양호 (삼국지)
중국 장수, 삼국시대 인물, 서진 인물
최근 수정 시각 : 2025-10-21- 17:17:12
양호는 삼국시대 위나라와 서진의 명장이자 문신입니다. 그는 뛰어난 학식과 인품으로 사마소에게 발탁되었고, 서진 건국 후 중요한 직책을 역임했습니다. 특히 형주 도독으로 오나라 정벌의 초석을 다지고 수차례 이를 건의했으며, 그의 선정을 기리는 타루비가 세워질 정도로 백성들의 존경을 받았습니다. 오나라 멸망 후에는 그 공로를 사마염 황제로부터 인정받았습니다.
221
[양호의 탄생]
위나라와 서진의 장수 양호가 연주 태산군 남성현에서 태어났다. 그는 후한 말 학자 채옹의 외손자이자 채염의 조카이며, 촉한에 항복한 하후패의 사위였다.
양호는 221년 연주 태산군 남성현에서 태어났다. 자는 숙자. 후한 말 학자 채옹의 외손자이자 채염의 조카이며, 촉한에 항복한 하후패의 사위이다. 그의 누나 양휘유는 사마사의 아내가 되어 훗날 경헌황후로 추존되었다.
233
[아버지의 죽음]
12살의 어린 나이에 아버지 양신(혹은 양도)을 여의었다. 그는 아버지를 생각하며 예를 지키는 것이 지나쳐 숙부가 걱정할 정도였다.
12살 때 아버지 양신(羊茞 : 진서열전에는 아버지가 羊衜)을 잃자, 아버지를 생각하며 예를 지키는 것이 지나쳐 양호의 숙부가 걱정할 정도였다고 한다. 그는 학문에 뛰어나고 문장을 잘 지었으며 담론에도 능했다.
239
[조상의 등용 제의 거절]
조방이 즉위하고 대장군 조상이 양호와 왕침을 등용하려 했으나, 왕침이 응한 것과 달리 양호는 이를 거절하며 쉽게 다른 사람을 섬길 수 없다고 밝혔다.
239년 조방이 즉위한 후 대장군 조상이 권력을 쥐었는데, 그는 양호와 왕침(王沈)을 등용하려 했다. 왕침은 이에 응했으나 양호는 받아들이지 않았는데, 왕침이 관직에 나갈 것을 권하자 다른 사람을 섬기는 일이 어찌 쉽겠느냐면서 끝내 따르지 않았다.
249
[조상 제거와 왕침의 몰락]
조상이 사마의에게 제거된 후, 양호의 조언을 듣지 않고 관직에 나섰던 왕침은 벼슬에서 쫓겨났다. 왕침이 예전 양호의 말을 기억한다고 하자 양호는 일이 거기까지 이를 줄은 몰랐다고 답했다.
249년 조상이 사마의에게 제거된 후 왕침은 벼슬에서 쫓겨났는데, 왕침이 양호에게 예전에 양호가 한 말을 기억하고 있다고 말하자 양호는 자신도 일이 거기까지 이를 줄은 몰랐다고 답하였다.
255
[사마소의 등용]
사마사가 죽고 대장군이 된 사마소가 양호를 등용하여 중서시랑으로 삼았다. 이는 양호의 본격적인 정치 활동의 시작을 알리는 중요한 전환점이 되었다.
255년 사마사가 죽은 후 대장군이 된 사마소는 양호를 등용하여 중서시랑(中書侍郎)으로 삼았다.
263
[관중후 및 거평자 봉해짐]
조환이 즉위한 후 관중후에 봉해져 식읍 1백 호를 받았으며, 이후 비서감을 거쳐 거평자로 봉해지고 식읍 6백 호를 받았다.
263년 조환이 즉위한 후 관중후(關中侯)에 봉해졌고 식읍 1백 호를 받았다. 이후 비서감(袐書監)이 되고 거평자(鉅平子)에 봉해졌으며, 식읍 6백 호를 받았다.
264
[종회 죽음과 기밀 관리]
종회가 강유와 함께 반란을 일으키려다 죽임을 당한 후, 양호는 종사중랑이 되어 순욱과 함께 국가의 기밀 업무를 관리하는 중요한 역할을 수행했다.
264년 종회가 강유와 함께 반란을 일으키려 하다가 죽임을 당한 후 종사중랑(從事中郎)이 되어 순욱(荀勖)과 함께 기밀을 관리하였다.
