원소 (후한)
군웅, 군벌, 정치가, 명문가
최근 수정 시각 : 2025-10-21- 17:19:21
후한 말 명문가 출신으로 청류파 사상가이자 정치가로 활동했습니다. 십상시 주살을 주도했으나 동탁의 개입으로 실패한 뒤, 기주 일대에서 군벌로 성장하여 하북 4주를 통일하며 최강 세력으로 부상했습니다. 그러나 조조와의 관도대전에서 대패한 후 병사했고, 그의 사후 원씨 세력은 분열되어 조조에게 멸망했습니다. 외모가 수려하고 관대했지만, 우유부단함과 후계자 문제로 비판받기도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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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장군 하진의 속관으로 벼슬 시작]
명문가의 사생아 출신으로 젊어서 청류파 사상가로 명성을 떨치던 원소는 6년간 벼슬을 피하다가, 황건적의 난을 계기로 더 이상 조정의 혼란을 묵과할 수 없다는 정의감으로 대장군 하진의 속관으로 벼슬을 시작했습니다.
원소는 고아가 된 일을 추감하여 6년의 상을 치르고 벼슬을 피하며 장막, 하옹, 조조 등 많은 선비들과 사귀었습니다. 당시 후한의 정치적 부패의 요인이었던 환관들의 전횡을 비판하여 많은 추종자들을 얻으며 청류파의 중심에 서게 되었습니다. 환관들의 미움을 받았으나, 184년경 대장군 하진의 속관으로 다시 벼슬을 시작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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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십상시 주살 쿠데타 모의 실패]
시어사로 승진했으나 종제 원술과의 불화로 무관직으로 전임한 원소는 갑훈, 유우와 함께 금병을 장악하고 쿠데타를 일으켜 십상시 주살을 도모했으나 갑훈이 전출되면서 실행에 옮기지 못했습니다.
원소는 학행이 우수하다는 평가를 받아 시어사로 승진하였으나, 사이가 나빴던 종제 원술이 상서대에 있었으므로 사직하고 무관직으로 전임해 호분중랑장이 되었습니다. 186년 갑훈, 유우와 같이 금병을 장악하고 쿠데타를 일으켜 십상시 주살을 도모하였으나, 갑훈이 경조윤으로 전출되어 실행에 옮기지 못하였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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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진에게 환관 주살 계획 제안]
영제가 붕어하고 대장군 하진이 집권하자, 원소는 하진에게 접근하여 환관을 주살할 계획을 세워 바쳤습니다. 하진은 처음엔 받아들였으나 하태후의 반대와 자신의 이해관계로 쉽게 포기했습니다.
189년, 영제가 붕어하고 대장군 하진이 집권하여 환관들과 대립하자 원소는 하진에게 접근하여 환관을 주살할 계획을 세워 하진에게 바쳤습니다. 하진은 처음엔 원소의 계책을 받아들였으나 누이동생 하태후의 반대와 설득에 마음이 돌아선데다가 그 스스로가 환관과 결탁하여 출세한 것이었으므로 쉽게 포기하고 말았습니다.
[지방 장수 소집 및 맹진 방화 조작]
원소는 하진을 설득하여 왕광, 정원, 교모, 동탁 등 지방 장수들을 수도 근교로 소집하고, 흑산적으로 위장하여 맹진을 불태우는 등 위협을 가했습니다. 이로 인해 친 환관파 관료들이 십상시 주살을 진언했으나 하태후는 듣지 않았습니다.
원소는 재차 왕광, 정원, 교모, 동탁 등 지방의 장수들을 수도 근교로 소집하여 하태후를 비롯한 환관들의 지지세력을 협박하는 계책을 세웠고 다시 하진을 설득하여 왕광에게 강노수 5백을 이끌고 낙양으로 오도록 하는 한편 교모는 성고에 주둔하게 하였으며, 동탁은 관중으로 오도록 하고, 정원을 시켜 흑산적으로 위장하여 맹진을 불태운 다음 흑산적 소탕을 구실로 삼도록 했습니다. 원소의 협박이 거듭 이어지고 맹진의 불빛이 낙양에까지 비추게 되자 친 환관파 관료들은 모두가 두려워 떨며 십상시를 주살하라고 진언했으나 하태후만이 이를 듣지 않았습니다.
