토미즘
철학 사상, 가톨릭 신학, 스콜라 철학, 서구 지성사
최근 수정 시각 : 2026-01-27- 09:25:08
토미즘은 13세기 성 토마스 아퀴나스가 아리스토텔레스의 철학과 그리스도교 신앙을 창조적으로 통합하며 세운 서구 사상의 거대한 기둥입니다. 인간의 이성과 신의 계시가 조화를 이룰 수 있다는 그의 통찰은 중세 스콜라 철학의 정점을 찍었으며, 이후 수세기 동안 가톨릭 교회의 공식적인 학문적 토대가 되었습니다. 19세기의 신토미즘 부흥을 거쳐 현대의 분석적 토미즘에 이르기까지, 토미즘은 존재론, 윤리학, 자연법 사상을 통해 인간 지성이 진리에 도달하는 길을 제시하며 서구 문명의 윤리적, 철학적 근간을 유지해오고 있습니다.
1225
[토마스 아퀴나스의 탄생]
토미즘의 창시자인 토마스 아퀴나스가 이탈리아 로카세카의 귀족 가문에서 태어났습니다. 그는 어린 시절부터 나폴리 대학교에서 아리스토텔레스 철학을 접하며 학문적 토대를 닦았습니다. 이는 훗날 이성과 신앙을 결합하는 토미즘 사상의 물리적 시작점이 되었습니다.
토마스는 아퀴노 백작 가문의 아들로 태어나 몬테카시노 수도원에서 초기 교육을 받았습니다.
나폴리 대학교 재학 시절 도미니코 수도회의 청빈한 삶에 매료되어 가족의 반대를 무릅쓰고 입회를 결정했습니다.
이 시기 그가 접한 아리스토텔레스 철학은 당시 가톨릭 신학계에 혁신적인 도구로 활용될 준비가 되고 있었습니다.
1245
[알베르투스 마그누스 사사]
토마스가 파리와 쾰른에서 당대 최고의 석학인 알베르투스 마그누스로부터 가르침을 받기 시작했습니다. 스승 알베르투스는 자연과학과 아리스토텔레스 철학을 신학에 도입하려 노력한 인물이었습니다. 토마스는 스승의 사상을 계승하고 확장하여 토미즘의 초기 골격을 형성했습니다.
쾰른에서 알베르투스는 토마스의 천재성을 알아보고 '이 벙어리 황소의 울음소리가 온 세상에 울려 퍼질 것'이라고 예언했습니다.
스승의 지도로 아리스토텔레스의 원문을 정밀하게 분석하며 철학적 논증의 엄밀함을 익혔습니다.
이 교육 과정은 토미즘이 단순한 신앙 고백을 넘어 체계적인 학문적 구조를 갖추는 데 결정적인 역할을 했습니다.
1252
[파리 대학교 강의 시작]
토마스가 유럽 학문의 중심지인 파리 대학교에서 성서 주석과 신학 강의를 시작했습니다. 그는 기존의 플라톤주의적 신학에 맞서 아리스토텔레스적 논리를 도입하며 주목받았습니다. 이때부터 토미즘의 독창적인 방법론이 학계의 주요 담론으로 부상하기 시작했습니다.
학생들과 동료 학자들 사이에서 명쾌한 논리와 깊이 있는 통찰로 명성을 쌓았습니다.
피에르 롬바르두스의 '명제집' 주석을 통해 자신의 신학적 견해를 체계적으로 정리하기 시작했습니다.
파리에서의 강의 경험은 토미즘이 보편적인 학술 언어로 정립되는 중요한 계기가 되었습니다.
1265
[신학대전 집필 착수]
토미즘의 결정판이자 서구 신학의 금자탑인 '신학대전(Summa Theologiae)' 집필을 시작했습니다. 신학 초보자들을 교육하기 위해 기획된 이 방대한 저술은 신, 인간, 그리스도를 중심으로 우주의 질서를 다룹니다. 이 책은 훗날 토미즘을 연구하는 모든 이들의 교과서가 되었습니다.
존재론, 윤리학, 법학 등 인간 지성이 다룰 수 있는 모든 영역을 신학적 관점에서 통합했습니다.
질문(Questio)과 반론, 그리고 답변으로 이어지는 스콜라적 논증 방식의 정수를 보여주었습니다.
이 저술을 통해 '이성은 신앙의 시녀'라는 원칙 아래 철학이 신학을 어떻게 보조할 수 있는지 완벽히 입증했습니다.
