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조 (조선)

조선 국왕, 군주, 정치인, 전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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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근 수정 시각 : 2025-10-21- 17:27:5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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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 국왕, 군주, 정치인, 전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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선조의 손자이자 정원군의 아들로, 광해군 폐위 후 반정으로 즉위한 조선 제16대 국왕이다. 재위 중 이괄의 난, 정묘호란, 병자호란 등 극심한 내우외환을 겪었으며, 청나라에 항복하는 치욕을 겪었다. 소현세자 독살 의혹 등으로 인해 무능하고 우유부단한 왕으로 평가받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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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595

[인조, 황해도 해주에서 탄생]

임진왜란 중에 선조의 다섯째 아들 정원군과 군부인 구씨 사이에서 장남으로 황해도 해주부 관사에서 태어났다. 비범한 외모와 특징적인 신체적 특징을 가졌다고 전해진다.

임진왜란 중에 선조의 다섯째 서자인 정원군과 의정부 좌찬성을 지낸 구사맹의 딸 군부인 구씨사이에서 장남으로 조선 황해도 해주부 관사에서 태어났다. 그가 해주에서 태어나게 된 이유는 당시는 임진왜란 난중으로 전란이 계속되어 왕자 제궁(王子諸宮)이 모두 해주에 머물러 있었기 때문이다. 실록 즉위일 기록에 의하면 그가 탄강할 때 붉은 광채가 빛나고 이상한 향내가 진동하였으며, 그 외모가 비범하고 오른쪽 넓적다리에 검은 점이 무수히 많았다고 한다. 첫 이름은 천윤(天胤)으로 정해졌다.

1601

[능양수 책봉]

할아버지 선조의 총애를 받으며 궁중에서 성장하던 이종이 '능양수'에 처음으로 책봉되었다.

1601년(선조 34년) 능양수(綾陽守)에 첫 책봉되었으며 선조는 그 자신이 방계출신에 서출인 탓에 손자인 그가 서손(서자 정원군의 아들)이었음에도 특별히 불러다 왕궁에서 기르며 총애하였다.

1607

[능양군으로 봉해지다]

능양도정(綾陽都正)에 봉해졌다가 곧이어 능양군(綾陽君)으로 다시 봉해졌다. 할아버지 선조 별세 후 정원군 일가와 함께 경희궁으로 나와 살게 되었다.

1607년(선조 40년) 능양도정(綾陽都正)에 봉해졌다가 이어 능양군에 봉해졌다. 할아버지 선조가 별세하면서 정원군 일가는 경희궁으로 나와 살았고, 부모를 따라 경희궁으로 갔다.

1615

[아우 능창군의 억울한 죽음]

'신경희의 옥사'로 둘째 아우 능창군이 모반 혐의로 유배되었다가 사사되었다. 이는 인조의 아버지 정원군에게 큰 충격을 주어 화병을 얻게 되는 계기가 되었다.

1615년(광해군 7) '신경희의 옥사'가 일어나자 둘째 아우인 능창군이 죽임을 당하였다. 능창군은 일찍이 인빈 김씨 소생 왕자들 중 선조의 총애를 받아 세자 물망에 올랐던 신성군이 일찍 죽자 정원군에 의해 그의 양자로 들어갔었는데, 당시 17살이던 능창군은 수안 군수 신경희 등이 획책하는 모반에 추대되었다 하여 유배되었다가 사사되었다. 이 무렵 정원군의 집에 왕기가 성하다, 인빈의 묘자리가 좋다, 정원군의 집터가 좋다 등의 소문이 돌았고, 광해군은 이를 신경희의 옥사 직후 능창군이 사전에 왕위에 뜻을 두었다는 것으로 해석되었다.

1619

[아버지 정원군의 죽음과 복수 다짐]

아우 능창군의 죽음으로 화병을 얻었던 아버지 정원군이 사망했다. 능양군은 빈소에서 복수를 다짐했으며, 이는 반정의 중요한 원인 중 하나가 되었다.

능창군이 사사되자 아버지 정원군은 화병을 얻어 몸져누웠고, 술도 좋아했던 정원군은 1619년(광해군 11) 결국 세상을 떠났다. 이때 능양군은 빈소에서 곡을 하며 복수를 다짐했다고 한다. 집안의 풍비박산을 초래한 이 사건은 반정의 원인이 되었을 것이다.