[하진의 죽음과 십상시의 난]
하진은 원소를 사례교위에 임명하고 황실 근위병을 원소의 심복으로 교체하는 등 권한을 부여했으나, 십상시 처형은 미뤘습니다. 결국 하진은 환관들의 반격에 살해당했고, 이를 들은 원소는 황궁을 공격하여 늙고 젊은 환관들을 가리지 않고 2천 명에 이르는 환관들을 죽였습니다.
원소는 하진을 만나 거듭 설득했고 이에 하진은 원소를 관리의 감찰과 낙양의 치안을 담당하는 사례교위에 임명하고 가절을 내리는 등 막대한 권력을 부여합니다. 이에 원소는 황실의 근위병들을 모두 자신의 심복으로 교체하며 태후와 환관들을 낱낱히 감시했는데 마침내 공포에 질린 하태후는 십상시 이하 고위직 환관들을 모두 파직시키자 십상시들은 모두 하진에게 가서 사죄하며 오직 하진의 조치에 따르겠다며 애원합니다. 원소는 하진에게 십상시들을 모두 처형할 것을 세 번이나 간하였으나 하진은 모두 듣지 않았고 십상시들에게 고향으로 돌아갈 것을 명령했습니다. 원소는 하진의 명령을 위조하여 모든 주군에 서찰을 보내 고위 환관의 친속들을 잡아들이고 심문토록 했으나 이미 때는 늦어 하진은 환관들의 반격에 살해되고 맙니다.(189년 9월 22일) 이를 전해들은 원소는 불같이 진노해 황급히 사병 백 명을 이끌고 수도를 장악하기 위해 장양 내각에서 임명한 친 환관파 관료들을 공격해 살해했으며 하진의 사망으로 인한 병사와 관료들의 혼란을 강경하게 수습했습니다. 또한 수습한 병사들을 이끌고 황궁을 공격하여 전투를 벌인 끝에 마침내 황궁을 점령했으며 붙잡은 환관들을 노소를 가리지 않고 모두 죽였습니다. 이때 얼굴에 수염이 없거나 어깨가 넓거나 목소리가 가늘거나 피부가 희고 곱다는 이유로 억울하게 희생된 환관들을 포함해 죽은 환관은 2천 명에 이르렀다고 합니다.(십상시의 난)
[동탁의 정권 장악과 하태후 살해]
십상시의 난으로 혼란한 틈을 타 동탁이 낙양에 입성하여 황제를 확보하고 정권을 장악했습니다. 원소는 동탁의 소제 폐위 시도에 반발하며 낙양을 떠났으나, 동탁은 원소를 죽이려다 회유하여 발해태수로 임명했습니다. 이후 동탁은 하태후를 살해했습니다.
원소는 정권을 잡는 데에는 실패하였습니다. 혼란을 틈타 동탁이 낙양에 군사들을 이끌고 들어와서 황제를 확보하고 정권을 장악했기 때문입니다. 당시 황제였던 후한 소제는 하태후라는 후견인이 존재하였으며 이미 나이가 많아 동탁이 권력을 휘두르는 데 방해가 되었으므로 동탁은 황제의 폐위를 획책하였는데 이로 인해 원소는 동탁과 심하게 반목하였습니다. 후한서에 의하면 이때 원소는 폐위를 획책하는 동탁을 준엄하게 꾸짖었으나 동탁은 칼을 어루만지며 '내가 하고자 하는데 안 되는 게 무엇이냐. 감히 애송이 녀석이 내가 하는 일을 막고자 하는가!'라고 말하며 원소를 협박하였습니다. 이에 원소가 '천하에 힘있는 자가 어찌 동공 뿐이겠습니까!'라고 분연히 말하며 칼을 뽑아든 채로 인사하고 나가버려 좌중을 놀라게 했습니다. 곧바로 원소는 인수(印綬)를 낙양의 성문에 걸어놓고는 그대로 낙양을 떠나 발해로 갔습니다. 동탁은 본래 원소를 죽이려 하였으나, 조정에 원소를 지지하는 사람이 많자 마침내 회유책을 써서 원소를 발해태수로 임명하였습니다. 동탁은 하태후를 죽였습니다.(189년 9월 30일)
190
[반동탁연합군의 맹주 추대와 붕괴]
원소는 반동탁 연합군을 결성하여 맹주로 추대되었으나, 유우를 황제로 옹립하려던 시도가 거절되고 동탁이 소제를 살해하며 장안으로 천도하는 등 혼란이 가중되자 구심점을 잃은 연합군은 붕괴되었습니다.
