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지원 (1737년)
문신, 실학자, 사상가, 외교관, 소설가, 북학파 영수
최근 수정 시각 : 2025-10-21- 17:09:11
조선 후기의 대표적인 실학자이자 문신, 사상가, 소설가입니다. 청나라의 선진 문물을 적극 수용하고 상업과 공업을 중시하는 중상주의를 주창한 북학파의 영수였습니다. 양반 계층의 타락과 사회 모순을 신랄하게 비판하며 독창적인 문체로 새로운 문학 세계를 열었으며, 그의 사상은 조선 근대화의 초석을 다지는 데 큰 영향을 미쳤습니다.
1737
[한성부 반송방에서 출생]
조선 한성부 반송방에서 지돈녕부사를 지낸 박필균의 손자이자 박사유의 둘째 아들로 태어났습니다. 어머니는 함평 이씨였으며, 위로 형 박희원과 누나 두 명이 있었습니다.
1737년(영조 13) 3월 5일(음력 2월 5일) 축시에 한양 서부(西部) 반송방(盤松坊 : 야동(冶洞))에서 지돈녕부사를 지낸 노론중진 장간공 박필균의 손자이며, 열상외사(洌上外史) 박사유의 둘째 아들로 출생하였다. 어머니는 함평이씨(咸平李氏)로 이창원(李昌遠)의 딸이다. 그의 형제들 중에는 2남 2녀가 전하는데 위로 형 박희원과 누나 두 명이 성인이 될 때까지 생존하였다.
1752
[결혼 후 학문 정진 시작]
16세에 이보천의 딸과 결혼하고, 장인 이보천에게서는 맹자를, 처삼촌 이양천에게서는 사기를 배우며 본격적으로 학문에 입문했습니다. 이 시기에 영조의 부마이자 청나라 사신으로 다녀온 8촌 형 박명원의 영향을 받아 외부 문물에 관심을 두기 시작했습니다.
1752년(영조 28) 16세에 처사 이보천(李輔天)의 딸과 결혼했다. 장인에게는 ≪맹자≫를, 처삼촌 이양천(李亮天)에게는 ≪사기≫를 배워 본격적인 학문을 시작했다. 처남인 이재성(李在誠)과는 평생의 문우(文友) 관계를 이어갔다. 또한 영조의 부마이자 청나라에 사신으로 다녀온 8촌 형 박명원의 영향을 받아 외부의 문물에도 관심을 두었다. 박명원은 자신 외에도 청나라를 견문하고 온 사실들에게서 접한 새로운 사실을 그에게 전해 주었다.
1765
[과거 단념과 학문 전념]
집안의 염원으로 과거시험에 응시했으나, 1차 장원 후 2차 시험에는 백지를 제출하며 과거를 단념했습니다. 이후 각지를 방랑하며 금강산을 유람하고 '총석정 해돋이'를 저술했으며, 오직 학문 연구와 저술에만 전념하게 됩니다.
1765년 집안의 염원을 받아들여 영조 46년 과거시험 1차에 장원했으나 2차 시험에는 백지를 제출했다. 그해 가을 친구 김이중이 마련해준 돈으로 금강산을 유람하고 돌아왔으며, 삼일포, 사선정 등 금강산 일대를 두루 돌아보고 '총석정 해돋이(叢石亭觀日出)'를 썼다. 이 글은 후일 《열하일기》에도 수록되어 있다. 되돌아와서 <김신선전>을 지었다. 이듬해 다시 과거에 응시하지만 낙방했고, 여러 번 과거에서 낙방한 이후 과거 시험을 단념하고 오직 학문과 저술에만 전념하였다.
1777
[연암협 은거와 '연암' 호 사용]
권신 홍국영에 의해 벽파로 몰려 신변의 위협을 느끼자 황해도 금천 연암협으로 은거했습니다. 이곳에서 직접 농사를 지으며 농사와 목축에 대한 장려책을 정리했으며, 이때부터 '연암'이라는 호를 사용하게 되었습니다.
