왕평 (삼국지)
장수, 군인, 삼국시대 인물
최근 수정 시각 : 2025-10-21- 17:18:53
촉한의 명장 왕평은 원래 조조 휘하에서 유비에게 귀순했습니다. 그는 제갈량의 북벌에서 가정 전투를 비롯해 여러 전투에서 뛰어난 전술과 침착함을 보여주며 군사를 지켰습니다. 제갈량 사후 위연의 모반을 진압하고, 한중 방어전에서 조상의 대군을 막아내는 등 탁월한 전략가이자 충성스러운 무장으로 촉한의 안녕에 크게 기여했습니다.
219
원래 조조를 섬기던 왕평은 219년 한중 전투에서 유비에게 투항하여 촉한의 장수가 되었고, 이후 촉한에서 중요한 역할을 수행했다.
228
[가정 전투에서의 활약과 승진]
제갈량의 북벌 중 가정 전투에서 마속의 독단적인 행동에 반대했으나 받아들여지지 않았다. 마속이 장합에게 패배한 혼란 속에서도 왕평은 휘하 병사들을 수습하고 침착하게 적의 접근을 막아냈으며, 이 공로로 제갈량에게 치하받아 참군, 토구장군으로 승진했다.
228년 제갈량이 북벌을 개시했을 때, 왕평은 마속을 따라 가정 수비를 맡았다. 마속이 왕평의 간언을 무시하고 산에 진을 쳐 장합에게 패배하자, 왕평은 휘하의 1천 군사만으로 북을 울려 적의 접근을 막고 흩어진 병사들을 수습하여 귀환했다. 제갈량은 이러한 왕평의 공로를 치하하며 그를 참군, 토구장군으로 승진시키고 오부를 통솔하게 했다.
231
[기산 전투에서 남쪽 방어 성공]
제갈량이 기산으로 출병했을 때, 왕평은 남쪽 방어를 맡아 장합의 공격을 굳건히 막아내며 중요한 방어 임무를 성공적으로 수행했다.
231년 제갈량이 기산으로 출병하자 왕평은 따로 남쪽을 지키는 임무를 맡았다. 위나라의 장합이 공격해왔으나 왕평은 굳건히 수비하여 이를 성공적으로 막아냈다.
234
[위연의 모반 진압 및 승진]
제갈량 사후 위연이 양의의 명을 거역하고 모반을 일으키자, 왕평은 마대와 함께 위연 토벌을 명받았다. 위연의 병사들에게 "승상(제갈량)께서 돌아가신 지 얼마 되지도 않았는데 어찌 이런 일을 벌이는가!"라고 꾸짖어 병사들이 뿔뿔이 흩어지게 만들었고, 위연의 군대를 쉽게 진압하는 데 결정적인 역할을 했다. 이후 후전군, 안한장군에 봉해졌다.
234년 제갈량이 사망하고 양의가 퇴각을 결정했으나, 위연이 이를 거부하고 독자적으로 행동하며 모반을 일으켰다. 조정은 양의의 편을 들어주었고, 양의는 마대와 왕평에게 위연 토벌을 명했다. 왕평은 위연의 병사들에게 제갈량의 죽음을 상기시키며 꾸짖었고, 이에 위연의 병사들은 두려움에 떨며 뿔뿔이 흩어져 위연의 군대는 쉽게 진압되었다. 이 공로로 왕평은 제갈량 사후 후전군, 안한장군에 봉해져 오의의 부장으로서 한중을 지키는 역할을 맡았다.
237
237년 왕평은 안한후에 봉해졌으며, 오의가 사망한 후에는 한중 방어의 최고 책임자가 되었다.
243
243년 왕평은 전감군과 진북대장군으로 임명되어 촉한의 주요 장수로서의 지위를 공고히 했다.
244
[한중 방어전에서 조상의 대군 격퇴]
244년 위나라 조상(曹爽)이 10여만 대군을 이끌고 한중을 침공하자, 왕평은 과감한 방어 전략을 제시했다. 다른 이들의 반대에도 불구하고 유민과 함께 흥세산을 점거하여 위군을 저지, 비의의 지원이 올 때까지 버텨내 대군을 성공적으로 격퇴시켰다.
244년, 위나라의 대장군 조상(曹爽)이 10여만 명의 대군을 이끌고 한중을 침공했다. 대항하기 어렵다는 의견이 지배적이었으나, 왕평은 유 호군(유민)과 두 참군을 파견하여 흥세산을 점거하고 자신은 후원을 담당하는 전략을 제시했다. 이 전략에 따라 유민과 함께 1천 명의 군사로 흥세산에서 위군을 저지했고, 결국 비의의 지원이 도착할 때까지 성공적으로 방어하여 위군을 격퇴시켰다.
248
248년, 촉한의 장수 왕평이 병으로 사망했다. 그의 적자인 왕훈이 왕평의 지위를 이어받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