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식 (1501년)
성리학자, 사상가, 교육자
최근 수정 시각 : 2025-10-21- 17:31:25
조식은 조선 중기 성리학자로 영남학파의 거두였습니다. 이황과 더불어 경상도 사림을 이끌며, 여러 관직 제안을 거절하고 현실과 실천을 중시하는 독자적인 학풍을 수립했습니다. 임진왜란 의병장 곽재우와 정인홍 등 수백 명의 제자를 길러내 후일 북인 정파 형성의 기반을 마련했습니다. 사후 의정부 영의정에 추증되었고, 시호는 문정입니다.
1501
[영남학파 거두, 조식 탄생]
조선 전기 성리학자이자 영남학파의 거두인 조식이 경상도 삼가현 토골(현 합천군 삼가면)에서 승문원 판교 조언형의 둘째 아들로 태어났다.
1501년 7월 10일(음력 6월 26일) 연산군 7년, 경상도 삼가현 토골(현 합천군 합천군 삼가면 외토리 토동)에서 승문원 판교 조언형과 인천이씨 충순위 이국(李菊)의 딸의 3남 5녀 중 둘째 아들로 태어났다. 그와 쌍벽을 이루는 퇴계 이황 역시 같은 해에 태어났다.
1506
[한양으로 이사, 견문을 넓히다]
5세 무렵 아버지가 장원급제하고 벼슬길에 오르자 가족과 함께 한성부로 이사하여 아버지 조언형에게서 문자를 배우기 시작했다.
5세 때까지 외가에서 자라던 조식은 아버지가 장원급제하고 벼슬길에 오르자 한성부로 이사해서 아버지 조언형에게서 문자를 배웠다. 이때 이윤경, 이준경 형제, 이항 등과 죽마고우로 지내며 학업을 닦았다.
1510
[9세에 큰 병, "하늘이 나를 태어나게 함은 할 일이 있어서"]
9세 때 큰 병을 앓아 어머니가 걱정하자 "하늘이 나를 태어나게 함은 반드시 할 일이 있어서일 것이니 요절할 리 없다"며 어머니를 위로하는 대범함을 보였다.
9세 때 큰 병을 앓았는데 어머니 인천이씨가 이를 걱정하자 "하늘이 나를 태어나게 함은 반드시 할 일이 있어서일 것이니 요절할 리 없다"하고 도리어 어머니를 위로하였다 한다.
1515
[학문의 폭을 넓히다]
아버지 조언형이 단천군수로 발령되자 따라가 경전, 역사, 천문, 지리, 의학, 군사 등 다양한 지식과 재능을 익혔으며, 노장학에도 심취하여 학문의 폭을 넓혔다.
소년기에 조식은 이윤경, 이준경 형제, 이항 등과 죽마고우로 자라면서 학업을 닦았다. 아버지 조언형이 단천군수로 발령되자 따라가 단천에서 지내면서 경전자사(經典子史)와 천문, 지리 , 의방, 수학, 궁마, 진법 등 유교 성리학 외에도 다양한 지식과 재능을 익혔고, 특히 자기의 정신력과 집중력, 담력 등을 스스로 시험하려고 두 손에 물그릇을 받쳐들고 밤을 새기도 하였다 한다. 또한 좌구명, 유종원의 문장과 노장학에 심취, 초탈의 경지에 이르렀다. 그는 과거 공부보다도 정통 유학과 제자백가, 노장사상을 두루 접하면서 학문의 폭을 넓혔다.
1525
[성리학 전념과 관직 단념 결심]
25세 때 <성리대전>을 읽고 크게 깨달아 성리학에 전념하게 되었다. 그러나 기묘사화의 충격으로 작은 아버지 조언경을 잃고 아버지까지 파직되자 관직을 단념하게 되었다.
