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용만 (1881년)

독립운동가, 언론인, 사회운동가, 군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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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용만은 대한제국 시기 계몽운동가이자 언론인, 독립운동가이며 군인이었습니다. 미국에서 한인소년병학교와 대조선 국민군단을 설립하며 무장 독립 운동을 이끌었습니다. 재미 한인 교민 사회의 초기 지도자로 이승만과 동지였으나, 독립 운동 방식의 차이로 갈등을 겪었습니다. 1928년 독립운동 자금 모금 중 의열단원에게 암살당했으며, 사후 건국훈장 대통령장을 추서받았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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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881

[강원도 철원에서 출생]

강원도 철원에서 평민 가정의 아들로 태어났습니다. 그의 출생 년도에는 여러 설이 있었으나, 1881년생 설이 가장 유력하게 채택되었습니다.

박용만은 1881년 8월 26일 강원도 철원의 평민 가정에서 태어났습니다. 그의 출생 년도에 대해서는 1882년생 설, 1875년생 설 등 여러 주장이 있었으나, 1881년생 설이 가장 유력하게 인정받고 있습니다.

1904

[보안회 활동 및 옥중 이승만과의 만남]

일제의 황무지 개간권 요구에 반대하는 보안회 운동에 참여하여 투옥되었고, 옥중에서 이승만 등과 만나 독립운동의 뜻을 함께하며 동지가 되었습니다.

1904년, 박용만은 일제의 황무지 개간권 요구에 반대하는 보안회 운동에 가담했다가 일제에 의해 한성감옥에 투옥되었습니다. 이곳에서 그는 이승만, 이동녕, 이상재, 이시영, 정순만 등 당대의 여러 독립운동가들을 만나 의기투합하며 옥중 동지가 되었습니다. 특히 이승만, 정순만과는 '3만'이라고 불릴 정도로 친밀한 관계를 맺었습니다.

[독립운동 모색을 위한 미국 망명]

옥중에서 출옥한 뒤 사립시무학교에서 유일한 등의 학생을 가르치다가, 독립운동의 새로운 방안을 모색하고자 미국으로 건너갔습니다.

한성감옥에서 출옥한 박용만은 숙부 박희병이 있던 평남 순천의 사립시무학교에서 유일한 등 소년들을 가르쳤습니다. 그러나 독립운동의 뜻을 이루기 위한 새로운 길을 찾아 1904년 12월 미국으로 망명을 결심하고 바다를 건넜습니다.

1905

[미국 정착 및 학업]

미국 샌프란시스코에 도착한 후 네브래스카 주로 이동하여 링컨 고등학교에 입학했으나 중퇴하고, 노동이민자를 위한 한인직업소개소를 운영하며 학업을 이어갔습니다.

1905년 2월 샌프란시스코에 도착한 박용만은 이후 네브래스카 주로 옮겨 링컨 고등학교에 입학했으나 1학년을 마치고 중퇴했습니다. 1906년 여름에는 숙부 박희병과 함께 콜로라도주 덴버에서 노동이민자를 위한 한인직업소개소를 운영하며 헤이스팅스 칼리지 정치학과에 입학하여 학업을 계속했습니다.

1908

[한인군사학교 설립안 통과]

콜로라도 덴버시에서 '해외애국동지대표자회의'를 개최하여 한인군사학교 설립안을 제출하여 통과시켰습니다.

1908년 7월, 박용만은 콜로라도 덴버시의 그레이스 감리교회에서 '해외애국동지대표자회의'를 개최했습니다. 이 회의에서 한인군사학교 설립안을 제출하여 통과시키는 데 성공하며 무장 독립 운동을 위한 구체적인 기반을 마련했습니다.

1909

[한인소년병학교 설립]

네브래스카주 커니의 한인 농장 내에 무장독립군 양성을 목적으로 한인소년병학교를 설립하여 한인 청년들에게 군사훈련을 실시했습니다. 이는 미주 지역 최초의 군사학교였습니다.

1908년 12월, 박용만은 네브래스카 주 정부 및 커니 지방정청과 교섭하여 한인군사학교 설립에 대한 묵허를 받아냈습니다. 그 결과 1909년 6월, 네브래스카주 커니에 있는 한인 농장 내에 한인소년병학교(The Young Korean Military School)를 열어 한인 청년 생도들에게 군사훈련을 실시했으며, 1912년 첫 졸업생 13명을 배출하는 등 무장 독립 운동의 초석을 다졌습니다.

