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경석

역관, 외교관, 정치인, 사상가, 개화파, 작가, 시인, 서예가, 서화가, 금석학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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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근 수정 시각 : 2025-10-21- 17:17:5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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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관, 외교관, 정치인, 사상가, 개화파, 작가, 시인, 서예가, 서화가, 금석학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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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 후기 개화사상의 선구자로, 한국 최초의 개화사상가이다. 역관으로 청나라를 오가며 서양 문물을 접하고 개항의 필요성을 절감했다. 박규수, 유대치 등과 함께 김옥균, 박영효 등 개화파 청년들을 양성하여 근대화 운동의 기틀을 다졌다. 외교관으로서 병인양요, 강화도 조약 체결 과정에서 전란 방지에 기여했다. 서화가, 시인, 작가, 고미술품 감정가 등 다재다능한 면모를 보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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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831

[출생]

한성부에서 한어 역관 오응현과 전주이씨 이의무의 딸 사이에서 태어났다. 대대로 역관을 지낸 부유한 집안 출신이었다.

1831년 3월 5일, 한성부에서 한어 역관 오응현과 지중추부사 이의무의 딸 전주이씨의 아들로 태어났다. 그의 가문은 8대째 역관을 지낸 부유한 집안으로, 그의 조부모와 증조부모 또한 역관이었으며, 고조부는 혜민서 참봉이었다.

1846

[역과 합격 및 관직 생활 시작]

16세의 나이로 역과 식년시에 한학으로 합격하여 사역원 한학습독관으로 관직 생활을 시작했다. 추사 김정희의 문하생 이상적에게 학문과 한어, 서화 등을 배웠다.

1846년, 16세의 나이로 역과의 식년시에 한학으로 합격하여 사역원의 한학습독관이 되었다. 이후 사역원 첨정을 지냈다. 어린 시절부터 박제가의 북학을 공부하고, 김정희의 금석학을 공부했다. 아버지 오응현은 친구인 역관 이상적을 초빙하여 집안 자제들에게 글을 가르쳤고, 오경석은 이상적에게 글을 배웠다. 이상적은 추사 김정희의 문인으로 박지원과 박제가의 학통을 계승했다. 오경석은 박제가를 가장 존경하여 그의 학문도 사숙하였다.

1853

[베이징 방문과 개항의 필요성 자각]

23세에 처음으로 베이징 사신단에 참여하여 서양 세력에게 침탈되는 청나라의 모습을 목격하고 충격을 받았다. 이는 조선의 위기로 이어질 것이라 판단, 서양 문물과 사상이 담긴 서적들을 구입하여 귀국하며 개항론을 주장하는 계기가 되었다.

1853년, 23세의 나이로 처음 베이징으로 가는 사신단에 참여하였다. 이때 서양 세력에게 침탈되는 청나라의 모습에 큰 충격을 받았으며, 이것이 장래에 조선에도 닥치게 될 위기임을 절감했다. 이러한 생각을 바탕으로 서양 문물과 사상이 담긴 서적들(해국도지, 영환지략, 박물신편, 양수기제조법, 중서견문록 등)을 사들여 귀국했다. 조선에서는 이 책들을 신서라고 불렀다.

[한국 최초 초상 사진 촬영]

한국인 최초로 초상 사진을 찍은 인물이다. 베이징 체류 중 프랑스 공사 필립에게 부탁하여 자신의 초상 사진을 촬영하고 귀국했다.

1853년, 베이징에서 주청 프랑스 공사 필립에게 부탁하여 사진을 찍고 귀국하였다. 이는 한국 최초로 초상 사진을 찍은 사례로 기록된다.

1860

[개화 사상 전파 및 청년 양성]

1860년대부터 박규수, 유대치, 강위 등과 함께 개항의 필요성을 역설하고, 김윤식, 유길준, 김홍집 등 젊은 양반 자제들에게 개화사상을 교육하며 개화파 형성에 기여했다.

1860년대부터 유대치, 박규수, 강위 등과 함께 개항의 필요성을 역설하고, 조선의 정치 현실 타개를 위해 젊은 양반 자제들과 접촉하여 개화사상을 교육하고 발전시켜 근본적인 개혁 정치를 실시하는 것이 중요하다고 생각했다. 김윤식, 유길준, 김홍집 등이 박규수와 유대치, 강위의 문하와 그의 문하에 출입하며 개화 사상을 배우고 발전시켰다.

1866

[병인양요 전 프랑스 침공 정보 수집]

병인양요 발생 직전, 프랑스 동양함대의 조선 침공 준비 정보를 입수하여 주청사 일행의 역관으로 베이징에 파견되었다. 청나라 양무파 정객들과 교류하며 프랑스 함대 동태 및 대응책 정보를 수집하여 조선 정부에 보고했다.

1866년 5월, 병인양요 발생 직전 프랑스 동양함대의 조선 침공이 준비되자, 이 정보를 입수하여 조선 정부가 사태를 해명하고 정세를 탐지하기 위해 청나라로 파견하는 주청사 일행의 역관으로 베이징을 방문하였다. 이때 서양의 침략을 경험한 청나라 양무파 정객, 외교가들을 방문하여 그들을 설득하고 프랑스 함대의 동태와 조선 침략 대책 수립에 대한 정보를 수집하여 대응책에 대한 정보를 얻어왔다. 귀국 후 청나라는 프랑스의 조선 침공에 관련되어 있지 않으며, 프랑스군은 군량이 부족하므로 지형을 이용하여 굳게 지키고 가능한 한 싸움을 피하면서 시간을 오래 끌면 이길 수 있을 것이라는 내용을 조선 정부에 보고했다.

1869

[당상관으로 승진]

사역원 당하 역관을 거쳐 절충장군인 당상관으로 승진하였다. 이후 오위장, 첨지중추부사를 역임했으나 신병으로 사퇴했다.

