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성근 (야구인)

야구 선수, 야구 감독, 야구 코치, 스포츠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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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근 수정 시각 : 2025-10-21- 16:58:3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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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한민국 야구계의 살아있는 전설, '야신' 김성근 감독은 선수와 지도자로서 파란만장한 커리어를 보냈습니다. 철저한 데이터 야구와 지옥 훈련으로 만년 하위팀을 강팀으로 변모시키는 탁월한 능력을 보여줬으며, 끊임없는 도전과 열정으로 한국 야구사에 숱한 기록과 명장면을 남겼습니다. 때로는 논란의 중심에 서기도 했으나, 그의 야구에 대한 집념은 변함없었습니다.

연관 연혁
주요사건만
최신순

1941

[야신, 일본 교토에서 태어나다]

일본 교토부에서 5남매 중 막내로 태어났다. 호적상 생년월일은 1942년 12월 13일이다.

쇼와 17년(서기 1942년) 일본 교토부에서 5남매의 막내로 태어났다. 실제 출생일은 1941년 10월 30일이며, 호적상으로는 1942년 12월 13일 생이다. 본적(부모 고향)은 경상남도 진양군(지금의 진주시)이다. 어렸을 때 아버지가 사망하면서 가난하게 지냈다.

1959

[모국 대한민국 첫 방문]

교토부립 가쓰라 고등학교 재학 중, 제4회 재일 동포 학생 모국 방문 경기를 통해 처음으로 대한민국 땅을 밟았다.

교토부립 가쓰라 고등학교에 재학 중이던 1959년, 제4회 재일 동포 학생 모국 방문 경기를 통해 처음으로 대한민국 땅을 밟았다.

1960

[동아대학교 스카우트]

고교 졸업 후 일본 사회인 야구 팀 교토상호차량에서 뛰다가 재일교포 성인 구단 방문 경기를 마치고 동아대학교에 스카우트되었다.

고교 졸업 후 일본 사회인 야구 팀인 교토상호차량에서 뛰다가 1960년 재일교포 성인 구단 방문 경기를 하고 나서 동아대학교에 스카우트됐다. 동아대학교를 중퇴했다.

1961

[한국 실업 야구 데뷔 및 국가대표 발탁]

대한민국 실업 야구 교통부에 입단했으며, 기업은행의 창단 멤버로 합류해 1969년 초까지 활약했다. 제4회 아시아 야구 선수권 대회에 대표팀으로 선발되어 준우승을 이끌었다.

동아대학교를 중퇴하고 대한민국 실업 야구에 투신해 1961년 교통부에 입단하고 기업은행의 창단 멤버가 되면서 1969년 초까지 활동했다. 좌완 투수로 빠른 직구를 주 무기로 삼아 1961년 제4회 아시아 야구 선수권 대회 때 대표팀에 선발돼 대한민국을 준우승으로 이끌었다.

1963

[노히트 노런 달성]

대통령배 가을 리그 인천시청과의 경기에서 볼넷 1개만을 내주며 노히트 노런을 기록하는 기염을 토했다.

1963년 11월 13일 대통령배 가을 리그 인천시청과의 경기에서는 볼넷 1개만을 내주며 노히트 노런을 기록했다.

1964

[실업 야구 다승 공동 2위 및 부상]

실업야구 연맹전에서 다승 공동 2위(20승 5패)에 오르며 놀라운 활약을 펼쳤으나, 지나친 혹사로 어깨 부상을 당했다.

1964년 실업야구 연맹전에선 다승 공동 2위(20승 5패)에 오르는 등 놀라운 활약을 보였다. 그러나 지나친 혹사로 어깨 부상을 당한 후 야수로 전업했다.

1967

[결혼]

현재의 아내 오효순과 결혼하며 가정을 이루었다.

선수로 뛰었던 1967년 현재의 아내 오효순과 결혼하였다.

