송진우 (1890년)
독립운동가, 언론인, 교육자, 외교가, 정치인, 사상가
최근 수정 시각 : 2025-10-21- 17:13:05
송진우는 조선의 독립운동가, 언론인, 교육자, 정치인이다. 3.1운동을 주도한 민족대표 48인 중 한 명으로, 독립 이후 동아일보 사장과 한국민주당 초대 당수를 역임하며 미군정 시기 혼란한 정국을 이끌었다. 신탁통치 문제로 격변의 시기, 서울 자택에서 암살당하며 파란만장한 생을 마감했다.
1890
[송진우 출생]
송진우가 전남 담양군에서 송훈과 남원 양씨의 넷째 아들로 태어났다. 아명은 옥윤이었고 애칭은 금가지였다.
고하 송진우는 전라도 담양군 고지면(현재의 금성면)의 손곡리(현재의 대곡리)에서 신평 송씨 송훈과 제주 양씨의 넷째 아들로 출생하였다. 본관은 신평이며, 조선 명종 때의 문신이자 면앙정가의 작자 송순의 후손이었다. 태어날 때 모친 제주 양씨가 채소밭에서 금빛의 가지를 딴 태몽을 꾸고 아들을 얻었다 하여 이름을 금가지, 아명을 옥윤이라 하였다.
1893
[한학 및 성리학 수학 시작]
송진우가 4세에 한학을 수학하기 시작했으며, 7세에는 성리학자이자 의병장이었던 기삼연에게 유학을 수학하였다.
1893년 4세에 한학을 수학하였고 1896년 7세에는 성리학자이며 의병장이었던 기삼연(奇參衍)에게서 유학(儒學)을 수학하였다. 스승 기삼연은 고종 때의 성리학자로 벼슬이 호조판서에 이르렀던 노사 기정진의 친족으로, 노론계 학맥을 이은 저명한 성리학자였다. 기삼연은 고하의 스승이 된 계기는 기삼연이 처음 의병을 일으켰으나 실패해 왜병에게 쫓기다가 마침내 송씨 마을로 흘러들어 옴으로 해서 마련되었다. 기삼연은 곧 송씨 문중의 식객이 되었고 그 때 만 여섯 살이던 고하를 비롯한 동리 소년, 청년들을 가르치게 된 것이다.
1904
15세 되던 1904년 고흥 유씨 유차(柳 次)와 결혼하였다. 이 시기 1907년에 득녀하였으나 1908년에 홍역으로 요절하였다.
1905
이후 송진우는 1905년초 전라남도 장성 북하면 백양사에 들어가 성리학자 김직부(金直夫)에게 수학하였다.
1906
[영학숙 입학 및 김성수와 만남]
담양군 창평의 월리에 있는 영학숙에 들어가 신학문을 배우기 시작했으며, 이때 인촌 김성수를 만나게 되었다.
아버지는 1905년 11월 을사조약이 강제로 체결되자 분노하며 송진우에게 "나라를 회복하기 위해서는 신학문을 배워야 한다"고 강조하였다. 이에 고하는 1906년 4월 담양군 창평(昌平)의 월리(月리)에 있는 영학숙(英學塾)에 들어가 신학문을 배우기 시작하였고, 인촌 김성수를 만나게 되었다.
1907
[내소사에서 수학 및 일본 유학 결의]
변산 내소사 청련암에 들어가 수학하였고, 백관수를 만났다. 이후 일본 유학을 결의하고 하산하여 위계후를 찾아가 일어를 배웠다.
1907년 전라북도 변산 내소사 청련암에 들어가 수학하고 백관수를 만났다. 이때 일본 유학을 결의하여 하산하고 위계후를 찾아가 일어를 배웠다. 같은 해 다시 창평의 영학숙에 들어가 고광준, 김성수 등을 만나 영어 등 신학문을 수학했다. 그러나 3개월 만에 영학숙을 그만 두었다.
1908
1908년 10월 송진우는 삭발후 김성수와 함께 일본에 유학, 곧바로 동경 세이소쿠영어학교에 등록하였다. 1909년 이 학교를 졸업하고 동경 긴죠중학교에 편입학하였다.
1910
1910년 4월 일본 와세다 대학교(早稲田大學) 고등예과에 입학하였다.
1910년 8월 일제에 의해 강제로 한일합병이 체결되어 국권이 침탈되자 송진우는 충격을 받고 자살을 결심한 채 다시 귀국하였다. 귀국 후 스승 기삼연을 찾아갔으나 그는 이미 피살된 후였다. 분노한 그는 윤치호와 이상재 등을 찾아가 독립을 위한 거사를 호소했으나 거절당했다.
