심영 (배우)

배우, 연극인, 영화인, 교수, 월북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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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근 수정 시각 : 2025-10-21- 17:16:0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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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제강점기부터 해방, 한국전쟁을 거쳐 북한에서 생을 마감한 격동의 시대를 살았던 배우입니다. 초기 무용과 연극 무대를 거쳐 영화배우로도 활약하며 당대 최고의 인기를 누렸습니다. 일제강점기 친일 영화에 출연하고 해방 후에는 좌익 예술단체에서 활동하며 여러 차례 피습당했습니다. 특히 1946년 김두한에게 총격당한 사건은 드라마 '야인시대'로 인해 대중에게 널리 알려졌습니다. 이후 북한으로 월북하여 연기과장, 대학 교수, 인민배우 칭호를 받으며 북한 예술계에서 활동했습니다. 말년에는 숙청되어 정확한 사망 시기와 원인이 불분명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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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10

[심영의 탄생]

강원도 철원군에서 태어났으며, 그의 출생 연대에 대한 여러 설이 있었으나 족보에 1910년생으로 기록되어 통설로 채택되었다.

1910년 9월 3일 강원도 철원군 서변면 관전리 구 철원관아 객사에서 태어났다. 그의 출생년대에 대해서는 일설에는 1909년생, 1908년생 설도 있으나, 집안 족보에 1910년생으로 수록되었기에, 보통 1910년생 설을 통설로 채택한다.

1918

[독립운동가 김철과의 인연]

파리 강화 회의 당시 그의 집에 머물던 김철이 고종의 죽음 이후 독립운동을 선전했으며, 3년 뒤 체포되었다.

1918년 파리 강화 회의가 열릴 때 심영의 집에 머무르던 김철(金徹)이 1919년 고종의 갑작스러운 죽음 이후 고종의 장례식을 보러 상경한 기산도에게 파리 강화 회의와 우드로 윌슨의 민족자결주의를 선전하고, 전라남도, 전라북도 등지를 돌아다니며 독립운동을 홍보했다가 3년만에 발각되어 체포되기도 했다.

1922

[연극 첫 데뷔]

의정부공립보통학교 6학년 재학 중 처음으로 연극 무대에 섰다.

의정부공립보통학교를 졸업하고 경성제이고등보통학교에 입학하기 전인 의정부공립보통학교 6학년 때(1922년)에 처음으로 연극 무대에 섰다.

1928

[학교 활동 중 연극계 입문 및 퇴학]

경성제이고등보통학교 재학 시절 무명 연극배우로 활동하다가 학교 승인 없는 연극 활동으로 퇴학당하고 토월회 연구생으로 연극계에 정식 입문했다.

경성제이고등보통학교 재학 시절 그는 무용에 관심을 가지다가, 결국 1928년에 무명 연극배우로 단편 연극 몇 편에 출연하였는데, 학교에 알려져 학교의 승인 없이 연극 활동과 사회 활동을 했다는 이유로 경성제이고보 일본인 학생지도 교사에 의해 퇴학 처분을 받았고 토월회 연구생으로 입단하면서 연극계에 입문했다.

1929

[연극 《간난이의 설움》 출연]

경성부 조선극장에서 공연된 연극 《간난이의 설움》에 출연하며 연극배우로서 이름이 알려지기 시작했다.

그의 첫 작품이나 단역으로 출연했던 작품들은 알려져있지 않다. 다만 출연진 속에 심영의 이름이 나타나는 작품은 1929년 11월 14일부터 11월 16일까지 경성부 조선극장 공연한 연극 《간난이의 설움》이었다.

1930

[경성제이고보 졸업 및 무용 교육]

경성제이고등보통학교에 복학하여 졸업했고, 이후 미국인 무용가에게 1년간 무용 지도를 받았다.

다시 복학하여 1930년 경성제이고등보통학교를 졸업하였다. 졸업 직후 미국인 무용가 A. C그라운드에게서 무용 지도를 받았고, 그의 딸이 가까이에서 도와주며 1년간 무용 연습을 했지만 그만두었다.