1969

[선수 은퇴 및 지도자 전향]

이른 나이에 현역에서 은퇴하고, 마산상업고등학교 야구부 감독을 맡으며 지도자의 길로 들어섰다.

1969년 이른 나이에 현역에서 은퇴했다. 은퇴한 후 마산상고 감독을 맡아 본격적으로 지도자의 길로 들어섰다.

1970

[기업은행 투수 코치 및 아들 출생]

기업은행 야구단 투수 코치로 활동했으며, 그의 아들 김정준이 태어났다.

기업은행 투수코치(1970년)로 활동했다. 은퇴한 후 마산상고 감독을 맡을 무렵에 아들 김정준이 태어났다.

1971

[기업은행 야구단 감독 취임]

기업은행 야구단 감독으로 승격되어 1975년까지 팀을 이끌었다.

기업은행 투수코치(1970년)를 거쳐 1971년부터 1975년까지 기업은행 야구단 감독을 역임했다.

1975

[아시아 선수권 우승 및 체육훈장 수상]

제11회 아시아 야구 선수권 대회에 대표팀 코치로 참가하여 우승을 일궈냈으며, 체육 훈장 기린장을 수여받았다.

1975년 제11회 아시아 선수권 때 대표팀 코치로 참가해 우승을 일궈 내어 체육 훈장 기린장을 받았다.

1976

[충암고등학교 감독 취임]

충암고등학교 야구부 감독을 맡아 1979년까지 팀을 지도했다.

충암고등학교 야구부 감독을 1976년부터 1979년까지 맡았다.

1977

[충암고 봉황기 전국 대회 우승]

충암고등학교를 창단 9년 만에 봉황기 전국 대회 우승으로 이끌며 아마추어 지도자로서의 역량을 증명했다.

1977년 봉황기에서 충암고를 창단 9년 만에 전국 대회 우승으로 이끌었다. 이때 백넘버 38번을 이용했는데, 이후 OB 베어스 시절을 포함해 오래 사용하게 된다.

1979

[신일고등학교 감독 취임]

신일고등학교 야구부 감독으로 부임하여 1981년까지 팀을 이끌었다.

신일고등학교 야구부 감독을 1979년부터 1981년까지 맡았다.

1981

[신일고 화랑기 전국 대회 우승]

화랑기에서 신일고등학교를 정상에 올려놓으며 다시 한번 아마추어 지도자로서의 능력을 입증했다.

1981년에는 화랑기에서 신일고도 정상에 올려 놓았다.

1982

[OB 베어스 창단 투수 코치 부임]

KBO 리그 OB 베어스의 창단 투수 코치로 부임하며 프로 야구와 인연을 맺었다.

1982년 OB 베어스의 창단 투수 코치였다.

1984

[OB 베어스 감독 취임 및 논란]

OB 베어스의 제2대 감독으로 부임하여 1988년까지 팀을 이끌었으나, 고의 패배 논란 등으로 한국시리즈에 진출하지 못했다.

1984년 시즌을 앞두고 김영덕의 후임 감독으로 부임해 1988년까지 OB 감독을 맡았다. 1984년 후기 리그에서 롯데 자이언츠와 1위 자리를 다투며 한국시리즈 진출을 노렸으나 전기 리그 우승 팀 삼성 라이온즈의 감독 김영덕의 '고의 패배 작전'으로 인해 목표를 달성하지 못했다. OB 베어스는 전·후기 통합 승률 1위를 달성했으나 한국시리즈에 진출하지 못했다.

1986

[어머니 별세]

OB 베어스 감독 재직 시절 어머니가 세상을 떠났다. 이 시기 여러 형제자매를 잃는 아픔을 겪었다.

OB 감독으로 재직하던 1986년 4월 6일 어머니가 세상을 떠났으며, 이 해와 1987년 사이 어머니, 큰 형, 큰 누나, 작은 형이 잇달아 별세해 현재 남은 형제자매로는 작은 누나 밖에 없다.