경술국치에 대한 분노로 원망, 방황하였으나 1910년 11월 경성을 찾아온 아버지 송훈의 권고로 마음을 다잡고 다시 일본으로 건너가게 된다.
1911
[메이지 대학 편입학 및 사상 형성]
일본에 건너가 와세다 대학 법학부에 복학하였으나 곧 그만두고 동경 메이지 대학교에 다시 편입학하여 실력배양론, 자강운동론 사상을 형성하였다.
송진우는 다시 일본에 건너가 1911년 와세다 대학 법학부에 복학하였으나 곧 그만두고 동경 메이지 대학교(明治大學)에 다시 편입학하여 수학하였다. 학교에서 그는 실력배양론, 자강운동론이라는 사상을 형성하였다. 와세다 대학과 메이지 대학에 재학하는 동안 그는 유학생친목회를 조직하고, 친목회 총무에 선출되었다. 이어 호남유학생회 회장, 호남유학생다화회장에도 선임되었으며, 김병로 등과 함께 일본 유학생들이 주축되어 발간한 잡지 학지광의 발행에 참여하였다.
1915
1915년 7월에 메이지 대학교 법학부를 졸업하였다. 졸업 후 1916년 초 배를 타고 부산항을 거쳐 입국, 고향으로 돌아왔다.
1916
[중앙학교 학감 취임]
귀국 후 친구인 김성수와 함께 중앙학교를 인수하는 것을 도와주고 학감(교감)에 취임하여 국사 과목을 담당하였다.
1916년 귀국하자 친구인 김성수가 중앙학교를 인수하는 것을 도와주고 조력하였다. 만일의 불상사를 대비하여 그는 약간의 자금을 마련하여 김성수에게 전달하기도 한다. 교장이 된 김성수는 그를 중앙학교 학감으로 초빙하였다. 송진우는 교감이었지만 직접 국사(國史) 교과목 담당 교사로도 강의하였다.
1917
[삼성사 건립기성회 조직]
단군 왕검, 세종대왕, 충무공 이순신의 사당 건립을 추진하는 삼성사 건립기성회를 조직하였으나 일제의 방해로 좌절되었다.
고하는 1917년 단군 왕검·세종대왕·이순신을 남산에 모시는 삼성사 건립기성회를 조직하였으나 일제가 그 자리에 조선신궁을 지으면서 방해하여 좌절되었다.
1918
[중앙학교 교장 취임 및 재혼]
제10대 중앙학교 교장 자리를 맡게 되었고, 학생들에게 실력 양성론을 전파했다. 고흥 유씨 유차와 이혼하고 강릉 유씨 유보부와 재혼하였다.
곧 제10대 중앙학교 교장 자리를 맡게 된 고하는 교장에 취임하자마자 학생들에게 훈시를 통해 "실력을 양성하여 독립의 기회를 엿보자"며 학생들에게 실력 양성론을 전파했다. 1918년 고흥 유씨(유차)와 이혼, 강릉 유씨(유보부)와 재혼하였다.
[3.1 만세 운동 계획 및 이승만 밀사 접견]
김성수, 현상윤 등과 중앙학교 숙직실을 근거지로 3.1 만세 운동을 계획하였다. 또한 이승만이 보낸 밀사를 만나 국내외 정세를 논의하고 대규모 시위를 계획하였다.
1918년 12월 김성수(언론인), 현상윤 등과 중앙학교 숙직실에서 만세운동을 계획하였다. 또한 1918년 10월 상하이에서 장덕수가 보낸 밀사와 12월에는 미국에서 보낸 이승만의 밀사를 만나 국내외 정세를 논의, 대규모의 시위를 계획하고 학생, 시민으로 된 단체 조직을 추진하였다.
1919
[3.1운동 종교계 합동 모임 참석]
기독교, 천도교 교단의 궐기준비 합동 모임에 참석하여 3.1운동의 준비과정 중 종교계와 연락하여 협력을 성사시켰다.
1919년 2월 24일 기독교, 천도교 교단의 궐기준비 합동 모임에 참석하였다. 3·1운동의 준비과정 중 종교계와 연락하여 기독교세력과 천도교세력의 협력을 위한 밀담을 준비하여 성사시켰고, 만세운동 후에 일경의 첩보망에 걸려 투옥당하였다.
[3.1운동 주동으로 체포 및 투옥]
3·1 만세 운동을 주동한 민족대표 48인의 한 사람으로 체포되어 서대문 형무소에 투옥되었다. 그는 기대하던 파리강화회의에 한국 대표단의 입장이 거부당한 소식을 듣고 좌절, 이후 현실주의자로 변신한다.
