왕충 (후한)

사상가, 철학자, 유학자, 작가, 천문학자, 박물학자, 기상학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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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근 수정 시각 : 2025-10-21- 17:18:4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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왕충은 후한 초기의 독특한 사상가로, 어려운 환경 속에서도 끊임없이 배우고 탐구했습니다. 그는 당시 지배적이었던 '천인감응' 사상을 비판하고, 경험적 지식과 논리적 추론을 바탕으로 한 유물론적 세계관을 제시했습니다. 그의 주저 『논형』은 고대의 신비주의적 관념에 큰 타격을 주며, 중국 중세 철학에 혁신적인 발자취를 남겼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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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7

[왕충 출생]

후한 초기의 사상가 왕충이 회계군 상우현에서 태어났습니다. 그는 훗날 '논형'이라는 혁신적인 저서를 통해 당대의 사상적 흐름에 큰 영향을 미치게 됩니다.

왕충은 27년 회계군 상우현에서 신분이 낮은 집안의 아들로 태어났다. 그의 자는 중임으로, 훗날 후한 시대의 대표적인 사상가이자 철학자로 이름을 알리게 된다.

45

[낙양에서 반표에게 수학]

청년기에 낙양으로 상경한 왕충은 반고의 아버지인 반표에게 가르침을 받았습니다. 가난했지만 서점에서 책을 통째로 외우며 다양한 학문에 통달하는 뛰어난 재능을 보였습니다.

왕충은 청년 시절 낙양으로 올라와 태학에서 푸풍의 반표를 스승으로 모시고 공부했다. 그는 집이 가난하여 책을 살 수 없었으나, 낙양 시중의 서점에서 판매하는 책들을 한번 보면 모두 암기할 정도로 뛰어난 기억력으로 백가사상에 통달했다.

60

[지방 관직 생활]

왕충은 현, 군도위, 군 등의 지방 관청에서 공조를 역임하며 뛰어난 능력을 발휘했습니다. 그러나 권력자들과의 잦은 의견 충돌로 인해 관직을 사직하고 고향에서 후학을 가르치기도 했습니다.

왕충은 학업을 마친 후 현, 군도위, 군 등의 지방 관청에서 근무하며 공조를 역임했다. 관직 생활 동안 뛰어난 능력을 보였으나, 때때로 권력자들과 생각이 맞지 않아 갈등을 겪었고, 결국 관직을 사직하고 고향으로 돌아와 자제들을 가르치는 일에 전념하기도 했다.

87

[60세에 주종사로 임용]

60세가 된 왕충은 자사 동근의 초빙으로 주종사에 임명되었습니다. 이후 치중까지 올랐으나, 2년 뒤 관직에서 물러나 저술 활동에 전념했습니다.

87년, 왕충은 60세의 나이로 자사 동근에게 초빙되어 주종사로 임명되었다. 이어서 치중까지 역임했으나, 얼마 지나지 않아 관직에서 물러났다.

89

[62세에 관직 퇴임 및 저술 전념]

62세에 관직에서 물러난 왕충은 이후 죽을 때까지 자신의 사상을 집대성한 주저 『논형』의 저술에 모든 에너지를 쏟아부었습니다.

89년, 62세가 된 왕충은 관직에서 물러나 남은 생애 동안 오직 저술 활동에만 전념하였다. 이 시기에 그의 대표작인 『논형』이 완성된 것으로 보인다.

90

[주저 『논형』 저술 및 사상 확립]

왕충은 그의 주저 『논형』을 통해 당대의 주류 사상이었던 '천인감응'을 비판하고, 경험과 논리에 기반한 실증적이고 유물론적인 사상을 확립했습니다. 이는 후한 시대 사상계에 큰 반향을 일으켰습니다.

『논형』에서 왕충은 하늘의 뜻에 의해 자연과 사회가 지배된다는 '천인감응'의 정통사상을 부인하며, 지식에 대한 비판주의와 실증적 태도를 일관되게 유지했다. 그는 경험적 인식과 논리적 추론만을 인정하고, 모든 초경험적인 설화나 역사의 허위를 폭로하려 했다. 이는 신비적 해석학으로 변질된 어용철학(공양학, 금문학)과 참위설 등 속류 관념에 큰 이론적 타격을 주었다. 그의 유물론적 사상 형성에는 당시의 천문역법 중심 자연과학, 민간의 실증주의적 해석학, 도가의 자연철학 등이 영향을 미쳤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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