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봉창
독립운동가, 상인, 한인애국단원
최근 수정 시각 : 2025-10-21- 17:23:19
이봉창은 일제강점기 상인 출신 독립운동가입니다. 조선인에 대한 극심한 차별에 분노하여 항일 의식을 키웠습니다. 대한민국 임시정부 김구 선생을 만나 한인애국단에 가입했습니다. 1932년 일본 도쿄에서 히로히토 천황 암살을 시도했으나 아쉽게 실패했습니다. 그의 의거는 침체된 독립운동에 불씨를 지피고 임시정부를 부활시키는 데 결정적인 역할을 했습니다. 순국 후 건국훈장 대통령장이 추서되었습니다.
1900
1900년 8월 10일 경성부 용산방 원정2정목(元町二丁目)에서 이진규와 그의 부인 밀양 손씨의 아들로 태어났다. 아버지 이진규는 건축청부업과 우차운반업으로 자산을 모은 신흥 자본가였다. 선대는 경기도 수원에 거주했다.
1919
[철도국 견습생직 사직]
1918년 철도국 견습사원이 된 후 1년여 만에 조선인 직원에 대한 차별 대우에 염증을 느껴 견습생직을 그만두었다. 이는 이후 그의 독립운동 참여의 배경이 된다.
조선총독부 철도국 용산역 만선철도 기차운전 견습생이 되었으나, 1919년 초부터 조선인보다 늦게 입사한 일본인들이 승급과 봉급, 상여금 등 모든 면에서 혜택을 받는 것에 분개했다. 조선인과 일본인 직원에 대한 차별과 부당한 대우에 염증을 느낀 끝에 1919년 4월 14일 견습생직을 그만두었다.
1928
[천황 즉위식 구경 중 불심 검문과 민족 차별 자각]
히로히토 천황 즉위식을 구경하러 교토에 갔다가, 한글 편지를 소지했다는 이유로 11일간 구금되었다. 이 사건으로 민족 차별에 대한 울분을 크게 느끼며 독립운동에 대한 뜻을 품게 되었다.
1928년 히로히토 천황의 즉위식을 구경하기 위해 오사카에서 교토로 갔다가, 한문이 섞인 한글 편지를 갖고 있었다는 이유로 교토 고조 경찰서에 체포되어 11일간 투옥되었다 풀려났다. 당시 동료들이 자신을 이상하게 여기는 듯한 눈치를 보여 위축감을 느꼈다. 단순히 조선인이라는 이유로 민족적 차별을 받아 검속된 것에 큰 울분을 느끼고 조선인으로 태어난 것을 후회하며 독립운동에 종사할 뜻을 본격적으로 품게 되었다.
1931
[상하이에서 김구와의 만남]
중국 상하이에 도착해 안공근의 소개로 대한민국 임시정부의 김구를 찾아갔다. 처음에는 밀정으로 의심받았으나, 천황 암살 계획을 밝히며 김구의 신뢰를 얻었다.
1931년 1월 중순 상하이에 도착한 후, 수소문 끝에 안중근의 동생 안공근을 만나 임시정부 통신처의 주소를 전해 듣고 김구를 찾아갔다. 일본어가 섞인 한국어를 하고 일본식 옷차림에 게다를 끄는 모습 때문에 임시정부 요인들에게 밀정으로 의심받았으나, 2층에서 지켜보던 김구는 그의 비범함을 간파했다. 이후 술자리에서 "내게 무기만 있다면 천황을 처단할 수 있을 텐데"라고 말하며 천황 암살 계획을 밝혀 김구의 신뢰를 얻었다.
[한인애국단 가입 및 천황 암살 선서]
김구의 권유로 항일 독립운동 조직인 한인애국단에 가입하고, "적국의 수괴를 도륙하기로 맹세한다"는 선서와 함께 천황 암살을 위한 기념 촬영을 했다.
1931년 2월경 김구의 권고로 홍구에 거주하며 일본인 행세를 하던 이봉창은 몇 달 뒤 정식으로 대한민국 임시정부의 김구가 양성하는 항일 독립운동 조직인 한인애국단에 가입하고 일본 천황 암살 계획을 세웠다. 1931년 12월 11일 김구로부터 계획 준비 완료를 통보받고, 12월 12일 한인애국단에 정식 가입하여 "나는 적성으로써 조국의 독립과 자유를 회복하기 위하여 한인애국단의 일원이 되어 적국의 괴수(傀首)를 도륙하기로 맹세하나이다"는 선서를 하고 김구와 함께 수류탄을 양손에 든 채 기념 사진을 촬영했다.
1932
[사쿠라다몬 의거 및 체포]
일본 도쿄 사쿠라다몬 부근에서 관병식을 마치고 돌아가던 히로히토 천황에게 수류탄을 던졌으나, 천황은 다치지 않고 거사는 실패했다. 이봉창은 그 자리에서 체포되었다.
1932년 1월 8일, 이봉창은 도쿄 교외에서 관병식을 마치고 돌아가던 중인 히로히토 천황을 겨냥하여 사쿠라다몬 부근에서 수류탄 1개를 던졌다. 말과 마차가 손상되고 일본 고관 2명이 부상했으나, 천황은 다치지 않아 거사는 아쉽게도 실패했다. 이봉창은 즉시 그 자리에서 체포되었고, 처음에는 배후를 부인하다가 김구의 존재를 시인하고 그의 지시를 받았음을 진술했다.
[사형 선고 및 순국]
사쿠라다몬 의거 실패 후 도요타마 형무소에 수감되었고, 9월 30일 사형을 선고받았다. 10월 10일 이치가야 형무소에서 교수형으로 순국했다.
사쿠라다몬 의거 후 도쿄 경찰서에 구금되었다가 도요타마 형무소로 이감되었다. 1932년 9월 16일 도쿄 대법원에서 제1차 공판이 열렸고, 9월 30일 오전 9시 350명의 경찰이 둘러싼 가운데 사형을 선고받았다. 비밀 재판을 통해 사형 선고를 받은 이봉창은 1932년 10월 10일 이치가야 형무소에서 교수형이 집행되어 향년 32세로 순국했다.
1946
[유해 환국 및 효창공원 안장]
광복 후 김구 주석의 노력으로 이봉창 의사의 유해가 국내로 환국되어, 윤봉길, 백정기 의사와 함께 효창공원 삼의사묘에 안장되었다.
이봉창 의거는 비록 실패했으나, 이후 윤봉길 의거로 이어져 대한민국 임시정부의 활로를 여는 데 기여했다. 광복 후 귀국한 김구 주석은 이봉창 의사의 유해를 돌려받아 1946년 윤봉길, 백정기 의사와 함께 서울 효창공원에 안장했다. 이곳을 '삼의사묘'라 부르며, 효창공원 내에는 이봉창 의사의 동상도 세워져 있다.
1962
1962년 대한민국 정부는 이봉창 의사의 숭고한 희생을 기려 건국훈장 대통령장을 추서했다. 그의 폭탄 투척은 비록 목적을 달성하지 못했으나, 1930년대 한국 독립운동사를 장식하는 의열투쟁의 선봉이었으며, 일본 제국주의가 신격화한 천황에게 적의 심장부인 도쿄에서 폭탄을 투척함으로써 한국 독립운동의 강인성과 한국민의 지속적인 저항성을 세계에 과시하는 데 큰 의미가 있다고 평가받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