방희 (후한)
후한 장군, 삼국시대 인물
최근 수정 시각 : 2025-10-21- 17:10:04
방희는 후한 말 유장 휘하의 장군으로, 유언 가문과 친교를 맺었다. 유언의 손자들을 구하며 유장과의 돈독한 관계를 형성했으나, 군사력 증강 과정에서 모함을 받아 갈등을 겪기도 했다. 이후 유비가 익주를 평정하자 그에게 협력하여 좌장군사마를 역임했다. 그의 사위는 유순이다.
194
[유언 가문의 손자들 구출]
유언의 아들들이 사망한 후, 의랑 방희가 유범, 유탄, 유장의 아들들을 데리고 촉으로 무사히 들어갔다. 이 공로로 유언의 뒤를 이은 유장으로부터 두터운 대우를 받으며 돈독한 관계를 형성했다.
194년(흥평 원년), 익주목 유언이 이각·곽사·번조 정권을 몰아내려다 실패하여 장안에 있던 아들 유범과 유탄이 사망하는 비극이 발생했다. 이때 의랑 방희는 유범, 유탄, 그리고 유장의 아들들을 데리고 촉으로 들어와 이들의 안전을 책임졌다. 유언이 같은 해 슬픔을 이기지 못하고 사망하자, 유장이 그의 뒤를 이어 익주목이 되었다. 방희는 이러한 공로로 유장으로부터 매우 후한 대우를 받게 되며, 유장과의 관계가 깊어졌다.
[장로 방어와 군사력 증강 중 참언]
장로가 유장으로부터 이탈하자, 방희는 화덕중랑장으로서 장로를 공격했으나 실패했다. 이후 파군 태수로 임명되어 장로를 방비하며 군사력을 확충했으나, 이 과정이 유장에게 모함으로 전달되어 관계가 나빠졌다.
유장으로부터 장로가 이탈하자, 유장은 장로의 모친과 동생을 죽이고 화덕중랑장 방희를 시켜 장로를 공격하게 했다. 그러나 방희는 누차 패배했다. 이후 방희는 파군 태수에 임명되어 낭중현에서 장로를 방비하는 역할을 맡았다. 그는 병력 확충의 필요성을 느껴 한창현의 종민들을 모으는 등 군세를 키웠으나, 이 행동이 누군가에 의해 유장에게 참언으로 전해지면서 유장과의 관계가 험악해졌다.
201
[정기와의 설전과 유장에게 사죄]
조위의 난 진압 후 방희는 두려워 한창현령 정기에게 병사를 요구했으나, 정기는 대의를 내세워 거절하며 불의한 행동을 경계했다. 이에 방희는 유장에게 사죄했고, 이때 삼파 명칭이 정립되어 그의 관직은 파서태수로 변경되었다.
201년(건안 6년), 조위가 전해에 일으킨 난이 이 해에 진압되자, 방희는 두려움을 느껴 한창현령 정기에게 그 아들 정욱을 통해 종인 병사를 더 요구했다. 그러나 정기는 "군에서 부곡을 모집한 것은 반란을 위해서가 아닙니다. 아무리 모함을 받았더라도 성심을 다해야 합니다. 딴마음을 품으셨다면 듣지 못하겠습니다."라며 거절했다. 또한 정욱에게도 대의를 강조하며 불의지사를 해서는 안 된다고 당부했다. 방희가 다시 사자를 보내 정기에게 위협했지만, 정기는 "옛날에 악양은 자식을 먹었는데 부자의 정이 없어서가 아니라 대의 때문에 그랬습니다. 제 아들을 끓인 국일지라도 마시겠습니다."라고 단호히 답했다. 이에 방희는 유장에게 사죄하게 되었다. 이 해에 삼파의 명칭이 정립되면서 방희의 관직명은 파서태수로 바뀌었다.
214
[유비 입촉 후 좌장군사마 임명]
유비가 익주를 정복하자 방희는 유비에게 협력하여 좌장군사마가 되었다. 그의 사위 유순은 유비의 휘하에 남아 봉거중랑장을 지냈으며, 219년에는 유비를 한중왕으로 올리는 표에 이름을 올렸다.
214년, 유비가 익주를 정복하자 방희는 유비에게 협력하여 좌장군사마(左將軍司馬)가 되었다. 이때 형주로 쫓겨난 유장에게 그의 큰아들이자 방희의 사위인 유순은 익주에 남으라고 조언했고, 유순은 촉에 남아 봉거중랑장(奉車中郞將)을 지냈다. 219년에는 여러 신하들이 유비를 한중왕(漢中王)으로 올림을 헌제에게 알리는 표에 방희도 이름을 올렸다. 파서태수일 적에 식객으로 등지를 들인 일도 기록되어 있다. 이후의 행적은 기록이 없어 알 수 없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