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규완

군인, 무신, 정치인, 기업인, 사상가, 관료, 개화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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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종대왕의 후손으로 몰락한 집안에서 태어난 이규완은 박영효의 식객으로 개화파에 가담했다. 갑신정변의 행동대장으로 활약했지만 실패 후 망명 생활을 겪었다. 일제강점기에는 강원도, 함경남도 도지사를 역임하며 친일반민족행위자로 분류되기도 했다. 그는 지독한 근검절약과 근면함을 강조하며 '게으름 망국론'을 주장, 황무지를 개간하고 농장을 운영하는 등 독특한 삶을 살았다. 조선인의 참정권과 자치권을 요구하는 등 실력 양성론을 몸소 실천한 인물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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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862

[이규완, 한성부에서 출생]

한성부 뚝섬에서 나무 장수 이기혁과 유씨의 둘째 아들로 태어났다. 초명은 치규(致圭)였다. 그의 집안은 세종대왕의 넷째 아들 임영대군의 15대손이었으나 가계는 몰락한 상태였다.

이규완은 1862년 11월 15일 한성부 뚝섬에서 나무 장수와 장터 행상을 하던 이기혁과 유씨의 둘째 아들로 태어났다. 처음 이름이자 족보상 이름은 치규(致圭)이다. 그의 집안은 세종대왕의 넷째 아들 임영대군(臨瀛大君)의 후손으로, 임영대군의 여섯째 아들 오산군 이주(烏山君 李澍)의 14대손이 된다. 왕족으로써의 예우는 11대조 수성부수 이검(秀城副守 李儉)에서 끝났고, 가계는 몰락하여 그는 무학으로 불우한 나날을 보냈다.

1876

[박영효의 식객이 되어 개화파에 가담]

9세에 어머니 유씨를 잃고, 1876년에 계모 기계유씨마저 사망한 후 광주군 숙부 집에서 거처하다 상경했다. 이후 박영효의 행차를 보고 그의 집에 찾아가 식객이 되면서 개화파에 가담하게 되었다.

소년기 때는 광주군 남종면 분원리의 숙부 집에서 거처하다가 다시 상경, 박영효의 행차 모습을 보고 그의 집을 방문, 초라한 행색을 보고 쫓아내는 박영효 집 하인들과 몇 번의 실랑이 끝에 박영효 집의 출입을 허락받았다. 이후 박영효 가문에 출입하다가 그의 식객이 되었다. 그는 젊은 시절 박영효의 식객이 되었다가 박영효 집의 청지기가 되었으며 그의 수하에 들어가면서 개화파에 가담하게 되었다.

1883

[청나라와 일본에서 근대 기술 및 군사 훈련 이수]

청나라 베이징에 파견되어 기기 다루는 기술을 배웠다. 이후 박영효와 서재필의 천거로 일본에 유학, 도야마 하사관학교에서 군사 훈련을 받았다.

1883년 1월 청나라 북경에 파견되어 기계 다루는 기술을 배우고 그해 3월 귀국하였다. 이때 익힌 기계 조립 기술로 이규완은 평소 웬만한 기계와 시계는 자신이 직접 수리, 수선하였다 한다. 그러나 청나라에서 다녀온 그는 다시 일본에 가보고자, 박영효에게 거듭 간청하여 관비 유학생의 한 사람이 되었다. 이규완은 박영효와 서재필 등의 추천과 후원으로 1883년 4월 관비 유학생으로 선발되어 일본에 유학하게 된다. 1883년 5월 이규완은 서재필 등과 함께 게이오 의숙에 입학하여 학문을 배웠다. 1884년 2월 게이오 의숙을 수료하였다. 1884년 3월 그는 후쿠자와 유키치의 추천장을 받고 바로 일본의 육군 하사관을 교육하는 도야마 육군하사관학교에 서재필, 정란교, 서재창, 신응희 등과 함께 입학, 사관 후보생이 되었다. 1884년 7월 그는 일본 토야마 하사관학교를 수료하고 귀국했다.

