성시백 (1905년)
공산주의 운동가, 정치가, 대남 공작원
최근 수정 시각 : 2025-10-21- 17:11:35
성시백은 1905년 황해도에서 태어나 3.1 운동에 참여하며 독립운동에 투신. 1925년 공산주의 활동 시작, 상하이 망명 후 중국공산당 입당, 저우언라이와 인연. 광복 후 김일성 특사로 남한 내 지하 공작 총책임자로 활약하며 조직망 구축. 1950년 체포되어 간첩죄로 사형 선고, 한국전쟁 발발 직후 처형. 북한에서는 '공화국 영웅 1호'로 추앙받으며 '남조선 혁명가'로 칭송.
1905
1905년 4월 5일 황해도 평산에서 출생한 성시백은 소학교를 졸업한 후 서울에 있는 중동학교 고등과를 졸업했다. 중등학교 재학 중 3·1 운동에 참가하여 독립운동에 대한 의지를 보였다.
1925
[공산주의 운동 시작 (고려공산청년회 활동)]
20세가 되던 해부터 고려공산청년회에서 활동을 시작하며 공산주의 운동에 첫발을 내딛었다.
20살이 되던 1925년부터 다음 해인 1926년까지 고려공산청년회에서 활동하며 본격적인 공산주의 운동에 투신하기 시작했다.
1928
1928년, 성시백은 상하이로 망명길에 올랐다. 이 망명은 그의 이후 공산주의 활동에 중요한 전환점이 되었다.
1932
[중국공산당 입당 및 지하 활동]
상하이 망명 중 중국공산당에 입당하여 정향명이라는 가명으로 국민당 통치 지역에서 공산당 정보기관 총책임자로 활동했다. 이때 중국 수상을 지낸 저우언라이와 깊은 인연을 맺었다.
1928년 상하이로 망명한 성시백은 1932년 중국공산당에 입당했다. 그는 정향명(丁向明)이라는 가명을 사용하며 후종난(胡宗南) 연대장의 막료로, 국민당 통치하의 서안지구 공산당 정보기관의 총책임자로 활동하는 등 주요 지하활동에 종사했다. 이 과정에서 중국의 지도자 저우언라이와 깊은 인연을 맺게 되었다.
1935
[조선민족혁명당 입당]
상하이에서 중국혁명호제회 회원으로 활동 중 체포되어 난징 감옥에서 복역한 후, 충경 조선민족혁명당에 입당했다.
상하이에서 중국혁명호제회 회원으로 활동하던 성시백은 체포되어 난징 감옥에서 복역했다. 이후 1935년 충칭(중경) 조선민족혁명당에 입당하며 독립운동 활동을 이어갔다.
1946
[광복 후 평양 입성 및 직책 수행]
광복 후 부산과 서울을 거쳐 평양에 입성, 조선공산당 북조선분국 사회부 부부장(이후 통일전선부로 명칭 변경)을 지냈다.
1946년 2월, 성시백은 광복 후 부산과 서울을 거쳐 평양으로 들어갔다. 그는 조선공산당 북조선분국 사회부(이후 통일전선부로 명칭 변경)의 부부장을 지내며 북한에서의 활동을 시작했다.
[김일성 직계, 남한 공작 활동 개시]
김일성의 직계 인물로서 박헌영의 조선공산당과의 연락 업무와 남한 정세 파악, 좌우합작 및 3당합동 사업의 최선두에서 핵심적인 공작 활동을 펼쳤다.
1946년 3월부터 성시백은 김일성의 직계로 활동하며 박헌영의 조선공산당에 대한 연락 업무와 남한 정세 파악, 그리고 좌우합작과 3당합동 사업의 최선두에서 중요한 역할을 수행하며 본격적인 대남 공작 활동을 시작했다.
[김일성 특사로서 남한 지하 조직망 구축]
김일성의 특사로 자임하며 서울로 와서 지하운동에 종사, 남한의 우익 및 중간 정당·단체, 미군정청, 경찰, 첩보대, 군부, 재외대표부 등 주요 기관에 산하조직을 구축했다. 그는 『조선중앙일보』, 『광명일보』 등 10여 종의 신문을 창간하여 선전 공작에 활용했다.
1946년 12월, 성시백은 '김일성의 특사'로 자임하고 서울로 내려와 지하운동에 본격적으로 종사하기 시작했다. 그는 남한 내 우익 및 중간 정당·단체들, 미군정청, 경찰, 첩보대, 군부, 심지어 재외대표부에까지 광범위한 산하조직들을 만들며 영향력을 확대했다. 또한, 『조선중앙일보』를 창간한 데 이어 『광명일보』를 비롯한 10여종이나 되는 신문들을 경영하여 선전공작에 적극적으로 활용했다.
1947
[근로인민당 결성 지원 및 김일성과의 합작 논의]
남한 내 공작 활동의 일환으로 근로인민당 결성을 지원하고, 같은 해 겨울 김일성을 만나 공산주의자와 민족주의자의 합작에 대해 논의했다.
1947년 5월, 성시백은 근로인민당 결성을 지원하며 남한 내 공산주의 세력 확장에 힘썼다. 같은 해 겨울에는 김일성을 만나 공산주의자들과 민족주의자들의 합작에 대해 심도 깊은 논의를 나누는 등 통일 전선 구축을 위한 노력을 지속했다.
1948
[남북연석회의 및 남조선인민대표자대회 참가]
남북연석회의에서 실무 역할을 담당했으며, 8월 해주에서 열린 남조선인민대표자대회에 참가하는 등 남북한 관계에서 중요한 역할을 수행했다.
