율리시스 S. 그랜트
미국의 대통령, 군인, 장군, 정치인
최근 수정 시각 : 2025-10-21- 17:21:59
- 미국 제18대 대통령이자 남북 전쟁의 영웅.- 웨스트포인트 졸업 후 멕시코-미국 전쟁 참전 및 육군 총사령관 역임.- 남북 전쟁에서 빅스버그 등 주요 전투 승리로 북군을 승리로 이끔.- 대통령 재임 중 재건 노력과 여러 정부 기관 설립에 기여했으나 부패 스캔들에 시달림.- 말년에 집필한 회고록은 군사적, 문학적 걸작으로 평가받음.
1822
[율리시스 S. 그랜트 출생]
하이럼 율리시스 그랜트라는 본명으로 오하이오주 포인트플레전트에서 제시 루트 그랜트와 한나 심슨 사이에서 태어났습니다.
오하이오주 클러몬트군의 포인트플레전트에서 제시 루트 그랜트와 한나 심슨 사이에서 '하이럼 율리시스 그랜트'라는 본명으로 태어났습니다.
1823
[조지타운으로 가족 이주]
가족이 브라운군에 있는 조지타운 빌리지로 이주하여, 그랜트는 17세 때까지 그곳에서 대부분의 시간을 보냈습니다.
1823년 가을, 그랜트의 가족은 브라운군에 있는 조지타운 빌리지로 이주했으며, 그랜트는 자신이 17세가 될 때까지 대부분의 시간을 그곳에서 보냈습니다.
1839
[웨스트포인트 사관학교 입학]
17세가 되어 웨스트포인트의 요구 사항을 간신히 통과하며 미국 육군사관학교에 입학했습니다. 이때 토머스 L. 헤이머 의원의 실수로 '율리시스 심슨 그랜트'로 후보 지명되었고, 이후 'S'를 '심슨'이라고 인정한 적은 없다고 합니다.
17세가 되어 입학을 위한 웨스트포인트의 신체 요구 사항을 간신히 통과한 그랜트는 토머스 L. 헤이머 의원을 통해 뉴욕주 웨스트포인트에 있는 미국 육군사관학교로 임명을 받았습니다. 헤이머는 실수로 그를 율리시스 심슨 그랜트로 후보 지명했으며, 그랜트가 이름 변경에 항의했음에도 불구하고 관료주의에 따랐습니다. 이후 그랜트는 'S'가 '심슨'을 상징한 것을 전혀 승인하지 않았습니다.
1843
[웨스트포인트 졸업]
웨스트포인트를 39명 중 21위로 졸업하며 사교성 없고 조용한 성격으로 외톨이였지만, 무서워하지 않는 전문가 기병으로 평판을 쌓았습니다.
그랜트는 1843년에 웨스트포인트를 졸업하여 39급에서 21위에 들었습니다. 그는 사교성도 없고 말수도 적고 조용한 성격에 친구도 사귈 줄 몰라서 학교에서는 늘 외톨이였지만, 사관학교에서 무서워하지 않는 전문가 기병으로서 평판을 설립하였습니다.
1846
[멕시코-미국 전쟁 참전]
재커리 테일러와 윈필드 스콧 장군들 아래 멕시코-미국 전쟁에 복무하며 여러 전투에 참여했고, 용감함으로 두 번 명예를 얻었습니다.
그랜트는 재커리 테일러와 윈필드 스콧 장군들 아래 미국-멕시코 전쟁에 복무하여 레사카 데 라 팔마, 팔로 알토, 몬테레이, 베라크루스 전투에 참여했습니다. 그는 몰리노 델 레이와 차풀테펙에서 두 번이나 용감함으로 명예를 얻었습니다. 비록 전투에서 자신을 드러냈지만, 그랜트는 전선 후방의 과제를 맡았습니다.
1848
1848년 미국-멕시코 전쟁이 끝났을 때 그랜트는 육군에 남아있었고, 몇몇 다른 직위들로 차례로 할당되었습니다. 그해 그랜트는 미주리주의 노예 소유자의 딸인 줄리아 덴트에게 결혼했습니다.
1850
1850년 그랜트는 줄리아 덴트와의 사이에서 그들의 4명의 자식들 중 첫째 아들을 두었습니다. 그랜트는 드물게 헌신적인 부친이자 남편이었습니다.
