장양 (후한 태수)
정치가, 장군, 태수
최근 수정 시각 : 2025-10-21- 17:28:47
후한 말 병주 출신으로 용맹했던 무장. 영제 말부터 하진, 동탁에 속하며 세력을 확장했습니다. 반동탁 연합군에 참여하고 여포를 보호하는 등 여러 세력과 관계를 맺으며 기회를 모색했습니다. 헌제를 낙양으로 모시는 데 크게 기여하여 대사마에 올랐으나, 여포를 돕다가 부하에게 살해당하며 생을 마감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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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병주에서 세력 형성]
영제 말 병주의 무맹종사로 임명되어 서원군 건석 휘하 장수로 활동했습니다. 하진에게 속한 후 고향에서 군사 천여 명을 모아 상당에 주둔하며 산적을 토벌, 세력을 키웠습니다.
장양은 용맹하여 후한 영제 말 병주의 무맹종사로 임명되었습니다. 서원군이 정비되고 소황문 건석이 총수가 되자, 병주자사 정원의 명령을 받고 장수가 되어 군사를 거느리고 건석에게 파견되었습니다. 건석이 하진에게 처단되자 장양은 하진에게 속했으며, 하진의 명령으로 출신지인 병주로 돌아가 군사 천여 명을 모아 상당에 머무르면서 산적을 토벌하며 점차 세력을 키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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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반동탁 연합군 합류]
하진 사망과 동탁 집권 후 스스로 장수가 되어 호관에서 상당태수를 공격하고 세력을 수천 명으로 불렸습니다. 초평 원년에 반동탁 연합군이 결성되자 원소, 흉노 선우 어부라와 연합하여 장수에 주둔했습니다.
하진이 죽임을 당하고 동탁이 집권하자 장양은 스스로 장수가 되어 호관에서 상당태수를 공격했으나 꺾지 못했습니다. 그러나 여러 현들을 노략하며 세력을 수천 명으로 불렸습니다. 초평 원년(190년), 반동탁 연합군이 결성되었을 때 장양은 하내에서 원소와 연합했고, 흉노의 선우 어부라와 함께 장수(漳水)에 주둔했습니다.
[어부라에게 포로, 동탁에 의해 복귀]
반동탁 연합 당시 흉노 선우 어부라에게 사로잡혔으나, 이후 동탁에게서 건의장군 및 하내태수로 임명되며 다시 세력을 인정받았습니다.
반동탁 연합군 당시, 선우 어부라가 반기를 들었고, 장양은 원소와 함께 호응하지 않아 선우에게 사로잡혀 함께 떠났습니다. 이후 선우가 도료장군 경지를 격파하며 세력을 회복하는 와중에 장양은 동탁에게서 건의장군(建義將軍)과 하내태수로 임명되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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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포 보호]
원소를 떠난 여포가 동향의 의리로 자신에게 의탁하자, 이각과 곽사의 현상수배를 무릅쓰고 겉으로는 잡는 척하면서도 실은 여포를 보호했습니다.
여포가 원소의 수하에서 공을 세웠으나 원소가 자신의 세력을 키우는 것을 위험하게 여기자 그를 떠나 장양에게 의탁했습니다. 장양은 여포와 동향의 의리로 여포를 받아들였습니다. 이각과 곽사가 현상수배한 여포를 잡으려는 움직임이 있었으나, 장양은 겉으로는 그러는 척 하면서도 실은 여포를 보호하며 여포와의 관계를 유지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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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헌제 구출 작전 협조]
이각과 곽사의 폭동으로 헌제가 낙양으로 달아나자, 동소의 권유를 받아 조조가 헌제를 구출하기 위해 하내를 지나는 길을 열어주어 조조와 우호 관계를 다졌습니다.
흥평 원년(194년), 이각과 곽사가 장안에서 폭동을 일으키자 헌제가 낙양으로 달아났고, 이각 등이 헌제를 쫓았습니다. 이에 격문을 받은 조조가 헌제를 구출하기 위해 하내를 지나려 하자, 장양은 동소의 권유로 길을 열어주어 조조가 헌제를 구출할 수 있게 되었으며, 이를 통해 조조 세력과 우호를 다지게 되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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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황실 공헌과 높은 관직 임명]
헌제가 하동 안읍에 머물며 백관들이 굶주리자 식량을 공급하며 공헌했습니다. 이 공로로 안국장군, 가절, 진양후에 봉해지는 높은 관직을 받았습니다.
흥평 2년(195년), 헌제가 장안을 빠져나와 하동에 이르러 임시로 안읍에 머물렀습니다. 이때 백관들이 굶주리자 장양은 수천 명을 부려 식량을 공향(供餉)하며 크게 공헌했습니다. 이로 인해 그는 안국장군(安國將軍)에 임명되고 가절(假節)을 받아 부(府)를 열었으며, 진양후(晉陽侯)에 봉해지는 등 높은 관직을 받았습니다. 천자를 맞이하여 낙양으로 돌아가려 했으나 제장들의 반대로 본거지인 야왕으로 돌아갔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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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헌제를 낙양으로 환도시키고 대사마에 오름]
식량을 가지고 헌제를 맞이하여 동승을 시켜 낙양 궁궐을 수리하고, 헌제를 낙양으로 모셔 돌아왔습니다. 이 공로로 대사마에 임명되었으며, 헌제가 들어간 양안전은 그의 공로를 기리는 의미로 이름 붙여졌습니다.
건안 원년(196년), 헌제를 옹위하는 장군들 사이에 권력 쟁탈전이 벌어지는 혼란 속에서, 장양은 식량을 가지고 천자를 맞이했습니다. 그는 동승을 시켜 낙양의 궁궐을 수리하였고, 헌제를 낙양으로 무사히 모시고 돌아왔습니다. 헌제는 8월에 양안전(楊安殿)에 들어갔는데, 장양은 이를 자신의 공로로 뽐내었으며, 이 궁궐 이름에 '양(楊)'이 쓰이게 된 까닭이 되었습니다. 이 공로로 장양은 야왕으로 돌아간 후 대사마에 임명되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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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하에게 피살]
조조가 여포를 공격할 때 여포를 돕기 위해 군사를 일으키려 했으나, 부하 양추에게 살해당했습니다. 이로써 그의 생애는 막을 내리고 세력도 와해되었습니다.
건안 3년(198년), 조조가 여포를 공격하자 장양은 여포의 편을 들어 군사를 일으키려 하였습니다. 그러나 그의 부하 양추에게 살해당하고 말았습니다. 이후 장양의 부장 수고가 양추를 죽였고, 남은 장양의 세력은 수고를 주축으로 원소에게 귀의하려 했으나 수고마저 조조에게 패하여 죽었습니다. 장양의 장사 설홍과 하내태수 무상은 동소의 설득을 받아 조조에게 투항하면서 장양의 세력은 완전히 와해되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