1948년 4월, 성시백은 남북연석회의에서 실무적인 역할을 담당하며 남북 관계의 가교 역할을 수행했다. 또한 같은 해 8월 해주에서 열린 남조선인민대표자대회에 참가하는 등 주요 정치적 행보를 이어갔다.
1949
[남한 정보당국, 북한 공작 활동 인지]
남한의 경찰 및 여러 군 수사 기관들은 북한의 김일성으로부터 특수 지원과 자금을 받아 남한의 주요 기관에 비밀 공작원을 잠입시켜 기밀을 빼내는 활동이 이루어지고 있다는 정보를 입수했다.
1949년 즈음부터 서울의 경찰 및 여러 군 수사 기관에서는 북한의 김일성으로부터 특수 지원과 자금을 받아, 남한의 주요 기관에 비밀 공작원을 잠입시켜 기밀을 빼내는 등의 여러 활동이 이루어지고 있다는 정보를 입수하고 있었다. 이는 이후 성시백 체포로 이어지는 중요한 배경이 되었다.
1950
[시신 미발견 및 가묘 조성]
대한민국에서 사형선고를 받고 한국전쟁 발발 직후 총살당한 그의 시신은 발견되지 못해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 평양의 애국열사능에 가묘가 조성되었다.
성시백은 대한민국에서 사형선고를 받고 한국전쟁이 발발한 다음 날 총살 당했다. 그의 시체는 한국전쟁 이후 발견되지 못했기 때문에 가묘만 존재하며, 가묘는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 평양직할시 신미리에 있는 애국열사능에 위치해 있다. 그의 묘비에는 '성시백 동지'란 이름 아래에 '남조선 혁명가'라고 쓰여져 있다.
[북로당 남반부정치위원회 본거지 및 부책임자 체포]
남한 정보당국이 '북로당 남반부정치위원회'의 본거지를 파악하고 최고 부책임자 김명용을 체포, 조직 문건과 기밀 정보를 확보하며 성시백 체포 작전이 급물살을 탔다.
1950년 2월경부터 남한의 정보당국은 본격적인 내사를 시작하여, 2월 10일에 '북로당 남반부정치위원회'의 본거지를 파악하고 최고 부책임자인 김명용(金明用)을 체포했다. 이 과정에서 조직문건의 일부와 각종 기밀정보, 관계서류 등을 확보하며 성시백 검거 작전에 결정적인 단서를 마련했다.
[성시백 체포]
'북로당 남반부정치위원회'의 최고책임자였던 성시백이 서울 종로구 효제동에서 남한 정보당국에 의해 체포되었다.
1950년 5월 15일 오전 3시, '북로당 남반부정치위원회'의 최고책임자였던 성시백은 서울시 종로구 효제동에서 남한 정보당국에 의해 체포되었다. 이는 남한 내 북한 공작 활동에 대한 대대적인 수사의 결과였다.
성시백은 같은 해 1950년 6월, 군사재판에서 간첩죄로 사형을 선고받았다. 이는 그의 대남 공작 활동에 대한 법적 심판의 결과였다.
1950년 6월, 군사재판에서 간첩죄로 사형을 선고받은 성시백은 한국전쟁이 발발하자 다음 날인 6월 27일 처형당했다. 그의 죽음은 한국전쟁 초기에 발생한 비극적인 사건 중 하나이다.
1990
[북한, '공화국 영웅 1호'로 성시백 추앙]
사후 북한에서 '공화국 영웅 1호' 칭호를 받고 혁명렬사릉에 가묘가 안치되었다. 1990년대 초에는 그에 대한 영화 '붉은 단풍잎'이 제작 방영되었고, 1997년 노동신문에서는 '통일혁명렬사'로 칭송받는 등 '남조선 혁명가'로 추앙받고 있다.
성시백은 대한민국에서 사형선고를 받고 한국전쟁이 발발한 다음 날 총살 당했다. 그의 시체는 한국전쟁 이후 발견되지 못했기 때문에 가묘만 존재하며, 가묘는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 평양직할시 신미리에 있는 애국열사능에 위치해 있다. 사후 성시백은 '공화국 영웅 1호' 칭호를 부여하고 그를 혁명렬사릉에 안치(가묘)했다. 1990년대 초반에는 성시백에 대한 영화인 '붉은 단풍잎'이란 7부작 영화를 제작하여 방영하기도 했다. 1997년 5월 26일자 노동신문에서는 '민족의 령수를 받들어 용감하게 싸운 통일혁명렬사'라는 제목으로 성시백의 남한 내 공작행위를 칭송했다. 북한은 성시백을 '남조선 혁명가' 또는 '통일혁명렬사'로 칭송하고 있다.
2004
[막내아들 성자립, 김일성대학 총장]
성시백의 가족은 월북했으며, 막내아들 성자립은 2004년 북한에서 김일성대학 총장을 지냈다.
성시백의 가족은 한국전쟁 이후 월북했으며, 그의 막내아들 성자립은 2004년 북한에서 최고 학부인 김일성대학 총장이 되었다. 이는 성시백 일가가 북한 사회에서 차지하는 위상을 보여준다.
2005
[금강산 이산가족 상봉 행사에서 가족 공개]
성시백의 일가가 2005년 8월, 금강산호텔의 이산가족 상봉 행사에서 모습을 드러내어 그들의 존재를 알렸다.
성시백의 일가는 2005년 8월, 금강산호텔에서 열린 이산가족 상봉 행사를 통해 외부에 그들의 모습을 드러낸 적이 있다. 이는 그들의 월북 이후 한국 사회에 알려진 몇 안 되는 가족 소식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