1884

[갑신정변 핵심 행동대원으로 활약]

김옥균, 박영효, 서재필 등이 일으킨 갑신정변에 행동대장으로 참여했다. 우정국 낙성식에서 민영익의 왼쪽 귀를 자르고, 이후 경우궁에서 윤태준, 이조연, 한규직 등 수구파 대신들을 척살하는 데 가담했다.

1884년 12월 4일 저녁 갑신정변 직전 우정국 낙성식장 입구에 숨어있다가 민영익을 습격하였다. 우정국 정문 입구에 서재창이 이끄는 분견대와 이규완이 이끄는 분견대가 숨어있다가, 민영익이 우정국 낙성식장에 들어갔다가 담배를 피우러 나왔을 때 서재창에게 습격당해 오른쪽 눈이 찔렸다. 정문에 숨어 있던 이규완은 민영익을 습격, 그의 한쪽 귀를 잘랐다. 1884년 12월 4일 8시경 이규완은 윤경순과 별궁에 방화하였다. 궁정 쿠데타에서 행동대장 서재필을 도와 요인을 제거하는 무력을 행사했다. 12월 5일에는 경우궁 소중문에서 윤태준, 이조연, 한규직 등 수구파 대신들을 처치하는 데 가담했다.

[갑신정변 실패 후 일본으로 망명]

갑신정변이 청나라군의 내습으로 실패하자, 김옥균, 박영효, 서재필 등과 함께 일본 국적선 치토세마루에 승선하여 일본으로 망명했다. 그는 묄렌도르프의 추격에도 불구하고 일본 선장의 도움으로 위기를 넘겼다.

1884년 12월 4일 김옥균과 박영효, 서재필, 서광범, 홍영식 등이 일으킨 갑신정변에 행동대로 참가했다. 그러나 갑신정변은 명성황후가 끌어들인 청나라군의 내습으로 사흘 만에 실패로 끝나고, 이규완을 비롯한 정변의 주역들은 북관왕묘에 숨어서 변복하고, 일본 공사관으로 은신했다가 배편으로 일본으로 망명해야 했다. 12월 7일 김옥균, 박영효, 서광범, 서재필, 변수, 유혁로, 이규완, 정란교, 신응희 등 9명은 일본으로 망명하고 홍영식, 박영교와 사관 생도 7명은 고종을 호위하여 청군에 넘겨주다가 피살되었다. 당시 이규완은 골절과 탈진 증세에 있는 서광범을 들쳐 업고, 자신의 짐과 서광범의 짐까지 짊어지고 뛰었다 한다. 제물포항에 정박 중인 일본 국적선 치토세마루(千歲丸)에 승선했다. 인천항 언덕에서 다케조에 공사는 김옥균, 박영효, 이규완 등에게 배를 타지 말라고 소리 질렀다. 일행은 급히 배에 탑승하였다. 이때 묄렌도르프가 말을 타고 인천까지 추격하여 일행을 내놓을 것을 요구하자 다케조에 신이치로는 다시 일행에게 당장 치토세마루에서 내릴 것을 요구했고, 그는 일행과 함께 자결을 기도하였다. 그러나 천세환 선장인 츠지 가츠사부로(辻勝三郞)가 다케조에 신이치로의 신의 없음을 나무란 뒤, 일행을 석탄 창고에 숨기고 그런 사람은 잠입한 적이 없다고 하여 되돌려보냈다.

1894

[조선 정부 자객 암살 계획 적발 및 체포]

일본 망명 중 조선 정부 자객 이일직이 박영효를 암살하려던 계획을 적발했다. 이규완은 이일직을 유인하여 붙잡았으나, 그를 고문한 혐의로 일본 경찰에 체포되어 징역형을 선고받았다.