1988

[태평양 돌핀스 감독 취임]

3년 계약을 통해 태평양 돌핀스의 감독으로 부임하며 인천 연고 팀과 인연을 맺었다.

1988년 9월 10일부터 3년 계약 형식을 통해 태평양 돌핀스의 감독으로 부임해 인천 연고 팀과 인연을 맺었다.

1989

[태평양 돌핀스 사상 첫 포스트시즌 진출]

만년 꼴찌 팀이었던 태평양 돌핀스를 사상 첫 포스트시즌(3위)에 진출시켰으나, 플레이오프에서 해태 타이거즈에게 3연패하며 한국시리즈 진출에 실패했다.

그 해 강력한 신인 투수들을 바탕으로 만년 꼴찌 팀이었던 태평양 돌핀스를 사상 첫 포스트시즌에 진출시켰다. 당시 삼성 라이온즈를 2승 1패로 꺾고 플레이오프에 진출했으나 해태 타이거즈에게 3연패로 스윕당해 한국시리즈 진출에 실패했다.

1990

[삼성 라이온즈 감독 취임]

태평양 돌핀스와 재계약에 실패한 후, 3년 계약으로 삼성 라이온즈 감독으로 부임했다.

1990년에 태평양 돌핀스가 다시 5위로 추락했고, 소위 '임호균 각서 파동' 탓인지 태평양 돌핀스는 계약 기간을 1년 남긴 그와 재계약하지 않았다. 같은 해 11월 2일부터 3년 계약 형식을 통해 삼성 라이온즈의 감독으로 활동했다.

1991

[삼성 라이온즈 3위 및 훈련 방식 논란]

부임 첫 해 삼성 라이온즈를 3위로 이끌었으나, 스파르타식 훈련으로 부상 선수가 속출하며 논란이 있었다.

부임 첫 해인 1991년에는 그의 스파르타식 훈련 때문에 부상 선수가 속출해 3위로 떨어졌다.

1992

[삼성 라이온즈 감독 사임]

삼성 라이온즈가 4위로 준플레이오프에 진출했으나 2패로 탈락하며 한국시리즈 진출에 실패, 임기를 1년 남기고 감독직에서 물러났다.

1992년에는 4위로 간신히 진출한 준플레이오프에서 2패로 탈락해 2년 연속 한국시리즈 진출에 실패하자 임기를 1년 남겨둔 채 우용득에게 감독직을 넘겼다.

[감독 통산 500승 달성]

수원야구장에서 열린 태평양 돌핀스와의 경기에서 삼성 라이온즈가 7:2로 승리하며 감독 통산 500승을 달성했다.

1992년 6월 17일 수원야구장에서 태평양 돌핀스와의 경기에서 7:2로 승리하며 감독 통산 500승을 달성했다. 이는 역대 세 번째 기록이다.

1994

[해태 타이거즈 투수 인스트럭터]

해태 타이거즈 투수 인스트럭터로 지도자 생활을 이어갔다.

이후 해태 타이거즈의 투수 인스트럭터로 지도자 생활을 이어나갔다.

1995

[쌍방울 레이더스 감독 취임]

해태 타이거즈 2군 감독을 맡았으며, 같은 해 10월 19일 쌍방울 레이더스 감독으로 부임했다.

해태 타이거즈 2군 감독을 맡았으며, 1995년 10월 19일부터 3년 계약 형식으로 쌍방울 레이더스의 감독으로 취임했다.

1996

[쌍방울 레이더스 포스트시즌 진출]

쌍방울 레이더스를 2년 연속 포스트시즌에 진출시키며 만년 약체팀의 가능성을 보여주었다. (1996년 2위, 1997년 3위)

쌍방울 레이더스의 감독을 맡으면서 만년 약체였던 쌍방울 레이더스를 2년 연속 3위로 끌어올려 가능성을 보였다.