1911

[신한민보 주필 활동 및 독립 사상 집필]

샌프란시스코의 신한민보 주필로 취임하여 무형의 정부인 '가정부'의 필요성을 역설하고, '아메리카 혁명', '국민개병설', '군인수지' 등을 집필하며 독립 사상을 고취했습니다.

1911년 2월, 박용만은 샌프란시스코의 대한인국민회 기관지인 신한민보의 제4대 주필로 취임하여 제217호부터 252호까지 활동했습니다. 주필 재임 중 그는 무형의 정부인 '가정부'의 필요성을 수개월간 주창했으며, '아메리카 혁명'(1911년 1월 자신의 논문을 한글로 번역, 1914년 발간), '국민개병설'(1911년), '군인수지'(1912년) 등의 저술을 통해 독립 사상을 전파했습니다.

1913

[이승만의 하와이 정착 지원]

미국 네브래스카에서 활동하던 옥중 동지 이승만을 하와이로 초청하여 정착을 돕고 독립 운동에 협력하며 그의 활동을 지원했습니다.

1912년 12월 하와이에 먼저 도착했던 박용만은 1913년 1월, 필라델피아에 있는 이승만을 하와이로 초청했습니다. 이승만은 박용만의 초청으로 1913년 2월 3일 하와이에 정착하여 독립운동에 협력하기 시작했습니다. 박용만은 이승만의 하와이 정착을 돕고, 이승만이 105인 사건을 폭로하는 《한국교회 핍박》을 출간하고 옥중 저서 《독립 정신》을 번역·출간하는 데 도움을 주었습니다.

[한인 자치제 확립 기여]

하와이 정부로부터 특별경찰권을 승인받아 대한인국민회 경찰부장을 설치하며 한인 자치제를 확립하는 데 기여했습니다.

1912년 12월 호놀룰루에 도착한 박용만은 1913년 5월, 하와이 정부로부터 특별경찰권을 승인받아 대한인국민회 경찰부장을 설치했습니다. 이를 통해 하와이 한인 사회의 자치적인 질서 유지와 권익 보호에 힘썼습니다.

['신한국보'를 '국민보'로 개명]

대한인국민회 하와이 지방총회의 기관지인 '신한국보' 주필로 취임하여 신문명을 '국민보'로 개명하며 언론 활동을 이어갔습니다.

1913년 8월, 박용만은 대한인국민회 하와이 지방총회의 기관지인 '신한국보'(新韓國報)의 주필로 취임했습니다. 그는 신문명을 '국민보'로 개명하고 독립 운동의 필요성과 한인 사회의 단결을 호소하는 언론 활동을 활발히 펼쳤습니다.

[대조선국민군단 설립 합의]

Nauuanu YMCA에서 한인지도자들과 회합하여 대조선국민군단과 사관학교 설립에 합의하며 무장 독립 운동의 기틀을 마련했습니다.

1913년 12월, 박용만은 Nauuanu YMCA에서 하와이 한인 지도자급 인사들과 회합을 가졌습니다. 이 자리에서 대조선국민군단과 대조선국민군단 사관학교 설립에 대해 합의하며 미주 지역 무장 독립 운동의 확장을 위한 중요한 발걸음을 내디뎠습니다.

1914

[이승만과의 독립운동 방법론 갈등 시작]

독립운동 방법의 차이로 외교독립론을 주창하는 이승만과 갈등을 겪기 시작하며 정적으로 변모하는 관계를 형성했습니다. 이 갈등은 재미 한인 교민 사회의 분열로 이어졌습니다.

1914년부터 박용만은 무장독립론을 주창하며 외교독립론을 주장하는 이승만과 독립운동 방법의 차이로 갈등을 겪기 시작했습니다. 이 대립은 1915년 박용만의 학교 통합 제의가 이승만에게 거절당하는 등 심화되었고, 결국 두 사람은 정적으로 변모했습니다. 이 갈등은 이승만, 안창호 계열 등과의 경쟁과 맞물려 1915년부터 1918년까지 하와이 및 미국 내 한인 교포 집단을 세 집단으로 쪼개는 결과를 초래했습니다.