1894년 조선 정부에서 파견한 암살대원 중 한 사람인 홍종우가 김옥균의 암살에 성공한 뒤, 홍종우의 일행이었던 이일직은 무사 권동수, 권재수 형제와 일본인 가와쿠보 주네기치(川久保常吉)를 매수하여 박영효의 은신처를 알아낸 뒤 암살을 기도했다. 그러나 첩자의 파견을 예상한 이규완에 의해 적발되어, 권동수(權東壽)는 친린의숙에 감금당하고 주동자격인 이일직 등은 일본 경찰에 넘겨진 뒤 일본에서 추방당했다. 1894년 3월 25일 이일직은 다시 도쿄에 와서, 사쿠라다, 홍고 지역에 있는 호텔 무라이 칸에서 가와구보를 만났고, 이때 양인은 당분간 하숙하였다. 이규완과 정난교는 이일직이 박영효, 김옥균 및 다른 사람들의 생명을 해치려는 계획에 몰두했었다는 사실에 대한 시인을 받아냈었다. 이규완은 이에 대해 박영효에게 알리고 다른 사람들과 논의하는 즉시, 이일직을 반초에 있는 기숙학교로 소환해서 그곳에서 심문하기로 결의했다. 3월 28일 그는 포박, 감금한 이일직에게 일본에 온 목적과 배후를 캐물었다. 이때 그는 다리미로 이일직을 고문했는데 이 일로 그는 '무력 감금, 폭행, 고문 수사' 등의 혐의로 기소되었다. 곧 이규완은 경찰을 불렀지만 고문 행위가 드러나 정란치와 함께 체포, 투옥되었다. 1894년 7월 16일 재판에서 이규완과 정란치에게는 이일직을 불법 감금, 구타한 혐의로 유죄 판결이 내려져, 한 달 10일간의 구금형과 2엔의 벌금형이 부과되었다.

[갑오경장으로 복권 및 관료 활동 시작]

김홍집의 친일 내각이 구성되면서 갑오경장이 단행되자 박영효와 함께 10년 만에 귀국했다. 귀국 직후 통위영 정령관 및 경무청 경무관으로 발탁되었고, 3품 경무관으로 승진했다.

1894년 11월 김홍집의 친일 내각이 구성되어 갑오경장을 단행하면서 박영효와 함께 10년 만에 귀국할 수 있었다. 귀국 직후 통위영 정령관(統衛營正領官)이 되고 곧 경무청 경무관(警務廳警務官)으로 발탁되었다. 11월 13일 박영효가 복권되면서 그도 복권되었다. 12월 10일 3품으로 승진하여 경무관이 되었다. 1895년 3월 23일 경무관 이규완이 지휘하는 순검들은 운현궁을 덮쳐 흥선대원군의 손자이자 고종 폐위를 꾀하던 이준용을 직접 구타하여 체포했다. 4월 1일 경무관 칙임관 2등에 임명되었다.

1895

[명성황후 암살 계획 연루 및 2차 망명]

박영효와 함께 명성황후 암살 계획인 '춘생문 사건'에 연루되어 수배령을 받았다. 유길준에 의해 계획이 폭로되자 박영효 등과 함께 용산에서 기선을 타고 일본으로 도피했다.

1895년 7월 6일 춘생문 사건 직후 내부대신 박영효는 국왕의 명령으로 해임되었으며, 경무사 이윤용은 경무관 이규완, 최진한과 더불어 내부의 제청으로 해직되었다. 그해 7월 박영효가 명성황후를 암살하려 했다가 유길준에 의해 폭로된 박영효 반역 사건으로 망명하자, 그도 친러파의 거듭된 탄핵을 받다가 1895년 말 일본으로 다시 망명해야 했다. 1895년 7월 그는 박영효와 함께 왕비를 암살할 계획을 세운다. 7월 5일 신응희, 이규완, 우범선 세 사람은 박영효와 상의하여 왕궁 수비 교체를 구실삼아 실력 행사로 대세를 만회하려 했다. 그런데 일본인 사사키가 그 내용을 상세히 탐지해 한재익에게 필담으로 누설시켰고, 한재익은 심상훈에게 보고, 심상훈은 7월 6일 입궐해 고종에게 이 사실을 아뢰었다. 고종은 즉시 '법부는 실상을 철저하게 조사하여 엄히 죄를 다스리도록 하라'고 지시했고, 이규완은 수배령을 받았다. 박영효는 심복 이규완을 데리고 한강으로 나가 증기선을 타고 제물포를 거쳐 7월 8일 일본으로 망명하였다.

