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태준 (1927년)

군인, 기업인, 정치인, 국무총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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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근 수정 시각 : 2025-10-21- 17:09:4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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군인, 기업인, 정치인, 국무총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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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한민국 경제 발전의 핵심 인물. 육군 장교로서 한국 전쟁에 참전했으며, 포스코를 창립하고 '철강왕'으로 불리며 세계적인 기업으로 성장시켰습니다. 이후 정치인으로 변모하여 국회의원과 국무총리를 역임했으나, 정치적 부침을 겪기도 했습니다. 그의 '제철보국' 정신은 한국 산업사에 큰 족적을 남겼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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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27

[출생]

경상남도 동래군 장안면 임랑리에서 태어났으며, 어린 시절을 경상남도 양산군과 부산부에서 보냈습니다.

박태준은 경상남도 동래군 장안면 임랑리에서 태어났습니다. 어린 시절은 경상남도 양산군과 부산부에서 보냈습니다.

1933

[일본으로 이주 및 성장]

6살의 어린 나이에 일가족과 함께 일본으로 건너가 그곳에서 성장했습니다.

박태준은 6살 때 일가족과 함께 일본으로 건너가 그곳에서 어린 시절과 학창 시절을 보냈습니다.

1945

[광복과 귀국]

와세다대학교 예과에 입학했으나, 광복으로 학업을 중단하고 귀국했습니다.

와세다대학교 예과에 입학했으나, 대한민국의 광복으로 학업을 중단한 후 귀국하여 새로운 삶을 시작했습니다.

1947

[남조선경비사관학교 입학]

남조선경비사관학교 6기로 입학하여 군인의 길을 걷기 시작했습니다.

남조선경비사관학교 6기로 입학했으며, 생도 시절 박정희 대위와 인연을 맺었습니다.

1948

[육군 소위 임관 및 한국 전쟁 참전]

육군 소위로 임관한 후, 한국 전쟁에 참전하여 충무무공훈장과 화랑무공훈장을 받으며 국가를 위해 헌신했습니다.

육군 소위로 임관하여 군인의 길을 걸었고, 한국 전쟁에 참전하여 여러 무공훈장을 받으며 뛰어난 리더십과 용맹함을 보여주었습니다. 또한, 5.16 군사 정변 당시 박정희의 부탁으로 그의 가족을 돌보는 중요한 역할을 맡기도 했습니다.

1950

[충무무공훈장 수훈]

한국 전쟁 참전 중 충무무공훈장을 수훈했습니다.

박태준은 한국 전쟁에 참전하여 충무무공훈장을 수훈받았습니다.

1951

[화랑무공훈장 수훈]

한국 전쟁 참전 중 화랑무공훈장을 수훈했습니다.

박태준은 한국 전쟁에 참전하여 화랑무공훈장을 수훈받았습니다.

1961

[경제개발 계획 참여 및 학업 지속]

국가재건최고회의 상공분과위원 등으로 활동하며 경제개발 5개년 계획 입안에 관여하고, 단국대학교 정법학부 정치학과에 편입하여 학업을 이어갔습니다.

국가재건최고회의 상공분과위원 등으로 활동하며 경제개발 5개년 계획의 입안에 관여했습니다. 또한, 고위급 관료들의 4년제 대학 학위 이수 요구에 따라 단국대학교 서울캠퍼스 정법학부 정치학과에 편입하여 학업을 지속했습니다.

1963

[단국대학교 학사 취득 및 육군 소장 예편]

단국대학교에서 학사 학위를 취득하고, 9월 22일 육군 소장으로 예편하며 군복무를 마쳤습니다.

단국대학교에서 학사 학위를 취득했으며, 같은 해 9월 22일 육군 소장으로 예편하면서 군 생활을 마무리했습니다.

1964

[대한중석 사장 취임 및 흑자 전환]

대한중석 사장으로 임명되어 1년 만에 회사를 흑자로 전환시키는 뛰어난 경영 능력을 보여주었습니다.

군 예편 후 기업인으로 전향하여 대한중석 사장으로 임명되었습니다. 그는 불과 1년 만에 대한중석을 흑자로 전환시키며 경영자로서의 역량을 입증했습니다.

1968

[포항제철 초대 사장 취임]

포항제철(현 포스코)의 초대 사장으로 취임하며 '제철보국'의 꿈을 안고 한국 철강 산업의 역사를 새롭게 쓰기 시작했습니다.

