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상화 (시인)
시인, 작가, 독립운동가, 교육자, 문학평론가, 번역가
최근 수정 시각 : 2025-10-21- 17:23:39
* 일제강점기를 대표하는 민족 저항 시인이자 독립운동가. * 암울한 시대 속에서도 뜨거운 민족혼을 노래하며 문학으로 저항 정신을 일깨웠다. * <빼앗긴 들에도 봄은 오는가> 등의 작품을 통해 암울한 현실 속에서도 희망을 잃지 않는 메시지를 전했다. * 교육자, 작가, 번역가 등 다양한 활동을 통해 민족 문화 수호에 기여했다.
1901
[대구에서 출생]
일제강점기 대구부 중구역 서문로 12번지에서 아버지 이시우와 어머니 김신자 사이 4형제 중 둘째로 태어났다. 그의 집안은 대구의 명문 부잣집이었다.
경상북도 대구부 중구역 서문로 12번지의 양옥집에서 아버지 이시우와 어머니 김신자 사이에서 4형제 중 둘째로 태어났다. 할아버지 이동진은 자신의 재산을 털어 대구에 신식 학교인 우현서루를 열어 학생들에게 한학을 가르치고 신식 학문을 도입했다. 8세 때 아버지를 여의고 14세까지 큰아버지 이일우의 훈도를 받으며 우현학교(현 대륜중학교, 대륜고등학교)에서 수학했다.
1918
14세 때 경성부 중앙학교(지금의 서울중앙고등학교)에 입학했으나, 1918년 봄에 중앙학교를 중퇴한 후 강원도 금강산 일대를 방랑했다.
1919
[3·1 운동 모의 후 피신 및 서온순 여사와 결혼]
대구에서 3·1 만세 운동 거사를 모의하다가 밀정의 추적으로 피신해야 했으며, 같은 해 충남 공주 출신 서온순 여사와 결혼했다.
1919년 대구에서 백기만 등 친구들과 함께 3·1 만세 운동 거사를 모의하다 밀정의 추적으로 주요 인물들이 잡혀가자 경성부로 피신하여 한동안 은신했다. 같은 해 12월, 사촌 매형 윤홍열의 소개로 충청남도 공주 출신 서온순 여사(아명 서순애)와 결혼했다. 서온순 여사는 이상화 사후에도 재혼하지 않고 자녀를 키우며 그의 묘소 근처에 안장되었다.
1922
[《백조》 동인 참여 및 문단 등단]
현진건의 소개로 월탄 박종화와 만나 〈백조〉 동인에 참여하였고, 《백조》 1호에 시를 발표하며 문단에 정식으로 등단했다. 이후 프랑스 유학을 위해 일본으로 떠났다.
1921년 현진건의 소개로 월탄 박종화와 만나 〈백조〉 동인에 참여했으며, 박종화의 소개로 홍사용, 나도향, 나혜석 등 여러 문인과 교류했다. 1922년 이상화는 《백조》 1호에 〈말세의 희탄〉, 〈단조〉, 〈가을의 풍경〉 세 편의 시를 발표하면서 문단에 등단했다. 같은 해 프랑스 유학 기회를 얻으려고 일본으로 가서 동경의 아테네 프랑세 어학원에서 2년간 프랑스어와 프랑스 문학을 공부했다.
1923
[관동 대지진 중 암살 위협 겪고 귀국]
일본 유학 중 관동 대지진이 발생하여 불령선인으로 몰려 일본인 폭도들로부터 암살 위협을 겪었으나, 극적으로 피신하여 무사히 귀국했다.
1923년 일본 유학 중 관동 대지진이 나자 불령선인으로 몰려 일본인 폭도들로부터 암살 위협을 겪었다. 그러나 어느 일본인의 배려로 은신해 있다가 분장하고 집주인이 준 여비를 받고 관동 대지진의 수난을 피해 귀국했다.
1926
[대표작 <빼앗긴 들에도 봄은 오는가> 발표]
일제강점기 저항시의 대표작인 <빼앗긴 들에도 봄은 오는가>를 《개벽》에 발표하여 민족의식을 고취했다. 또한 조선프롤레타리아예술가동맹(카프) 발기인으로 참여하며 활발한 작품 활동을 펼쳤다.
1925년에 작품 활동을 활발히 했다. 시뿐만 아니라 평론, 소설 번역에도 힘썼다. 8월에 조선프롤레타리아예술가동맹(카프) 발기인으로 참여했다. 1926년 《개벽》에 <빼앗긴 들에도 봄은 오는가>를 발표했다. 이 작품은 작자의 반일 민족의식을 표현한 것으로, 나라는 빼앗겼어도 민족혼이 담긴 국토의 대자연은 우리를 일깨워주며, 피압박 민족의 비애와 일제에 대한 강력한 저항의식을 담고 있다.
1927
[의열단 사건 연루 및 교남학교 교사 재직]
대구로 돌아온 뒤 의열단원 이종암 사건에 연루되어 대구경찰서에 수감되었다가 풀려났다. 이후 교남학교(현 대륜고등학교)에서 조선어, 영어, 작문 교사로 근무하며 교육자로도 활동했다.