1896

[일본인 여성 나카무라 우메코와 결혼]

2차 망명 중이던 일본 야마구치현에서 일본인 외교관의 딸 나카무라 우메코와 결혼했다. 그녀는 이씨로 성을 바꾸고 한국식 이름인 이매자(李梅子)로 개명했다.

2차 망명 생활 초반 조선 사회에 환멸과 염증을 느낀 그는 도쿄, 야마구치, 시모노세키, 후쿠오카 등을 방황하다가 후쿠자와 유키치의 충고로 처가인 야마구치현 하기 촌에 체류하며 잠업 강습소에 입소하여 잠업 기술을 배웠다. 1896년 7월 15일 나카무라 우메코와 결혼하였다. 나카무라 우메코의 아버지 나카무라 이치는 1876년 주미국 일본대사관 재직 시 스페인과 캐나다인 혼혈이었던 여성 외교관 마가렛 고츠와 만나 아들 하나를 두고 딸로 나카무라 우메코를 두었다. 나카무라 우메코는 일본풍습에 따라 이씨로 성을 바꾸고, 한국식 성과 이름을 따서 이매자(李梅子)라 하였다. 중촌매자의 집은 양잠을 하였으며, 그는 처갓집에서 양잠업을 도우면서 생활하였다. 나카무라 우메코와의 사이에서 5남 4녀를 두었다.

1898

[고종 폐위 쿠데타 시도 발각]

독립협회 지원 활동을 명목으로 국내에 잠입, 고종 폐위 및 박영효를 대통령에, 윤치호를 부통령에 옹립하려는 계획을 추진했다. 그러나 일본 공사관 직원에 의해 발각되어 실패했다.

1898년 10월 일시 귀국하였다. 그는 한성부의 일본인 거류민 지역에 숨어 있으면서 최정덕 등과 연락하였고, 윤치호에게도 사람을 보내 박영효의 귀국 운동을 독립협회와 만민공동회에서 처리해줄 것을 부탁하였다. 그러나 윤치호로부터 개혁의 기회를 놓치기 싫다는 이유로 거절당했다. 1898년 11월 9일 개화파와 독립협회의 지원 요청을 받고, 황철과 함께 독립협회 지원 시위를 하고 일본으로 돌아왔다. 이규완과 황철은 11월 9일 후쿠오카현의 몬지 항을 출발하여 인천에 상륙, 서울에 무사히 들어가 진고개 일본인 여관에 투숙했다. 11월과 12월 그는 대한제국에 잠입하여 고종을 폐위시키고 박영효를 대통령에, 윤치호를 부통령에 옹립할 계획을 세웠다. 그러나 주한국 일본 공사관 직원에 의해 사전에 유출되어 정변 기도는 무산되고 만다. 이들의 정변 계획은 12월 말에 발각되었다. 일망타진된 박영효의 추대 음모자들 가운데 이규완의 매부인 강성형과 박영효의 추천으로 일본 유학을 했던 윤세용의 공초에서 이승만의 이름이 토로되었고, 이승만도 곧 체포 대상이 되고 말았다. 한편 이규완은 체포령을 피해 비밀리에 경성을 탈출, 배편으로 다시 일본으로 귀환, 박영효 등을 만나고 야마구치현으로 되돌아왔다.

1907

[강원도 관찰사 및 함경남도 도지사 역임]

통감부의 지원으로 강원도 관찰사에 임명되었다. 그는 학식이 짧다는 이유로 사양했으나 이토 히로부미의 강권으로 부임했고, 이후 강원도 도장관과 함경남도 도지사를 역임하며 부지런함과 근검절약을 몸소 실천했다.