1853
그랜트는 1853년 워싱턴 준주에 있는 포트밴쿠버로 보내져 미국 보병 4단의 연대 선장을 지냈습니다. 그의 부인은 그의 중위 월급이 경계 지방에 가족을 후원하지 않았기 때문에 그를 동행할 수 없었고, 줄리아 여사는 당시 둘째 자식을 임신 중이었습니다.
1854
[군 임무 사임 및 시민 생활 시작]
대위로 진급되었으나 가족을 부양할 형편이 안 되어 술을 마시기 시작했고, 군사 업무에 영향을 주어 결국 임무 사임 또는 재판 중 선택을 강요받았습니다.
다음 해인 1854년 그랜트는 대위로 진급되었고, 캘리포니아주 포트흄볼트에서 보병 4단의 F 컴퍼니 사령관을 맡는 데 할당되었습니다. 월급 상승에도 불구하고 그는 여전히 자신의 가족을 서부로 데려올 여유가 없었습니다. 그는 캘리포니아에 있는 동안 수입을 보충하려 사업을 시도했으나 모두 실패했습니다. 돈 문제와 가족에 대한 그리움 때문에 음주를 시작했고, 이것이 군사 업무에 영향을 미쳐 상관들로부터 임무 사임 또는 재판 중 하나를 선택하라는 압박을 받았습니다.
[7년간의 비성공적인 시민 생활]
이후 7년간 농부, 부동산 중개인, 가죽 가게 보조인 등 다양한 직업에 종사했지만 모두 성공하지 못하고 깊은 빚에 시달렸습니다.
시민 생활의 7년이 이어졌고, 그랜트는 다양한 고용들에 어울리지 않는 것을 증명했습니다. 그는 농부로서, 세인트루이스에서 부동산 중개인으로서, 그리고 최종적으로 일리노이주 갤리나에서 부친과 동생에 의해 소유된 가죽 가게에서 보조인으로서 차례로 비성공적이었습니다. 이 시간 동안 그는 깊게 빚으로 들어갔으나 헌신적인 부친과 남편으로 남아있었습니다.
1861
[남북 전쟁 발발 및 참전 준비]
남군이 섬터 요새에 발포하며 남북 전쟁이 시작되자, 그랜트는 전쟁에 참여할 소원을 이루기 위해 지원군 보병 중대 소집을 도왔습니다.
1861년 4월 12일 남군이 섬터 요새에 발포했을 때, 에이브러햄 링컨 대통령은 7만 8천 명의 지원군을 위한 요구를 내놓았습니다. 이 소식이 갤리나에 도달하자 그랜트는 전쟁에 들어가는 소원을 이루고자 했습니다. 그는 지원군 보병 중대 소집을 도왔고, 쇠퇴하는 부대의 장의 직함에도 불구하고 일리노이주의 수도 스프링필드로 부대를 동행했습니다.
스프링필드에서 지원군 소집 직위를 제안받아 받아들였습니다. 장교 임무를 달성하려는 여러 번의 실패 끝에, 주지사는 그랜트가 웨스트포인트 졸업생인 것을 인정하여 6월 17일에 일리노이 21연대의 대령으로 임명했습니다.
[지원군 준장 임명]
적군과 교전하기 전, 지원군 준장으로 임명되었고, 이후 미주리주 남동부의 중요한 지구 사령관을 맡게 되었습니다.
사령관직을 맡은 지 얼마 지나지 않아 그랜트의 연대는 미주리주로 명령을 받아 도착했고, 그는 부하들을 교련시키고 훈련을 설립하는 데 집중했습니다. 8월 7일, 아직 적군과 교전하기 전에 그는 지원군 준장으로 임명되었습니다. 몇몇 작은 사령부에서 첫 복무 후에 그랜트는 미주리주 남동부의 중요한 지구 사령관을 할당받았습니다.
1862
[헨리-도널슨 요새 포획]
테네시주의 헨리 요새와 도널슨 요새를 포획하며 남북 전쟁에서 북군의 첫 주요 승리를 이끌었습니다.
1862년 2월, 그랜트는 테네시주에서 헨리 요새와 도널슨 요새들을 포획하면서 전쟁의 첫 주요 승리의 원인을 합중국에게 주었습니다. 그랜트는 요새들의 주둔군들을 사로잡았을 뿐만 아니라 도널슨에서 자신의 유명한 요구와 함께 북부의 주들을 열광시켰습니다.
