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립 (사회주의자)

독립운동가, 사회주의자, 언론인, 정치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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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근 수정 시각 : 2025-10-21- 16:58:0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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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제강점기 독립운동가이자 사회주의자로 활동했습니다.대한민국 임시정부 국무총리 권한대행과 고려공산당 상해파 비서부장 등을 역임했습니다.블라디미르 레닌의 독립운동 자금을 둘러싼 임시정부와의 갈등 끝에 1922년 상하이에서 암살당했습니다.사후 오랜 기간 자금 횡령 누명을 썼으나, 구 소련 비밀문서 공개 후 재조명받고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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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880

[김립 출생]

독립운동가 김립(본명 김익용)이 함경북도 명천군에서 태어났다.

김립은 1880년(추정) 함경북도 명천군에서 김익용이라는 이름으로 태어났다. 그의 가계나 젊은 시절에 대한 자료는 정확하게 알려져 있지 않으며, 후에 립(立)으로 개명했다.

1910

[보성전문학교 졸업 및 신민회 활동]

보성전문학교 법학과 정치학을 전공하고 졸업했으며, 신민회와 서북학회에서 청년 지도자로 활동하며 교육 문화 활동을 주도했다.

김립은 보성전문학교에서 법학과 정치학을 전공하고 1910년 3월 졸업했다. 그는 신민회와 서북학회에서 유력한 청년 지도자로 교육 문화 활동을 주도했으며, 같은 고향 출신 후배 허헌 등과 일본, 영국의 입헌제도에 관심을 갖고 입헌군주국 수립을 결심했으나 한일합방으로 무산되었다.

1911

[블라디보스토크 망명 및 권업회 참여]

한일합방 이후 블라디보스토크로 망명하여 항일 독립운동 단체인 권업회 조직에 동참하였다.

1910년 한일합방 이후 블라디보스토크로 망명한 김립은 1911년 신한촌에서 조직된 항일독립운동 단체인 권업회에 동참하여 활동했다.

1912

[시베리아 한인 교육 활동 시작]

시베리아에서 이상설, 이동휘와 함께 한인 교포 자녀들의 교육을 위해 광성학교를 설립하고, 이동휘와 길성학교를 설립 후 만주로 건너갔다.

1912년 시베리아에서 이상설, 이동휘와 함께 한인 교포 자녀들을 위한 광성학교를 설립하여 청소년들을 가르쳤다. 또한 이동휘와 함께 길성학교를 설립한 후 만주로 건너갔다.

1913

[동림무관학교 교수 취임]

만주 왕칭현 뤄쯔거우 다뎬쯔에 있는 동림무관학교의 교수가 되었다.

1913년 만주 왕칭현 뤄쯔거우 다뎬쯔에 위치한 동림무관학교의 교수로 취임하여 활동했다.

1917

[러시아에서 체포 및 석방]

독일 스파이 혐의로 제정 러시아 경찰에 체포, 투옥되었으나 2월 러시아 임시정부가 세워지면서 무혐의로 석방되었다.

1917년 1월 독일 스파이라는 혐의로 제정 러시아 경찰에 체포되어 투옥되었다. 그러나 2월 러시아 임시정부가 세워지면서 무혐의로 석방되었고, 러시아 혁명에 고무되어 극동 러시아의 혁명 중심지 하바로프스크로 건너가 이동휘를 보좌하며 한인사회당 조직을 위한 사람과 물자를 확보했다.

1918

[전로한족회중앙총회 부회장 선출]

전로한족회중앙총회 부회장에 선출되었고, 기관지 '한인시보' 발행에 참여했다.

1918년 1월 전로한족회중앙총회 부회장에 선출되어 활동했으며, 그 기관지인 '한인시보' 발행에도 참여했다.

[신민회에서 공산주의 수용 주장]

신민회 망명간부회의에 참여하여 공산주의 수용을 주장했다.

1918년 2월에 열린 신민회 망명간부회의에 참가하여 공산주의를 수용할 것을 주장했다.

