조운 (촉한)
무장, 역사적 인물, 촉한 장군
최근 수정 시각 : 2025-10-21- 17:31:41
조운은 후한 말 삼국시대 촉한의 전설적인 무장이다. 그는 뛰어난 무예와 지혜를 겸비한 용맹한 장수로, 유비를 오랜 기간 섬기며 촉한 건국에 크게 기여했다. 특히 장판파 전투에서 유비의 아들 아두를 구출한 일화는 그의 충성심과 용맹을 상징한다. 제갈량의 북벌에도 참여하여 위기 상황에서도 흐트러짐 없는 지휘력을 보여 존경받았다. 유비와 제갈량 모두에게 인정받은, 촉한을 대표하는 인물 중 하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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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난세에 첫발을 내딛다]
기주 상산군 출신인 조운은 원소 휘하에 있었으나 그의 그릇을 간파하고 공손찬에게 몸을 의지하며 용맹을 떨치기 시작했습니다.
상산군 진정현 출신인 조운은 처음 원소의 부하로 임관했으나, 원소의 인물됨을 알아보고 공손찬의 밑으로 들어갔습니다. 소설에서는 창술의 명수로 등장하며, 문추를 상대하여 공손찬을 위기에서 구하는 장면에서 처음 모습을 드러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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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운명의 만남, 유비와 인연을 맺다]
공손찬 휘하에서 유비를 만나게 된 조운은 깊은 유대를 형성하며 유비의 인물됨을 높이 평가했습니다. 이는 훗날 그가 유비의 충실한 가신이 되는 결정적인 계기가 됩니다.
공손찬이 유비를 파견해 전해를 돕도록 했을 때, 조운도 유비의 지휘 아래 종군했습니다. 이 시기에 조운은 공손찬의 난폭함에 실망하고 유비를 눈여겨보게 되었고, 유비 또한 조운을 높이 평가하며 서로 깊은 유대감을 느꼈습니다. 조운은 형의 장례를 치르기 위해 잠시 고향으로 돌아가며 유비에게 "은덕을 잊지 않겠다"고 작별을 고했는데, 이는 공손찬에게 돌아가지 않겠다는 암시였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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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비의 진정한 가신이 되다]
유비가 조조에게 서주를 잃고 원소에게 의지하게 되자, 조운은 다시 유비에게 합류하여 그의 부하가 되었습니다. 유비는 그를 극진히 대하며 깊은 신뢰를 보였습니다.
조조에게 서주를 잃고 원소에게 의지하게 된 유비를 찾아간 조운은 정식으로 그의 부하가 되었습니다. 정사 삼국지에는 유비가 조운과 같은 침대에서 잠을 잤다고 기록되어 있으며, 연의에서는 관우, 장비와 동등한 대우를 받은 것으로 묘사될 정도로 유비의 깊은 신뢰를 얻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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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두를 구출한 장판파의 영웅]
당양 장판 전투에서 조조군에 쫓기던 유비를 위해, 조운은 홀로 적진에 뛰어들어 유비의 어린 아들 아두와 미부인을 구출하는 전설적인 용맹을 보여주었습니다. 유비는 이 공로로 그를 아문장군으로 승진시켰습니다.
207년 유표 사후 조조가 형주를 침공하자 유비는 피난길에 올랐습니다. 당양현 장판에서 조조군의 습격을 받았을 때, 조운은 미처 피하지 못한 유비의 어린 아들 아두(유선)와 아내 미부인을 구하기 위해 홀로 조조의 대군 속으로 뛰어들었습니다. 연의에서는 조운이 하후은을 죽여 청강검을 얻고 아두를 품에 안고 홀로 분전했으며, 조조가 "활을 쏘지 말고 생포하라"는 명을 내린 덕분에 위기를 벗어났다고 묘사됩니다. 조운이 아두를 데려오자 유비는 아두를 던지며 "하마터면 훌륭한 장수를 잃을 뻔했다"고 말해 조운을 감동시켰습니다. 이 공로로 조운은 아문장군으로 승진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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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중 전투의 지혜로운 용맹]
유비의 익주 입성에 기여하고, 한중 전투에서는 조조군에 맞서 공성계(空城計)와 같은 지혜로운 전술로 대승을 거두며 유비에게 '조운의 몸은 모두 간덩어리다'라는 극찬을 받았습니다.
211년 유비가 익주로 들어갈 때 제갈량, 장비 등과 함께 형주의 군대를 이끌고 강을 거슬러 올라가며 주변 군현을 평정했습니다. 유장의 항복 후 조운은 익군장군에 임명되었습니다. 219년 한중 전투에서 황충을 돕기 위해 나섰다가 조조군과 마주쳤습니다. 조운은 진영 문을 활짝 열고 깃발을 숨기고 북을 치지 않는 공성계 전술로 조조군을 의심하게 만들었고, 이후 북을 치고 쇠뇌를 쏘며 역습하여 조조군에게 참패를 안겼습니다. 유비는 이를 보고 "조운의 몸은 모두 간덩어리다"라고 칭찬하며 그를 호위장군이라 불렀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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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현명한 조언과 새로운 직책]
관우의 복수를 위해 오나라를 공격하려는 유비를 만류하며 현명한 조언을 했으나 받아들여지지 않았습니다. 유비 사후에는 유선(아두)의 중호군, 정남장군으로 임명되어 촉한의 중추적인 인물로 활약했습니다.
관우가 손권에게 살해당하자 유비는 격노하여 오나라를 공격하려 했습니다. 조운은 "먼저 위나라를 멸망시키면 오나라는 자연히 굴복할 것"이라며 위나라 공략을 우선시하는 현명한 조언을 했지만, 유비는 이를 듣지 않고 동쪽으로 진군했습니다. 유비가 이릉 대전에서 패배하자 조운은 구원에 나섰으나 이미 오나라 군대는 물러난 뒤였습니다. 223년 유선이 즉위하자 조운은 중호군, 정남장군에 임명되었고, 이후 영창정후, 진동장군으로 위임되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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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북벌의 선봉, 그리고 영원한 안식]
제갈량의 제1차 북벌에 참전하여 선봉장 역할을 수행했으나, 전투에서 패배하여 좌천되었습니다. 그러나 퇴각 중에도 흐트러짐 없는 지휘로 군수 물자 보존과 병사들의 단결을 이끌어 제갈량의 존경을 받았습니다. 같은 해 사망 후 대장군 순평후로 추증되었습니다.
227년 제갈량을 따라 한중에 주둔했고, 228년 제갈량의 제1차 북벌에 등지와 함께 출병하여 조진을 상대했습니다. 비록 전투에서 패하여 진군장군으로 좌천되었지만, 퇴각 시에는 직접 후방 부대를 맡아 군수 물자를 거의 버리지 않고 병사들의 흐트러짐 없는 단결을 이끌어 제갈량에게 "살아 선제께서 말씀하시길 자룡은 군자라 하였는데, 그 말이 헛되지 않도다"라는 극찬을 받았습니다. 229년 11월에 사망했으며, 261년 대장군 순평후(順平侯)라는 시호를 받아 촉한의 위대한 무장으로 길이 기억되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