1270
[아베로에스주의와의 논쟁]
이성과 신앙의 진리가 서로 다를 수 있다는 '이중 진리설'을 주장하는 라틴 아베로에스주의자들에 맞서 논박을 펼쳤습니다. 토마스는 진리는 하나이며 이성과 신앙은 결코 모순될 수 없음을 강조했습니다. 이 논쟁을 통해 토미즘은 이성의 자율성을 보장하면서도 신앙의 우월성을 지켜냈습니다.
그는 '지성의 단일성'에 반대하며 인간 개개인이 고유한 지성을 가지고 있음을 논증했습니다.
아베로에스주의자들이 오해한 아리스토텔레스 철학을 본래의 의미로 되돌려 놓는 데 주력했습니다.
이 승리는 가톨릭 교내에서 아리스토텔레스 철학이 정통성을 인정받는 중요한 분수령이 되었습니다.
1274
[토마스 아퀴나스의 선종]
리옹 공의회로 향하던 중 포사노바 수도원에서 토마스 아퀴나스가 짧은 생을 마감했습니다. 그는 임종 직전 '내가 쓴 모든 것은 지푸라기처럼 보인다'며 신비적 체험 앞에서의 학문적 한계를 고백했습니다. 그의 사후 그의 가르침은 '토미즘'이라는 이름으로 제자들에 의해 계승되었습니다.
미완으로 남은 신학대전은 제자인 레지날두스에 의해 정리되어 후세에 전해졌습니다.
임종 시 그는 아가서를 주해하며 신과의 일치를 갈망하는 경건한 모습을 보였습니다.
그의 죽음은 한 개인의 종말이 아닌, 유럽 지성사를 지배할 거대 사조의 탄생을 의미했습니다.
1277
[파리 대주교의 금지령]
파리 대주교 에티엔 탕피에가 토마스의 일부 주장을 포함한 219개의 명제를 금지 목록에 올렸습니다. 보수적인 신학자들은 토마스의 아리스토텔레스적 접근이 신의 전능함을 제한한다고 우려했습니다. 초기 토미즘은 이 시기 정통성 논란에 휩싸이며 시련을 겪었습니다.
특히 질료와 형상의 결합에 관한 토마스의 단일 형상론이 주요 공격 대상이 되었습니다.
옥스퍼드에서도 로버트 킬워드비에 의해 유사한 금지 조치가 내려지며 학문적 위기를 맞았습니다.
이 금지령은 역설적으로 토미즘의 논리적 허점을 보완하고 더욱 정교한 체계를 갖추는 자극제가 되었습니다.
1286
[도미니코회의 공식 채택]
도미니코 수도회 총회에서 토마스 아퀴나스의 가르침을 수도회의 공식 학설로 채택했습니다. 외부의 비판에도 불구하고 수도회 차원에서 그의 사상을 보호하고 전파하기로 결정한 것입니다. 이로써 토미즘은 안정적인 교육 기반을 확보하며 교세 전역으로 퍼져나갔습니다.
모든 도미니코회 수도자들은 토마스의 저술을 바탕으로 신학을 공부하도록 의무화되었습니다.
수도회 내의 뛰어난 학자들이 토마스 사상의 주석가로 활동하며 초기 토미즘을 공고히 했습니다.
특정 수도회의 학문적 자산으로 시작된 토미즘이 보편적 지위를 얻는 첫 발을 뗐습니다.
1316
[시성 절차의 개시]
교황 요한 22세가 토마스 아퀴나스의 시성 조사를 공식적으로 시작했습니다. 그의 학문적 업적뿐만 아니라 삶의 거룩함에 대한 조사가 다각도로 이루어졌습니다. 이는 토미즘이 가톨릭 정통 교의와 완벽히 일치함을 확인하는 종교적 과정이었습니다.
조사 과정에서 그의 사상이 교회를 어지럽히는 것이 아니라 세우는 데 기여했음이 강조되었습니다.
나폴리와 시칠리아 지역에서 그가 행한 기적들과 덕행들이 증언으로 수집되었습니다.
시성 절차는 토미즘에 대한 학계의 비판적 시각을 우호적으로 돌리는 데 큰 역할을 했습니다.