1998

[감독 통산 700승 달성]

사직야구장에서 열린 롯데 자이언츠와의 경기에서 쌍방울 레이더스가 4:2로 승리하며 감독 통산 700승을 달성했다.

1998년 6월 14일 사직야구장에서 롯데 자이언츠와의 경기에서 쌍방울 레이더스가 4:2로 승리하며 감독 통산 700승을 달성했다. 이는 역대 세 번째 기록이다.

[쌍방울 레이더스 재계약 및 전력 약화]

쌍방울 레이더스와 2년 재계약을 했으나, IMF 여파로 팀의 주축 선수들이 트레이드되며 전력이 약화되었다.

이 때문에 1998년 10월 23일부터 2년 재계약을 했으나 IMF의 여파로 모기업이 재정난에 시달리며 구단이 선수를 팔아넘기는 극단적 선택을 했고 이때 팀의 주축인 박경완, 김현욱, 김기태, 조규제 등이 현금 트레이드로 타 팀으로 떠나 전력이 크게 약화됐다.

1999

[쌍방울 레이더스 감독 해임]

쌍방울 레이더스가 전반기 최하위에 머물자 올스타전이 끝난 후 성적 부진으로 해임되었다. 팀은 이후 해체 수순을 밟았다.

1999년 전반기까지 팀이 최하위인 8위에 머물면서 올스타전이 끝난 날 성적 부진에 따른 분위기 쇄신이라는 이유로 해임됐다. 결국 쌍방울 레이더스는 1999년에 최하위로 마감한 뒤 2000년에 해체됐다. 선수단은 신인 지명 선수들을 포함해 2000년에 SK 와이번스가 새로 창단하면서 인계됐다.

2000

[삼성 라이온즈 2군 감독]

삼성 라이온즈 2군 감독을 1년 동안 맡았으나, 시즌 후 코치진 대개편 과정에서 해임되었다.

1999년 시즌 후 삼성 라이온즈가 그를 다시 불러들여 이듬해 1년 동안 2군 감독을 맡았고, 시즌 후 코치진의 대개편 과정에서 해임됐다.

2001

[LG 트윈스 감독 대행 선임]

LG 트윈스 2군 감독으로 부임 후 팀의 부진으로 1군 수석코치 보직 변경, 이후 이광은 감독 경질로 감독 대행을 맡게 되었다.

2001년 LG 트윈스로 옮겨 2군 감독으로 부임했다가 시즌 초 팀이 1승 9패에 그치자 1군 수석코치로 보직이 변경됐다. 2001년 시즌 초 LG 트윈스는 9승 1무 25패로 부진하자 그 해 5월 16일 이광은을 경질하고 수석코치로 올라온 그를 감독 대행으로 선임했다.

[LG 트윈스 정식 감독 선임]

2001년 시즌 후 LG 트윈스의 정식 감독으로 선임되었다.

2001년 시즌 후 정식 감독으로 선임됐다.

2002

[LG 트윈스 한국시리즈 준우승 및 해임]

하위 팀이었던 LG 트윈스를 한국시리즈까지 이끌었으나, 삼성 라이온즈에게 2승 4패로 준우승에 그쳤고, 구단과의 갈등으로 임기를 채우지 못하고 해임되었다.

2002년 시즌에는 하위 팀이었던 LG 트윈스를 정규 시즌 4위로 이끌며 준플레이오프와 플레이오프에서 현대 유니콘스, KIA 타이거즈를 잇따라 꺾고 2002년 한국시리즈에 진출했다. 준플레이오프부터 한국시리즈까지 선수들이 지쳐 갔음에도 2002년 한국시리즈에서 마지막까지 알 수 없는 흐름을 보여 주며 양 팀 모두 흥미진진한 경기를 펼쳤다. 결국 2002년 11월 10일 한국시리즈 6차전에서 삼성 라이온즈의 이승엽, 마해영에게 백투백 홈런을 허용하고 2승 4패로 준우승에 그쳤다. 시즌 후 LG 트윈스의 감독으로 유임될 줄 알았던 그는 어윤태 사장으로부터 '그의 야구는 LG의 야구가 아니다'라는 혹평을 받으며, 계약 기간(3년)을 다 채우지 못하고 해임됐다.