[실로 전투 승리]
실로 전투에서 남군의 기습 공격으로 북군이 큰 피해를 입었지만, 그랜트는 꾸준히 후퇴를 거부하고 역습을 감행하여 승리했습니다. 이 전투는 23,000명 이상의 사상자를 낸 잔인한 전투였습니다.
4월 초순에 그는 실로 전투에서 앨버트 시드니 존슨과 P.G.T. 보리거드 장군들에 의해 경악하였습니다. 남군 공격의 심한 폭력은 북군을 혼란에 빠뜨렸으나, 그랜트는 꾸준히 후퇴하는 것을 거부했습니다. 엄한 결심으로 그는 자신의 전선을 안정시켰습니다. 그러고 나서 이틀째 날에 시기적절한 강화의 도움과 함께 그랜트는 역습하여 승리로 심각한 반전을 돌렸습니다. 실로 전투는 북군의 승리에도 불구하고, 23,000명 이상의 사상자와 함께 당시 미국 역사상 가장 잔인한 전투였습니다.
1863
미시시피주 빅스버그에서 미시시피강의 요새를 포획하는 캠페인에서 그랜트는 작전의 일련을 지도하고, 지방의 늪에도 불구하고 접근을 시도하는 데 1862년 ~ 63년의 겨울을 보냈습니다. 이 시도들은 실패했으나, 그랜트는 1863년 봄에 새로운 계획을 발포했습니다. 이후의 작전은 군사 역사상 가장 명인 다운 것들 중 하나로 숙고되었습니다.
그랜트는 미시시피강의 서부 언덕으로 자신의 군인들을 행렬시키고 빅스버그에서 총을 뛰어 넘은 미국 해군의 군함들을 이용하여 강을 건넜습니다. 이 일은 미국-멕시코 전쟁의 베라 크루스 전투 이래 미국 군사 역사상 가장 큰 수륙 양용 작전에서 결과를 가져왔고, 제2차 세계 대전의 노르망디 전투까지 그 기록을 보유하였습니다. 거기서 그랜트는 자신의 군인들을 내륙으로 옮기고 기존의 군사적 원리를 도전하는 대단한 움직임으로 자신의 공급선들의 대부분으로부터 느슨하게 잘랐습니다. 적군의 영토에서 작전을 벌인 그랜트는 빠르게 움직여 존 C. 펨버턴 아래의 남군들에게 자신을 상대로 그들의 권력을 집중하는 데 전혀 기회를 주지 않았습니다. 그랜트의 군대는 동부로 향하여 잭슨을 포획하고 빅스버그로 철도를 절단했습니다.
[빅스버그 전투 승리 및 항복]
빅스버그 전투에서 6주간의 포위 공격 끝에 존 C. 펨버턴 장군의 항복을 받아냈습니다. 이는 남북 전쟁의 전환점으로 여겨집니다.
남군들이 더 이상 빅스버그 주둔지로 증원대를 보낼 수 없던 것을 알던 그랜트는 서부로 돌려 챔피언힐 전투에서 이겼습니다. 패배한 남군들은 빅스버그에서 자신들의 방어 공사들 내부로 후퇴하였고, 그랜트는 즉시 도시를 항복하였습니다. 임신 불가능한 유방을 상대로 폭행들이 효과 없는 것을 찾아낸 그는 빅스버그 전투가 된 6주 포위 공격을 위하여 정착하였습니다. 1863년 7월 4일 가로 막아지고 구호의 가능성 없이 펨버턴은 그랜트에게 항복하였습니다. 그 일은 남부의 경우를 위하여 파괴적인 패배였으며 효과적으로 남군을 2개로 갈라놓았고, 이전의 날 게티스버그 전투에서 북군의 승리와 함께 남북 전쟁의 역전으로 넓게 숙고되었습니다.
그해 9월 치카모가 전투에서 남군이 이겼습니다. 그 후에 패한 윌리엄 S. 로즈크랜스 아래 북군은 테네시주 채터누가로 후퇴하였습니다. 브랙스턴 브래그가 이끈 승리적인 남군들은 뒤에 가깝게 따라갔습니다. 그들은 산허리들에 자세들을 취하여 도시를 바라보고 연방 정부를 둘러쌌습니다.