박태준은 포항제철(현 포스코)의 초대 사장으로 취임했습니다. 그는 기술도 자본도 없는 철강 불모지 한국에 '제철보국'의 이념 아래 일관제철소를 건설하겠다는 비장한 각오로 사업을 이끌었으며, 이는 그의 가장 위대한 업적의 시작이었습니다.

1973

[포항제철 제1고로 첫 쇳물 생산 성공]

포항제철 제1고로에서 첫 쇳물 생산에 성공하며 '제철보국'의 꿈을 현실로 만들었습니다. 조업 개시 6개월 만에 흑자를 달성하는 기적을 이뤄냈습니다.

박태준 회장의 지휘 아래 포항제철 제1고로에서 역사적인 첫 쇳물이 생산되었습니다. 이는 '제철보국'의 이념을 실현한 감격적인 순간이었으며, 조업 개시 6개월 만에 흑자를 달성하는 놀라운 경영 성과를 보여주며 포항제철을 세계 굴지의 기업으로 성장시키는 초석을 다졌습니다. 세계은행 전문가들도 기적이라고 칭송한 사건입니다.

1974

[국민훈장 무궁화장 수훈]

국가 발전에 기여한 공로로 국민훈장 무궁화장을 수훈했습니다.

국가산업 발전에 기여한 공로를 인정받아 국민훈장 무궁화장을 수훈했습니다.

1975

[한국철강협회 회장 취임]

한국철강협회 회장에 취임하여 1990년까지 한국 철강 산업 발전을 이끌었습니다.

1975년부터 1990년까지 한국철강협회 회장을 역임하며 한국 철강 산업의 성장과 국제적 위상 강화에 기여했습니다.

1978

[광양제철소 건설 계획 수립]

포항제철의 성공을 바탕으로 제2의 신화인 광양제철소 건설 계획을 수립했습니다.

포항제철 1기의 성공에 힘입어 그는 광양제철소 건설이라는 또 다른 대규모 프로젝트를 계획했습니다. 이는 한국 철강 생산능력을 세계 최고 수준으로 끌어올리는 계기가 되었습니다.

1980

[정계 입문]

국가보위입법회의 경제 제1위원장으로 취임하며 정계에 입문했습니다.

국가보위입법회의 경제 제1위원장으로 취임하며 본격적으로 정계에 발을 들였습니다. 이후 한일의원연맹 회장, 한일경제협의회 회장 등을 역임했습니다.

1981

[제11대 국회의원 당선]

제11대 국회의원(민주정의당, 전국구)으로 당선되어 국회 재무위원장을 역임했습니다.

제11대 국회의원(민주정의당, 전국구)으로 당선되어 국회 재무위원장을 역임하며 입법 활동을 펼쳤습니다.

1982

[광양제철소 완공]

광양제철소를 성공적으로 완공하며 포스코를 연간 2,100만 톤 생산 체제로 구축, '신화창조자'라는 찬사를 받았습니다.

광양제철소를 완공함으로써 포스코는 10년 후 연간 2,100만 톤 생산체제를 구축하게 됩니다. 이는 '원조 철강왕' 카네기가 35년에 걸쳐 이룬 성과를 25년 만에 달성한 것으로, 세계 철강업계로부터 '신화창조자(Miracle-Maker)'라는 칭송을 받았습니다.

1987

[영국 금속학회 베서머 금상 수상]

영국 금속학회로부터 세계 철강 산업 발전에 기여한 공로로 베서머 금상을 수상했습니다.

박태준은 세계 철강 산업 발전에 기여한 공로를 인정받아 영국 금속학회로부터 최고 권위의 베서머 금상을 수상했습니다.

1988

[민주정의당 대표 취임]

민주정의당 대표를 맡으며 주요 정치인으로 자리매김했습니다.

민주정의당 대표를 맡아 당을 이끌었으며, 한일경제협회 명예회장으로서 국제적인 교류 활동도 활발히 펼쳤습니다.

1990

[민주자유당 최고위원 및 레종도뇌르훈장 수훈]

3당 합당 이후 민주자유당 최고위원이 되었고, 프랑스 최고 훈장인 레종도뇌르훈장을 수훈했습니다.

3당 합당 후 민주자유당 최고위원이 되어 정치적 영향력을 확대했습니다. 같은 해 프랑스 최고 훈장인 레종도뇌르훈장을 수훈받으며 국제적인 인물로 인정받았습니다.