2005

[지바 롯데 마린스 타격 인스트럭터]

일본 프로 야구 지바 롯데 마린스의 팀 타격 인스트럭터로 취임, 이승엽 선수의 부활에 큰 도움을 주었다.

2005년에 일본 프로 야구 지바 롯데 마린스의 팀 타격 인스트럭터로 취임하였고, 당시 일본식 야구에 적응하지 못하고 2004년 시즌에 부진에 빠져있던 이승엽의 개인 코치로서 지도와 조언을 아끼지 않았다. 그의 조언과 도움을 받은 이승엽은 2005년에 30홈런을 기록해 이승엽이 부활하는 데 숨은 조력자가 됐다.

2006

[일본 프로 야구 최초 정식 코치 부임]

지바 롯데 마린스의 1·2군 순회 코치로 취임, KBO 리그 출신 지도자로는 최초로 일본 프로 야구 팀의 정식 코치가 되었다.

2006년에는 지바 롯데 마린스의 1·2군 순회 코치로 취임해 KBO 리그 출신 지도자로는 처음으로 일본 프로 야구 팀의 정식 코치가 됐다.

2007

[SK 와이번스 한국시리즈 우승 (첫 프로 우승)]

SK 와이번스 감독으로 취임하여 팀을 정규 시즌 1위로 이끌었고, 한국시리즈에서 두산 베어스를 꺾고 창단 첫 우승 및 본인의 프로 감독 첫 우승을 달성했다.

조범현의 후임으로 2007년에 SK 와이번스의 감독으로 취임해 태평양 돌핀스 이후 인천 연고 팀을 다시 맡게 됐다. 2006년 시즌을 6위라는 저조한 성적으로 마감한 SK 와이번스는 그와 이만수 수석 코치 체제로 2007년 정규 시즌 페넌트레이스 1위를 기록했고, 2007년 한국시리즈에서 두산 베어스에게 초반 2연패 후 4연승으로 역스윕하며 2007년 한국시리즈에서 SK 와이번스의 창단 첫 우승이자 그의 프로 감독 재임 후 생애 첫 우승을 했다.

2008

[감독 통산 1000승 달성]

문학야구장에서 우리 히어로즈와의 경기에서 SK 와이번스가 8:0으로 승리하며 감독 통산 1000승을 달성했다.

2008년 9월 3일 문학야구장에서 우리 히어로즈와의 경기에서 SK 와이번스가 8:0으로 승리하며 감독 통산 1000승을 달성했다. 이는 역대 두 번째 기록이다.

[2년 연속 페넌트레이스 우승]

KIA 타이거즈와의 경기에서 승리하며 2년 연속 페넌트레이스 우승을 확정짓고 한국시리즈에 직행했다.

2008년 9월 21일, SK가 KIA 타이거즈와의 경기에서 승리함으로써 2년 연속 페넌트레이스 우승을 확정해 한국시리즈에 직행했다.

[SK 와이번스 2년 연속 한국시리즈 우승]

두산 베어스를 상대로 4연승을 거두며 2년 연속 한국시리즈 우승을 차지했다.

2008년 10월 31일에 삼성 라이온즈를 꺾고 2007년 시즌에 이어 2008년 한국시리즈에서 다시 두산 베어스를 만났다. 1차전에서 패배한 이후, 4연승을 함으로써 2년 연속 한국시리즈 우승을 했다.