[대조선 국민군단 창설]

하와이 가훌루 '아후이마누' 지역에 항일무장 독립운동 단체인 대조선 국민군단을 창설하여 130여 명의 독립전쟁 대비 인원을 확보하며 무장 투쟁 운동을 벌였습니다.

하와이 한인들의 절대적인 지원으로 1914년 4월 토지권 인계 등의 준비를 거쳐, 1914년 6월 하와이 가훌루 '아후이마누' 지역에 항일무장 독립운동 단체인 대조선 국민군단이 창설되었습니다. 8월 29일에는 대조선국민군단 사관학교 낙성식을 거행하고, 군사훈련을 실시하여 130여 명을 독립전쟁에 대비한 인원으로 확보하는 등 무장 투쟁 운동을 적극적으로 주도했습니다.

1915

[《미국 혁명사》 출판]

미국 독립정신을 본받아 대한독립을 이루자는 내용의 《미국 혁명사》를 출판하며 독립운동가로서의 사상을 피력했습니다.

1915년, 박용만은 미국 독립정신을 본받아 대한독립을 이루자는 내용을 담은 저서 《미국 혁명사》를 출판했습니다. 이는 그의 독립운동 철학을 대중에게 알리고 독립의지를 고취하려는 노력이었습니다.

[조선국민회 결성]

장일환 등을 귀국시켜 평양에서 대조선 국민군단 국내지부 성격의 비밀단체인 조선국민회를 결성하며 국내외의 독립운동 연계를 시도했습니다.

박용만은 대조선 국민군단 조직을 국내로 확장하고자 강원도 출신 이주연을 블라디보스토크에 파견하고, 1914년 하와이에 온 장일환을 귀국시켰습니다. 귀국한 장일환은 강석봉 및 평양 숭실대학 학생 등과 함께 1915년 3월 평양에서 대조선 국민군단 국내지부 성격의 비밀단체인 조선국민회를 결성하여 국내외 독립운동 연계를 꾀했습니다.

1916

[대한인국민회 하와이 지방총회 폐쇄]

이승만의 자금 관련 공격으로 인해 대한인국민회 하와이 지방총회가 실질적으로 폐쇄되는 등 주요 단체 활동에 어려움을 겪었습니다.

1916년 10월, 대한인국민회 하와이 지방총회는 자금을 둘러싼 이승만과의 갈등과 공격으로 인해 실질적으로 폐쇄되었습니다. 이는 박용만이 주도하던 독립 운동 단체의 활동에 큰 타격을 주었습니다.

1917

[대동단결선언문 발표]

뉴욕 약소국 동맹회에 참석하고, 신규식, 김규식, 조소앙 등과 연락하여 독립운동의 대동단결을 호소하는 대동단결선언문을 발표했습니다.

1917년 박용만은 뉴욕에서 열린 약소국 동맹회에 참석하여 국제 사회에 한국의 독립 의지를 알렸습니다. 또한 상하이(上海)에 있던 신규식, 김규식, 조소앙 등과 긴밀히 연락하여, 독립운동 세력의 대동단결을 촉구하는 공동선언문인 대동단결선언문을 발표하며 민족적 역량 결집에 힘썼습니다.

1918

[<태평양시사> 창간]

호놀룰루에서 주간신문 <태평양시사(The Korean Pacific Times)>를 창간하고 주필 겸 사장이 되어 언론을 통해 독립 의식을 고취했습니다.

1918년 11월 28일, 박용만은 호놀룰루에서 주간신문 <태평양시사(The Korean Pacific Times)>를 창간하고 주필 겸 사장이 되었습니다. 이를 통해 그는 미주 지역 한인들에게 독립운동의 소식을 전하고 민족 의식을 일깨우는 데 주력했습니다.

1919

[대조선독립단 하와이 지부 조직 및 '한국인의 봉기와 독립 선언서 등에 대한 진실' 발행]

3·1 운동의 영향으로 대조선독립단 하와이 지부를 조직하고, 삼일운동 관련 문서들을 편집하여

1919년 3월, 박용만은 3·1 운동의 소식을 접한 후 대조선독립단 하와이 지부를 조직했습니다. 또한, 삼일운동에 관련된 문서들을 편집하여 "한국인의 봉기와 독립 선언서 등에 대한 진실(True Facts of the Korean Uprising and the Text of the Declaration of Independence, etc)"이라는 책자를 발행하며 국내외에 3·1 운동의 진실과 독립 의지를 널리 알렸습니다.