1623

[호위청 신설 및 대동법 강원도 실시]

군사력 강화를 위해 호위청을 신설하여 반정을 주도한 세력의 사병을 정규병력으로 변화시키고, 이원익의 건의로 경기도에 시험 실시되던 대동법을 강원도에 시행하기 시작했다.

인조는 허약한 왕권을 강화함과 동시에, 친명정책을 추진하면서 생겨난 전란의 위협에 대처하기 위해 군사력 강화책을 활발히 추진했다. 먼저 1623년 호위청을 신설하여 반정을 주도한 세력의 사병을 정규병력으로 변화시켰다. 광해군 때 경기도에 시험적으로 실시했던 요역과 공물의 전세화(田稅化) 조치인 대동법을 이원익의 건의로 1623년 실시했다. 애초 강원도·전라도·충청도 등 3도에 시행하기로 했으나 1626년에 강원도에만 실시했다.

[인조반정으로 광해군을 폐위하고 즉위]

서인의 김류, 이귀, 이괄, 최명길 등이 주도한 반정을 통해 이복 백부인 광해군을 폐위시키고 조선의 제16대 국왕으로 즉위했다. 이는 광해군의 폐모살제와 실정 등을 명분으로 삼았다.

1623년 4월 11일(광해군 15년 음력 3월 12일) 서인의 김류·이귀·이괄·최명길 등이 일으킨 정변을 준비하고 그해 4월 12일(음력 3월 13일) 새벽 군사를 이끌고 궁궐에 진입, 반정군에 힘입어 왕위에 올랐다. 즉위 직후 반정의 명분을 확립하여 정통성을 다지는 동시에 서인계를 중심으로 정부를 재구성하고 왕권을 안정시키는 작업을 폈다. 반정의 명분은 광해군 정권의 부도덕성과 실정에서 구했다.

[아버지 정원군을 정원대원군으로 추존]

즉위와 동시에 아버지 정원군을 정원대원군으로 추존했다.

능양군이 즉위하면서 아버지 정원군은 대원군으로 추존하여 정원대원군이 되었다. 그러나 인조는 생부 정원군을 왕으로 추존하려 하였고, 정치적 기반이 부족한 능양군 반정의 반정공신들 또한 선조-정원군-능양군으로 이어지는 가계도를 구성하여 자연스러운 계승 순서와 능양군의 정통성 강화를 꾀하였다.

1624

[이괄의 난 발생, 왕이 공주로 피난가다]

반정공신 이괄이 논공행상에 불만을 품고 반란을 일으켜 한양을 점령하는 초유의 사태가 발생했다. 인조는 공주까지 피난하는 등 심각한 위기를 겪었으며, 이 난으로 북인계 인사 수십 명이 숙청되었다.

1624년에는 반정공신이던 이괄이 불만을 품고 반란을 일으켜, 흥안군을 추대, 인조는 공주까지 피난할 정도의 위기에 처하기도 했다. 이괄은 반정에 대한 논공행상에서 도감대장 이수일이 내응의 공이 있다 하여 공조판서로 중용된 데 비해, 자신은 2등으로 평가받고 도원수 장만 휘하의 부원수 겸 평안병사로 임명된 것에 불만을 품고 반란을 일으킨 것이다. 이괄의 난 이후 피난가던 인조는 전 영의정 기자헌, 유몽인 등 옥에 갇힌 북인계 인사 40명을 전격 처형했다.

1627

[정묘호란 발발, 후금의 침략]

광해군의 중립외교를 폐기하고 친명배금 정책을 추진하자 후금이 국경 안정과 물자 확보를 위해 3만 명의 군사를 이끌고 조선을 침공했다. 이괄의 난 잔당의 종용도 침공의 빌미가 되었다.