190년, 원소는 반동탁 연합군을 결성해 맹주로 추대되었습니다. 그 해 동탁이 낙양을 불태우고 장안으로 천도했으며(190년 4월 9일), 유폐되어 있던 홍농왕(소제)을 죽였습니다(190년 3월 26일). 원소는 이에 대항하여 유우를 황제로 옹립하려고 계획하였으나, 유우는 이를 완강히 거절하여 무산되었습니다. 결국 구심점을 잃은 연합군은 동탁과 자웅을 가리지 못한 채 붕괴되고 말았습니다. 동탁은 제후를 진정시키기 위하여 음수, 한융, 호모반, 오수, 왕괴 등을 각지에 사자로 보냈습니다. 원소는 하내태수 왕광에게 음수와 오수를 죽이게 하였습니다.
191
[한복에게 기주목 자리 양도받아 세력 확장]
공손찬의 기주 침공을 조장한 원소는 한복을 격파하고 기주 내 반란 세력을 진압하며 위세를 얻었습니다. 이를 바탕으로 한복을 설득 및 협박하여 기주목의 자리를 양도받아 자신의 세력을 확장했습니다.
191년, 공손찬이 동탁 토벌을 명분으로 한복이 지배하는 기주를 침공해 한복을 격파했습니다. 이때 원소는 기주목이었던 한복에게 부득이하게 종속되어 견제, 감시를 받는 입장에 있었으나 배후에서 공손찬의 기주 공격을 조장한 흑막의 장본인이기도 했습니다. 한복이 패배하여 지배력이 약해진 틈을 타 영내에선 반란이 일어났고, 흑산적 장연을 비롯해 어부라, 장양 등의 군벌이 기주를 넘보았는데 원소는 이들을 모두 격파하였으며 패퇴한 장양, 어부라는 원소에게 항복했습니다. 이로 인해 기주 내에서 위세를 얻은 원소는 이를 바탕으로 한복을 설득하며 또한 협박했습니다. 겁에 질린 한복은 결국 원소에게 기주목의 자리를 양도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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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손찬과의 전투에서 승리하며 세력 공고화]
공손찬은 원소에게 반발하여 기주를 공격했으나, 원소는 반하와 계교 전투에서 공손찬을 대파하며 하북 전체를 흔들던 공손찬의 위세를 꺾고 하북의 강력한 세력으로 자리매김했습니다. 이때 원소는 퇴각하던 공손찬 기병대에 포위되었으나 용맹하게 맞서 위기를 극복했습니다.
원소가 한복을 협박하여 기주를 빼앗는 데 이용당한 셈이 된 공손찬은 원소와 대립하고 있던 사촌동생 공손월을 파견하여 원술과 우호관계를 맺었습니다. 원술은 손견과 공손월을 파견해 원소의 간접적인 세력권 내에 있던 양성을 공격하였으나 오히려 패배했을 뿐만 아니라 공손월은 날아온 화살에 맞아 전사했습니다. 이에 공손찬은 더욱 대노하여 원소를 칠 것을 다짐하고 반하에 군대를 주둔시켰습니다. 당시 공손찬은 하북에서 가장 강력한 세력을 형성한 군벌이었으므로 원소는 직접 대결을 피하고 발해태수의 직위를 공손찬의 종제 공손범에게 양도하면서 공손찬을 회유하려 하였으나, 공손찬은 청주, 서주 일대까지 세력을 확대하여 더욱 강성해졌고, 마침내 기주를 공격했습니다(192년 1월). 이때 공손찬의 무시무시한 위세에 하북 전체가 흔들렸으며 기주의 수많은 성읍들이 공손찬에게 투항하였다고 합니다. 이를 좌시할 수 없었던 원소는 마침내 직접 군대를 거느리고 나와 공손찬과 일전을 벌입니다. 