1323
[토마스 아퀴나스 시성]
교황 요한 22세가 아비뇽에서 토마스 아퀴나스를 성인으로 선포했습니다. 교황은 '그가 쓴 명제 하나하나가 기적'이라며 그의 지혜를 찬양했습니다. 이 시성은 토미즘이 가톨릭 교회의 공식적이고 안전한 가르침이라는 최종적인 보증이 되었습니다.
성인 반열에 오름으로써 그의 모든 저술은 이단 혐의에서 완전히 벗어나게 되었습니다.
교회는 그를 '천사적 박사(Doctor Angelicus)'로 부르며 최고의 존경을 표했습니다.
이 사건을 기점으로 유럽 전역의 대학에서 토미즘을 연구하는 풍토가 폭발적으로 확산되었습니다.
1324
[과거 금지령의 공식 철회]
파리 주교 보르가 1277년에 내려졌던 토마스 아퀴나스 관련 금지 조항들을 공식적으로 철회했습니다. 성인이 된 그의 가르침을 더 이상 금지할 명분이 사라졌기 때문입니다. 이로써 토미즘은 법적, 종교적 제약 없이 학문의 자유를 누리게 되었습니다.
철회 결정은 파리 대학교의 학문적 분위기를 토미즘 중심으로 재편하는 결과를 낳았습니다.
기존의 프란치스코회적 학설과 대등하거나 우월한 지위에서 경쟁할 수 있게 되었습니다.
토미즘의 정통성이 확립되면서 중세 스콜라 철학의 전성기가 본격적으로 열렸습니다.
1367
[툴루즈 대학교의 지침]
교황 우르바노 5세가 툴루즈 대학교에 토마스 아퀴나스의 학설을 따르도록 강력히 지시했습니다. 이는 특정 대학의 교육 표준으로 토미즘이 지정된 사례입니다. 교황청의 이 같은 지원은 토미즘이 유럽 고등 교육의 표준이 되는 데 기여했습니다.
교황은 토마스의 가르침이 가장 명확하고 오류가 적다는 점을 강조했습니다.
이후 다른 대학들도 교황청의 권고를 받아들여 토미즘 강좌를 필수적으로 개설했습니다.
토미즘은 이제 단순한 학파를 넘어 가톨릭 지성 공동체의 공용어가 되었습니다.
1485
[명제집을 대체한 신학대전]
여러 유럽 대학에서 표준 교재였던 피에르 롬바르두스의 '명제집' 대신 토마스의 '신학대전'을 주교재로 채택하기 시작했습니다. 이는 신학 교육의 패러다임이 완전히 토미즘으로 전환되었음을 의미합니다. 학문적 엄밀성과 체계성에서 토미즘이 승리한 결과였습니다.
독일의 쾰른 대학교를 비롯한 주요 명문 대학들이 이 변화를 주도했습니다.
학생들은 이제 신학의 기초부터 심화까지 토마스의 논리를 따라 학습하게 되었습니다.
이 교재 교체는 이후 수백 년간 지속될 가톨릭 신학 교육의 모델을 확립했습니다.
1511
[카예타누스의 주석서 발간]
토미즘의 위대한 주석가 토마소 데 비오(카예타누스)가 신학대전에 대한 방대한 주석을 완성했습니다. 그는 토마스의 텍스트를 현대적으로 해석하고 보완하여 토미즘의 생명력을 연장했습니다. 카예타누스의 주석은 이후 신학대전을 읽는 이들의 필수적인 동반자가 되었습니다.
카예타누스는 토미즘의 용어들을 더욱 정교하게 정의하여 논리적 명확성을 높였습니다.
종교개혁의 도전에 맞서 가톨릭 교의를 방어하는 데 그의 토미즘적 논증이 핵심적으로 사용되었습니다.
그의 작업은 토미즘이 시대의 변화에 발맞추어 재해석될 수 있음을 보여준 모범 사례였습니다.
1545
[트리엔트 공의회의 개막]
종교개혁에 대응하기 위해 열린 트리엔트 공의회에서 토미즘은 가톨릭 신학의 강력한 무기가 되었습니다. 전해지는 기록에 따르면, 공의회 회의장에 성경과 함께 신학대전이 놓여 있었다고 할 만큼 그 영향력이 절대적이었습니다. 토미즘은 가톨릭 반종교개혁의 사상적 기반이 되었습니다.
의화(Justification)와 성사론에 관한 공의회의 결정들은 토미즘의 논리에 큰 빚을 졌습니다.
살라망카 학파의 토미스트들이 공의회 신학 자문관으로 대거 참여하여 활약했습니다.