밀정의 밀고로 3월 중순 송진우는 중앙학교 교내에서 연행된뒤 서대문 형무소에 투옥되었고 조선총독부 경찰관의 고문보다 조선인 밀정의 밀고로 체포되었다는 점에 그는 분개하였다. 또한 그가 기대하던 파리 강화회의에 김규식 등 한국인 대표단원의 입장이 거부당한 소식을 듣고 그는 배신감을 느낀다. 이후 그는 이상주의를 버리고 합리주의적인 사고관을 갖게 되었으며, 작은일 하나라도 조건을 보고 신중히 판단하게 되었다.
1920
1920년 4월 1일 동아일보가 창간되었다. 그는 옥중에 있었으나 김성수는 그를 창립 발기인의 한사람으로 명단에 선임했다.
송진우는 1920년 8월 14일 옥중에서 모친 양씨의 사망소식을 접하였다.
경성복심법원 판결에서 적용법조문 관계로 무죄선고를 받고 석방되었지만 사실상 1년 반 가까이 수감되어 있었다.
1921
[동아일보 사장 취임]
주식회사 동아일보 창립에 참석한 뒤, 동아일보사 제3대 사장에 취임하여 언론 활동을 시작했다.
1921년 2월 경성으로 올라가, 그 전해에 설립된 동아일보사를 주식회사로 전환하기 위하여 주식을 공모하고, 창립총회를 준비, 기획하였다. 같은 해 9월 주식회사 동아일보 초대사장으로 선임되면서 김동성 기자를 10월 2일 열리는 만국기자단의 한사람으로 파견했다. 1921년 9월 14일 주식회사 동아일보 창립에 참석하고 1921년 9월 15일부터 1924년까지 동아일보 제3대 사장을 역임하면서, 1923년 1월이후 조만식 등과 함께 20개이상의 단체들을 통합하여 조선물산장려회를 조직하고 동아일보를 통하여 전국적으로 적극지원하였고 민립대학기성회 운동에도 적극 참여하여 3월 조선민립대학기성회 중앙집행위원에 선출되었다.
1923
[물산장려회 및 민립대학기성회 활동]
조만식 등과 함께 조선물산장려회를 조직하고 동아일보를 통해 적극 지원했으며, 민립대학기성회 운동에도 참여하여 중앙집행위원에 선출되었다.
1923년 1월 이후 조만식 등과 함께 20개 이상의 단체들을 통합하여 조선물산장려회를 조직하고 동아일보를 통하여 전국적으로 적극 지원하였다. 또한 민립대학기성회 운동에도 적극 참여하여 3월 조선민립대학기성회 중앙집행위원에 선출되었다.
1924
[박춘금 협박 및 사장직 사퇴]
동아일보가 친일 각파유지연맹을 비난한 뒤, 정치깡패 박춘금의 협박과 폭행에 충격을 받아 동아일보 사장직을 사퇴했다.
1924년 4월 2일에 《동아일보》가 친일 정치깡패 박춘금 등이 만든 친일 각파유지연맹을 격렬히 비난했는데, 박춘금이 사장 송진우와 사주 김성수를 요정인 식도원으로 유인하여 권총으로 협박 및 구타를 가했다. 이 때문에 고하는 정치깡패 박춘금의 협박과 폭행에 충격을 받아 1924년 4월 25일 동아일보 사장직을 사퇴하였다.
1925
1925년 4월 사임한 홍명희를 대신하여 동아일보 주필로 있다가 6월, 동아일보 특파원 자격으로 동년 8월 하와이에서 개최되는 제1차 범태평양회의에 파견되는 조선인 대표단 일행을 (김활란, 서재필, 신흥우, 유억겸) 따라 하와이를 다녀왔다.
[제1차 범태평양회의 참석 및 논문 발표]
동아일보 특파원 자격으로 제1차 범태평양회의에 조선인 대표단 일행과 함께 하와이를 다녀왔다. 귀국 후 '세계 대세와 조선의 장래'라는 논문을 12회에 걸쳐 동아일보에 발표하였다.
1925년 6월, 동아일보 특파원 자격으로 동년 8월 하와이에서 개최되는 제1차 범태평양회의에 파견되는 조선인 대표단 일행을 (김활란, 서재필, 신흥우, 유억겸) 따라 하와이를 다녀왔다. 6월말 하와이에 있던 이승만이 그에게 하와이에서 함께 일하자는 망명제의를 거절하였다. 1925년 8월 회의가 종료되자 8월 하순에 귀국하고, 보고서 형식의 '세계 대세와 조선의 장래'(世界大勢와 朝鮮의 將來)라는 제목의 논문을 12회에 걸쳐 동아일보에 발표하였다.