인조 정권은 광해군의 중립외교와는 다르게 친명정책을 펼쳐 청의 반발을 샀다. 이러한 때에 1623년 능양군 반정의 논공행상에 불만을 품은 이괄의 난이 일어났다. 결국 진압은 되었지만, 이괄과 함께 난을 일으킨 한명련의 아들, 한윤이 후금으로 도망가 정묘호란의 명분이 되기도 했다. 이무렵 선양(瀋陽)으로 수도를 옮기고 청 태종이 왕위를 계승하는 등 국세가 날로 강대해지고 있었던 후금은 후방 안정을 꾀하고 악화된 경제를 살리기 위해, 1627년 음력 1월 14일, 군사 3만 명을 주어 조선을 침입케 했다.

[강화도 피신 후 정묘화약으로 후금과 화친]

후금군이 의주, 능한산성, 평양을 연이어 함락시키자, 인조는 강화도로 피신했다. 최명길의 강화 주장을 받아들여 후금과 '형제의 의'를 맺는 정묘화약(丁卯和約)을 체결하며 전쟁을 일단락시켰다.

후금군의 일부는 가도의 모문룡을 치고, 주력 부대 3만 명은 1627년 음력 1월 16일 의주를 돌파하고 파죽지세로 남하하여 1월 21일에는 능한산성을 함락시켰으며, 1월 24일에는 평양을 함락하였다. 인조는 부랴부랴 1월 25일 강화도로 피신을 하였다. 의주를 거쳐 평산까지 함락되자 조정은 강화도로 천도했으며, 최명길의 강화 주장을 받아들여 양국의 대표가 회맹(會盟), 형제의 의를 약속하는 정묘화약(丁卯和約)을 맺었다.

1628

[제주도에 표류한 벨테브레이, 서양 문물 접촉의 계기]

네덜란드 선박이 난파되어 얀 얀스 벨테브레이 등이 제주도에 표류해 왔다. 인조는 벨테브레이를 통해 서양 사정을 알게 되었고, 조선 지식인들이 서구 세계의 존재를 어렴풋이 인지하는 계기가 되었다.

1628년 네덜란드선박이 난파되어 제주도에 네덜란드 사람 얀 얀스 벨테브레이(Jan Jansz Weltevree) 등이 표류하였다. 인조는 친히 벨테브레이를 통해 서양 사정을 알게 되었고 그에게 박연이라는 이름을 내려 조선에 정착시켰다. 벨테브레이는 원산 박씨의 시조가 되었다. 벨테브레이의 조선 표류로 조선의 사대부, 지식인들은 고려시대 벽란도와 예성강을 오간 아랍 외에는 막연하던 서구 세계의 존재를 어렴풋이 알게 되었다. 인조는 그에게 들은 화포와 총기를 만들게 하였으나 조선에서는 재료와 기술이 부족하였고 그것이 한계였다.

1629

[아버지 정원군을 '원종'으로 추존]

아버지 정원군을 왕으로 추존하려는 움직임이 추진되어, 반대 여론에도 불구하고 정원군이 '원종'으로 추존되었다. 이는 왕실의 정통성 강화를 위한 시도였다.

인조는 생부 정원군을 왕으로 추존하려 하였고, 정치적 기반이 부족한 인조 반정의 반정공신들 또한 선조-정원군-인조로 이어지는 가계도를 구성하여 자연스러운 계승 순서와 인조의 정통성 강화를 꾀하였다. 서인계 성리학 예학자인 김장생, 김집 등은 인조가 선조의 후사를 계승하였으므로, 선조를 아버지라 하고 정원군은 황숙부나 황백부로 불러야 된다고 고집하였다. 인조 반정 공신인 이귀, 이정구 등을 중심으로 정원군의 추존 작업을 추진하였고, 중론을 듣는 것처럼 여론을 각색한 후 정원군을 왕으로 추존하여 원종이라 하였다.

1633

[영정법 시행과 상평통보 주조 시도]

세종 때 제정된 연등구분의 전세법을 폐지하고 풍흉에 관계없이 전세를 토지 1결당 4두로 고정하는 영정법을 법제화했다. 또한 김육의 주장에 따라 상평청을 설치하고 상평통보를 주조하여 화폐 유통을 시도했다.

세종 때 제정되었던 연등구분의 전세법을 폐지하고 전세의 법적인 감하를 주된 내용으로 하는 영정법과 군역의 세납화를 실시했다. 1633년 김육의 주장에 따라 상평청을 설치하여 상평통보를 주조하고 그 유통을 시험했다. 이는 실패로 끝나기는 했으나 효종대 이후 화폐 유통의 기초를 이루었다.