이 공의회를 통해 토미즘은 가톨릭 교회의 '유일한' 정통 학설에 가까운 지위를 굳혔습니다.
1567
[교회학자로 선포]
교황 비오 5세가 토마스 아퀴나스를 '교회학자(Doctor Ecclesiae)'로 공식 선포했습니다. 이는 그의 가르침이 교회 전체에 보편적이고 영구적인 가치가 있음을 확인한 것입니다. 이로써 그는 4대 라틴 교부들과 어깨를 나란히 하는 권위를 얻게 되었습니다.
그는 '천사적 박사'라는 칭호와 함께 가톨릭 지성의 최고봉으로 공인되었습니다.
그의 축일은 로마 전례력에서 최고의 등급으로 격상되어 기념되었습니다.
이 선포는 토미즘이 가톨릭 신앙의 필수적인 일부임을 대외적으로 선언한 것이었습니다.
1580
[수아레스의 등장]
예수회의 프란시스코 수아레스가 토미즘을 계승하면서도 독자적인 발전을 꾀한 '바로크 스콜라 철학'을 전개했습니다. 그는 토마스의 사상을 체계적으로 재정리하여 방대한 저술을 남겼습니다. 이는 '수아레스주의'라는 이름으로 토미즘의 변용된 형태를 만들어냈습니다.
수아레스는 존재론과 법철학 분야에서 토마스의 사상을 근대적 관점에 가깝게 발전시켰습니다.
그의 저술은 가톨릭뿐만 아니라 개신교 대학에서도 교재로 사용될 만큼 영향력이 컸습니다.
토미즘의 정통성과 변용 사이에서 활발한 학문적 논쟁이 촉발되는 계기가 되었습니다.
1597
[형이상학 논고 출간]
수아레스가 '형이상학 논고(Disputationes Metaphysicae)'를 출간하며 스콜라 철학의 새로운 체계를 제시했습니다. 이 책은 신학적 맥락에서 벗어나 순수하게 형이상학을 다룬 최초의 독립적인 저술 중 하나입니다. 토미즘적 원리를 바탕으로 하면서도 독창적인 논증을 더해 유럽 지성사에 큰 족적을 남겼습니다.
이 저술은 데카르트, 라이프니츠 등 근대 철학자들에게 직접적인 영향을 주었습니다.
토미즘의 존재론이 근대 철학으로 넘어가는 가교 역할을 수행했습니다.
복잡한 중세 스콜라 철학을 체계적으로 분류하고 요약하여 후세에 전달한 공로가 큽니다.
1600
[매뉴얼주의의 확산]
17세기에 접어들며 토미즘은 방대한 원문 대신 요약된 '매뉴얼(교본)' 형태로 신학교에서 가르쳐지기 시작했습니다. 복잡한 논쟁보다는 명확한 결론 위주의 교육이 이루어지면서 토미즘의 대중화가 이루어졌습니다. 하지만 이는 원문의 깊이를 잃게 한다는 비판을 나중에 받게 됩니다.
신학생들이 짧은 시간 안에 교의를 익힐 수 있도록 문답식이나 요약식 교재가 주를 이루었습니다.
토미즘은 가톨릭 세계의 표준 지식으로 견고하게 자리 잡았으나 학문적 창의성은 다소 정체되었습니다.
이 시기의 토미즘은 '체제 옹호적' 성격이 강해지며 근대 과학과 철학의 도전에 직면하게 됩니다.
1879
[에테르니 파트리스 반포]
교황 레오 13세가 회칙 '에테르니 파트리스(Aeterni Patris)'를 통해 토미즘의 부흥을 공식 선언했습니다. 근대 사상의 혼란에 맞서 토마스 아퀴나스의 '황금 지혜'로 돌아갈 것을 전 세계 가톨릭 교회에 명령했습니다. 이 회칙은 '신토미즘(Neo-Thomism)' 운동의 출발점이 되었습니다.
교황은 토마스의 철학이 신앙과 이성의 완벽한 조화를 보여주는 최고의 모델임을 강조했습니다.
전 세계 가톨릭 대학교와 신학교에 토미즘 교육을 필수로 실시하도록 지시했습니다.
이후 수십 년간 가톨릭 지성계는 토미즘을 중심으로 놀라운 학문적 부흥기를 맞이했습니다.