20대 중반까지는 아버지 조언형의 임지인 의흥(義興)·단천(端川) 등 외지에 살기도 했으나 대개 서울에 살았다. 그 뒤 성수침 형제, 성운, 성혼 등과 교제하며 학문에 힘썼으며, 여러 책을 다독하던 중 1525년 25세 때 〈성리대전〉을 읽은 뒤 크게 깨닫고 성리학에 전념하게 되었다. 그러나 기묘사화가 일어나면서 작은 아버지인 조언경이 조광조 일파로 몰려 죽고 (일설에는 배척되었고), 아버지 조언형도 파직되고 이내 세상을 떠나자 고향으로 내려와버렸다. 그리고는 처가 김해 탄동으로 옮겨 산해정을 짓고 학문에 열중하며 많은 제자를 길러내었다.
1527
1527년 중종 22년 부친 상을 당하여 고향에 내려와 3년간 시묘하였고, 1531년(중종 26년) 생계가 어려워지자 처가인 김해의 탄동으로 찾아가 산해정을 짓고 제자교육에 힘썼다.
1531
[김해 탄동 정착, 학문과 후학 양성에 몰두]
생계가 어려워지자 처가인 김해 탄동으로 이주하여 산해정을 짓고 제자 교육에 힘썼다. 친구들에게 ≪심경≫과 ≪대학≫을 선물 받아 성리학 연구에 더욱 몰두했다.
1531년(중종 26년) 생계가 어려워지자 처가인 김해의 탄동으로 찾아가 산해정을 짓고 제자교육에 힘썼다. 장인인 남평조씨 충순위 조수(曺琇)는 김해 일대의 부자 가문 출신으로, 그는 처가의 도움으로 경제적 안정을 갖게 되어 산해정을 짓고 독서에 힘쓰며 경제적인 안정을 누릴 수 있었다. 1531년 친구이던 이준경과 송인수가 한성부에서 그에게 선물로 ≪심경≫과 ≪대학≫을 보내왔다. 그는 선물받은 ≪심경≫과 ≪대학≫을 읽고 성리학에 침잠하면서 학문 연구와 후학 양성에 몰두했고, 성운·이원·신계성·이희안 등과 더불어 담론, 토론하거나 편지 서신으로 문답을 주고받으면서 의리의 구명과 실천에 힘써 그 학문적 기반을 쌓아나가게 된다.
1538
[어머니 권유로 과거 응시 후 과거 포기]
37세 되던 해 어머니의 권유로 과거에 응시했다가 낙방한 뒤, 어머니를 설득하여 과거를 완전히 포기하고 본격적인 학문 연구와 덕성 수양, 후학 양성에 전념하는 처사의 삶을 시작했다.
37세 되던 해 어머니의 권유로 과거에 응시했다가 낙방되자 어머니를 설득, 과거를 포기한 뒤 비로소 처사로서 삶을 영위하며 본격적인 학문 연구와 덕성 수양, 후학 양성에 전념한다. 그는 일생동안 술을 입에 대지 않고 수행을 하듯 늘 근신하였다.
[헌릉참봉 직책 거절]
경상도관찰사 이언적과 대사간 이림의 천거로 헌릉참봉에 제수되었으나 나아가지 않았으며, 이언적과의 면담도 거절하며 관직에 대한 단호한 태도를 보였다.
1538년(중종 33) 경상도관찰사 이언적과 대사간 이림의 천거로 헌릉참봉에 제수되었으나 나아가지 않았고, 또 한번 만나기를 원하는 이언적의 요구도 후일을 기약하며 거절하였다. 이이화의 인물한국사의 표현을 그대로 빌리면 "성운과 같은 도학자들과 교유하고 탁족하면서 지냈다"한다.
1544
[유일한 적장자 조차산 병으로 잃음]
관찰사의 면담을 거절했던 해 6월, 유일한 적장자였던 조차산을 병으로 잃고 깊은 상심에 빠졌다. 그는 아들을 기리며 시를 지어 위안을 삼았다.