1927년 대구로 돌아왔다. 같은 해 의열단원 이종암 사건에 연루되어 대구경찰서에 수감되었다가 풀려났다. 1933년 교남학교(지금의 대륜고등학교) 교사로 근무했으며, 담당 과목은 조선어와 영어, 작문이었다. 이듬해 교사직을 사직했다가, 조선일보 경상북도총국 경영 실패 후 다시 교남학교의 영어, 작문담당 교사로 복직했다.
1937
[만주 형 이상정 방문 후 일본 관헌에 구금]
만주에 있던 큰형 이상정을 만나러 중국에 3개월간 다녀왔으나, 이 사실이 확인되면서 일본 관헌에게 구금되었다가 특별한 혐의점이 없어 가석방되었다.
1937년 3월 만주에 있던 큰형 이상정(독립운동가)을 만나러 중국에 3개월간 다녀왔다. 그가 형을 만난 사실이 확인되면서 일본 관헌에게 구금되었으나 특별한 혐의점이 없어 같은 해 11월 말경 가석방되었다. 이후 다시 대구로 내려와 교남학교에 조선어, 영어, 작문담당 교사로 복직하여 교가를 작사하고 권투부를 창설하여 지도하기도 했다.
1940
[교사직 사직 및 춘향전 영어 번역 시도]
교남학교 교사직을 그만두고 대구 자택에서 독서와 연구에 몰두하며 춘향전을 영어로 번역하고 한국 국문학사 및 프랑스 시 정석을 한글로 번역하는 작업을 시도했다.
1940년 대구부 계산2동에 집을 마련했다. 같은 해 말 교남학교 교사직을 그만두고 대구부 계산2동 84번지의 집에서 주로 생활하며 독서와 연구에 몰두했다. 그해부터 춘향전을 영어로 번역하고, 이어 한국 국문학사와 프랑스 시 정석 등을 한글로 번역을 시도했으나 완성을 보지 못했다.
1943
[43세의 나이로 사망]
갑작스럽게 쓰러진 후 위암 진단을 받고 투병하다가 대구 자택에서 위암과 폐결핵, 장결핵의 합병증으로 43세의 젊은 나이로 세상을 떠났다.
1943년 초 갑자기 쓰러졌고, 그 해 3월 병원에서 위암 진단을 받고 투병하다가 4월 25일 오전 8시 45분 경상북도 대구 자택에서 위암과 폐결핵, 장결핵의 합병증으로 인해 43세의 젊은 나이로 타계했다. 같은 날에는 이상화의 오랜 친구인 소설가 현진건도 경성부 제기동에서 폐결핵과 장결핵의 합병증으로 숨을 거두었다.
1948
[달성공원에 대한민국 최초 시비 건립]
김소운의 발의로 이윤수, 구상 등이 참여하고 죽순시인구락부가 협찬하여 달성공원에 시인을 기리는 대한민국 최초의 시비가 세워졌다.
1948년 3월 14일 김소운이 발의하고 이윤수, 구상 등이 참여하며 죽순시인구락부가 협찬하여 시인을 기리는, 대한민국 최초의 시비를 달성공원에 세웠다.
2008
[시민 운동으로 이상화 고택 보존 및 개방]
도시 개발로 헐릴 위기에 놓였던 이상화 고택이 1999년부터 시작된 시민들의 모금 활동과 100만 서명 운동 끝에 보존되어 새롭게 단장되어 일반에 개방되었다.
이상화의 고택은 대구광역시 중구 서성로 6-1(계산동2가 84)에 있다. 1999년 도시개발로 한때 헐릴 위기에 놓이기도 했으나 1999년부터 고택을 보존하자는 시민운동이 벌어졌고, 2008년 8월 13일 결실을 맺어 이상화 고택 개방에까지 이르게 되었다. 2008년 8월 12일 새롭게 단장되어 문을 열었다.
2009
[이상화 일대기 창작 뮤지컬 초연]
대경대학교 뮤지컬학과 학생들이 이상화의 일대기를 아들에게 자문받아 극을 구성하여 창작 뮤지컬 <빼앗긴 들에도 봄은 오는가>를 제작, 공연하며 그의 삶과 문학을 재조명했다.
2009년 초부터 대경대학교 뮤지컬학과 학생들은 이상화의 일대기를 그의 아들인 이충희 씨에게 자문받아 극을 구성했다. 이들은 지난 6개월간 시인의 삶을 기록한 책자를 참고하면서 대구광역시 중구 계산동2가 소재 이상화 고택을 수십차례 방문해 당시 분위기를 몸에 익혔다. 대경대 뮤지컬과 1학년 학생 30여명은 1920년대 식민지 시대를 살면서 저항시인으로 뜻을 굽히지 않은 이상화 시인의 삶과 비극적 역사상황을 담은 '빼앗긴 들에도 봄은 오는가'를 만들었다. 2009년 11월 30일과 12월에는 그의 일대기를 다룬 창작 뮤지컬 <빼앗긴 들에도 봄은 오는가>가 공연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