당시 막 출범한 신생세력에 지나지 않았던 원소는 공손찬에 비해 군대의 수와 장비, 훈련도 등 여러 면에서 압도적으로 불리하였으나 반하, 계교에서 거듭 벌어진 회전에서 공손찬을 크게 격파했습니다. 이때 공손찬의 진형이 무너지자 승리를 확신한 원소가 방심하여 보병 수십 명만 이끌고 공손찬이 패퇴하는 것을 건너편에서 지켜보다가 퇴각하던 공손찬 휘하의 기병대 수천 명에게 포위되고 말았는데, 군사 전풍이 원소를 구해 담 사이에 피난시키려고 하자 모자를 벗어 집어던지며 "대장부라면 응당 적에게 돌진하여 죽는 것이 마땅하거늘, 어찌 담장 사이로 몸을 숨긴단 말인가!"라고 말하며 나아가 싸워 이에 모든 병사들이 분발했습니다. 공손찬의 병사들은 적의 병력이 너무 적었기 때문에 이들의 지휘관이 원소일 것이라고 생각지 못하였고, 의외로 강한 저항에 부딪히자 기가 눌려 퇴각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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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흑산적 토벌과 업 수복]
공손찬과 화친을 맺은 직후 흑산적 총수 장연이 원소의 근거지인 업을 습격했습니다. 이에 원소는 직접 군을 이끌고 흑산적을 격파하고 업을 수복했으며, 이후 지속적인 교전으로 장연 세력을 몰락시키며 기주 내 안정적인 지배력을 확립했습니다.
공손찬은 비록 계교 전투에서 대패하였으나 이후에도 거듭 군사를 일으켜 원소를 공격하였습니다. 전투는 여러 곳에서 한동안 계속되었는데, 마침내 원소와 공손찬은 평원군 일대에서 다시 만나 회전을 벌였고, 여기서 공손찬은 또다시 원소에게 대패하였습니다. 다급해진 공손찬은 193년 초에 원소와 화친을 맺었습니다. 초평 4년(193년), 흑산적의 총수 장연은 원소와 공손찬이 싸우는 틈을 타 원소의 근거지인 업을 습격하여 위군태수 율성을 죽였습니다. 이때 원소군의 수뇌부는 공손찬을 격파하고 화친을 맺어 박락진에서 전쟁이 끝난 것을 축하하는 연회를 열고 있었는데, 업이 함락되었다는 보고를 받자 자리에 있던 사람들은 모두 경악하였고 혼란에 빠졌으나 원소는 평소의 모습을 전혀 잃지 않고 태연자약하게 행동하였습니다. 혼란을 수습한 원소는 업으로 진격하였고, 창암곡에서 흑산적 두목 우독과 장안에서 임명한 기주목 호수를 격파하고 1만 명을 참하였으며, 녹장산에서 좌자장팔의 군대를 전멸시켰습니다. 또한 다시 청우각, 이대목, 황룡, 좌교, 유석, 우저근 등을 공격하여 대파하고 수만 명의 수급을 얻었습니다. 업은 3개월 만에 수복되었으며, 이후 흑산적과 교전을 거듭하여 이듬해에는 상산에서 장연까지 격파하였습니다. 장연은 상산전투 이후에도 원소의 집요한 군사, 외교적인 공격을 받아 점차 몰락한 것으로 보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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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손찬 세력 약화 및 고립]
과격하고 잔인한 성품으로 신망을 잃은 공손찬을 유우의 아들 유화를 앞세워 공세, 북방 기마민족들과 연합하여 공손찬을 공격했습니다. 포구 전투에서 공손찬군을 참패시켜 수만 명의 군사를 잃게 하고, 공손찬을 역경의 요새로 고립시켰습니다.