10월 17일 그랜트는 포위 세력의 전체 책임에 놓였습니다. 그는 즉시 로즈크랜스를 구제하여 그를 조지 H. 토머스와 대체하였습니다.
[워해치 전투로 공급선 확보]
'크래커 라인' 계획을 고안한 윌리엄 F. 스미스의 도움으로 워해치 전투를 발포하여 테네시강의 공급선을 열고 채터누가로 보급과 증원대가 들어올 수 있도록 했습니다.
'크래커 라인'으로 알려진 계획을 고안한 그랜트의 최고 기술자 윌리엄 F. '볼디' 스미스는 테네시강을 여는 데 워해치 전투 (1863년 10월 28일 ~ 29일)를 발포하여 채터누가로 들어가 흐르는 데 공급물과 증원대들을 허용하여 그랜트의 세력들을 위한 기회들을 거대하게 늘였습니다.
다시 보급을 받고 강화에 북군의 사기가 높아졌습니다. 11월 후순에 그랜트는 공격에 갔습니다. 채터누가 전투는 남군의 우익에 셔먼의 실패한 공격과 함께 시작하였습니다. 셔먼은 전술적 오류를 저질렀습니다. 그는 잘못된 산을 공격했을 뿐만 아니었으나 자신의 부하들에 단편을 저질러 유일한 남군의 사단에 의해 패하는 데 그들을 허용하였습니다. 응답에서 그랜트는 토머스에게 셔먼으로부터 방어군을 물리치는 데 중앙에 양동 작전을 발포하는 데 명령을 내렸습니다. 토머스는 조지프 후커가 포토맥 군으로부터 증원대와 함께 맹방의 선의 중심에 컴벌랜드군을 자신이 발포하기 전에 남군의 좌측에 교전되었던 것이 확실할 때까지 기다렸습니다. 연기에 불구하고 토머스의 사단이 기대되지 않았지만 눈부신 미셔너리 리지를 똑바로 충전하여 맹방의 선의 요새화된 중심지를 깬 동안 후커의 부하들은 남군의 좌측을 깼습니다. 더글러스 맥아더 장군의 부친 아서 맥아더 중위는 자신의 부대의 군대와 함께 차지하고 앞으로 충전한 공로로 명예 훈장을 받았습니다. 그랜트는 시초적으로 양동 작전을 위한 그의 명령들들이 처음에 연기되고 그러고나서 능가한 것에 토머스에게 화를 냈으나 폭행파가 거꾸로 후퇴로 들어가면서 보내져 조지아주의 주도이자 아메리카 맹방의 심장 애틀랜타를 침입하는 데 북군을 위한 길을 열었습니다.
1864
[중장 계급 임명]
링컨 대통령에게 깊은 인상을 주어 미국 의회에 의해 새롭게 권한이 부여된 중장 계급으로 임명되었습니다.
그랜트의 싸우는 데 기꺼이 하는 마음과 이기는 데 능력은 링컨 대통령에게 인상을 주었습니다. 빅스버그에서 그랜트의 승리에 대비하여 링컨은 그랜트의 부적절한 명령과 음주 문제에 관한 불만의 소탕을 들었습니다. 빅스버그에서 그랜트의 놀라운 승리는 메릴랜드주에서 리 장군을 몰아낸 불행한 게티스버그 전투와 거의 동시에 일어난 그랜트에 관한 링컨의 판단이 입증되었고 그는 1864년 3월 2일 마음 속에 그랜트와 함께 미국 의회에 의해 새롭게 권한이 부여된 계급인 중장으로 그랜트를 임명했습니다.
3월 8일 링컨 대통령은 이제 유명한 장군과 함께 정면으로 맞서 백악관에서 접대를 베풀었습니다.
[미국 육군 총사령관 취임]
미국 육군 총사령관에 임명되어, 리 장군의 군대를 파괴하고 리치먼드를 포획하는 데 주력하는 전략을 세웠습니다.
1864년 3월 12일 그랜트는 미국의 전 육군의 사무 총장(총사령관)이 되었습니다. 그는 셔먼 소장을 서부의 모든 군단 사령관 자리에 앉히고, 리 장군의 부하들을 파괴시키는 데 장기적으로 좌절되었던 북군의 노력으로 자신의 주의를 돌려 버지니아주로 자신의 본부를 옮겼습니다. 그의 보조 목표는 버지니아주의 주도 리치먼드를 포획하는 것이었으나, 그랜트는 일단 전자가 이루어지면 자동으로 일어날 이 후의 일이 일어날 것을 알았습니다.