사역원의 한학교수를 거쳐 1868년 3월 18일 영건도감 별간역에 임명되었고, 사역원 당하 역관을 거쳐 1869년 7월 20일 당상관인 절충장군으로 승진했다. 이후 1869년 8월 22일 오위장, 첨지중추부사가 되었으나 9월 2일 신병을 이유로 오위장직에서 체직을 청하고 사퇴하였다.

1873

[가선대부로 승진]

청나라에 파견되는 진하사의 수행 수역관으로 황제의 조서를 받아온 공로로 절충장군에서 가선대부로 승진했다.

1872년 12월 25일 상호도감 별간역에 임명되었고, 그해 겨울 청나라에 파견되는 진하사의 수행 수역관으로 가서 청나라 황제의 조서를 받아온 공로로 1873년 1월 20일 홍순목의 청으로 절충장군에서 가선대부로 승진하였다. 이어 다시 상호도감 별간역이 되었다가 7월 30일 당상역관으로 청나라 사행길에 참여했다.

1874

[흥선대원군 실각 후에도 지속된 관료 생활]

흥선대원군 실각 후에도 사역원 한어 당상역관으로 계속 근무했다. 청나라에서 접한 신문물을 바탕으로 개화의 시급함을 주장했다.

1874년 11월 흥선대원군이 실각한 뒤에도 정치색을 드러내지 않고 사역원의 한어 당상역관으로 계속 근무하였다. 청나라에서 미국, 유럽 열강의 신 문물을 접한 오경석은 개화의 시급함을 주장하였다. 그해 겨울부터 사역원에서 《통문관지》의 속편 교열에 한학 당상 김경수 등 18명의 역관과 함께 교정관으로 참여했다.

1875

[《통문관지》속편 교열 공로로 가의대부 승진]

《통문관지》속편 교열에 참여한 공로로 1자급 승진하여 가의대부가 되었다.

1875년 2월 26일 《통문관지》속편 교열에 참여한 사역원 관료들을 포상할 때 1자급 승진하여 가의대부가 되었다. 같은 해 4월 12일 청나라 사신이 도착하자 모화관에서 역관 통사로 이용숙과 함께 접견했다.

1876

[강화도 조약 전 일본 통역관 접견]

강화도 조약 체결 직전 일본 선박이 인천항에 나타나 항의 시위를 하자, 강화 유수 조병식의 지시로 훈도 현석운과 함께 일본 군함의 통역 모리야마 시게루를 접견했다.

1876년 1월 13일 강화도 조약 직전 일본의 선박이 인천항에 나타나 항의 시위를 하자, 강화 유수 조병식의 지시를 받고 훈도 현석운과 함께 항산도에 정박 중이던 일본 측 군함의 통역 모리야마 시게루를 접견하였다.

[일본 군함 퇴거 공로로 자헌대부 승진]

왜국 군함이 물러나는데 기여한 공로로 흥인군 이최응의 건의로 자헌대부로 승진했다.

1876년 2월 5일 왜국 군함이 물러나는데 기여한 공로로 흥인군 이최응의 건의로 자헌대부로 승진했다.

1877

[개항론 주장]

개항을 놓고 논쟁이 발생했을 때 박규수, 유대치, 강위 등과 함께 개국론을 주장하며 흥선대원군 일파에 맞섰다. 이는 청나라 이홍장의 권고에 따른 것이었다.

1877년 개항을 놓고 논쟁이 발생했을 때 그는 박규수, 유대치, 강위 등과 함께 개국(開國, 개항)론을 주장하여 흥선대원군 일파와 맞섰다. 승정원일기에 의하면 오경석과 박규수 등이 개국론을 주장한 것은 청나라 이홍장의 권고 때문이었다고 한다.

[외교활동 공로 인정, 정헌대부 특진]

오랫동안 승진하지 못했다는 이유와 외교 활동의 공로를 인정받아 사역원 도제조의 건의로 1자급 특진하여 정헌대부가 되었다.

1877년 6월 16일 사역원 도제조의 건의로 오랫동안 승진하지 못했다는 이유로 1자급 특진되어 정헌대부가 되었다.

[종1품 숭정대부로 승진 및 고위직 역임]

외교 활동의 공로를 인정받아 종1품 숭정대부로 승진하여 돈녕부판사가 되었다. 이후 중추부지사에 임명되었으나 신병으로 면직을 청했다.

1877년 8월, 그동안의 외교활동의 공로를 인정받아 주변의 반대 없이 종1품 숭정대부로 승진하여 돈녕부판사가 되었다. 8월 14일 중추부지사로 임명되었으나 9월 10일 신병을 이유로 체직을 청하는 상소를 올려 면직되었다.

[숭록대부, 중추부지사 임명]

《통문관지속편》 영인 감인 참여 공로로 숭록대부로 승진하고 중추부지사에 임명되었다.

1877년 11월 11일 사역원에서 《통문관지속편》을 영인할 때 감인에 참여한 공로로 1자급 특진하였다. 12월 숭록대부로 승진하고 중추부지사에 임명되었다.

1879

[사망]

49세의 나이로 콜레라에 감염된 후처를 안장하고 돌아오던 길에 과로, 풍증, 콜레라 감염이 겹쳐 병석에 누웠다가 사망했다.

만년에는 풍증으로 고생하였다. 1879년, 콜레라에 전염되어 죽은 후처를 안장하고 돌아오던 길에 과로와 풍증, 콜레라 감염이 겹쳐 병석에 누웠다가 바로 49세의 나이로 사망하였다. 시신은 경기도 양근군 북면 율곡리(현, 가평군 설악면 회곡리 밤나무골 부락)의 선영하에 매장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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