1931

[영화배우 데뷔]

무용을 그만두고 영화계에 진출하여 단역으로 출연하며 영화배우 활동을 시작했다.

1931년부터는 영화에도 단역으로 출연하면서 영화배우도 겸하게 되었다.

1932

[조선영화제작소 창립 참여 및 초기 활동]

1932년 여러 영화에 참여했고, 조선영화제작소 창립에 동참했다. 같은 해 콜롬비아 레코드 드라마를 촬영했으나 판매 금지되었으며, 만주사변 이후 만주 위문공연을 다녀오기도 했다.

1932년 대경영화양행에서 제작한 이수일과 심순애, 신흥프로덕션에서 제작한 방아타령에 참여했다. 1932년 9월 조선영화제작소(朝鮮映畵製作所)의 창립에 참여하였다. 12월 태양극단 소속으로 콜롬비아 레코드 회사의 부탁으로 박제행 등과 인도의 달이라는 드라마를 촬영해서 비디오로 녹화하였으나 판매금지 조치를 받았다. 1932년 9월 18일 만주사변이 발생하여 그해 말 태양극단은 만주동포 위문공연을 추진하여 그도 만주를 다녀왔다.

1934

[수재 의연품 기증]

삼남 지방 수해 당시 의복을 두 번 기증하여 이웃 사랑을 실천했다.

1934년 여름, 경상, 전라, 충청 삼남지방에 수해가 발생하자 그는 수재 의연품으로 의복을 두 번 기증하였는데, 의류의 종류나 개수는 확인되지 않는다.

1936

[인기 연극 《춘향전》, 《사랑에 속고 돈에 울고》 출연]

연극 《춘향전》에서 방자 역, 《사랑에 속고 돈에 울고》에서는 주인공 홍도의 남편 역을 맡아 배우 황철과 함께 공연하며 삼남 지방 순회공연을 성공적으로 마쳤다.

1936년 《춘향전》에서도 방자 역을 맡았고, 삼남 지방 순회공연을 다녀왔다. 《사랑에 속고 돈에 울고》에서는 심영이 주인공 홍도의 남편 역을, 황철이 홍도의 오빠 역을 맡았다.

1937

[극단 중앙무대 창립 참여]

동양극장 출신 배우 송영, 서월영 등이 주도하여 설립한 극단 중앙무대 창립에 참여했다.

1937년 6월 6일 동양극장 출신 송영, 서월영 등의 주도로 극단 중앙무대(中央舞臺)를 설립하자, 여기에 참여하였다.

1939

[극단 고협 대표 및 친일 연극 단체 간부]

극단 고협의 대표로 활동하며 함경도 순회공연에 참여했다. 이 시기 고협이 조선총독부 후원으로 친일 연극 단체 조선연극문화협회를 결성할 때 간부를 맡으며 친일 활동을 시작했다.

1939년 극단 고협의 대표로 활동하였다. 그해 고협의 함경도 순회공연 중 그는 원산지역 순회공연에 참여했다. 고협을 비롯한 여러 연극 단체들이 조선총독부의 후원으로 친일 연극 단체 조선연극문화협회를 결성했을 때 이 단체의 간부를 맡았는데 고협은 태평양 전쟁 중 임선규의 《빙하》, 《상아탑에서》, 송영의 《해당화 피는 섬》, 김태진의 《아름다운 고향》 등 친일 연극을 다수 공연했다.

1941

[영화배우 공식 등록]

조선총독부의 조선영화령에 따라 영화배우 명단에 수록되었다.

1941년 8월 1일 조선총독부의 조선영화령으로 영화배우를 등록할 때, 영화배우 명단에 수록되었다.

[친일 영화 《그대와 나》 출연]

1941년 9월 촬영되어 1942년 상영된 학도병 주제의 일본 영화 《그대와 나》(君と僕)에 출연했다.

1941년 9월 촬영하여 1942년 상영한 학도병을 주제로 한 일본영화 그대와 나(君と僕) 촬영에 출연하였다.

[조선연극협회 창립 참여]

경성부 부민관 중강당에서 열린 조선연극협회 조직에 참여하여 감사로 선출되었다.