1544년 관찰사의 면담도 거절하였다. 그해 6월에 유일한 적장자였던 조차산을 병으로 잃었다. 차산은 어려서 뛰어나게 총명하였다. 남명집에 의하면 일찍이 기르는 개가 먹이를 다투어 으르렁대는 것을 보고 탄식하면서, "옛날 진씨(陳氏)의 개는 백 마리가 한 울안에 살았는데 우리 집 개는 그렇지 못하니 실로 마음에 부끄럽구나." 라며 한탄하였다. 또한 산해정에서 글을 읽고 있는데, 하루는 초헌을 타고 길을 지나가는 행차가 있어 매우 거창하였다. 함께 배우던 아이들은 모두 다투어 구경하고 부러워했지만 조차산은 홀로 태연히 글을 읽으며 조용히 말했다. "장부의 할 일이 어찌 거기에 있겠는가?" 그가 이를 기특하게 여겨 사랑하였으나 불행히도 일찍 죽었다. 아들을 잃고 상심에 빠졌던 그는 스스로 시를 지어 위안을 삼았다.
1545
[인종 즉위 후 조정 방문]
인종 즉위 후 조정의 부름을 받고 잠시 한성부에 다녀갔지만, 인종의 재위가 길지 못할 것을 예상하며 슬퍼하고 안타까워했다.
1545년 인종 즉위 후 다시 조정에서 불러 조정에 잠시 다녀갔다. 다만 그는 인종이 오래 살지 못할 것이라 예상하고 슬퍼하며 안타까워했다 한다.
[외척의 전횡 비판]
어린 명종이 즉위하자 외척들이 왕을 등에 업고 전횡하려 한다고 강하게 비판하며, 이후 명종이 여러 번 불렀음에도 관직에 나가지 않고 사직 상소를 올렸다.
명종 즉위 후 외척이 어린 왕을 등에 업고 전횡하려 한다고 비판하였다. 이후 명종이 여러 번 그를 불렀으나 그때마다 사직상소를 올리고 관직에 나가지 않았다.
1549
[계부당과 뇌룡사 건립]
전생서주부에 특진되었으나 고사하고, 합천 삼가면 집 근처에 계부당(鷄伏堂)과 뇌룡사(雷龍舍)를 지어 학문 강론에 전념하며 후학 양성의 터전을 마련했다.
1548년 전생서 주부(主簿), 1549년 명종 4년 전생서주부에 특진되었으나 고사하였고, 합천 삼가면 집 근처에 계부당(鷄伏堂; 닭이 알을 품는 집)과 뇌룡사(雷龍舍; 우레와 용의 집. 장자의 '尸居龍見 淵默雷聲'에서 따온 말)를 지어 강학에 전념하였다.
1555
[단성현감 사직 상소, '을묘사직소' 제출]
단성 현감에 임명되었으나 이를 사직하며 '을묘사직소'를 올렸다. 이 상소에서 그는 당시 정사의 문제점과 나라의 위태로움을 날카롭게 지적하고, 왕과 대비까지 직설적으로 비판하여 큰 파문을 일으켰다.
선무랑에 제수되었다가 1555년 단성 현감, 1556년 종부시주부로 다시 부름을 받았지만, 역시 고사하였다. 단성현감 사직시 올린 상소는 '단성소'라고 불리는 '을묘사직소'라 불린다. 당시 사회에 대한 문제점을 날카롭게 지적하면서, 조정의 신하들에 대한 준엄한 비판과 함께 왕과 대비에 대한 직선적인 표현으로 조정에 큰 파문을 일으켰으며, 양사에서는 "군주에게 불경을 범했다"며 그에게 벌을 주어야 한다고 했지만, 대부분의 대신이나 사관들은 "초야에 묻힌 선비라 표현이 적절하지 못해서 그렇지, 그 우국충정만은 높이 살 만한 것이다."라는 논리로 적극 변호하여 파문은 가라앉았다.