공손찬은 화친을 맺고 후퇴하였으나 장연의 공격으로 원소가 위기에 몰리자 곧 이를 파기하고 다시 원소를 공격하였습니다. 하지만 공손찬은 이 무렵부터 평소의 과격하고 잔인한 성품이 더욱 두드러지고 명망 높은 황족 유우를 죽인 일로 인해 신망을 완전히 잃었으며 내부 문제에 시달렸으므로 더 이상 대대적인 공세를 취하지 못하였습니다. 장연과의 싸움을 끝낸 원소는 유우의 아들 유화를 앞세워 공손찬에게 공세를 펼치기 시작하였는데, 공손찬의 악정에 시달리던 백성들은 열광적으로 이를 맞이하였습니다. 또한 원소는 오환, 선비, 흉노를 비롯한 북방의 기마민족들에게 우호적인 자세로 유화책을 펼쳤고, 평소 공손찬의 강경책에 시달려 오던 이들도 원소에게 적극적으로 호응하여 공손찬을 공격했습니다. 흥평 2년(195년), 포구에서 원소군과 전투를 벌인 공손찬은 참패하여 수만 명의 군사를 잃었고, 각지의 반란으로 인해 그 위세가 극도로 약해져 몰락하기 시작했습니다. 이후 공손찬은 역경에 요새를 짓고 수비에 전념하였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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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후계자 선정 문제와 파벌 형성]
원소는 장남 원담의 교만한 성격 때문에 후계자 선정에 고심하다가, 총애하던 막내 원상을 지지하는 후처 유부인의 영향으로 원상을 후계자로 결정하고 원담을 폐출시켜 청주 도독으로 내보냈습니다. 이는 원소 사후 원씨 일족이 내분에 빠지는 원인이 됩니다.
원소의 장남 원담은 사치스럽고 교만한 성격이었기 때문에 원소는 이 무렵 후계자 선정에 있어서도 고심하고 있었습니다. 원소는 막내아들 원상의 용모와 재능을 아꼈으나 원상은 나이가 너무 어려 후계자로 삼기에 문제가 있었습니다. 그러나 원소의 총애를 받던 후처 유부인은 미소년이었던 원상을 심하게 편애하여 그를 강하게 지지했으며 원소 또한 원상을 총애하고 있었으므로, 마침내 원상이 장성하면 후계자로 삼기로 결심하고 원담을 형의 양자로 입적시켜 자신의 호적에서 폐출시켰으며 청주의 도독으로 삼아 내보냈습니다. 저수는 이에 대해 간언하지만 원소는 오히려 "다른 자식들도 각 주로 내보내 그 역량을 살펴보겠다"라고 말하며 무시했습니다. 이때 원소는 원상이 장성하여 후계자로서의 경력과 권위를 인정받기 이전에 자신이 죽음으로써 후계문제에 혼선이 생길 가능성 따위는 전혀 염려하지 않았던 듯하지만, 결과적으로 원소가 병으로 걱정 속에 사망(憂死)함에 따라 나이가 어렸던 원상은 그 지지기반이 극히 취약한 상태에서 집권하게 되었으며, 원담 또한 청주의 도독으로서 독단적인 행동이 가능한 위치였으므로 이는 원씨 일족이 내분에 빠져 멸망하는 원인이 됩니다. 또한 이 무렵부터 원소는 정권의 2인자였던 저수와 별가 전풍을 대표로 한 기주의 호족, 명사 계층과의 대립이 심해졌던 것으로 보입니다. 이것은 사적에 건안 원년(196년) 경을 시작으로 원소가 저수와 전풍의 간언을 거듭 무시하는 부분에서 나타나는데, 사료의 부족으로 자세한 전모를 파악하는 것은 불가능하나 확실한 것은 이 무렵부터 원소 정권 내부에서 저수, 전풍으로 대표되던 기주계 인사들이 소외되기 시작하여 급기야는 2인자였던 저수가 탄핵까지 받고 점차 실각되었으며 이와 반대로 곽도, 순우경을 위시한 중원 출신의 관료계 인사들이 부각되기 시작한 것입니다. 실제로 관도전투 무렵 원소군의 주요 간부들은 심배 정도를 제외하면 거의 전부가 하남출신의 인물들이며 이를 봤을 때 원소와 저수의 대립은 지역적, 정치적인 고려와도 무관하지 않습니다. 원소 진영의 파벌 싸움은 일반적으로 알려져있다시피 간부들의 거듭된 다툼 속에서 우유부단한 원소가 방관자적 위치를 취한 것이 아니라, 오히려 원소가 파벌 싸움을 적극적으로 조장, 개입하며 자신의 반대파를 배제한 것에 가깝습니다. 이런 점에서 저수와 전풍(특히 전풍)은 조조의 라이벌이었던 원소의 어리석음을 강조하기 위해 후세에 의도적으로 신격화되었을 가능성도 있습니다.