1907년 3월 비밀리에 귀국하였다. 1907년 5월 11일 서북영림창 사무관(西北營林廠事務官)의 한 사람으로 임명되었다. 1907년 7월 고종이 퇴위하자 사면령이 내려졌으며, 충청도 관찰사직에 임명되었지만 거절했다. 그해 11월 6일 대한제국 중추원 부찬의(中樞院副贊議) 주임관 2등(奏任官二等)에 임명되었다. 이후 지방관의 물망에 여러 차례 거론되었지만 그는 자신의 학식이 짧음을 들어 여러 번 스스로 사양하였다. 결국 그는 1907년 11월 7일 강원도 관찰사(江原道觀察使)로 부임하고 칙임관 3등(勅任官三等)에 서임되었다. 강원도 관찰사가 되면서 겸임 중추원 찬의(中樞院贊議)에 임명되어, 1910년 10월 1일까지 중추원 찬의를 겸하였다. 1910년 10월 1일 한일 합방 조약 체결과 동시에 그는 조선총독부 고등관에 임용되고 강원도 도장관로 발령되었다. 1918년 9월 23일 함경남도 도장관으로 발령받았다. 1919년 8월 19일 관제 개정으로 도장관이 도지사로 바뀌면서 인사이동이 단행되었을 때, 그는 함경남도지사로 유임되었다. 그는 도지사로 재직하면서 매춘굴과 유흥가, 주점을 단속, 혁파하고, 도박과 오락을 근절, 금지하였다. 또한 음주와 흡연 역시 금지하고 그 시간에 쉬거나 물을 마시는 일, 용변보는 것만 허용했다. 그는 일각의 촌음이라도 헛되이 낭비하지 말라며 독서를 하든, 물레를 잣든, 신문을 읽든, 청소를 하든 무엇이든 하라고 강조하였다.

1916

[조선인 참정권 및 자치권 운동 주장]

매일신보 기자와의 공개 인터뷰에서 조선인의 참정권과 자치권 허용을 주장했다. 그는 조선인 역시 일본 국민으로서 동등한 권리를 누리려면 스스로 노력해야 한다고 강조했다.

1910년 한일 합방 조약 체결 직후부터 그는 조선인의 참정권 허용과 자치권 허용을 주장하였다. 그는 일본이 조선을 병합했다면 조선의 백성들 역시 차별하지 말고, 동등한 일본의 국민으로 인정하라고 요구했다. 그는 조선인 역시 일본의 국민임을 인정하고, 일본인과 동등한 권리를 얻기 위해 스스로 분발해야 한다고 덧붙였다. 또한 그는 조선인이 일본인과 동등한 대접을 받으려면, 조선인 역시 일본 정부에 세금을 납부하고 동일한 의무를 이행해야 한다고 덧붙였다. 1916년 4월에는 매일신보 기자와의 공개 인터뷰를 하였다. 이때 그는 '조선인의 부력(富力)이 내지인과 필적하게 납세 및 기타 국민된 의무를 행하게 된다면, 어찌 내지인과 똑같이 동등한 권리를 향유하지 못하겠는가. 참정권을 획득함은 물론이고, 비록 국무대신이나 주외(駐外)의 외교사신을 조선인이라고 못할 자가 없다고 믿는다'고 답하였다.

1924

[공직 사퇴 후 황무지 개간 및 농장 경영]

함경남도지사직을 사퇴하고 공직에서 물러났다. 이후 조선총독부 중추원 참의직 제안을 거절하고 청량리와 춘천 등지의 황무지를 개간하여 농장을 경영하는 데 전념했다.

