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전 (1517년)
조선시대 인물, 무신, 군인, 정치인, 외교관, 작가
최근 수정 시각 : 2025-10-21- 17:25:21
조선 중기의 무신이자 정치인으로, 중종, 명종, 선조 시대에 걸쳐 활약했다. 외교관으로 명나라에 다녀오고, 북방 야인 토벌에 공을 세우는 등 국방과 외교에 기여했다. 특히 임진왜란 발발 시 80세의 노구로 선조 어가를 의주까지 호종하며 큰 충성심을 보였다. 하지만 전쟁 중 두 아들과 세 손자를 잃어 '일실 오절(一室五節)'이라 불리는 가문의 비극을 겪었다. 사후 호성원종공신 3등에 책록되며 국가적 공헌을 인정받았다.
1517
[무신 이전, 강릉에서 태어나다]
조선 중기의 무신 이전이 강원도 강릉부에서 태어났다. 할아버지는 평안도 병마절도사를 지낸 이지방이며, 아버지는 병조참판 이광식이다.
1517년(중종 12) 1월 21일 강원도 강릉부에서 태어났다. 할아버지는 평안도 병마절도사와 경상좌수사를 지낸 이지방이며 아버지는 병조참판과 중추부 동지사를 지낸 이광식이고, 어머니는 함안이씨로 이세응의 둘째 딸이다. 어려서 이름은 언석(彦晳)인데, 뒤에 전으로 개명하였다. 자는 언우(彦祐) 또는 언점(彦漸)이다.
1539
1539년(중종 33) 무과에 급제하여 바로 훈련원권지를 거쳐 그 해 선전관이 되었다.
1540
1540년(중종 39) 훈련원 판관이 되었다.
1546
1546년(명종 1) 호조 좌랑과 호조 정랑을 지냈다.
1553
[관비 솔축으로 파직되다]
사도사 첨정으로 재직 중 관비를 첩으로 솔축했다는 이유로 사헌부의 탄핵을 받아 파직되었다가 후에 복관되었다.
1553년(명종 8년) 5월 14일 사도사 첨정(司導寺僉正)으로 있을 때 관비를 데려다가 자기 첩으로 솔축했다 하여 그해 5월 14일 경상우도 수사 원적, 부산포 첨사 신종, 나주 목사 노경린, 평산 부사 조숭조, 김제 군수 김명언 등과 함께 사헌부의 탄핵을 받고 파직되었다가, 뒤에 복관했다.
1555
그 뒤 1555년 6월 장흥부사(長興府使)가 되었다.
1556
명종 11년(1556년) 경흥부사(慶興府使)를 거쳤다.
1558
1558년(명종 13) 12월 만포 첨사(滿浦僉使)가 되었다.
1560
1560년(명종 15) 승정원의 좌부승지가 되었다.
1561
[동부승지, 좌승지 등 요직을 거치다]
동부승지에 임명되었고, 이후 경연 참찬관과 좌승지를 역임하며 무인으로서 경연관이 되는 것에 대한 논란을 겪기도 했다.
1561년(명종 16) 윤 5월 18일 동부승지(同副承旨), 그해 7월 겸 경연 참찬관, 11월 좌승지를 지냈다. 그가 경연관이 되자 무인이 경연관이 되었다며 논박을 받았으나 왕이 듣지 않았다.
[공조참판과 북병사를 역임하고 명나라 동지사로 외교 활동을 펼치다]
공조참판과 북병사를 지내는 등 주요 관직을 역임했으며, 1566년에는 대호군으로 명나라 동지사의 정사가 되어 외교 활동을 펼치고 구련성 성보 수축의 폐단을 보고하는 등 활약했다.
1561년(명종 16) 11월 5일 특명으로 가선대부 공조참판(嘉善大夫工曹參判)이 되었으며, 같은 해 12월 9일 함경북도 절도사로 나갔다. 1566년(명종 21) 8월 대호군(大護軍)으로 명나라에 파견되는 동지사의 정사가 되어 구련성(九連城) 성보 수축 이후 폐단을 통역관을 시켜서 적어 보냈다.
1562
1562년 2월 함경북도 절도사 겸 경성부사(鏡城府使)가 되었다가 그해 10월 체직되었다.
1563
[경기도 수군절도사, 효심으로 탄핵을 모면하다]
전라도 병마절도사를 거쳐 경기도 수군절도사가 되었다. 병환 중인 아버지의 병구완을 위해 휴가를 청했다가 탄핵받았으나 왕의 특별 배려로 처벌을 면했다.
