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종서 (1383년)
조선시대 인물, 문신, 무신, 정치인, 학자, 시인
최근 수정 시각 : 2025-10-21- 17:02:17
김종서는 조선 전기의 문신이자 무신으로 활약했습니다.식년문과 급제 후 사간원 등 요직을 역임했습니다.함길도절제사로 육진을 개척하여 두만강 국경 확정에 큰 공헌을 했습니다.《고려사》와 《고려사절요》 편찬을 주도하며 학자적 역량도 보였습니다.단종의 충신으로 좌의정까지 올랐으나, 계유정난으로 수양대군에게 암살당했습니다.강직하고 위엄 있는 성품으로 '백두산 대호'라 불렸습니다.
1383
[김종서 출생]
고려 양광도 공주목에서 김추와 성주 배씨 부인 사이 3남 중 둘째로 태어났다. (일설 1390년생 출생설도 있다.)
김종서는 1383년(고려 우왕 9년) 양광도 공주목에서 아버지 김추(金錘)와 어머니 성주 배씨 부인 사이에서 3남 중 둘째(차남)로 태어났다. 일설에는 1390년생 출생설도 있다.
1394
김종서의 동생은 양광도의 양주부사를 역임한 김종흥(金宗興, 1394년~1449년)이다.
1396
아버지 김추(金錘)는, 1396년(조선 태조 4)에 김수(金陲)로 이름을 개명했다.
1405
[식년문과 급제]
1405년(태종 5년) 식년문과 동진사에 13위로 급제하여, 사간원우정언, 지평, 집의, 우부대언 등을 지냈다.
1405년(태종 5년) 식년문과 동진사를 13위로 급제하여, 사간원우정언(司諫院右正言), 지평(持平)·집의(執義)·우부대언(右副代言) 등을 지냈다.
1415
1405년(태종 5) 문과에 급제하여 1415년 상서원직장(尙書院直長)을 지냈다.
1418
1418년(세종 즉위년) 11월 감찰로서 강원도의 답험손실(踏驗損失)로 원성이 크자 조정에서는 그에게 다시 조사하게 하였다.
1419
1419년 3월 행대감찰(行臺監察)로서 충청도에 파견되어 진휼상황을 조사하였다.
1419년 10월에 사간원우정언이 되었다.
1420
[광주판관 및 진제경차관 활동]
광주판관으로 임명되고, 이후 봉상판관으로서 의주와 삭주 지역에 진제경차관으로 파견되어 백성 구휼에 힘썼다.
1420년 윤정월에 광주판관(廣州判官)이 되었고, 봉상판관(奉常判官)으로 있으면서 의주·삭주도(義州朔州道)의 진제경차관(賑濟敬差官)으로 파견되었다.
1426
[전라도 왜인 포획상황 조사]
이조정랑으로서 전라도에 파견되어 침입한 왜인의 포획 상황을 조사하고 보고하는 임무를 수행했다.
1426년 4월에는 이조정랑으로서 전라도에 파견되어 침입한 왜인의 포획상황을 조사, 보고하였다.
1427
1427년에는 민정을 살피기 위하여 황해도경차관으로 파견되기도 했다.
1433
특히, 세종의 신임이 두터워 우부대언, 좌부대언, 우대언을 거쳐 1433년 좌대언인 그에게 이부지선(吏部之選)을 관장하도록 특명하기도 하였다.
[최윤덕의 파저강 유역 정벌]
평안도 절제사 최윤덕이 15,000명의 군사를 동원하여 압록강 지류인 파저강 유역의 이만주 세력을 정벌하여 압록강 유역을 평정했다. 이는 북방 국경 확장의 중요한 발판이 되었다.
세종 15년(1433년) 평안도 지역에 계속되는 여진족의 침탈에 최윤덕을 평안도 절제사로 임명하여 동년 4월에 평안도와 황해도의 군사 15,000명을 동원하여 압록강의 지류인 파저강 유역의 이만주세력을 정벌시키면서 압록강 유역을 평정시켰다.
[육진 개척 지시 및 착수]
두만강 유역 여진족의 내분 발생 후, 세종의 지시로 함길도 관찰사 겸 절제사로 임명되어 육진(六鎭) 개척에 착수하며 조선의 국경을 두만강까지 확장하는 대업을 시작했다.
같은해 12월 함길도절제사가 된 뒤 7, 8년간 북변에서 육진(六鎭)을 개척하여 두만강을 국경선으로 확정하는 데 큰 공로를 세웠다. 이후 동년 10월 두만강 유역의 여진족 사이에 내분이 발생하여, 알목하의 추장인 동맹가첩목아 부자가 죽는 등 내부적인 여진족의 분열이 있었는데 이에 세종은 김종서를 함길도 관찰사로 임명하여 국토 회복 작업을 지시하였다. 김종서는 함길도 관찰사로 부임한 뒤 흩어진 민심을 추스르고, 함길도 남부 지방의 농가 2,200호를 경원부와 같은 북방 진지인 영북진으로 이주시켰다. 김종서는 먼저 회령을 공격하여 회령진을 설치하고 경원부도 더 북쪽인 경원으로 이동시키고, 경원부가 있던 지역에는 공성현을 설치하였다. 또한 종성과 온성에도 진을 설치 하여 동북면의 국경을 확정하였다.