1924년 12월 1일 그는 병을 이유로 조선총독부 내무국에 사직서를 제출, 함경남도지사직을 사퇴하였다. 1924년 함경도 장관을 마지막으로 공직에서 퇴직한 뒤에도, 비슷한 경력의 전직 고위 관료들이 대부분 들어가는 조선총독부 중추원에 참가하지 않고 식산흥업이라는 평소의 주장대로 황무지를 개간하여 농장을 일구고 운영하는 일에 몰두하여, 1930년 청량리 전농 농장, 1936년 춘천 농장을 경영했다. 조선총독부에서는 다른 지역 도지사 중 원하는 곳이나, 총독부 내 국장급의 직책을 추천, 권고했지만 그는 모두 사양하였다. 그는 조선총독부 중추원 참의 직을 여러 번 제의받았으나 모두 거절하였다. 1930년부터 춘천군 신동면 석사리와 춘천읍 후평리의 야산을 손수 개간하여 밭을 만들고, 장남 각일과 차남 선길, 삼남 영일에게 주었다. 그는 인부를 고용한 것 외에도, 자신도 직접 청량리와 전농리 등 다른 곳을 맡아서 산지와 황무지를 농토와 밭으로 개간하였다.

1945

[해방 후 실력 양성 강조 및 정치 활동 고사]

해방이 되자 경거망동을 삼가고, 다시는 주권을 빼앗기지 않기 위해 백성들 스스로 배우고 땀 흘려 일해야 한다고 호소했다. 이후 강원도 도지사 고문 및 임시 도지사직을 맡기도 했으나, 고령을 이유로 정치 활동을 고사했다.

1945년 8월 15일 해방이 되자 그는 경거망동을 삼가할 것과 해방은 우연히 굴러온 것인 만큼 다시는 권리를 빼앗기지 말자고 호소하였다. 8월 16일에 발표한 소감에서 그는 우연히도 하늘의 보살핌으로 독립을 하였으므로 감사히 여겨야 하며, 다시는 나라를 빼앗기지 말자고 주문했다. 그는 주권을 잃지 않으려면 백성들 스스로 배우고 깨달기를 주저하지 말아야 한다, 모르는 것이 있으면 어린아이에게도 물어서 배우자, 열심히 땀 흘려 일하자, 노동을 더럽다며 수치스러워하지 말자고 호소하였다. 해방 후 1945년 9월 2일 강원도 도지사 고문이 되고 10월에는 해방 이후 공석이 된 강원도지사직을 임시로 맡기도 했다. 한국민주당의 강원도 지구당 위원장직에 천거되었지만 그는 고령을 이유로 거듭 고사하였다. 1946년 2월 1일 비상국민회의와 2월 14일 민주의원에 참여하였으며, 이승만을 지지하였다. 만년에는 춘천읍 후평리의 2층 집에서 거처하며 신동면 석사리에 있던 아들 집을 왕래하면서 생활하였다.

1946

[중풍과 노환으로 춘천 자택에서 사망]

중풍과 노환에 등창까지 더해져 춘천 자택에서 합병증으로 사망했다. 그는 평소 근검절약과 노동의 가치를 강조하며 호화로운 장례식을 거부하고 최소한의 비용으로 장례를 치러줄 것을 유언했다.

중풍과 노환으로 병석에 누워 있다가 등창까지 더해져, 1946년 12월 15일 춘천군 춘천읍 자택에서 중풍과 등창, 노환 등의 합병증으로 사망하였다. 그는 말년에 중풍으로 누워 있었는데, 죽을 때까지도 곁에 어망 짜는 실을 놓고 어망을 짰다 한다. 그는 생전 자신의 집 울타리 안팎과 집 주변에 미루나무, 오동나무, 대추나무, 밤나무, 감나무, 은행나무 등을 심어두었다. 그는 자신이 죽어서도 전직 고관대작이 죽었다는 이유로 시장과 저자거리를 점유하거나 누군가에게 민폐를 끼칠 것을 염려하였다. "언제 내가 죽을지는 모르나 내가 죽거든 저 미루나무로 관재(官材)를 하라. 관재가 마련되었으니 굳이 관을 새로 살 필요가 없어서 장례비 10원을 5원으로 내리고, 그 이상 넘지 않도록 하라."고 유언했다. 시신은 춘천군 춘천읍 후평리(현 강원도 춘천시 후평1동) 589번지, 그의 2층 다다미집 근처, 삼운사 서남편에 매장되었고, 장례식에는 초대 강원도의회 의장 임용준, 강원도지사 박근원 등 여러 인사가 조문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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