전라도 병마절도사를 거쳐 1563년(명종 18) 경기도 수군절도사가 되었다. 이때 병중인 아버지의 병구완을 위해 수유(受由)를 청했다가 승정원의 탄핵을 받았으나 임금이 특별히 배려하여 처벌을 면하고 휴가를 받았다.
1567
[경상우도 수군절도사와 전라도 병마절도사를 역임하다]
경상우도 수군절도사로 부임했다가, 곧이어 전라도 병마절도사로 임명되었다.
귀국 직후 1567년(명종 22) 2월 3일 경상우도 수군절도사(慶尙右道水軍節度使)로 부임했다가, 2월 29일 전라도 병마절도사(全羅道兵馬節度使)로 임명되었다.
1568
그해 회령부사가 되었다가, 1568년(선조 1년) 6월 12일 제주목사(濟州牧使)로 부임하였다.
1571
1571년(선조 4) 1월 체직되어 행 사직(司直)으로 전임되었다.
1573
[첨지중추부사, 북병사 등 다양한 보직을 거치다]
첨지중추부사가 된 후, 문신 활쏘기 시험의 시관을 맡기도 했다. 북병사에 임명되었으나 분양마가 여윈 일로 탄핵받아 체임되었다.
1573년(선조 6) 첨지중추부사가 되고, 1573년(선조 6) 7월 18일에는 문신시사시관으로 낙점되었으며, 7월 27일에는 문신을 대상으로 활쏘기 시험을 할 때 순장으로 훈련원 일시관이 되었다. 그해 8월 2일 북병사에 임명되었으나, 8월 4일 전임지인 경상 좌병사로 있을 때 분양마가 여윈 일로 사헌부의 탄핵을 받고 체임되었다.
[형문 남용으로 파직되다]
경상우도 병마사로 재직 중 형문을 남용하여 사람이 죽자 암행어사의 탄핵으로 파직되었다가 다시 복관되었다.
이후 전라도 병마절도사를 거쳐 1573년(선조 6) 5월 2일 그는 경상우도병마사(慶尙右道兵馬使)에서 형문을 가하던 중 사람이 죽었기 때문에 형장을 남용하여 사람을 죽였다며 순무 어사(巡撫御史)에게 탄핵받아 파직되었다가 다시 복관되었다.
1573년(선조 6) 8월 23일 다시 충청 병사(忠淸兵使)로 제수되어 내려오다가 미암 유희춘을 방문했다.
1574
[탐오 혐의로 탄핵받고 복직하다]
충청도 병마절도사로 재직 중 탐오하고 포악하다는 이유로 대간의 탄핵을 받아 체직되었으나, 다음 날 선조의 명으로 다시 서용되었다.
1574년(선조 7) 충청도 병마절도사로 재직 중, 그해 3월 15일 대간으로부터 탐오하고 포악하다는 이유로 파직을 청하는 탄핵을 받고 체직되었다. 3월 16일 선조는 명을 환수하여 서용의 명을 내렸다. 이후 동지중추부사 겸 경연특진관에 제수되었다.
[북방 방어의 최전선에서 야인을 토벌하다]
회령부사에 임명된 후 북병사, 함경북도 절도사 등을 역임하며 북방에서 침략하는 야인들을 세 차례 토벌하고 축출하는 데 공을 세웠다.
1574년(선조 7) 7월 27일 회령부사(會寧府使)에 임명되었다. 그는 북병사, 회령부사 등을 역임하여 북문으로 쳐들어온 야인을 세번 토벌하고 서방경계를 넘어와 약탈하는 야인들도 두번 진압 축출하였다. 1574년(선조 7) 7월 회령 부사가 되었다가 그해 12월 함경북도 절도사 겸 경성부사로 전임되었으나 이듬해 사직하였다.
1581
[비리 혐의로 탄핵받다]
개인 사정을 이유로 청탁하고 암거래상을 비호했다는 이유로 대간의 탄핵을 받았으나 왕이 무마시켰다.
이후 훈련원 도정 겸 오위도총부 부총관이 되었다가, 1581년(선조 14) 11월 4일 개인 일신의 사정을 이유로 청탁한 것과, 합심으로 비호하여 범행이 드러난 암거래상을 완전히 놓아주었다는 이유로 대간의 탄핵을 받았지만 왕이 무마시켰다.
1583
1583년(선조 16) 3월 비변사 당상으로 있을 때, 왕명으로 인재를 추천케 하자 성혼을 추천하였다.