1777년(정조 1년) 권신(權臣) 홍국영에게 벽파로 몰려 신변의 위협을 느끼자 이듬해 황해도 금천(金川) 연암협(燕巖峽)으로 은거하였다. 연암이란 호는 이 골짝 이름에서 따온 것이다. 이때 그는 개성유수로 부임한 교우 유언호에게서 생활하는데 도움을 받기도 했다. 박지원은 이곳에 생활하는 동안 직접 농사를 지어 생활하였으며, 농사와 목축에 대한 장려책을 정리하게 되었다.
1780
[청나라 방문과 《열하일기》 저술]
44세 때 삼종형 박명원을 따라 청나라 북경으로 출발했습니다. 건륭제가 열하의 여름 별궁에 피서를 즐기고 있었기 때문에 열하까지 갔으며, 이 과정에서 중국의 발달된 사회와 신문물을 직접 경험하고 실학에 대한 구체적 견해를 형성했습니다. 이때의 견문을 바탕으로 그의 대표작 《열하일기》를 저술했습니다.
1780년(정조 4) 44세 때 처남 이재성의 집에 머물고 있다가 삼종형 진하사 박명원(朴明源)을 따라 청나라 북경으로 갔다. 1780년 6월 25일 출발하여 압록강을 거쳐 북경에 도착했다. 이때 건륭제가 열하의 여름 별궁에서 피서를 즐기고 있었기 때문에, 박지원은 열하(熱河)까지 갔다. 이 과정에서 중국의 발달된 사회를 보고 실학에 뜻을 두게 된다. 그의 대표작 《열하일기》는 이때의 견문을 기록한 것으로 이용후생에 관한 그의 구체적 견해가 담겨 있다.
1786
[음서로 첫 관직 진출]
정조 즉위 이후 여러 번 학문과 문장력을 인정받아 추천되었으나 번번이 고사하다가, 집안과 주변의 거듭된 권고로 50세에 음보로 선공감 감역에 제수되며 처음으로 관직에 나아갔습니다. 이후 조정에 시무책을 건의했지만 채택되지 않았습니다.
1776년 정조 때 여러 번 학행과 문장력으로 추천되었지만 번번이 사양하고 고사하였다. 이후 여러 번 천거되었는데도 모두 거절한다. 그러나 집안과 주변의 거듭된 권고로 1786년(정조 10년) 50세 때 음보로 처음 출사하여 조정 시무책을 건의하였다. 그해 7월 왕의 특명으로 선공감 감역(監役)에 제수되었다. 그는 옷소매를 줄이고, 군사훈련을 하고, 정병을 양성하며, 군사물자 비축을 건의하였으나 채택되지 않았다.
1805
[중풍 발병 후 사망]
정조 사망 후 벽파 집권으로 양양부사에서 물러난 뒤, 중풍으로 몸이 마비되어 글을 짓지 못하다가 69세의 나이로 한성부 재동 자택에서 사망했습니다. 유언으로 깨끗하게 목욕시켜 달라는 말을 남겼으며, 12월 5일 선영이 있는 경기도 장단에 장사 지냈습니다.
1800년(정조 24년) 8월 양양부사가 되었으나, 그해 정조가 죽고 1801년 관내의 신흥사(神興寺)의 승려들이 궁속과 결탁, 폐단을 끼치자 노론 벽파가 집권했음에도 치사(致仕)하고 물러났다. 1803년 중풍으로 몸이 마비되어 글을 짓지 못하였다. 1805년(순조 5년) 10월 20일(음력) 한성부 가회방(嘉會坊)의 재동(齋洞) 자택에서 깨끗하게 목욕시켜 달라는 유언만을 남긴 채 69세로 세상을 떠났다. 12월 5일 선영이 있는 경기도 장단(長湍) 송서면의 대세현(大世峴)에 장사 지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