[2009 WBC 감독직 고사]

2009 WBC 대표팀 감독 제의를 받았으나 '한 곳에 집중하는 성격'이라며 건강상의 이유로 고사했다.

2009 WBC 대표팀 감독 제의를 받았으나 '내가 한 곳에 집중하는 성격이라 대표팀 감독을 맡게 된다면 몸이 아플 것 같다'라는 이유로 이를 고사한 것으로 알려졌다. 이는 당시 여론의 비판을 받았다.

2009

[프로 야구 아시아 최다 19연승 달성]

SK 와이번스를 이끌고 8월 25일부터 9월 26일까지 19연승을 기록, 아시아 신기록을 달성했다.

2009년 8월 25일의 승리를 시작으로 9월 26일에 정규 시즌을 마감할 때까지 19연승을 거뒀다. 이로써 기존의 삼성 라이온즈가 가지고 있던 17연승 기록을 경신했으며, 이는 아시아 신기록이 됐다.

[한국시리즈 준우승 및 혹사 논란]

주축 선수들의 부상 이탈 속에서도 KIA 타이거즈와 한국시리즈 7차전까지 가는 접전을 벌였으나 아쉽게 준우승에 머물렀다. 전병두 혹사 논란이 불거졌다.

2009년 KIA 타이거즈와 맞붙게 된 2009년 한국시리즈에서는 박경완, 김광현, 전병두, 송은범 등 주축 선수들의 부상 속출에 따른 전력 이탈로 인한 어려움 속에서도 마지막 7차전까지 가는 접전을 벌였으나 나지완에게 끝내기 홈런을 허용해 준우승을 차지했다. 한편 2009년 시즌 전병두가 불펜 투수임에도 불구하고 100이닝 이상을 소화해 혹사 논란이 있었다.

2010

[SK 와이번스 3번째 한국시리즈 우승]

삼성 라이온즈를 4전 전승으로 스윕하며 SK 와이번스의 3번째 한국시리즈 우승을 이끌었다.

2010년 한국시리즈에서 삼성 라이온즈를 4전 전승으로 스윕해 3번째 우승을 차지했다.

[일본 고치현 관광 특사 임명]

일본 고치현 관광 특사를 맡았다.

2010년 12월에는 일본 고치현 관광 특사를 맡았다.

2011

[감독 통산 1200승 달성]

대전 한화생명 이글스파크에서 한화 이글스와의 경기에서 SK 와이번스가 7:4로 승리하며 감독 통산 1200승을 달성했다.

2011년 5월 4일 대전 한화생명 이글스파크에서 한화 이글스와의 경기에서 SK 와이번스가 7:4로 승리하며 감독 통산 1200승을 달성했다. 이는 역대 두 번째 기록이다.

[SK 와이번스 감독 경질]

프런트와의 재계약 마찰로 2011년 시즌 후 자진 사임을 선언했으나, 다음 날 SK 와이번스에서 바로 경질되었다.

2011년 8월 17일에 프런트와의 재계약 마찰로 인해 2011년 시즌 후 자진 사임을 선언하자 다음 날인 2011년 8월 18일 SK 와이번스에서 바로 경질하고 당시 2군 감독이었던 이만수에게 감독 대행을 맡겼다.

[성균관대학교 야구부 인스트럭터 활동]

성균관대학교 야구부 인스트럭터로 초빙되어 전국체전 우승에 크게 기여했다.

전에 태평양 돌핀스, 쌍방울 레이더스에서 함께 했던 성균관대학교 야구부 이연수 감독의 요청으로 2011년 9월 5일 성균관대학교 야구부의 인스트럭터로 초빙되어 성균관대학교 야구부가 전국체전에 우승하는 데 큰 기여를 하였다.

2012

[고양 원더스 초대 감독 취임]

대한민국 최초의 독립 야구단 고양 원더스의 초대 감독으로 선임되어 총 22명의 선수를 프로로 진출시켰으나, 외국인 용병 투수 활용으로 논란이 있었다.