265
[서진 건국과 중군장군 임명]
사마염이 진나라를 세운 후, 양호를 중군장군으로 임명하고 산기상시를 겸하게 했다. 또한 군공으로 봉하고 식읍 3천 호를 늘려주었는데, 양호는 이를 굳게 사양하다가 나중에 받아들였다.
265년 사마염은 진나라를 세운 후 양호를 중군장군(中軍將軍)으로 임명하고 산기상시(散騎常侍)를 겸하게 했으며, 군공(郡公)으로 고쳐 봉하고 식읍을 3천 호로 늘려 주었다. 양호는 처음에는 굳게 사양하다가 나중에서야 받아들였다.
266
[사마소 상복 착용 논쟁]
사마소의 상을 치르면서 사마염의 상복 착용 여부에 대한 논의가 있었다. 양호는 황제도 상복을 입어야 한다고 주장했지만, 부현의 반대로 받아들여지지 않았다.
266년 사마염이 사마소에 대하여 상을 치르면서 상복을 입는 문제에 대해 조정에서 논의가 있었다. 양호는 사마염만이라도 상복을 입어야 한다고 주장했으나, 부현(傅玄)이 황제만 상복을 입고 있는 것은 군신간의 도리가 아니라고 하여 이는 받아들여지지 않았다.
268
[석포 모함 옹호]
왕침이 대사마 석포가 오나라와 내통한다고 모함했을 때, 양호는 석포를 적극적으로 옹호하여 그가 간신히 의심을 풀 수 있도록 도왔다.
268년 왕침(王琛)이 대사마 석포(石苞)가 회남에서 오나라와 내통하려 한다고 모함하였다. 양호가 석포를 옹호했으나 사마염은 석포를 면직시키려 했는데, 석포가 스스로 병권을 내놓고 죄를 청하여 겨우 의심을 풀 수 있었다.
269
[형주 도독 임명 및 오나라 정벌 준비]
사마염이 오나라 멸망을 결심하고 양호를 도독형주제군사로 임명하여 양양에 주둔하게 했다. 그는 군량을 10년치로 늘리고 민심을 얻었으며, 오나라 정벌을 위해 수군 건설을 건의하는 등 중요한 기틀을 다졌다.
269년 사마염은 오나라를 멸망시킬 마음을 먹고 양호를 도독형주제군사(都督荊州諸軍事)로 임명하여 양양에 주둔하게 했다. 양호가 처음 부임했을 때 임지에 있는 군량이 100일치도 되지 않았으나 밭 8백여 경(頃)을 개간하는 등 애를 쓴 끝에 10년치로 늘어났고, 장강과 한수(漢水) 일대의 민심을 얻었으며, 전투에서 항복한 오나라 사람들 중 고국으로 돌아가고 싶어하는 자는 기꺼이 돌려보내 주었다. 그리고 사마염에게 오나라를 치려면 장강에서 싸울 수군이 필요하다고 건의하였다. 이것이 받아들여져 사마염은 왕준(王濬)에게 수군을 감독하고 전선을 대대적으로 건조하게 했다.
276
[정남장군 임명과 오나라 정벌 건의]
정남장군으로 임명된 양호는 사마염에게 오나라 정벌을 청하는 상소를 올렸다. 그러나 가충과 순욱 등 대부분의 신하가 이를 회의적으로 받아들여 강력하게 반대하자 양호는 한탄을 금치 못했다.
276년 10월에 정남장군(征南將軍)으로 임명되었는데, 이때 사마염에게 오나라 정벌을 청하는 상소를 올렸다. 그러나 탁지상서(度支尙書) 두예(杜預)와 중서령 장화(張華)를 제외한 대부분의 신하가 이를 회의적으로 받아들였고, 그중에서도 가충(賈充)과 순욱(荀勖)이 강력하게 반대했다. 양호는 하늘이 주는 기회를 받지 않는다면서 한탄을 금치 못하였다.
277
[남성군후 사양 및 오군 추격 거부]
남성군후 봉작을 거절하고, 오군이 강하를 공격 후 돌아갔을 때 굳이 병사를 수고롭게 할 필요가 없다며 추격하지 않았다. 또한 조정의 형주 본거지 남양 이전 제안에도 반대했다.