[한인사회당 창당 주도]

이동휘 등과 함께 연해주 하바로프스크에서 한인사회당을 창당하고 선전부장 및 기관지 '자유종'의 주필이 되었다.

1918년 5월 11일, 연해주 하바로프스크에서 이동휘, 한형권 등과 함께 친 볼셰비키적 한인사회당을 창당했다. 김립은 한인사회당의 선전부장이 되고 기관지 '자유종'을 발행하며 주필이 되었다. 또한 이동휘 위원장 체제의 당 교통부장 연락책에 선출되었고, 비공산주의 계열 청년 인사들을 사회당으로 포섭하기 위해 노력했다.

1919

[상하이 한인사회당 지부 결성]

중국 상하이로 건너가 한인사회당의 상하이 지부를 결성했다.

1919년 초 중국 상하이로 건너가 한인사회당의 상하이 지부를 결성하며 활동 영역을 넓혔다.

[상해 임시정부 참여 결정]

이동휘 등 한인사회당 주요 간부들과 상해 임정 참여 여부를 논의하고, 임정 승인 및 간부 참여를 결정했다.

1919년 6월 말 또는 7월 초, 이동휘를 포함한 김규면, 김립, 박진순 등 주요 간부들이 참여한 회의에서 한인사회당은 상해 임정을 승인하고, 당 간부들의 상해 임정 참여를 허용하기로 결정했다. 이 회의에서 이동휘와 김립은 상해로, 박진순, 박애, 이한영은 모스크바로 파견될 것이 결의되었다.

[대한신민단 한인사회당으로 흡수]

신민단 단장 김규면을 설득하여 대한신민단을 한인사회당에 흡수시키는 데 성공했다.

1919년 6월 26일자 첩보문서에 따르면, 김립은 이동휘의 최측근 참모이자 한인사회당의 최고 책략가로서, 신민단 단장 김규면을 설득하여 신민단과 한인사회당의 통합을 성사시켰다.

[신한민회 조직 참여]

해삼위 신한촌에서 이동휘, 문창범 등 2백여 명의 한인 독립운동 대표들과 함께 신한민회를 조직하고 국내 진공을 논의했다.

1919년 7월 해삼위 신한촌에서 이동휘, 문창범, 황병길, 오영선 등 2백여 명의 한인 독립운동 대표들과 함께 신한민회를 조직하고 국내 진공 작전을 논의하는 데 참여했다.

[임시정부 국무원 비서장 취임]

대한민국 임시정부 국무총리 이동휘를 따라 상하이로 이동, 임시정부 국무원 비서장으로 취임하여 활동했다.

1919년 8월, 상하이에서 대한민국 임시정부가 수립되자 국무총리로 부임하는 이동휘를 따라 상하이로 이동하여 임시정부 국무원 비서장에 선임되어 잠시 활동했다. 이 사실은 김립을 한인 독립운동가들 사이에 질시 또는 선망의 대상으로 만들었다.

1920

[임시정부 비서장직 사퇴]

국무총리 이동휘가 사회주의 활동과 소련과의 관계로 임시정부를 떠나면서 김립 또한 임정 비서장직을 사퇴했다.

이동휘가 사회주의 활동 및 소련과의 관계 등으로 임시정부 내 갈등을 겪다 임정 비서장직에서 물러나면서, 김립도 1920년에 임정 비서장직을 사퇴했다. 이 시기에 임정 국무원 서무국장 이원익이 김립이 이동휘에게 보내려던 밀서를 빼돌려 밀서 파문이 발생하기도 했다.

1921

[고려공산당 상해파 결성]

이동휘 등과 함께 한인사회당을 해산하고 고려공산당 상해파를 결성하는 데 참여했으며, 비서부장이 되었다.