1926
[기념사 게재로 인한 동아일보 정간 및 징역형]
국제농민본부에서 조선농민에게 보내는 3·1운동 7주년 기념사를 번역하여 전문 게재한 일로 동아일보가 무기정간 처분을 받고, 주필이었던 그는 징역 6월의 실형을 선고받았다.
1926년 3월 5일 국제농민본부에서 조선농민에게 보내는 3·1운동 7주년 기념사를 번역하여 전문 게재하였다. 이 일로 3월 7일 동아일보는 제2차 무기정간 처분을 받고, 주필이었던 그는 발행인 김철중과 함께 재판에 회부되어 징역 각 6월의 실형을 선고받고, 항소했다.
[순종 유칙 위작 미수 및 6.10 만세 운동 취조]
순종 황제 승하에 맞춰 정인보와 함께 순종의 '유칙' 위작을 획책하였으나 발각되어 이루지 못했다. 이 사건으로 6·10 만세 운동 배후 조종 혐의로 종로 경찰서에서 취조를 받았다.
1926년 4월 21일 동아일보는 속간할 수 있었다. 4월 25일 순종이 병으로 죽자 그는 대규모의 만세시위를 일으킬 계획을 세운다. 6월 그는 융희황제 승하와 관련 정인보와 함께 순종의 '유칙' 위작(遺勅僞作)을 획책하였다가 발각되어 이루지 못하였다. 그는 곧 6·10 만세 운동을 배후에서 조종한 혐의로 종로 경찰서에 불려가 취조를 받았다.
1927
1926년 11월 3·1운동 7주년 기념사 관련 항소에서 패소하고 징역 6월형이 확정되어 복역하였다. 옥중에서 그는 국내외 사정을 알리는 편지 서신을 지어 임시정부와 하와이의 이승만에게 은밀히 보내려다가 발각되어 편지를 압수당하고 고문을 당했다. 1927년 2월 일본 신임 천황(裕仁) 즉위기념 특사로 출옥하였다. 형량 3개월을 앞두고 특별 가석방된 것이다.
[동아일보 사장 취임 및 집단폭행 사건]
동아일보 6대 사장으로 취임하였으며, 이 해 동아일보 함북지국장 회의에 참석 중 신간회 내 공산주의 계열의 조종으로 집단폭행을 당하였다.
7월부터 8월까지 동아일보의 전조선수리조합답사 특별 기획을 주관하였고, 1927년 10월부터 동아일보 6대 사장에 선임되어 활동하였다. 6월 송진우는 편집국장 이광수를 동아일보 편집고문으로 임명하고, 편집국장에 김준연을 임명했다. 11월 김구의 어머니 곽낙원이 아들의 활동에 짐이 될 것과 손자들의 건강을 우려해 귀국하였다. 12월부터는 기자를 파견해 재만동포들의 사정을 조사하기 시작하였다. 12월 동아일보 함북지국장의 회의에 참석하였다. 그러나 회의 참석중, 신간회내의 공산주의계열의 조종을 받은 하수인들에게 집단폭행을 당하였다.
1929
[제3차 범태평양회의 참석]
일본 교토에서 열린 제3차 범태평양회의에 유억겸, 김활란, 윤치호, 백관수 등과 함께 참석하고 귀국했다.
1928년 4월 문맹퇴치운동에 동참하였으나, 총독부의 압력으로 중단하고 말았다. 그러나 꾸준히 비밀리에 브나로드 운동을 지원해 나갔고, 1932년까지 지속할 수 있었다. 10월 중국 총통에 국민당 장개석이 취임하자, 취임식 취재차 주요한을 난징에 특파하였다. 이후 장개석 총통과는 긴밀한 연락이 있었다. 1929년 일본 교토 시 교토에서 열린 제3차 범태평양회의에 유억겸, 김활란, 윤치호, 백관수 등과 함께 참석하고 귀국, 1929년 9월 제1회 전국학생수상 경기대회를 창설하였고, 제1회 전조선남녀학생작품전도 기획, 개최하였다.
1931
[이충무공 유적 보존 운동 전개]
김성수, 조만식, 안재홍 등과 함께 이충무공 유적 보존 운동을 시작하여 모금 활동과 홍보에 힘썼다.
1931년 5월 이충무공 유적 보존운동을 시작하여 모금운동과 함께 조만식, 안재홍, 김성수 등과 충무공 유적지 보존 홍보활동을 하며 충무공 알리기에 힘썼다.