277년 남성군후(南城郡侯)로 봉해졌으나 받아들이지 않았다. 12월 오군이 강하(江夏)를 공격하고 돌아갔을 때 양호는 군사를 보내 추격하지 않았다. 조정에서는 문책하는 사자를 보내고 형주의 본거지를 남양(南陽)으로 옮기려 했다. 이에 대해 양호는 이미 오군이 달아난 지 며칠이 지났는데 굳이 병사를 수고롭게 할 필요가 없다고 답하고, 본거지를 옮기는 것을 반대했다.
278
[타루비 건립]
양호가 양양에 있을 때 백성들에게 선정을 베풀자, 그의 사후 양양 백성들이 현산에 사당과 비석을 세웠다. 비석을 바라보며 눈물을 흘리지 않는 사람이 없다 하여 '타루비(墮淚碑)'라 불렸다.
양호가 양양에 머물면서 선정을 베풀 때, 현산(峴山)에 올라 술을 마시면서 시 읊는 것을 즐겼는데, 어느 날 부하들을 돌아보며 <혼백이 있다면 마땅히 이 산에 오르리라>고 말하자 종사(從事) 추담(鄒湛)이 <공의 어진 명성이 반드시 이 산과 함께 할 것>이라고 대답한 적이 있었다. 양양 백성들은 현산에 양호를 기리는 사당과 비석을 세우고 계절이 바뀔 때마다 제사를 지냈는데, 비석을 바라보며 눈물을 흘리지 않는 사람이 없다 하여 타루비(墮淚碑)라는 이름이 붙었다.
[병중에도 오나라 정벌 주장]
병이 깊어가는 와중에도 조정에 나아가 오나라 정벌을 강력히 주장했다. 사마염이 자신에게 오나라 정벌을 맡기려 하자 양호는 굳이 자신이 갈 필요는 없다고 말하며 겸양의 태도를 보였다.
278년 병이 들었음에도 불구하고 조정에 나아가 오나라를 정벌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사마염은 양호에게 오나라 정벌을 맡기고 싶어했으나, 양호는 굳이 자신이 갈 필요는 없다고 하였다.
[양호의 죽음과 두예 천거]
11월 병이 위독해지자 두예를 후임으로 천거하고 사망했다. 그는 죽을 때까지 남성군후 작위를 사양했으며, 사마염은 그의 죽음을 슬퍼하며 태부로 추증했다. 형주와 오나라 백성들도 그의 죽음을 애도했다.
278년 11월에 병이 위독해지자 두예를 천거하여 자신의 후임으로 삼게 하였고, 얼마 가지 않아 죽었다. 양호는 죽을 때까지도 남성군후에 봉해지는 것을 사양했는데, 유언으로 남성후(南城侯)의 도장을 자신의 관 속에 넣지 못하게 했다. 사마염은 양호의 죽음에 대해 무척 슬퍼하였으며, 양호의 유언을 받아들이지 않고 그의 작위를 남성군후로 정하고 태부(太傅)로 추증하였다. 형주 백성들과 부근의 오나라 사람들도 양호의 죽음을 슬퍼하며 눈물을 흘렸다고 한다.
280
[오나라 멸망과 양호의 공로 인정]
오나라가 멸망하자, 사마염은 신하들의 축하 자리에서 오나라 멸망은 양호의 공로라고 말하며 눈물을 흘렸다. 이는 양호의 오나라 정벌 구상이 최종적으로 실현되고 그의 업적이 공식적으로 인정받은 순간이었다.
마침내 280년에 오나라가 멸망한 후 신하들이 사마염에게 축하의 술잔을 올리자, 사마염은 오나라를 멸망시킨 것은 양호의 공로라고 말하면서 눈물을 흘렸다.
1603
[한국 이순신 타루비 건립]
임진왜란이 끝난 후, 이순신 장군의 부하들이 1603년 장군을 기리는 비석을 세웠는데, 이 비석의 이름 또한 '타루비'였다. 이는 한국의 보물 1288호로 지정되어 있다.
한국에서는 임진왜란(壬辰倭亂)이 끝난 후 이순신(李舜臣) 장군의 부하들이 1603년 장군을 기리는 비석을 세웠는데, 이 비석의 이름 역시 타루비이다. 한국의 타루비는 전라남도 여수시에 있으며, 대한민국의 보물 1288호로 지정되어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