[오벌랜드 캠페인 시작]
오벌랜드 캠페인을 시작하며 래피던강을 건너 '황무지'로 알려진 지역으로 행군했습니다. 이 캠페인은 로버트 E. 리 장군과의 대결이었습니다.
오벌랜드 캠페인은 남군을 꺾는 데 북군에 의해 필요했던 군사 추력이었습니다. 그 일은 서사시 대회에서 위대한 사령관 로버트 E. 리를 상대로 그랜트를 겨루게 하였습니다. 그 일은 1864년 5월 4일 포토맥 군이 래피던강을 건너 덤불과 '황무지'로 알려진 두 번째로 자란 나무들의 지역으로 들어가는 행군을 할 때 시작되었습니다.
[황무지 전투 중 리의 후퇴와 그랜트의 진격]
황무지 전투 이틀간의 싸움이 정지되었을 때, 역사는 리가 물러나 포토맥 군의 전임 사령관들이 하던 대로 그랜트도 후퇴할 것이라는 예측을 뒤엎고 진격을 선택한 그랜트의 결정에 달렸습니다.
황무지의 전투는 완고하고 피를 흘리는 이틀간의 싸움이었습니다. 그 일은 북군을 위하여 불길한 시작이었습니다. 그랜트는 전쟁을 이기는 순서에 그 것에 캠페인을 이끌어 남군의 주요 전투 군대들을 파괴시켜야 했습니다. 5월 7일 싸움에서 정지와 함께 역사의 과정이 단 한 명의 남자의 결정에 떨어질 때 그 드문 순간들 중 하나가 왔습니다. 리는 물러나 포토맥 군의 사령관들로서 그의 전임자들이 이 상황에 해낸 것을 하는 데 그랜트를 허용하였으며 그것은 후퇴였습니다. 그러나 그랜트는 진격을 선택했습니다.
[스포칠베이니아 코트 하우스 전투 시작]
스포칠베이니아로 리를 꺾었으나, 그곳에서 14일간의 치열한 스포칠베이니아 코트 하우스 전투가 시작되었습니다.
캠페인은 지속되었으나 그랜트의 이동을 고대한 리는 5월 8일 싸움이 다시 일어난 버지니아주 스포칠베이니아로 그를 꺾었습니다. 스포칠베이니아 코트 하우스 전투는 14일간 지속되었습니다.
['나는 싸울 것을 제안한다' 급파 작성]
'만약 전투가 전부의 여름을 끈다면 나는 이 선을 따라 싸울 것을 제안한다'는 유명한 급파를 써 자신의 끈질긴 전투 의지를 드러냈습니다.
5월 11일 그랜트는 '만약 전투가 전부의 여름을 끈다면 나는 이 선을 따라 싸울 것을 제안한다'는 유명한 급파를 썼습니다.
이 말들은 싸움에 관한 그의 태도를 요약하였고, 매우 다음 날인 5월 12일 리의 선들을 거의 깬 대량의 갑작스런 습격을 명령내렸습니다.
버지니아주 피터스버그에 도착한 그랜트는 첫째로 비접합의 도시를 포획해야 했으나 그의 부하 윌리엄 F. '볼디' 스미스의 지나치게 신중한 활동들 때문에 실패하였습니다. 다음 3일 동안 다수의 북군의 습격들이 발포되어 도시를 차지하려고 시도하였습니다. 그러나 전부 실패하였고 결국 6월 18일 리의 베테랑들이 도착하였습니다. 자신의 앞에서 완전한 유인 참호와 향한 그랜트는 다른 방법이 없으나 포위 공격으로 내려갈 수 있었습니다.
[크레이터 전투 실패]
앰브로스 번사이드 군단의 혁신적인 계획을 승인하여 광산을 폭발시켰으나, 아프리카계 미국인 군인들의 공격 지휘를 미드와 그랜트가 꺼려 마지막 순간에 계획이 변경되면서 크레이터 전투에서 남군이 승리했습니다.