[브나로드 운동 시작 및 만보산 사건 진상 규명]
학생 하기방학 '브나로드 운동'을 시작했다. 만주에서 만보산사건이 일어나자, 일본의 한중이간책임을 사설로 논파하고 한중 양국민간의 보복중지를 호소하며 희생된 중국인 유가족에 대한 위문사업을 전개하였다.
1931년 7월에는 학생 하기방학 '브나로드 운동'을 시작했다. 이때 만주에서 만보산사건(萬寶山事件)이 일어나자 7월 일제가 만주침략의 구실을 마련하고자 중국농민들이 만보산부근에서 농업용수분쟁으로 조선농민들을 살해한다는 거짓정보를 퍼뜨리자 이에 흥분한 국민들이 국내화교를 공격살해하는 사건이 일어났다. 그는 이것이 일본의 한중이간책(韓中離間策)임을 사설로 논파하여 한·중 양국민간의 보복중지를 호소하였다. 한편 그는 대한민국 임시정부로 사람을 보내 일본과 조선총독부가 한국인을 위하는 것을 가장하여 한·중 양국을 이간질하려 하고 있다고 알렸다. 이후 송진우는 동아일보 사설과 방송 출연을 통하여 흥분한 국민을 진정시키고 위문금을 모아, 억울하게 당한 화교를 위로하고, 희생된 중국인의 유가족에 대한 위문사업을 전개하였으며 만보산사건에 서범석 기자를 특파하여 현지조사를 나온 국제연맹조사단에게 몰래 진상을 전달하였다. 후일 이를 안 장개석 총통은 경성화교협회장을 통하여 고하에게 감사하는 뜻으로 친인선린(親仁善隣)이라고 새겨진 감사패를 보내왔다.
1936
[손기정 일장기 말소 사건 및 사장직 사임]
베를린 마라톤에서 우승한 손기정 선수 사진의 일장기를 말소한 사건으로 총독부에 소환 조사를 받고 동아일보 사장직을 사임했다. 이로 인해 동아일보는 제4차 무기 정간 처분을 받았다.
1936년 8월 9일 베를린 마라톤에서 한국인 손기정이 우승하였다. 9월 동아일보의 기자 이길용은 사장의 지시에 따라 베를린 마라톤 대회에서 우승한 손기정을 보도할 때 일장기를 삭제한채 보도했다. 사장 송진우는 손기정 선수 사진에 일장기를 말소한 사건으로 11월 11일 총독부의 압력으로 사장직을 사퇴하였다. 송진우는 장덕수와 함께 조선총독부 경무국을 찾아가 동아일보의 폐간 조치를 철회해줄 것을 호소하였다.
1940
[동아일보 폐간 부당성 주장 중 피검]
일본 도쿄에서 일본 정객들에게 동아일보 강제폐간의 부당성을 주장하고 돌아오던 중 부산에서 피검당했다.
1939년 12월 총독부는 시국에 부응하여 다음해 2월까지 동아일보를 자진 폐간할 것을 강요하였다. 1940년 7월 송진우는 일본 도쿄로 건너가 일본 정객들에게 동아일보 강제폐간의 부당성을 주장하고 돌아오던 중, 부산에서 피검당하였다.
[동아일보 강제 폐간 및 일제 협력 거부]
조선총독부가 동아일보를 강제 폐간하였다. 이후 창씨개명을 거절하고 국민총력연맹 협조 요구 등 일제의 협력 제안을 병을 핑계로 회피하며 은거하였다.
1940년 8월 10일 조선총독부는 고하가 끝끝내 저항하자 발행인을 다른 사람으로 바꾸어 지령 6819호를 내려 동아일보를 강제 폐간했다. 8월 동아일보는 청산위원회를 열고 그를 주식회사 동아일보사 대표 청산위원에 선임했다. 1940년 조선총독부가 창씨 개명을 한국 사회에 강요했을 때, 송진우는 이를 한사코 거절하였는데, 총독부는 그가 창씨개명을 하지 않았다 하여 불이익을 주거나 처벌하지는 않았다. 1940년 10월에 일제가 국민총력연맹이라는 국민동원조직을 발족시킨 뒤에는 여기에 협조하라는 압력이 가중되었으나 병으로 전신을 움직일 수 없다는 이유로 일제에 협력하기를 회피해 왔다. 1941년 12월 8일 태평양전쟁이 일어나서 총독부로부터 학도병 권유유세 등 대일협력을 강요받았으나 거부하고 병을 핑계로 드러누웠다.
1942
[단파방송 청취 및 일제 패망 주장]
송남헌과 홍익범을 통해 단파방송 내용을 접했고, 여운형, 김성수 등과 '미국의 소리 단파방송'을 청취하며 일본 제국의 패망을 주장했다.