[경연 특진관, 왕명 회피 논란]
경연 특진관으로 경연에 참여했으나, 왕명으로 북방의 일을 논의하라는 지시를 피하고 들어가지 않았다.
1583년(선조 17) 7월 특진관(特進官)으로 경연에 참여하였다. 1583년 7월 20일 왕명으로 특진관 곽흘과 함께 경연에서 북방의 일을 논의하라고 하였으나, 피하고 들어가지 않았다.
1584
1584년(명종 17년) 봄 평안도 병마절도사 겸 수군절도사가 되고, 영변대도호부사를 겸직했다.
[습진 행사 대장 임명 취소되다]
선조가 신립과 함께 습진 행사의 대장으로 임명하려 했으나 비변사의 의견에 따라 취소되었다.
1584년 3월 17일 선조가 이전과 신립을 20일에 거행할 습진 행사의 대장으로 임명하도록 명령했다가 비변사의 말에 의하여 도로 파했다.
1587
[교자 탑승으로 파직되는 불명예]
경기도 수군절도사로 재직 중 도성 문을 나서자마자 교자에 올라탔다는 이유로 사헌부의 탄핵을 받아 파직되었다.
1587년(선조 20) 경기도 수군절도사로 있을 때 도성 문을 나서자마자 바로 교자에 올라탔다는 이유로 그해 12월 1일 사헌부의 탄핵을 받고 파직되었다.
1592
[임진왜란 발발, 선조 어가를 호종하며 국가 위기에 맞서다]
임진왜란 발발 직후 수성좌위장으로서 성곽을 수축하고 전략 12조를 헌책하며 전란 대응에 나섰으며, 80세의 노구로 파천하는 선조의 어가를 의주까지 호위하는 막중한 임무를 수행하며 큰 공을 세웠다.
1592년(선조 25) 4월 임진왜란 발발 직후 수성좌위장을 맡아 성곽을 수축했으며, 임금에게 전략 12조를 헌책하였다. 4월 말 어가의 파천이 정해지자, 4월 30일부터 나이 80에 서북으로 몽양가는 선조 어가(御駕)를 호위(護衛)하여 개성으로 피난했으며, 이어 5월 평양을 거쳐 6월 의주까지 가마를 호종했다.
[임진왜란, 두 아들과 손자 탄금대에서 전사하다]
임진왜란 중 신립 휘하에서 싸우던 두 아들 이경헌과 이승헌, 그리고 손자 이인남이 충주 탄금대 전투에서 전사했다. 이로 인해 '일실 오절'의 비극이 시작되었다.
임진왜란 당시 그의 두 아들 경헌과 승헌, 손자 인남은 탄금대 전투 때 신립 휘하에서 싸우다 전사했다. 이전의 셋째, 넷째 아들 이경헌과 이승헌은 신립 장군의 부관으로 충주 탄금대 전투에서 순절하여 세간에서는 일실 오절(一室五節)이라 칭했다. 손자 이인남은 무과 급제후 남도 우후로 신립의 휘하에서 충주 탄금대 전투에서 전사했다. (음력 1592년 4월 28일은 양력 1592년 6월 7일로 추정됨.)
다른 손자 이덕남은 김화현감으로 있다가 올라오는 왜군과 교전하다 전사했다. 이덕남(1559년 - 1592년 7월)
[도성 방어 실패 대죄, 병력 징발 건의]
도성 방어 초기 오위장과 병사들의 탈영을 막지 못한 책임을 스스로 대죄했으나 선조가 무마시켰고, 병력 징발을 위해 강원도에 산척이 많음을 들어 병력 징발을 건의했다.
그해 10월, 동지로 도성방어 초기에 오위장과 병사들의 탈영을 막지 못한 일로 스스로 대죄하였다. 그러나 선조는 대죄하지 말라며 이를 무마시켰다. 1592년(선조 25) 10월 19일 병력 징발을 논할 때, 강원도에 산척이 많음을 들어 병력 징발이 가능함을 건의하였다.
1597
이전의 손자 이복남은 임진왜란 시 전주 웅치에서 승전하였지만 1597년 남원성에서 순절했다.
1604
[호성원종공신 3등에 책록되다]
임진왜란 중 선조 어가를 호종한 공로를 인정받아 호성원종공신 3등에 책록되었다. 그의 아들 이봉헌도 함께 책록되었다.
1604년(선조 37) 호성원종공신3등(扈聖原從功臣三等)에 책록되었다. 이때 그의 아들 이봉헌(李奉憲)도 사과로 재직 중 호성원종공신 3등에 책록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