1992

[포항제철 회장직 사임 및 정치적 시련]

김영삼 행정부와의 불화로 인해 포항제철 회장직에서 사임하고, 국회의원직도 사퇴하며 정치적 격변기를 맞았습니다.

김영삼 행정부와의 정치적 불화로 인해 포항제철 회장직에서 결국 물러났습니다. 그는 포항제철을 정치 외풍에서 지키는 울타리 역할을 해왔으나, 정권 수립 직전 회장직을 내놓아야 했습니다. 이어 제14대 대통령 선거를 앞두고 국회의원직도 사퇴하며 큰 정치적 시련을 겪었으며, 이후 특정 혐의로 인해 한동안 해외에 머물기도 했습니다.

[정치적 시련과 해외 체류]

김영삼 정부의 표적 수사 의혹을 받으며 해외를 떠돌았고, 정치적 공백기를 보냈습니다.

포항제철 회장직 사임 이후, 민자당 대선 후보 경선에서 김영삼 후보의 반대편에 섰던 이유로 김영삼 정부의 표적 수사라는 의혹이 제기되며 포항제철 협력사로부터 금품을 수수한 혐의를 받았습니다. 이로 인해 한동안 외국에 머물며 정치적 공백기를 가졌습니다.

1997

[정계 복귀 및 자유민주연합 총재 취임]

자유민주연합에 입당하여 포항시 북구 보궐선거에서 당선되며 정계에 화려하게 복귀했습니다. 이후 자유민주연합 총재로 취임하여 김대중 대통령 당선을 지원했습니다.

자유민주연합에 입당하여 포항시 북구 보궐선거에 출마, 당선되며 정계에 성공적으로 복귀했습니다. 이후 자유민주연합의 총재가 되었고, 김종필 총재와 함께 김대중 후보의 제15대 대통령 선거 당선을 적극 지원하며 새로운 정치적 영향력을 행사했습니다.

2000

[제32대 국무총리 취임]

김대중 행정부의 제32대 국무총리로 취임하며 대한민국의 행정을 총괄하는 최고위직에 올랐습니다.

김대중 행정부에서 제32대 국무총리로 취임하며 대한민국 행정의 최고 수장 자리에 올랐습니다. 이는 그의 정치 인생에서 정점을 찍는 순간이었습니다.

[국무총리 불명예 퇴진]

부동산 명의신탁 의혹으로 인해 국무총리 취임 4개월 만에 불명예 퇴진하며 다시 한번 정치적 어려움을 겪었습니다.

부동산 명의신탁 의혹으로 궁지에 몰려 국무총리 취임 4개월 만에 불명예 퇴진하게 되었습니다. 이는 그의 정치 경력에서 아쉬운 오점으로 남았습니다.

2001

[흉막섬유종 수술]

미국 코넬대학교 병원에서 흉막섬유종 수술을 받았습니다.

미국 코넬대학교 병원에서 흉막섬유종 수술을 받았으며, 이후 이로 인한 후유증에 시달렸습니다.

2011

[청조근정훈장 추서]

대한민국 산업 발전에 기여한 공로로 청조근정훈장이 추서되었습니다.

그의 사망 후 대한민국 산업 발전에 기여한 지대한 공로를 인정받아 청조근정훈장이 추서되었습니다.

[별세]

흉막섬유종 수술 후유증으로 인한 호흡 곤란 증세가 악화되어 향년 85세로 별세했습니다. '포스코가 국가 산업 동력으로 성장하길 바란다'는 유언을 남겼습니다.

연세대학교 세브란스병원에서 흉막섬유종 수술 후유증으로 인한 호흡 곤란 증세로 향년 85세를 일기로 별세했습니다. 그는 '포스코가 국가 산업 동력으로 성장하길 바란다'는 유언을 남겼으며, 발인일인 17일 국립서울현충원 국가사회유공자묘역에 안장되었습니다.

2012

2012.06.21 사후 1년

[세계 철강 명예의 전당 헌액]

전 세계 철강 산업에 기여한 공로를 인정받아 '세계 철강 명예의 전당'에 헌액된 한국인 최초의 인물이 되었습니다.

박태준은 '제철보국의 이념으로 철강 불모지 한국에 일관제철소를 설립해 산업 근대화를 이끈 철강왕'으로 헌정되며 세계 '철강 명예의 전당'에 오른 한국인 최초의 인물이 되었습니다. 이는 그의 업적이 세계적으로 인정받는 기념비적인 사건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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