[헌제 영입 기회 상실과 조조의 부상]
동탁 사후 혼란 속에서 헌제가 장안을 탈출했을 때, 원소는 참모 곽도의 진언에도 불구하고 헌제 영입 기회를 놓쳤습니다. 결국 헌제는 조조의 보호를 받게 되었고, 조조는 황실의 권위로 명분을 얻어 세력을 키우기 시작했습니다. 원소는 뒤늦게 후회했지만 이미 조조에게 명분적 우위를 내어준 뒤였습니다.
초평 3년(192년), 동탁이 여포에게 살해된 이후, 동탁의 잔당 이각 등이 장안에 내습하여 조정은 일대 혼란에 빠지게 됩니다. 흥평 2년(195년), 마침내 헌제는 이각, 곽사에게서 벗어나고자 장안을 탈출하여 낙양으로 향합니다. 이때 참모 곽도는 황제를 영입하여 우리들의 세력권 내에 있는 마을로 천도를 해야 한다고 진언했으나, 원소는 동탁이 임명한 헌제의 정통성을 인정할 수 없었던 데다, 황실은 이미 쇠락하여 다시 일어설 수 없다 여겼으므로 이를 받아들이지 않았습니다. 이듬해 헌제는 조조에게 보호받는 처지가 되었는데, 그때까지 평범한 군벌 수준에 지나지 않았으며 심지어, 원소계 군벌로까지 분류되던 조조는 황실의 권위와 명망을 되살려내는 데 성공하며 명분을 얻었고, 그때까지 원소가 누려 왔던 명분적 우위를 뒤집어 버렸습니다. 본디 군웅할거 초반의 조조는 식견과 안목에 있어서도 별다른 능력을 보이지 못했으며, 원소의 도움을 받고서야 군벌로서 어느 정도 성장해 나갈 수 있었습니다. 조조가 황제를 보호함으로써 크게 두각을 나타내기 시작하자, 그때까지 조조를 다소 얕보고 있었던 원소는 그제서야 크게 후회했다고 합니다.
[조조에게 대장군 지위 양보받음]
조조가 스스로 대장군에 오르고 원소를 실권 없는 태위에 임명하자, 원소는 이를 거부하며 조조를 꾸짖었습니다. 당시 세력면에서 원소의 상대가 되지 않던 조조는 두려워 대장군 지위를 원소에게 양보했습니다. 이 알력 싸움은 원소의 승리로 끝났습니다.
원소는 헌제에게 상소문을 써 바침으로 일단 황제의 권위에 물러서는 입장을 보였으나, 이에 고무된 조조가 스스로 대장군에 오르고 원소를 실권이 없는 직위인 태위에 임명하자 이를 사양하고 받지 않았습니다. 또한 조조에 대해 '수차례나 죽을 지경에 놓인 것을 그때마다 번번이 구해주었더니 이제는 황제를 끼고서 나에게 호령하는구나.'라고 말하며 분노했다고 합니다. 비록 명분적 우위를 차지했으나 당시 세력면에서 원소의 상대가 되지 않던 조조는 이에 크게 두려워하며 대장군 지위를 포기하고 원소에게 양보했습니다. 이렇듯 대장군 취임을 놓고 벌어진 원소와 조조의 알력싸움은 원소의 승리라는 형태로 끝이 났고, 헌제라는 새로운 명분 아래의 1인자도 원소가 차지하는 듯 보였지만 양자의 충돌은 이미 시간 문제가 되어 있었습니다.
199
[공손찬 멸망과 하북 4주 통일]
원소는 공손찬을 멸망시키고 그의 영토를 병합하여 기주, 유주, 병주, 청주 등 하북 4주에 이르는 광대한 세력을 구축했습니다. 그는 원담을 청주자사, 원희를 유주자사, 조카 고간을 병주목으로 삼아 통치하게 했습니다.