1636

[병자호란 발발, 남한산성으로 피신]

후금이 국호를 청으로 바꾸고 조선을 완전히 복속시키기 위해 대규모로 침공했다. 인조는 강화도로 왕실과 비빈을 보내고 자신은 남한산성으로 들어가 농성을 시작했다.

1636년 12월 후금은 국호를 ‘청’으로 바꾸었는데 청나라는 조선을 완전히 박살내고 복속시키기 위해 병자호란을 일으켰다. 그러나 조정에서는 이를 막지 못했고 봉림대군·인평대군과 비빈을 강화도로, 인조 본인은 남한산성으로 후퇴하여 항거했다.

1637

[삼전도의 굴욕, 청에 항복하다]

59일간의 남한산성 농성 끝에, 인조는 청 태종에게 삼배구고두례를 행하며 치욕적인 항복을 했다. 이 사건은 조선 사대부들에게 깊은 정신적 충격과 함께 중화사상에 대한 회의감을 안겨주었다.

결국 59일간을 버티던 인조는 항복을 결심했다. 인조는 항복이라는 표현을 쓰고 싶지 않아 스스로 하성(下城)이라 표현했다. 이후 영을 내려 남한산성 하산을 항복이라 하지 않고 하성이라 쓰도록 명했다. 이후 공식 기록에는 정축하성(丁丑下城)이라 쓰였다. 성문을 나선 인조가 눈밖에 쌓인 비탈길을 내려와 수향단에 좌정한 홍타이지(숭덕제) 앞에 무릎을 꿇었다. 그리고 삼배구고두례를 행했다. 세 번 절 할 때마다 세 번씩 머리를 땅에 찧는 의식이다. 청나라의 입장에선 비교적 관대한 항복의식 이었다. 이와 함께 장남 소현세자, 차남 효종과 척화론자인 삼학사를 청나라에 인질로 보냈다.

1645

[소현세자의 의문스러운 죽음과 독살 의혹]

청나라에서 8년간 볼모 생활을 마치고 귀국한 소현세자가 갑자기 사망했다. 인조와의 갈등과 당시 정황상 독살 의혹이 제기되었으며, 이후 세자빈 강씨와 그 아들들까지 숙청당하는 비극이 이어졌다.

병자호란 이후 청나라에 볼모로 끌려간 소현세자는 그곳에서 선교사 아담 샬 등을 통해 서구의 문물을 접하게 되면서 청나라에 대한 시각이 바뀌게 된다. 1644년 11월 석방된 소현세자는 1645년 2월 조선으로 귀국한다. 그러나 백성들로부터 인망이 높은 그가 자신을 왕위에서 쫓아낼 것을 두려워한 인조는 그를 제거할 계획을 세운다. 인조의 총애를 받던 후궁 소용 조씨(후일의 귀인 조씨)와 김자점 일파는 소현세자를 공격했고, 1645년 그를 독살하였다는 의혹이 제기되었다. 인조실록에서는 독살설이 제기되었으나 승정원일기에서는 이미 세자가 폐렴을 앓고 있다는 기록이 있었다.

1649

[인조, 55세의 나이로 승하하다]

55세를 일기로 창덕궁 대조전에서 승하했다. 병석에 누웠다가 죽기 직전 왕세자 효종 내외 대신 효명옹주와 숭선군, 낙선군을 찾으며 그들을 벌하지 말라는 유언을 남겼다.

1649년(인조 27년) 초 병석에 누웠다가 그해 5월 8일(음력) 새벽에 적장자인 왕세자 효종 내외를 찾지 않고 서녀 효명옹주와 서자 숭선군 낙선군을 찾았다. 인조는 왕세자 효종 앞에서 효명옹주와 숭선군 낙선군을 벌하지 말고 죽는 순간까지 친형제 지간처럼 사이좋게 지내고 많이 도와주라는 유언을 남기고 결국 이날 유시(오후 5시~7시)에 창덕궁 대조전 동침에서 55세를 일기로 승하 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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