1559
[조지서 사지 부임 후 사직]
조지서 사지에 임명되어 잠시 부임했으나, 얼마 지나지 않아 스스로 사직서를 내고 다시 관직에서 물러났다.
1559년(명종 14년) 조지서 사지(造紙暑司紙)에 임명되어 부임했었으나, 부임한지 얼마 뒤에 스스로 사직서를 냈다.
1561
[지리산 산천재에서 학문 정진]
번잡한 김해를 떠나 지리산 덕천동으로 옮겨 산천재를 짓고 성리학을 연구하며 독자적인 학문 체계를 이룩하는 데 전념했다. 이는 그의 학문적 성숙에 중요한 시기였다.
1561년 지리산의 덕천동으로 옮겨 산천재(山天齋)를 짓고, 성리학을 연구하여 독특한 학문의 체계를 이룩하였다. (주역에 '山天 大畜'괘를 따서 이름 지었다. 제자를 크게 키운다는 말이다. '山天'은 하늘을 품은 산을 뜻한다.) 남명은 번잡한 김해를 떠나 지리산 천왕봉 아래 덕산에 자리잡고 산천재를 짓고서 오직 학문과 제자 양성에 전념하였다. 이때 그는 '덕산에 묻혀산다(德山卜巨)'라는 시를 지었다.
1567
[명종에게 치국의 도리 건의]
명종의 부름을 받고 찾아가 나라를 다스리는 도리에 대해 건의한 뒤 돌아와 만년에는 두류산에서 학문 연구와 후진 양성에 전념했다.
1567년 5월 명종의 부름을 받고 찾아가 치국의 도리를 건의하고 돌아왔다. 만년에는 두류산에 들어가 학문 연구와 후진 양성에 전념하였다. 여러 차례 조정에서 벼슬을 내렸으나 모두 고사하였다.
1568
[선조에게 '무진대사'와 '서리망국론' 상소]
선조가 다시 불렀으나 사양하고 정치의 도리를 논한 상소문 '무진대사'를 올렸으며, 관료들의 폐단을 지적한 '서리망국론'을 발표하여 당시 사회 문제에 대한 비판 정신을 드러냈다.
1568년 선조가 다시 불렀으나 역시 사양하고 정치의 도리를 논한 상소문 '무진대사'(戊辰對事)를 올렸다. 또한 관료들의 폐단을 지적한 '서리망국론'(胥吏亡國論)은 당시 서리의 폐단을 극렬히 지적한 것으로 유명하였다.
1571
[선조에게 식물과 전답 하사받고 사은소 올림]
선조가 그에게 특별히 식물(食物)과 전답을 하사하자 이를 받고 임금의 은혜에 감사하는 사은소를 올렸다.
1571년(선조 5년) 선조가 그에게 특별히 식물(食物)과 전답을 하사하자 그는 이를 받고 사은소(謝恩疏)를 올렸다.
1572
[남명 조식, 72세로 서거 및 대사간 추증]
경상도 감영에서 임금에게 병이 위중함을 아뢰자 전의가 파견되었으나 도착 전에 72세의 나이로 덕천동 산천재에서 세상을 떠났다. 임금은 그의 죽음을 애도하여 조회를 파하고 대사간에 추증했다.
1572년 1월에 경상도 감영(監營)에서 남명에게 병이 있다고 임금에게 아뢰니, 임금은 특별히 전의(典醫)를 파견하였지만, 전의가 도착하기 전에 남명은 세상을 떠났다. 숨을 거두는 순간까지도 경의(敬義)의 중요함을 제자들에게 이야기했고, 경의에 관계된 옛 사람들의 중요한 말을 외웠다. 음력 2월 8일(양력 2월 21일)에 몸채에서 자세를 단정히 한 채 조용히 눈을 감았다. 그의 부음 소식이 전해지자 선조는 예관을 보내 치제하였다. 그의 나이는 72세였다. 선조는 그의 죽음을 애도하여 조회를 파하고, 바로 예장을 명하고 부의를 내렸다. 바로 증직으로 통정대부 사간원 대사간에 추증되었다.