그랜트는 막다름을 깨는 데 앰브로스 번사이드의 군단들에 의한 혁신적인 계획을 찬성하였습니다. 7월 30일 새벽 전에 그들은 남군의 업무 아래 광산을 폭발시켰습니다. 그러나 계획에서 공격을 지도하는 데 아프리카계 미국인 군인들의 분열을 허용하는 데 미드와 그랜트의 싫음을 연루한 마지막 분의 변화들의 이유로 폭행은 부족하게 조화되었고 활력이 부족하였습니다. 재편성하는 데 기회가 주어진 남군은 상황의 장점을 택하고 역습하여 크레이터 전투를 이겼고, 연방 정부는 전쟁을 끝내는 것을 서두르는 데 또다른 기회를 잃었습니다.
[총력전 전략의 성공]
총력전 전략이 결실을 맺어 셔먼이 애틀랜타를 점령하고 셰리든이 셰넌도어 계곡을 진격하며 북부인들에게 전쟁 승리가 확실해졌습니다.
9월 초순에 그랜트의 공동 전략의 노력들이 결국 열렸습니다. 처음에 셔먼은 애틀랜타를 차지하였습니다. 그러고 나서 그랜트는 얼리와 다루는 데 필립 셰리든 장군을 셰넌도어 계곡으로 급파하였습니다. 그 일은 전쟁이 승리한 것에 북부인들에게 명확하게 되었고, 링컨은 넓은 차이에 의해 재선되었습니다.
[셔먼의 '바다로 행진' 시작]
셔먼이 '바다로 행진'을 시작했고, 셰리든과 셔먼 모두 그랜트의 총력전 전략을 따라 적의 경제적 기반 시설을 파괴했습니다.
11월 후순에 셔먼은 자신의 '바다로 행진'을 시작하였습니다. 셰리든과 셔먼은 둘다 계곡의 경제적 시설들과 조지아주와 캐롤라이나의 큰 무리를 파괴시켜 그랜트의 총력전의 전략을 따라갔습니다.
1865
[애포매톡스 코트 하우스에서 리 장군 항복]
로버트 E. 리 장군으로부터 애포매톡스 코트 하우스에서 남군을 항복받았습니다. 이는 남북 전쟁을 사실상 종결시키는 결정적인 사건입니다.
1865년 4월의 시작에 그랜트의 끊임 없는 압력은 결국 버지니아주 리치먼드를 철수하는 데 리를 강요하였고, 9일간 후퇴 후에 리는 4월 9일 애포매톡스 코트 하우스에서 자신의 군대를 항복하였습니다. 거기서 그랜트는 군대 사이의 긴장을 풀고 전쟁 수행의 편들을 화해시키는 데 필요했던 남부의 자부심의 어떤 유사를 보존하는 데 많은 일을 한 관대한 용어를 마련하였습니다.
리의 항복 즉시 후에 그랜트는 자신의 거대한 옹호자 링컨 대통령의 장례식에서 관을 드는 사람으로서 지낸 슬픈 영예를 가졌습니다. 링컨은 실로 전투에서 대량의 막대한 손실 후에 '난 이 장군을 구할 수 없다. 그는 싸운다.'라고 인용하였습니다. 그것은 율리시스 S. 그랜트의 본질을 완전히 잡은 2개 문장의 서술적 묘사였습니다.
6월 2일 트랜스미시시피 부에서 커비 스미스가 자신의 군대를 항복할 때까지 소수의 활동들이 지속되었어도 몇 주 안에 남북 전쟁은 효과적으로 끝났습니다.
[스탠드 웨이티 장군 최종 항복]
인디언 준주에서 스탠드 웨이티 장군이 자신의 체로키족 군대를 북군에 항복하며 남군 전체의 최종 항복이 이루어졌습니다.
남부의 결국적 항복은 스탠드 웨이티 장군이 자신의 체로키족 군대를 북군의 중령 A. C. 매슈스에게 항복했을 때 인디언 준주에서 6월 23일에 일어났습니다. 마지막 남군의 급습선 CSS 셰넌도어는 잉글랜드 리버풀에서 11월까지 그 깃발을 내리지 않았습니다.
1866
전쟁 후에 미국 의회는 새롭게 창조된 육군의 장군 계급을 부여하였습니다. 그는 1866년 7월 25일 앤드루 존슨 대통령에 의해 그런 계급으로 임명되었습니다.
1868
아무 진지한 반대 없이 그는 1868년 5월 20일 시카고에서 열린 공화당 전당 대회에서 공화당 대통령 후보로 선택되었습니다.