[임시의정원 의원 및 한성임시정부 외무총장 추대]

상하이에 임시의정원이 설치되자 부재중에도 불구하고 의원으로 선출되었으며, 한성임시정부로부터는 외무총장으로 추대된다는 통보를 받았습니다.

1919년 4월, 상하이에 임시의정원이 설치되자 박용만은 부재중임에도 불구하고 의원으로 선출되었습니다. 같은 달 23일에는 경성에서 수립된 한성임시정부로부터 외무총장으로 추대되었다는 전보 통보를 받았으며, 상하이 임시정부에서는 외무차장에 선출되는 등 초기 임시정부 수립 과정에서 핵심 인물로 부상했습니다.

[하와이-블라디보스톡-하와이 여정]

하와이를 출발하여 블라디보스톡으로 향했으나, 북평과 텐진에 체류하다가 다시 하와이로 되돌아가는 여정을 거쳤습니다.

1919년 5월 17일, 박용만은 하와이를 출발하여 블라디보스톡으로 향했습니다. 그러나 7월 8일 북평(北平)에 체류하다가 텐진 항에서 링컨호를 타고 다시 하와이 호놀룰루로 되돌아갔습니다. 이는 임시정부 참여와 관련하여 복잡한 상황을 보여줍니다.

[상해 임시정부 외무총장 취임 거부]

통합 상해 임시정부의 외무총장에 선출되었으나, 이승만을 대통령으로 뽑은 임정이 외교 노선의 성향을 띠자 이승만과의 갈등으로 취임하지 않았습니다.

1919년 9월, 박용만은 통합 대한민국 임시정부의 외무총장에 선출되었습니다. 그러나 대통령으로 이승만이 선출되고 임시정부가 외교독립 노선을 강하게 띠자, 무장독립론을 주장하던 박용만은 이승만과의 독립운동 방법론에 대한 갈등 때문에 결국 외무총장직에 취임하지 않았습니다. 이는 임정 내 노선 갈등의 단면을 보여주는 중요한 사건입니다.

1920

[군사통일회의 결성]

북경에 도착하여 임시정부와 이승만의 노선에 반대하는 신채호, 신숙, 이회영 등과 함께 '군사통일회의'를 결성했습니다.

1920년 4월 북경에 도착한 박용만은 임시정부와 이승만의 외교 노선에 반대하는 신채호, 신숙, 이회영 등 무장 독립 운동을 지지하는 인사들과 함께 '군사통일회의'를 결성했습니다. 이 회의는 임시정부에 대한 불승인안을 통보하는 등 강력한 비판적 입장을 취하며 독립 운동의 노선 갈등을 심화시켰습니다.

1921

[이승만 위임통치론 반대 및 '대동' 발간]

이승만의 위임통치론이 드러나자 '이승만 성토문'을 발표하며 임시정부에 반대하고, 군사통일회의에서 <대동>을 발간했습니다.

1921년, 이승만의 위임통치론이 불거지자 박용만은 '이승만 성토문'을 발표하며 임시정부 노선에 대한 강력한 반대 입장을 표명했습니다. 또한, 군사통일회의의 기관지인 <대동>을 발간하여 무장 독립 운동의 정당성을 알리고 임시정부 불승인안을 통보하는 등 활발한 활동을 펼쳤습니다.

1923

[국민대표대회 임정 불신임 운동 주도]

상하이 국민대표대회에서 임시정부 불신임 운동에 앞장섰으나, 내무부장 김구의 포고령에 의해 대회는 강제 해산되고 상하이에서 축출되어 하와이로 돌아갔습니다.

1921년부터 임시정부의 존폐 여부를 놓고 임정 고수파, 창조파, 개조파가 갈등을 겪자 박용만은 임정 해체론을 주장하는 창조파에 가담했습니다. 1923년 중국 상하이에서 개최된 국민대표대회에서 그는 대한민국 임시정부 불신임 운동에 앞장섰습니다. 그러나 국민대표대회는 임정 내무부장 김구의 내무부 포고령 제5호에 의해 강제 해산되었고, 임정 해체론자들은 상하이에서 축출되면서 박용만은 상하이를 떠나 배편으로 다시 하와이로 귀환했습니다.