1576
[덕산서원과 회현서원에 배향]
조식의 문도들이 덕천의 산천재 부근에 덕산서원을 세워 배향했으며, 그의 고향인 삼가에도 회현서원을 세워 봉향하기 시작했다.
1576년 조식의 문도들이 덕천의 산천재 부근에 세운 덕산서원에 배향되었고, 그의 고향인 삼가에도 회현서원을 세워 봉향하였으며 1578년에는 김해의 탄동에 신산서원을 세웠다.
1578
1576년 조식의 문도들이 덕천의 산천재 부근에 세운 덕산서원에 배향되었고, 그의 고향인 삼가에도 회현서원을 세워 봉향하였으며 1578년에는 김해의 탄동에 신산서원을 세웠다.
1604
[저서 ≪남명집≫ 최초 간행]
그의 학문적 사상과 철학을 집대성한 저서인 ≪남명집≫이 선조 37년에 처음으로 간행되어 후대에 전해졌다.
저서로는 1604년(선조 37)에 처음 간행된 ≪남명집≫과 ≪남명학기유편 南冥學記類編≫·≪신명사도 神明舍圖≫·≪파한잡기 破閑雜記≫가 있으며, 문학작품으로 '남명가', '권선지로가 勸善指路歌' 등이 전한다.
1609
[덕산서원 사액]
광해군 원년에 덕산서원이 국가로부터 편액과 서적 등을 하사받는 사액 서원이 되어, 그의 학맥과 정신을 계승하는 중심지가 되었다.
광해군 때 대북세력이 집권하자 조식의 문인들은 스승에 대한 추존사업을 적극적으로 전개해 세 서원 모두 사액을 받았다. 덕산서원은 광해군 원년 1609년에 사액 되었다.
1615
[의정부 영의정으로 추증 및 문정공 시호]
광해군 7년, 북인 집권 후 그의 문인들이 스승에 대한 추존 사업을 적극적으로 전개하여 의정부 영의정에 증직되고 '문정공'이라는 시호가 추증되었다.
선조 때 증직 통정대부 사간원 대사간에 증직되었다가, 조선 광해군 즉위 후 북인이 집권하게 되면서 1615년(광해군 7) 증 대광보국숭록대부 의정부 영의정으로 추증되었다. 그해 시호는 문정공(文貞公)이 추증되었다.
1617
[문묘종사 건의되었으나 불발]
생원 하인상 등 유림이 연명으로 상소하여 남명을 문묘(성균관에 있는 공자를 모신 사당)에 종사할 것을 건의했지만, 끝내 받아들여지지 않았다.
1617년 생원 하인상 등 유림이 연명으로 상소하여 남명을 문묘(성균관에 있는 공자를 모신 사당)에 종사할 것을 건의했지만, 받아들여지지 않았다. 이 이후로 남명의 문묘종사를 건 의하는 상소를, 경상도 유림이 7회, 충청도 유림이 8회, 전라도 유림이 4회, 성균관과 사학 유생들이 12회, 개성부 유림이 1회, 홍문관에서 1회, 양사(兩司: 사헌부와 사간원의 합칭)에서 1회 했으나, 끝내 문묘에 종사되지 못했다.
1874
[흥선대원군 집정 이후 학자로서 재평가]
북인의 몰락으로 조선사회에서 저평가되어 오다가, 고종 1년 흥선대원군 집정 이후 이이, 이황 등에 필적하는 성리학자로 인식되며 재평가되었다.
북인의 몰락으로 그는 조선사회에서 저평가되어오다가 1874년(고종 1년) 흥선대원군 집정 이후부터 이이, 이황, 성혼, 서경덕에 필적하는 성리학자로 인식, 재평가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