1435
[함길도 병마도절제사 겸직]
함길도 병마도절제사를 겸직하며 확장된 영토에 조선인을 정착시키고 북방 경계와 수비를 강화했다. 이 역할은 1440년까지 7년간 이어졌다.
1435년 함길도 병마도절제사(咸吉道兵馬都節制使)를 겸직하면서 확장된 영토에 조선인을 정착시켰고, 이후 1440년까지 북방의 경계와 수비를 7년 동안 맡았다.
1441
병조판서가 되었고, 예조판서를 거쳐 의금부제조가 되었다. 또한 승문원제조도 겸했다. 인포박스에 따르면 1441년 11월부터 1446년 1월까지 예조판서를 재임했다.
1445
1445년에는 충청·전라·경상 3도의 도순찰사로 파견되어 삼남지방의 목마장으로 적합한 곳과 방마(放馬)가 가능한 곳의 수효를 조사하여 보고하였다.
1446
1446년 의정부우찬성으로 임명되고 판예조사(判禮曹事)를 겸하였으며, 이듬해 충청도에 파견되어 태안 등지의 책보(柵堡)를 심정하였다.
1447
이듬해(1447년) 충청도에 파견되어 태안 등지의 책보(柵堡)를 심정하였다.
1449
[《고려사》 개수 및 평안도체찰사 활동]
세종의 명으로 정인지 등과 함께 《고려사》 개수 작업에 착수했으며, 같은 해 8월 달달(타타르)의 침입에 대비하여 평안도체찰사로 파견되었다.
세종은 권제·안지 등의 《고려사》 개수작업이 미비한 것을 보고 1449년 김종서·정인지 등에게 고쳐 쓰기를 명하였다. 1449년 8월 달달(達達, Tatar) 야선(也先)이 침입하여 요동지방이 소란해짐에 따라 그에 대처하기 위하여 평안도체찰사로 파견되었다가 이듬해에 소환되었다.
1450
평안도체찰사로 파견되었다가 이듬해(1450년)에 소환되었다.
1451
[《고려사》 찬진 및 우의정 임명]
좌찬성 겸 지춘추관사로서 2년간의 작업 끝에 《고려사》를 완성하여 왕에게 올렸으며, 같은 해 10월 우의정에 임명되며 정계의 핵심 인물로 부상했다.
1451년(문종 1) 좌찬성 겸 지춘추관사(知春秋館事)로서 《고려사》를 찬진하였고, 같은 해 10월 우의정이 되었다.
1452
[《세종실록》 감수 및 《고려사절요》 편찬]
《세종실록》 편찬의 감수를 맡아 중요한 역할을 했으며, 《고려사》 편찬 건의 후 《고려사절요》를 완성하여 왕에게 올렸다.
1452년 《세종실록》 편찬의 감수를 맡았고 《고려사절요》를 찬진하였다. 같은해 《세종실록》의 편찬 때에는 책임관으로 임명되었으며, “세종실록에는 따로 지(志)를 만들어야 마땅하다”고 한 정인지의 의견을 지지하여 《세종실록》에 오례·악보·지리지·칠정산내외편(七政算內外篇) 등의 전문적인 자료가 정리되어 실리게 하는 데 영향을 주었다.
1453
1453년(단종 1년) 좌의정이 되어 단종을 보필했다. 인포박스에 따르면 1452년 10월부터 1453년 11월까지 좌의정을 재임했다.
[계유정난으로 암살]
수양대군에 의해 두 아들과 함께 자택에서 암살되며 계유정난의 첫 희생자가 되었다. 이로써 단종을 보필하던 핵심 세력이 제거되었다.
1453년 수양대군에 의하여 두 아들과 함께 집에서 암살(살해)되어 계유정난의 첫 희생자가 되었다. 김종서는 향년 71세로 사망했다. 그의 사망일은 1453년 11월 10일(음력 10월 10일)이다.
1678
그 뒤 1678년(숙종 4)에 그 후손들이 채용되었고, 1746년(영조 22)에 복관되었다.
1746
1746년(영조 22)에 복관되었다.
1786
[정조의 부조전 하사]
정조 10년에 좌의정의 건의로 김종서의 충절과 공로를 기려 특별히 부조전(불천위 사당)을 하사하는 전교가 내려졌다.
병오(1786, 정조10년)년 12월 22일에 좌의정이 임금께 아뢰어 백악산 기슭에서 발견된 단종조 상신 김종서의 신주를 근거로 부조전을 하사할 것을 건의했고, 정조 임금이 이를 윤허하여 충익공 절재에게 부조전이 명해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