시즌 후 대한민국 최초의 독립 야구단 고양 원더스의 초대 감독으로 선임됐고, 2012년 2군 번외 경기에서 좋은 경기력을 인정받아 시즌 중 구단과 재계약에 합의했다. 감독 재직 기간 동안 총 22명의 선수를 프로로 진출시켰으며, 그 중 일부 선수는 방출로 인해 고양 원더스에서 기량을 갈고 닦다가 재진입에 성공했다. 하지만 고양 원더스는 외국인 용병 투수 7명을 동원해 팀 전체 이닝의 80%을 외국인 용병 투수가 던지게 해 논란이 있었다.

[대한스포츠애널리스트협회 초대 회장 취임]

대한스포츠애널리스트협회(KSA) 초대 회장에 임명되었다.

2012년 6월에는 대한스포츠애널리스트협회(KSA) 초대 회장에 임명됐다.

2014

[고양 원더스 해체]

고양 원더스가 해체되면서 초대 감독으로서의 역할을 마쳤다.

고양 원더스가 해체했다.

2015

[한화 이글스 감독 취임 및 혹사 논란]

김응용 감독 후임으로 한화 이글스 감독에 취임하여 첫 시즌 팀을 6위로 이끌었으나, 투수 혹사 논란이 제기되었다.

김응용의 후임으로 2015년 시즌부터 한화 이글스의 감독으로 취임했다. 첫 번째 시즌에는 그 동안 최하위를 도맡아했던 팀을 6위로 이끌었지만, 선발 투수를 믿지 못하고 조금만 흔들려도 바로 교체하는 퀵후크를 자주 했고, 권혁, 박정진, 송창식, 윤규진 등의 필승조 투수를 너무 자주 올려서 혹사 논란이 일었다.

[감독 통산 1300승 달성]

대전 한화생명 이글스파크에서 삼성 라이온즈와의 경기에서 한화 이글스가 7:6으로 승리하며 감독 통산 1300승을 달성했다.

2015년 9월 29일 대전 한화생명 이글스파크에서 삼성 라이온즈와의 경기에서 한화 이글스가 7:6으로 승리하며 감독 통산 1300승을 달성했다. 이는 역대 두 번째 기록이다.

2016

[한화 이글스 시즌 7위 및 투수 혹사 논란 지속]

한화 이글스가 시즌 7위로 마감했으며, 벌떼 야구와 송창식 벌투 혹사 사건 등 투수 혹사 논란이 계속되었다.

벌떼 야구로 그 해 시즌을 7위로 마감했다. 송창식 벌투 혹사 사건 등 2016년 시즌에도 투수 혹사 논란은 계속됐다. 포스트시즌 진출 실패와 맞물려 그에 대한 부정적인 목소리가 극에 달했다.

2017

[한화 이글스 감독 경질]

성적 부진 및 박종훈 단장과의 불화로 한화 이글스 감독직에서 경질되었다.

박종훈 단장이 단장으로 취임한 후 감독의 권한을 둘러싸고 프런트와 갈등이 격화됐다. 2017년 5월 23일 성적 부진 및 단장과의 불화로 경질됐다.

2018

[후쿠오카 소프트뱅크 호크스 코치 고문]

일본 프로 야구 후쿠오카 소프트뱅크 호크스 코치 고문으로 활동을 시작하여 2021년까지 이어졌다.

후쿠오카 소프트뱅크 호크스 코치 고문으로 2018년부터 2021년까지 활동했다.

2022

[후쿠오카 소프트뱅크 호크스 감독 고문]

후쿠오카 소프트뱅크 호크스 감독 고문으로 활동했다.

후쿠오카 소프트뱅크 호크스 감독 고문으로 2022년에 활동했다.

2023

[최강 몬스터즈 감독 취임]

JTBC 예능 프로그램 '최강야구'의 최강 몬스터즈 제2대 감독으로 취임했다.

2023년 1월 9일부터 JTBC '최강야구' 프로그램의 최강 몬스터즈 제2대 감독으로 활동 중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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