1868년 총선에서 그는 총 5,716,082개의 투표 중 3,0012,833개의 다수 혹은 일반 투표의 53 퍼센트 가까이와 함께 이겼습니다.
1869
[재건 노력과 인권 법안 서명]
남부 흑인들의 권리 보호와 쿠 클럭스 클랜의 난폭한 전술 억압을 위해 투표권 흥행 및 클랜 지도자 구형 법안을 서명했습니다.
그랜트 행정부의 가장 떠들석한 것은 재건의 지속적인 진행이었습니다. 그랜트는 남부에서 주둔한 연방군들의 제한된 수에 견고하게 호의를 가졌습니다. 그는 남부 흑인들의 권리를 보호하고 쿠 클럭스 클랜의 난폭한 전술들을 억압하는 데 충분한 수를 허용하였으나 많은 이들이 정통 인구에서 의심을 품지 않았습니다. 1869년과 1871년 그랜트는 투표권을 흥행하고 클랜 지도자들을 구형하는 법안을 서명하였습니다.
그랜트는 군에서 퇴역한 후 미국의 18대 대통령이 되어 1869년 3월 4일부터 1877년 3월 3일까지 지냈습니다.
1870
[미국 법무부 설립 및 헌법 수정 제15조 비준]
미국 법무부와 법무국장 사무소가 설립되었으며, 투표권을 확립한 미국 헌법 수정 제15조가 비준되었습니다.
현재까지 남는 다수의 정부 기관들은 그랜트 행정부 동안에 설립되었습니다. 그 중 미국 법무부(1870년)와 법무국장 사무소(1870년)가 포함됩니다. 투표권을 설립한 미국 헌법 수정 제15조는 1870년 그의 첫 기간 동안 비준되었습니다.
그랜트는 미국 대법원의 판사로 윌리엄 스트롱(1870년)과 조지프 P. 브래들리(1870년)를 임명하였습니다.
1871
현재까지 남는 다수의 정부 기관들은 그랜트 행정부 동안에 설립되었습니다. 그 중 공무원 자문부(1871년)와 공중 위생국(1871년)이 포함됩니다. 공무원 자문부는 1873년 만기된 후 그랜트의 충실한 체스터 A. 아서 대통령에 의해 1883년 설립된 공무원 위원회의 역할 모델이 되었습니다. 오늘날 임시담당국으로 알려졌습니다.
[워싱턴 조약 체결]
국무장관 해밀턴 피시가 협상한 워싱턴 조약이 체결되어 미국과 영국 간의 다양한 이견, 특히 앨라배마주 청구에 관한 문제들을 진정시켰습니다.
외교 정세에서 그랜트 행정부의 거대한 성취는 1871년 그랜트의 국무장관 해밀턴 피시에 의해 협상된 워싱턴 조약이었습니다. 조약은 미국과 영국 사이에 양국 정부간 다양한 다른점들을 진정시키기 위해서였으나 주로 앨라배마주 청구에 관한 것들이었습니다.
1872
현재까지 남는 다수의 정부 기관들은 그랜트 행정부 동안에 설립되었습니다. 그 중 미국 우정청(1872년)이 포함됩니다.
1873
그랜트는 미국 대법원의 판사로 워드 헌트(1873년)를 임명하였습니다.
1874
그랜트는 미국 대법원의 대법관으로 모리슨 레믹 웨이트(1874년)를 임명하였습니다.
1876
국내 쪽에서 그랜트는 38번째 주 콜로라도주가 1876년 8월 1일 합중국으로 편입된 것으로 기억됩니다.
1877
[세계 여행 시작]
대통령 임기 후 줄리아 여사와 함께 2년간 세계 여행을 다니며 아시아, 아프리카, 중동을 방문한 최초의 전직 미국 대통령이 되었습니다.
자신의 2번째 임기 기간에 이어 그랜트와 줄리아 여사는 세계 여행을 다니면서 2년을 보냈습니다. 그는 여태까지 아시아, 아프리카와 중동을 방문하는 데 첫 전직 미국 대통령이었습니다.
그랜트는 1869년 3월 4일부터 1877년 3월 3일까지 미국의 18대 대통령으로 재임했으며, 이날 퇴임했습니다.
[대통령 선거 분쟁 진정 기여]
러더퍼드 B. 헤이스와 새뮤얼 J. 틸던 사이의 논쟁적인 대통령 선거 분쟁을 진정시키는 데 도움을 주었습니다.