1921년 1월, 이동휘 등과 함께 한인사회당을 발전적으로 해산하고 고려공산당으로 개편, 고려공산당 상해파를 결성하는 데 참여했다. 김립은 고려공산당 상해파의 비서부장이 되었고, 그해 5월 고려공산당 창당 선언, 강령 및 규약을 발표했다. 또한 사회주의 홍보물을 국내로 반입시키는 역할을 맡았다.

[고려공산당 창당 선언 발표]

고려공산당 대표회의 이름으로 창당 선언, 강령 및 규약을 발표했다.

1921년 5월, 김립은 고려공산당 창당선언, 강령 및 규약을 고려공산당 대표회의 이름으로 발표하며 당의 활동을 공식화했다.

[레닌으로부터 독립운동 자금 지원받음]

소비에트 연방 모스크바 코민테른 회의에서 블라디미르 레닌으로부터 독립운동 자금 200만 루블을 지원받았다.

1921년 11월, 모스크바에서 열린 코민테른에 한형권 등과 함께 한인사회당 대표자로 참석하여 블라디미르 레닌으로부터 200만 루블의 독립운동 자금을 지원받았다. 이 자금은 한인 독립운동에 대한 국제공산당의 원조였다.

1922

[임시의정원 회의에서 성토문 발표]

임시 의정원 회의에서 이동휘와 함께 성토문을 발표하며 임시정부 내의 갈등이 심화되었다.

1922년 1월, 임시 의정원 회의에서 이동휘와 김립 등은 성토문을 발표하여 임시정부 내 갈등을 표출했다. 이로 인해 두 계열 간 난투극이 벌어지기도 했고, 의정원 의원들이 대거 사퇴하는 등 내분이 격화되었다.

[임시정부의 김립 횡령 성토 포고문 발표]

상해 임시정부는 이동휘와 김립이 레닌의 자금을 횡령하고 정부를 파괴하려 했다는 내용의 포고문을 발표했다.

1922년 1월 26일, 상해 임시정부는 신규식, 이동녕 등 각료들 명의로 이동휘와 김립을 성토하는 포고문을 발표했다. 포고문은 김립이 한형권을 통해 받은 거액의 자금을 횡령하고 이동휘와 결탁하여 공산주의 운동 미명하에 간모를 하고 있다며, 극형에 처할 만하다고 선언했다. 이는 레닌 자금 문제를 둘러싼 임시정부와의 갈등이 극에 달했음을 보여준다.

[상하이에서 암살당함]

레닌의 독립운동 자금 문제로 임시정부와 갈등을 겪던 중, 상하이 자베이 거리에서 김구의 지시를 받은 오면직, 노종균 등에게 총격을 받고 암살당했다.

1922년 2월 11일, 김립은 상하이 자베이 거리에서 김구의 부하인 오면직, 노종균 등의 총격을 받고 암살당했다. 그는 김철수, 유진희, 김하구와 함께 있다가 이들의 은신처를 알아낸 암살범들의 공격을 받았으며, 병원으로 이송되었으나 과다출혈로 사망했다. 그의 시신은 상하이 송경령공원에 안장되었다. 이 사건 이후 소련 공산당은 상하이 한인 공산당 조직 해소를 지시하고 임시정부에 대한 호의를 거두게 된다.

1990

[사후 재평가 시작]

김구의 '백범일지' 기록 등으로 오랜 기간 독립운동 자금을 횡령했다는 부정적인 평가를 받았으나, 1990년대 구 소련 비밀문서 공개 후 누명이 벗겨지며 재조명받기 시작했다.

사후 김구의 '백범일지' 기록에 따라 독립운동 자금 40만 루블을 사적으로 유용, 낭비했다는 부정적인 평가가 주를 이루었으나, 1990년대 구 소련 비밀문서 등이 공개되면서 자금 횡령이 사실이 아니었다는 것이 알려지고 그에 대한 연구 활동이 나타나기 시작하며 재조명받고 있다. 레닌의 자금은 임시정부가 아닌 이동휘 등 한인 공산주의자들에게 직접 지원된 것이었음이 밝혀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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