어느 날 홍익범은 송진우를 찾아와 그 동안 미국과 일본의 전쟁 전황을 외국인 선교사들 덕택에 알 수 있었는데, 그들이 감옥에 잡혀들어가거나 귀국하여 정세를 알 길이 없다며 도움을 청하였다. 송진우는 '어떻게 해서든지 현재의 정세를 알 수 있는 방법을 강구해 봤으면 좋겠다'고 답하였고 홍익범은 송남헌을 찾아갔다. 송남헌의 제안에 양제현은 처음에는 거부하였으나 비밀리에 단파방송 내용을 알려주는 데는 동의했다. 송진우는 이들에게서 단파방송을 접했고, 그결과 송남헌과 홍익범을 통해 단파방송 내용이 송진우 외에도 김병로, 이인, 허헌 등에게도 전달되었다. 1942년 여운형, 김성수 등과 '미국의 소리 단파방송'을 청취하기도 했다. 미국의 소리 한국어방송은 미일전쟁 발발 직후인 1942년 6월 13일 워싱턴DC에서 주미외교위원부 위원장 이승만에 의해 단파라디오로 송출되었다.
1945
[총독부 정권인수 제안 단호히 거절]
마지막 조선총독 아베 노부유키의 밀사가 비밀리에 송진우를 찾아와 일본인들의 재산을 지켜주고 안전하게 탈출할 수 있도록 도움을 요청하며 정권인수를 제의했으나, 그는 "모든 죄에는 대가가 따릅니다"라며 단호히 거절했다.
1945년 8월 8일, 마지막 조선 총독이었던 아베 노부유키의 밀사가 비밀리에 송진우를 찾아와 일본인들의 재산을 지켜주고 안전하게 탈출할 수 있도록 도움을 요청하였다. 아베 장군이 한국을 위해 시민 관리자가 되기를 원한다는 밀사의 제안을 거부하며 "이미 너무 늦었습니다. 한국인들이 일본이 전쟁에서 졌다는 사실을 알게 되는 그 순간, 혁명은 일어날 것이고 그들은 수천의 무죄한 일본 시민들을 죽일 것입니다. '모든 죄에는 대가가 따릅니다.'"라고 말하며 단호히 거절했다. 조선총독부는 1945년 8월 15일, 여운형과 접촉하기 전 1945년 8월 11일에 경기도지사 이쿠다를 통하여 한인 지도자 중 한 명이었던 송진우를 접촉하여 '행정위원회'를 구성하여 줄 것을 요청했으나 송진우는 중경의 대한민국 임시정부 봉대(奉戴)와 연합군의 승인을 이유로 대면서 그 요청을 거절하였다.
[건국준비위원회 참여 거절 및 국민대회준비위원회 조직]
해방 당일 여운형으로부터 건국준비위원회에 참여 요청을 받았으나 거절하였고, 이후 서상일, 김준연, 장택상 등과 함께 국민대회준비위원회를 조직했다.
8월 15일 오전, 휘문여자중학교에서 여운형, 박헌영, 안재홍 등의 명의로 건국준비위원회가 선포되었다. 그는 초청을 받았으나 가지 않았다. 해방 당일 이여성이 송진우를 만나 여운형과 협력할 것을 권유했으나 거절하였고, 그 다음 여운형이 송진우 집을 직접 찾아가 함께 손잡고 일하자고 간청했으나 역시 거절당했다. 여운형은 송진우에게 "내가 착수하는 일에 잘못이 있다고 생각한다면 서로 의논해서 고쳐나가도록 하자"고 거듭 요청했으나 끝내 동의를 못 얻었다. 일부에서는 협력을 거부하는 송진우에게 여운형이 지나치게 그를 우대 평가한다고 불평을 토로하였다. 그 후 이인이 여·송의 제휴를 위해 노력했으나 송진우의 거절로 성사가 되지 않았다. 건준에 참여를 거부하고 그는 8월 16일 서상일, 김준연, 장택상 등과 함께 국민대회준비위원회(약칭 국준)를 선포한다. 부유하지는 않았으나 태생적으로 사회주의자들의 분파, 선동 등에 염증을 느낀 그는 지역 유지들과 유학파, 지식인들을 중심으로 임정 봉대 및 민주국가 건설을 역설한다.
[한국민주당 초대 수석총무 취임]
장덕수, 허정, 백남훈, 김병로 등과 함께 한국민주당을 창당하고 초대 수석총무에 추대되었다.