1941년 12월 22일 오후 2시 경성부 부민관 중강당에서 열린 조선연극협회의 조직에 참여하고 감사에 선출되었다.

1943

[친일 영화 《망루의 결사대》 출연]

친일 선전 영화 《망루의 결사대》에 출연하며 친일 연기자로 지목되기 시작했다.

1943년에 친일 선전 영화 망루의 결사대(원제:望樓の決死隊)에 출연하고 이후 몇몇 관변 영화에 참여하면서 그는 친일 연기자로 지목받게 되었다.

[제2회 연극경연대회 개인 연기상 수상]

제2회 연극경연대회에서 일어극 부문 개인 연기상을 수상하며 연기력을 인정받았다.

1943년 9월 16일부터 12월 26일까지 열린 제2회 연극경연대회(演劇競演大會)에서 일어극 부문 개인 연기상을 수상했다.

1944

[제2회 연극공연대회 입선상 수상]

제2회 연극공연대회에서 개인 부문 3등으로 입선상을 수상했다.

1944년 3월 17일 입선상을 수상하였다. 상격은 개인부문 3등이었다.

1945

[해방 후 혁명극장 창립 및 운영]

해방 후 박제행 등과 함께 혁명극장을 창립하고 극장장을 맡아 운영했으나, 여러 차례 피습을 겪으며 극장 문을 닫아야 했다.

1945년 9월 심영은 박제행, 박창환, 박춘명, 김양춘, 박영호 등과 함께 혁명극장을 창립하고 극장장이 되어 운영하였으나 몇번의 피습 끝에 극장 문을 닫았다.

1946

[광통교 총격 피습 사건]

극작가 박영호의 연극 《님》 공연을 마치고 귀가하던 중 광통교에서 괴한에게 총격을 받아 하복부에 중상을 입었다. 이는 훗날 드라마 야인시대에서 '고자라니' 장면으로 재해석되어 대중에게 크게 알려졌다.

1946년 3월 14일 오후 8시 30분경 극작가 박영호의 《님》 공연을 마치고 귀가하던 중 광통교에서 괴한에게 총을 맞아 중상을 입어 경성대학 의학부 부속병원 외과에 입원했다. 서울신문은 당시 상황을 ‘다리 위 자욱한 안개 속에서 누런 바바리코트와 회색 모자를 쓴 괴한이 나타나 권총을 발사했다’고 묘사했다. 이때 그는 하복부(아랫배 주변)를 관통상되었다. 총을 쏜 사람이 김두한으로 알려졌지만, 김두한의 진술과 기사가 일부 불일치하는 부분이 있다.

[민중극장 및 극단 민중 창설]

총격 피습 이후 1946년 11월 경성부에 민중극장과 극단 민중을 창설하여 《원야》, 《태백산맥》 등 여러 연극을 공연했다.

심영은 이후 1946년 11월 경성부에 민중극장과 극단 민중을 창설하여 《원야 (原野)》, 《태백산맥》, 《별하나》 등의 연극을 공연하였다.

[조선연극동맹 서울지부 조직 참석]

경성 종로 YMCA에서 조직된 조선연극동맹 서울지부 창립에 참석했다.

1946년 12월 24일 오후 2시 경성 종로 YMCA에서 조선연극동맹 서울지부가 조직되자 허집(許執), 함세덕(咸世德), 한일송(韓一松), 서일성(徐一星), 조현(曺鉉), 황철(黃澈), 김산초(金仙草), 이상백(李象伯), 김선영(金鮮英), 박창환 등과 함께 참석하였다.

1947

[문화공작대 이끌고 지방 순회공연]

연극 조직인 문화공작대의 제4대를 이끌고 경상북도 대구, 포항, 경주, 안동, 영주, 상주, 김천 지역을 순회 공연하기 시작했다.

1947년 7월 21일 연극 조직인 문화공작대의 제2대, 3대가 지방 순회공연을 할 때 그는 제4대를 이끌고 경상북도 지역의 대구, 포항, 경주, 안동, 영주, 상주, 김천 지역을 순회 공연하였다.