199년, 공손찬을 공격해 멸망시키고 그 영토를 병합했습니다. 이로써 그의 세력은 기주, 유주, 병주, 청주 등 4주에 미치게 됩니다. 원소는 원담을 청주자사, 원희를 유주자사, 조카 고간은 병주목으로 삼아 각각 통치하게 했습니다. (이들은 원소 생전에는 복종하였으나, 원소 사후 어리고 지지기반이 약한 원상이 집권하여 중앙의 감시가 소홀해지자 제각기 독자적으로 행동하여 멸망을 초래하게 됩니다. 비록 진수의 삼국지는 원담, 원희, 고간의 임명을 199년으로 서술했지만 원담은 이미 193년부터 청주에 부임한데다가, 196년에 정식으로 자사가 된 것으로 보이기에 엄밀히 말해 삼국지의 기록은 틀린 것입니다. 고간과 원희의 경우도 임지에 부임한 해가 199년인지 알 수 없으며, 이는 아마 199년까지의 일을 축약해 적은 것으로 생각됩니다.)
200
[유비 동맹의 기회 상실]
유비가 조조를 배반하고 원소와 동맹을 맺어 조조의 배후를 칠 호기가 찾아왔습니다. 하지만 원소는 아들의 병을 이유로 출병을 거절하며 기회를 놓쳤고, 결국 유비는 조조에게 패배하여 원소에게 도망쳐 왔습니다.
200년, 유비가 조조를 배반하고 서주를 점거해 원소와 동맹을 맺은 일은 모처럼 만나기 힘든 호기였으나 원소는 결정적인 순간에 결단을 내리지 못했습니다. 조조가 유비를 공격하고 있을 때, 참모 전풍이 조조의 배후를 찌르도록 진언했지만 자식의 병을 이유로 허가하지 않아 기회를 놓치고 말았습니다. 결국 유비는 패배하여 원소에게로 도망쳐 왔습니다. (이때 원소가 아들의 병을 이유로 출병을 거절한 사건은 한 세력의 수장으로서 너무나 비상식적인 일이었을뿐더러, 일가가 몰살당하거나 포로로 잡혔을 때도 전혀 아랑곳하지 않던 이전 원소의 행동과도 반대되는 태도였기 때문에 단지 핑계였을 뿐이라고 보는 견해도 많습니다. 이 직전 원술이 원소에게 의탁하려던 사건이 있었습니다. 원소는 공식적으론 원술의 칭제를 비난하며 역적으로 규정하고 있었으나 한편으론 은밀히 원술이 망명해 오는 것을 옳게 여겼다는 보이는 기록도 여러 곳에서 보이는데, 원술 진영과 몇 차례의 연락이 오갔던 것은 분명해 보이고 칭제를 고려하는 등 이해에 따라서는 원술을 받아들일 생각도 있었던 모양입니다. 유비는 조조에게서 파견되어 이를 저지하며 원술을 방해했었는데, 원술이 죽은 직후 조조에게 등을 돌려 원소와 손을 잡았습니다. 원소로서는 유비를 전적으로 신용하기 어려웠을 것입니다. 또한 아들의 병을 이유로 출병하지 않은 사건은 위서 원소전에만 기록된 일로, 무제기와 곽가전에서는 모두 '원소는 의심이 많으므로 서둘러 군을 움직이지 않을 것'이라고 보고 있습니다.)
[관도대전의 참패]
조조와의 관도대전에서 국지전 승리 후 관도를 포위했지만, 참모 허유의 배신으로 오소의 보급기지를 조조에게 빼앗겼습니다. 또한 장합과 고람이 조조에게 투항하면서 원소군은 혼란에 빠져 붕괴, 관도대전에서 참패하고 말았습니다.
200년, 본격적인 원소의 남진이 시작되었습니다. 원소군은 국지전에서 안량과 문추와 같은 유력 지휘관이 전사하는 등 손실을 입었지만, 사실 전황 자체는 순조로운 원소군의 우위로 진행되었으며 철수를 거듭하던 조조는 군세를 모아 관도에서 원소를 공격했으나, 대패하여 굳게 진영을 지킵니다. 원소는 관도를 포위공격했으나 조조군 역시 필사적으로 저항했으므로 3개월 가까이 함락시키지 못했습니다. 하지만 조조가 관도에서 고립되고 전황이 조조에게 점점 불리하게 되자, 원소의 선동공작이 효과를 거두어 조조의 세력권 내 여러 곳에서 원소에 호응한 대규모 반란이 일어났는데, 특히 예주의 경우는 단지 양안군만을 제외한 모든 군현이 원소에게 호응해 반기를 들 정도였습니다. 안팎으로 궁지에 몰린 조조는 패배직전의 위기에 빠졌습니다. 하지만 이때 반전이 일어났습니다. 당시 원소의 참모 허유는 자신의 비리가 드러난 것이 두려워 원소를 배신하며 조조에게 원소군 군량고의 위치 등의 기밀 정보들을 가르쳐 줬는데. 그 결과 오소의 보급기지는 조조에게 함락당했으며 그 책임 소재를 두고 간부들 사이에 충돌이 일어난 끝에 장합과 고람이 원소를 공격하고 진영을 불태워버린 뒤 조조에게 투항했는데, 이로 인해 원소군은 대혼란에 빠졌으며 총대장 원소의 생사조차 불분명해졌으므로 사실상 군대는 완전히 붕괴되어 어이없이 괴멸당하고 말았습니다.
