동흥습격사건
독립운동, 항일 무장투쟁, 역사적 사건
최근 수정 시각 : 2025-10-21- 17:05:08
1935년, 만주 동북인민혁명군이 조선 국경의 동흥읍을 기습, 일본 측에 막대한 피해를 입힌 사건입니다. 이는 당시 언론을 뜨겁게 달구며 큰 충격을 주었죠. 놀랍게도 2년 후 벌어진 보천보 습격 사건보다 규모가 크고 먼저 일어났지만, 북한 정권의 의도적인 은폐로 역사 속에 묻혔습니다. 한반도 독립운동의 중요한 한 페이지가 될 이 사건의 진실을 재조명합니다.
1935
[동북인민혁명군, 평안북도 동흥읍 습격]
이홍광이 이끄는 동북인민혁명군 200여 명이 평안북도 후창군 동흥읍을 기습해 일본 측에 큰 타격을 입혔다. 경찰서와 친일파 주택을 공격해 다수의 사상자와 납치자가 발생했으며, 많은 금품을 빼앗았다. 당시 언론에 대서특필될 정도로 파장이 컸던 주요 항일 무장투쟁 중 하나이다.
1935년 2월 13일 새벽 1시경, 이홍광 사령관이 지휘하는 동북인민혁명군 1군 1사 소속 약 200여 명의 병력이 얼어붙은 압록강을 건너 평안북도 후창군 동흥읍을 습격했다. 대원들은 장총, 권총, 기관총 등으로 무장하고 동흥읍 시가로 진입, 47명의 경찰이 방어하는 경찰서에 집중 사격을 가했다. 이와 동시에 동흥 최고의 재산가이자 재목상인 장영록의 집과 기타 친일파, 일본인 주택 16호를 습격해 상당량의 금품을 빼앗고, 경관 2명 및 그 가족 1명을 부상시키고 일본인 6명을 살상했다. 또한 일본인 2명과 친일 한인 10명을 납치했다. 작전은 3시간여 만에 끝났으며, 혁명군은 만주국 측 전신전화 기관을 파괴했으나 일제 측 시설을 파괴하지 못해 적의 응원대가 올 것을 우려해 서둘러 퇴각했다. 이 과정에서 혁명군도 전사자 3명, 중상자 7명, 부상자 10여 명을 냈고, 대원 2명이 체포되는 피해를 입었다. 교전 중 무고한 주민 2명이 사망하고 5명이 부상하는 안타까운 일도 있었다. 이 사건은 동아일보, 조선일보 등 국내외 언론에 연일 대서특필되며 일제 당국과 대중에게 큰 충격을 안겨주었다.
[동흥습격사건 지휘관 이홍광, 일만군과의 전투 중 전사]
동흥습격사건을 이끈 이홍광 사령관이 사건 발생 약 3개월 후, 일본군과 만주군 연합부대와의 전투에서 중상을 입고 26세의 나이로 전사했다. 그의 죽음은 항일 무장투쟁 세력에 큰 손실이었다.
1935년 5월, 동흥습격사건의 성공적인 작전을 지휘했던 이홍광 사령관이 일본군과 만주군 연합부대와의 치열한 전투 중 중상을 입고 결국 전사하였다. 당시 26세의 젊은 나이였던 그의 죽음은 항일 무장투쟁 세력에게 큰 타격을 주었으며, 이로 인해 만주 지역의 독립운동이 한때 위축되기도 했다. 그의 죽음 이후에도 동흥습격사건의 여파는 계속되었다.
1937
[보천보 습격 사건, '제2 동흥사건'으로 언론에 보도]
2년 후 발생한 보천보 습격 사건이 당시 언론에 '제2 동흥사건'으로 불리며 동흥 습격 사건의 충격과 파급력이 얼마나 컸는지를 재확인시켰다. 이는 동흥 사건이 보천보 사건보다 더 큰 규모와 파장을 가졌음을 시사한다.
1937년 6월, 김일성이 이끈 것으로 알려진 보천보 습격 사건이 발생하자, 당시 주요 언론이었던 매일신보와 동아일보는 이를 '제2 동흥사건'이라고 보도했다. 이는 경찰 5명이 상주하는 면 단위 마을인 보천보를 습격한 사건보다 훨씬 더 큰 규모와 피해를 일본 측에 안겨주었던 동흥습격사건의 역사적 충격과 파급력이 얼마나 컸는지를 보여주는 방증이다. 언론이 보천보 사건을 동흥 사건에 비유할 정도로 동흥 사건은 대중에게 깊은 인상을 남긴 주요 항일 무장투쟁이었다.
1953
[북한, 동흥사건 은폐 및 지명 변경으로 역사에서 지워지다]
북한 정권이 김일성의 보천보 사건을 부각하기 위해 이홍광이 이끈 동흥습격사건을 의도적으로 은폐하고 동흥읍의 지명까지 변경하면서, 한반도 독립운동의 중요한 기록이 역사 속에서 사라졌다.
김일성 집권 이후 북한 정권은 자신의 업적을 과장하기 위해 보천보 습격 사건을 대대적으로 선전하는 한편, 자신과 직접적인 관련이 없는 이홍광의 동흥습격사건을 의도적으로 은폐했다. 이 사건이 널리 알려질 경우 보천보 사건의 역사적 중요성이 상대적으로 희석될 것을 우려했기 때문이다. 심지어 동흥(東興)이라는 지명 자체를 없애 현재의 양강도 김형직군 고읍노동자구로 변경하는 극단적인 조치까지 취했다. 이로 인해 보천보 사건보다 규모도 크고 먼저 발생했던 중요한 항일 무장투쟁이 대중의 기억 속에서 잊히게 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