9월 16일 한국민주당이 창당되자 이에 참가하여 한국민주당 초대 수석총무 겸 대표최고위원(당수)에 추대되었으며, 1945년 12월 1일 복간된 동아일보의 사장으로 취임하였다. 당시 임시정부는 해방전후로 연합국으로부터 대표성을 인정받기위해 노력했지만 실패해왔다. 송진우는 법통(정통성)을 가진 임시정부지만 국외에서 활동했던만큼 '국민대회'를 통해 국민들의 인정을 받아야 한다고 생각했고, 동시에 당시 난립해있던 여러 정치단체들이 서로 사상이 다르겠지만 우선은 법통을 가진 임시정부를 중심으로 단결하여 국제사회에 독립국가로 승인받아 민족의 독립을 완성해야 한다는 입장이었다.
[존 하지 미군정 사령관과 면담]
미군정청 사령장관 존 하지와 면담을 통해 조병옥의 국립경찰 장 임명 등 중대한 결정에 있어서 긴밀하게 협조하였고, 하지는 송진우를 미국의 점령 정책을 전달하는 수단으로 이용하였다.
1945년 10월 20일에는 환국지사환영위원회의 조직을 주도했다. 이승만이 귀국하자 그는 윤치영과 여러 독지가들과 사재를 모아 돈암장을 빌려 그의 거처를 마련해주었고 11월 중순 이승만을 찾아가 국민총동원의 방법을 협의하였다. 10월 31일 미군정청 사령장관 존 하지와의 면담을 통해 중요한 토론을 하였다. 토론에서 하지는 송진우에게 조병옥을 국립경찰의 장으로 임명하는 것과 같은 건을 상의하여 중대한 결정에 있어서 송진우와 긴밀하게 협조하였다. 하지 중장은 또한 한국에 있어서의 미국의 행동을 설명하는 데 있어서 송진우를 전달수단으로 이용하였다. 11월 1일 송진우는 '하지가 그 전날 자신에게 말한 신탁통치에 관한 모든 얘기는 미 국무성 극동사무국의 책임자인 빈센트 한 사람의 의견이며 그가 한국 정치를 지배할 위치에 있지는 않다'고 말하였다.
[임정 환국 요인들과 경교장 갈등]
대한민국 임시정부 제1진이 환국하자 김성수, 허정, 장택상, 조병옥, 김준연과 함께 경교장을 찾았다. 하지만 임정 요인들이 후원금에 "깨끗하지 못한 돈이 들어있다"며 문제를 제기하여 격렬한 갈등이 발생했다.
1945년 11월 3일 대한민국 임시정부 제1진이 환국하자 김성수, 허정, 장택상, 조병옥, 김준연과 함께 경교장을 찾았다. 그러나 경교장에 근무를 서던 광복군은 잠시 기다리라 해놓고는 청사로 들어가 6시간 뒤에 나타났다. 이 탓에 그는 눈밭에서 떨었다. 당시 임정을 찾았던 다른 한민당 인사들은 분노하였으나 이후에도 계속 송진우는 임정봉대론을 주장하며 임시정부와의 합작을 역설하였다. 김구 일행이 서울에 입경한 그 다음날 아침 송진우는 낭산 김준연을 대동하고 백범의 숙소로 마련된 서울 서대문의 경교장으로 예방해 불굴의 노애국자에 대한 경의를 표시했고, 같은 날 낮 이번에는 국민대표준비회의 대표 자격으로 장택상을 대동하고 예방해 후원회 기금을 전달했다. 얼마 뒤에 임정 요인들은 그 후원금 가운데 깨끗하지 못한 돈이 들어있다 하여 국민대표준비회 사무실로 들고와 처리 문제를 논란했다. 대화는 자연히 거칠어지면서 주먹과 흥분의 수라장이 벌어졌다. 조용히 듣고만 있던 고하는 참다못해 “정부가 받는 세금 속에는 양민의 돈도 들었고 죄인의 돈도 들어 있는 것이요. 이런 나라세우기의 큰일에 그런 사소한 것을 가지고 왈가왈부할 필요가 없을 줄 아오”라고 설득함으로써 겨우 수습하기도 했다.
[북한 소련군정 압제에 대한 항의]
소련 영사 알렉산드르 폴랸스키를 방문하여 북한 지역의 소련군과 공산주의자들의 주민 탄압에 항의하고 소련군 철수를 요구했다.
1945년 12월 초순 송진우는 소련 영사관으로 영사 알렉산드르 폴랸스키를 방문하여 북한 지역에서의 소련군과 공산주의자들의 행동과, 북한지역 주민들을 탄압하는데 대해 항의를 하며 소련군 철수를 요구했다. 이에 대해 폴랸스키는 이런 의견을 자기 나라에 잘 전달하겠다고 정중하게 답했다고 한다. 당시 북한의 소련군정 및 공산주의자들의 인권 유린 문제와, 소련군 병사들의 부녀자 겁탈, 민간 재산 약탈 및 소련군의 산업 시설 소련 반출 문제 등이 심각했고, 남한에도 어느 정도 알려졌음에도 불구하고, 남한의 정치인으로 이에 대해 문제 제기를 하고 항의 의사를 공개적으로 표명한 경우는 거의 찾아볼 수 없다.