[<혁신보> 주필]

당시 폐간된 <혁신보(革新報)>의 주필이 되어 언론 활동을 통해 독립 운동의 의지를 계속해서 표명했습니다.

1923년 5월, 박용만은 당시 폐간된 <혁신보(革新報)>의 주필이 되었습니다. 이는 그가 독립 운동가로서 언론의 중요성을 인식하고, 지속적으로 민족의 독립 의지를 고취하려는 노력을 멈추지 않았음을 보여줍니다.

1925

[태평양 연안 국제신문 기자대회 한국대표 참석]

호놀룰루에서 열린 태평양 연안 국제신문 기자대회에 한국 대표로 참석하여 국제사회에 한국의 상황을 알리는 기회를 가졌습니다.

1925년 7월, 박용만은 호놀룰루에서 개최된 태평양 연안 국제신문 기자대회에 한국대표로 참가했습니다. 이 기회를 통해 그는 국제 언론인들에게 한국의 독립 문제와 일제의 식민 통치 현실을 알리며 국제적인 관심과 지지를 호소했습니다.

1926

[베이징 대본농간공사 설립]

독립운동 기지 마련을 목적으로 사재를 털어 중국 베이징에 대본농간공사를 설립하여 독립군 양성 자금을 마련하고 근거지를 확충하고자 했습니다.

1926년, 박용만은 독립운동 기지를 마련할 목적으로 사재를 털어 중국으로 건너가 베이징 시내 외곽에 대본농간공사를 설립했습니다. 이 공사의 설립 목적은 중국에서 미개간지를 구입하고 개간하여 독립운동의 근거지를 마련하고, 나아가 독립군 양성 자금을 확보하는 데 있었습니다.

1927

[우성학교 설립 및 초등 국어 교과서 편찬]

호놀룰루 팔라마에 '우성학교'를 설립하고 직접 편찬한 초등 국어 교과서를 사용하여 교포 자녀들의 국어 교육에 이바지했습니다.

1927년 4월, 박용만은 호놀룰루 팔라마에 국어 학교인 '우성학교'를 설립했습니다. 이때 그는 직접 편찬한 초등 국어 교과서를 교재로 사용하여 해외 교포 자녀들에게 민족어와 민족정신을 가르치며 교육 운동에도 적극적으로 참여했습니다.

1928

[중국 베이징에서 암살]

군자금 모금차 중국 텐진에 체류하던 중, 독립운동 자금을 요구하는 의열단원 이구연에게 거절했다는 이유로 베이징에서 암살당했습니다.

1928년 10월 17일, 박용만은 군자금 모금차 중국 텐진에 체류하던 중 베이징에서 독립단원 또는 의열단원으로 활동하던 이구연(일명 이해명 또는 박인식)이 쏜 총탄에 맞아 사망했습니다. 당시 동아일보 기사에 따르면 이구연 등이 독립운동 자금 1천 원을 요구했으나 박용만이 이를 거절하면서 언성이 높아졌고, 결국 총격으로 이어져 사망에 이른 것으로 보도되었습니다. 그의 죽음은 당시 독립운동계의 극심한 분열을 보여주는 비극적인 사건이었습니다.

1962

1962.03.01 사후 34년

[건국훈장 독립장 추서]

대한민국 정부는 그의 독립운동 공훈을 기려 건국훈장 독립장을 추서했습니다.

박용만은 사후 한동안 잊혀졌다가 1960년대 초부터 행적 발굴 등의 사업이 추진되었습니다. 대한민국 정부는 고인의 공훈을 기리기 위해 1962년 3월 1일 건국훈장 독립장을 추서했습니다.

1995

[건국훈장 대통령장 추서]

대한민국 정부는 그의 훈격을 높여 건국훈장 대통령장을 추서하며 그의 공헌을 다시 한번 인정했습니다.

대한민국 정부는 1962년 추서된 건국훈장 독립장에 이어, 1995년 박용만의 훈격을 높여 건국훈장 대통령장을 추서했습니다. 이는 그의 독립운동에 대한 국가의 최고 수준의 예우를 의미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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