201
[관도대전 이후 반란 진압]
관도대전 참패 이후, 원소의 영지 내에서 대규모 반란이 일어났습니다. 원소는 자신이 살아있음을 알린 후 패잔병들을 수습하여 반란을 일으킨 군현들을 모두 공격해 평정했습니다.
이로 인해 원소의 영지 내에서는 대규모의 반란이 일어났으나, 원소는 자신이 살아있음을 알린 후 패잔병들을 수습하여 반란을 일으킨 군현들을 모두 공격해 평정하였습니다.(201년 4월)
202
[관도대전 패배 후 사망]
관도대전에서 패배한 후 병을 얻었던 원소는 202년 6월 28일, 걱정 속에 사망했습니다. 그의 죽음은 하북 백성들에게 큰 슬픔을 안겨주었습니다.
비록 관도에서 패하긴 했지만 원소의 세력은 여전히 조조를 웃돌고 있었습니다. 하지만 원소는 관도에서 패배한 이후 병을 얻었고, 건안 7년(202년) 5월 경술일(음력)에 걱정 속에 죽었습니다. (삼국지 원소전: 自軍敗後發病, 七年, 憂死. 삼국지 무제기: 紹自軍破後, 發病歐血, 夏五月死. 후한서 원소전: 自軍敗後發病, 七年夏, 薨. 후한서 원소전 주석 위지왈: 「紹自軍破後, 發病歐血死.」 후한서 효헌제기: 七年 夏 五月 庚戌 袁紹薨.) 원소는 사람됨이 관아하였으며 올곧고 바른 정치를 펼쳐 존경을 받았고, 그에게 불만을 내는 목소리가 없을 정도였다고 합니다. 원소가 죽자 지체높은 사대부에서 시골의 비천한 아낙네에 이르기까지 하북의 모든 계층의 사람들이 그 죽음을 비통해하여 온 거리와 저자에 통곡이 끊이지 않았고, 간혹 원소의 죽음을 두고 부모가 죽은 것처럼 상을 치르는 자도 있었습니다.
204
[원소 세력의 와해]
원소 사후, 나이가 어리고 기반이 약했던 원상은 장남 원담의 반발과 고간의 배신으로 내분에 휩싸였습니다. 결국 204년 조조에 의해 업이 함락되면서 원소의 세력은 사실상 와해되었습니다.
비록 원소가 생전 원상을 후계자로 지목하였으나 원소가 죽을 때 나이가 어렸던 원상의 기반은 극히 취약했습니다. 원담은 노골적으로 원상을 거역하며 대립했으며, 결국 실패하게 되자 조조에게 항복하여 조조와 같이 원상을 공격했습니다. 또한 고간 역시 표면적으로는 원상을 따랐으나 한편으론 은밀히 자립을 획책하여 원상이 조조와 원담에게 협공당하는 위기에 빠지자 원상을 배신했습니다. 결국 건안 9년(204년)에 조조에 의해 업이 함락되면서 원소의 세력은 사실상 와해되고 맙니다.
205
원담은 업이 함락된 이후 조조에게 반기를 들었다가 패하여 죽었습니다. 삼국지연의에서는 조홍에게 살해되는 것으로 묘사됩니다. (205년 1월)
207
원상은 각지를 망명하며 재기를 도모하지만 최후엔 요동에서 공손강에게 살해당하여 그 수급이 조조에게 보내집니다. (207년 9월, 혹은 10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