사망 직전인 1945년 12월 1일에 동아일보 8대 사장에 취임하였다.
[신탁통치 문제 관련 하지 회담 및 경교장 회의]
존 하지 군정청 사령장관과 회담 후, 경교장 회의에 참석하여 김구 등의 격앙된 반탁 주장에 대해 침착하고 신중하게 대처하며 물리적 충돌은 피할 것을 주장했다.
12월 28일 중앙청을 방문, 신탁통치 문제로 아놀드 미군정장관과 회담을 통하여 반탁시위의 정당성을 강조하였다. 12월 29일 송진우는 미군정청 사령관 존 하지의 면담요청을 받았다. 하지는 자문위원인 송진우를 불러 임시정부와 우익 진영에 대한 설득을 당부하였다. 미군정에서는 만약에 대비하여 경호원을 붙여줄 것을 제안하였으나 그는 거절하였다. 12월 29일 밤 각 정당과 사회단체 대표들이 김구의 숙소인 경교장에 모였다. 강원용의 증언에 의하면 당시 회의에 정당 대표들, 좌익, 우익, 중간파 할 것 없이 다 모였고, 남로당 사람들까지 다 나왔다. 다들 아주 격해 있었다. 김구는 눈물을 흘리면서 목멘 소리로 "우리 민족은 다 죽는 한이 있더라도 신탁통치만은 받을 수 없으며 우리들은 피를 흘려서라도 자주 독립정부를 우리들 손으로 세워야 한다" 고 절규하였다. 김구는 신탁통치에 찬성하는 자는 매국노라고 규정하였다. 그런데 송진우만은 “침착하고 신중하게 대처하자”고 했다. 송진우는 미국을 적으로 돌리면 공산당이 어부지리를 얻는다는 생각에서 김구와 맞섰다. 송진우는 김구의 중경 임시정부의 통치권 주장을 미 군정에서 도저히 받아들이지 않을 것이라고 판단했던 것이다. 송진우의 항변에 좌중은 놀랐고, 송진우를 비난하는 발언들이 나왔다. 그러나 송진우는 자신이 반탁 입장임을 명시하고, 무력으로 미군정으로부터 정권을 접수하려 해서는 승리할 수 없다고 설득해 나갔다.
[신탁통치 논란 중 암살당함]
신탁통치 문제를 놓고 신중한 반탁론 입장을 펼치다 찬탁론자로 오인되어, 새벽 6시 15분 서울 종로구 원서동 자택에서 한현우 등 6인의 총격을 받고 피살당했다.
1945년 12월 30일 새벽 6시 15분에 자택에서 한현우(韓賢宇) 등의 저격을 받고 암살당했다. 그의 나이 향년 56세였다. 범인은 한현우, 유근배 등 6명이었고 탄환 13발 중 6발이 명중했다. 범인 중 한 사람인 한현우는 송진우가 미국의 후견을 지지한 것이 자신의 저격동기였고 배후는 없었으며 김구와 이승만이 자신들을 의거를 단행한 의사로 칭찬해 주었다고 주장했다. 송진우가 암살되는 시점에도 송영수 내외는 송진우의 원서동 댁 안채에서 자고 있다가 자객 침투 후 추격했다. 송영수와 하인들의 추격 끝에 한현우와 유근배를 생포했고 나머지 공범 4명도 검거하여 군정청 경찰서로 넘겼다. 암살조의 우두머리인 한현우는 '좌익에선 여운형, 우익에선 송진우가 나라를 망치려 해서 둘 다 죽이려고 했다.'고 암살 이유를 밝힌바 있다. 그의 암살 직후 암살범들의 수사와 재판과정은 알려지지 않았으며, 그가 건국준비위원회와 조선인민공화국에 강하게 반대한 점과 박헌영 등을 비난한 것을 이유로 좌익 계열에서 암살했을 것이라는 소문이 유포되었다.
1963
대한민국 정부는 그의 공헌을 기려 1963년 건국훈장 독립장을 추서하였다.
1983
1983년 9월 23일 서울 어린이대공원에 동상이 세워졌다.
1997
1997년 12월 27일 대한민국 문화관광부로부터 이달의 문화인물(12월)에 지정되었다. 2009년 담양현지의 생가가 복원되었고 2010년 생가 옆에 고하기념관이 건립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