[대구 공연 중 총격 피습]

문화공작대를 이끌고 대구에서 공연하던 중 총격을 받고 중상을 입어 연극이 중단되었다.

1947년 7월 26일 문화공작대를 이끌고 대구에서 공연 도중, 총격을 받고 중상을 입어 연극이 중단되었다.

[북한으로 월북]

미 군정 경찰의 좌익 극단 탄압이 계속되자 1947년 12월 말 혹은 1948년 4월 남북협상 전후로 북한으로 월북했다. 월북 당시 황철과 함께 백인제 의사, 배우 최은희 등을 납북하는 데 가담했다.

1947년 파업 선동 혐의로 미 군정 경찰에 피검되는 등 좌익 극단에 대한 탄압이 계속되자 1947년 12월 말 혹은 1948년 4월 남북협상을 전후로 하여 월북하였다. 그러나 그의 정확한 월북 날짜는 알려져 있지 않다. 월북할 당시 황철과 힘을 합쳐서 어려 사람들을 납북했는데 그 중에서 자신이 피습당했을 때 자신을 치료해준 의사인 백인제와 배우 최은희 등도 포함되어 있었다. 하지만 최은희는 납북당하자마자 바로 탈북했다.

1948

[월북 후 북한 예술계 요직 부임]

월북 후 조선예술영화촬영소 연기국 연기과장 및 조선영화인동맹 위원장에 선임되며 북한 예술계의 주요 인사가 되었다.

1948년 조선예술영화촬영소 연기국 연기과장, 조선영화인동맹 위원장에 선임되었다.

[제1차 남북협상 참여]

평양에서 개최된 제1차 남북협상에 문화예술인 대표자로 참여하여 협상을 지지했다.

1948년 4월 19일~4월 30일 평양에서 개최된 제1차 남북협상에는 문화예술인 대표자로 협상을 지지하였다.

[제2차 전조선 제정당사회단체 대표자 연석회의 참여]

제2차 전조선 제정당사회단체 대표자 연석회의에도 참여했다.

1948년 6월 29일의 제2차 전조선 제정당사회단체 대표자 연석회의에도 참여하였다.

1950

[한국 전쟁 중 서울 상륙 및 납북 가담]

한국 전쟁 발발 직후 리승엽 및 조선인민군과 함께 서울에 상륙하여 영화배우, 연극배우, 가수 등 수십여 명의 연예인과 자신을 치료해 준 백인제 박사를 강제 월북시키거나 납북하도록 가담했다.

1950년 6월 29일 한국 전쟁 당시 리승엽 및 조선인민군과 함께 서울에 상륙, 영화배우, 연극배우, 탤런트, 가수, 희극인들에게 같이 북한으로 갈 것을 권고하거나 꾀거나 강제로 수십여 명을 데려가기도 했다. 연예인 뿐만 아니라 자신을 치료해 준 의사인 백인제 박사도 데려갔다.

1957

[공훈배우 칭호 수여]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에서 공훈배우 칭호를 받았다.

1957년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의 공훈배우 칭호를 받았다.

1964

[인민배우 칭호 수여]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에서 인민배우 칭호를 받았다. 이는 북한의 최고 배우 칭호이다.

1964년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의 인민배우 칭호를 받았다.

1966

[평양연극영화대학 교수 재직]

평양연극영화대학 교수로 재직하며 후학 양성에 힘썼다.

1966년부터 평양연극영화대학 교수로 재직하였다.

1971

[심영의 사망 (숙청 또는 지병)]

숙청되어 중앙 무대에서 사라졌으며, 1971년 지병으로 사망했다는 설과 숙청 후 탄광에서 노역 중 폐결핵으로 사망했다는 설이 있다.

1971년 숙청되어 중앙 무대에서 사라졌다. 그의 최후에 대해서는 친일인명사전에는 심영이 1971년 7월 24일 지병으로 사망하였다고 되어 있다. 한편 1971년 숙청되어 평양직할시 인근의 삼석구역 삼신탄광에서 노역을 하다가 1973년 폐결핵으로 사망했다는 설도 있다. 그가 왜 숙청되었는가의 이유는 알려져있지 않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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