그해 11월 그랜트는 러더퍼드 B. 헤이스와 새뮤얼 J. 틸던 사이에 논쟁적 대통령 선거 분쟁에 국가를 진정시키는 데 도움을 주었습니다. 그랜트는 헤이스의 호의에 선거를 진정시키는 데 도움을 준 연방 위원회를 임명하여 반대를 조용히 하는 데 도움을 주었습니다.
1879
[류큐 제도 병합 문제 중재]
메이지 천황 정부의 류큐 제도 병합 문제에 대해 일본의 주장이 강하다고 판단하여 일본의 호의에 따라 중재 결정을 내렸습니다.
1879년 일본의 메이지 천황 정부는 류큐 제도의 병합을 공고하였습니다. 청나라는 항의하였고 그랜트는 문제를 중재하는 데 초대되었습니다. 그는 일본이 섬들에 더욱 강한 주장을 보유하여 일본의 호의에 다스려지는 결정을 하였습니다.
[일본 천황과의 만남]
일본 천황으로부터 따뜻한 환영을 받았고, 일본 왕실 역사상 엄격히 금지되었던 천황과의 악수를 했습니다.
그랜트는 1879년 7월 일본 천황에 의해 따뜻하게 받아졌고, 일본 왕실의 역사상 엄격히 금지되었고 전혀 알려지지 않은 천황과 악수를 하였습니다.
1880
[대통령 후보 재도전 실패]
정계 복귀를 모색하며 공화당 대통령 후보 지명을 다시 추구했으나, 제임스 A. 가필드에게 밀려 실패했습니다.
1880년 그랜트는 정치로 복귀를 응시하여 한번 더 공화당 후보 지명을 추구하였습니다. 하지만 후보 지명자로서 제임스 A. 가필드에게 대신 간 그해 공화당 전당 대회에서 충분한 지원을 얻는 데 실패하였습니다.
1881
그랜트는 월스트리트에서 거대한 성공을 즐기고 있던 자신의 아들 벅 (율리시스 2세)에 의해 암시되면서 1881년 동아 퍼디낸드 워드와 투자 은행 파트너십으로 자신의 거의 전부의 재정적 자산을 놓았습니다. 워드는 '협력 금융의 어린 나폴레옹'으로 알려졌습니다.
1884
[사기 피해 및 암 진단]
동업자 퍼디낸드 워드에게 사기를 당해 '그랜트 앤드 워드' 회사가 파산하고 거의 빈곤 상태에 빠졌으며, 동시에 두경부암 진단을 받았습니다.
이 경우에서 워드는 1884년 그랜트에게 사기를 치고, '그랜트 앤드 워드'로 알려진 회사를 파산시키고 달아났습니다. 그랜트는 동시에 자신이 두경부암이 걸린 것을 알아내기도 하였습니다. 그랜트와 그의 가족은 거의 빈곤하게 남겨졌습니다.
1885
[회고록 집필 및 완성]
병든 몸으로 자신의 회고록을 집필하여 사망 며칠 전에 마침내 완성했습니다. 이 회고록은 문학적 걸작으로 평가받으며 가족에게 큰 수입을 안겨주었습니다.
이제 종말에 병이 들고 자신의 거대한 개인적 투쟁에서 그랜트는 자신의 회고록을 끝내는 데 싸웠습니다. 고통에 휩싸이고 끝에 말을 할 수 없었어도 그는 승리를 하여 자신의 사망의 겨우 며칠 전에 그것들을 끝냈습니다. 회고록은 성공하여 300,000권 이상의 사본을 팔아 그랜트의 가족은 4십 5만 달러를 벌었습니다. 마크 트웨인은 회고록을 '율리우스 카이사르의 회고록 이래 그런 종류의 가장 놀라운 일'로 감수하였습니다. 그것들은 여태까지 쓰여진 가장 좋은 회고록들 중에 넓게 여겨졌습니다.
1885년 7월 23일 목요일 아침 8시 6분 그랜트는 뉴욕주 새러토가군 마운트맥그레거에서 63세의 나이에 후두암으로 사망하였습니다. 그는 뉴욕에 있는 아메리카에서 가장 큰 대영묘인 그랜트의 묘에 부인의 시신 옆에 안장되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