1880
[로마 안젤리쿰의 강화]
교황 레오 13세가 로마의 도미니코회 대학교(안젤리쿰)를 토미즘 연구의 세계적 중심지로 육성하기 시작했습니다. 최고의 교수진을 배치하고 전 세계의 우수한 학생들을 불러 모았습니다. 안젤리쿰은 신토미즘의 산실로서 수많은 교회 지도자들을 배출했습니다.
이곳에서 배출된 학자들은 각국으로 돌아가 토미즘 부흥 운동을 전파했습니다.
신학대전에 대한 정밀한 텍스트 연구와 주석 작업이 현대적 방법론으로 재개되었습니다.
안젤리쿰은 오늘날까지도 토미즘의 가장 순수한 전통을 잇는 보루로 여겨집니다.
1882
[레오닌 위원회 출범]
토마스 아퀴나스의 전집을 비판적으로 교정하여 발간하기 위한 '레오닌 위원회'가 설립되었습니다. 중세 이후 필사 과정에서 생긴 오류들을 바로잡고 가장 정확한 원문을 복원하는 방대한 작업입니다. 이 위원회의 활동은 현대 토미즘 연구의 과학적 토대를 마련했습니다.
현재까지도 수십 권의 전집이 발간되며 정밀한 텍스트 복원 작업이 이어지고 있습니다.
라틴어 원문에 대한 엄밀한 어휘 분석과 문맥 연구가 병행되었습니다.
이 작업은 토미즘이 단순한 신념이 아니라 엄격한 문헌학적 기초 위에 있음을 입증했습니다.
1889
[루뱅 고등철학연구소 설립]
데지레 메르시에 추기경이 벨기에 루뱅 대학교에 고등철학연구소를 설립하여 토미즘과 현대 과학의 대화를 시도했습니다. 그는 토미즘을 폐쇄적인 체계가 아닌 개방적인 학문으로 발전시키려 노력했습니다. 루뱅은 신토미즘의 또 다른 중요한 거점이자 혁신의 중심지가 되었습니다.
심리학, 물리학 등 당시 신흥 과학들과 토미즘의 존재론을 접목하는 연구가 진행되었습니다.
메르시에는 토미즘이 현대적 질문에 답할 수 있는 살아있는 사상임을 강조했습니다.
이곳의 연구 성과는 가톨릭 지성계가 근대 문명과 소통하는 데 크게 기여했습니다.
1895
[세페리노 곤살레스의 활약]
스페인의 추기경이자 철학자인 세페리노 곤살레스가 '철학사'를 통해 토미즘의 관점에서 서구 사상사를 재정리했습니다. 그는 스페인어권에서 신토미즘 부흥을 주도하며 라틴 아메리카까지 영향력을 넓혔습니다. 토미즘이 언어와 지역의 벽을 넘어 보편화되는 과정이었습니다.
곤살레스는 근대 철학의 흐름을 분석하며 토미즘의 우월성을 논리적으로 설파했습니다.
그의 저술은 스페인과 필리핀 등지에서 신학 교육의 표준 교재로 사용되었습니다.
지역적 토미즘 전통이 신토미즘이라는 거대 흐름 속으로 통합되는 데 공헌했습니다.
1910
[24개 토미즘 명제의 확립]
교황 비오 10세가 토미즘의 핵심 원리들을 요약한 '24개 명제'를 승인했습니다. 이는 가톨릭 학교에서 가르쳐야 할 철학적 정석을 제시한 것입니다. 토미즘은 이 시기 가장 체계적이고 구속력 있는 교육 지침으로 관리되었습니다.
존재와 본질의 구별, 질료와 형상의 관계 등 핵심 형상론이 명제에 포함되었습니다.
이 명제들은 근대주의(Modernism)의 도전에 맞서 정통 신앙을 수호하는 지침이 되었습니다.
학문적 자유를 다소 제약한다는 비판도 있었으나 토미즘의 정체성을 수호하는 방패 역할을 했습니다.
1914
[성부성령성회의 공표]
교황청 성부성령성회가 24개 토미즘 명제를 공식적으로 공표하며 모든 신학교에 준수를 명령했습니다. 토미즘은 이제 단순한 추천 학설이 아닌 가톨릭 사제 양성의 필수 도구가 되었습니다. 사상적 통일성을 통해 교회의 일치를 꾀하려는 시기였습니다.
명제들은 토마스 아퀴나스 사상의 정수를 담고 있으며 다른 철학적 오류로부터 학생들을 보호하기 위해 고안되었습니다.
이후 수십 년간 이 명제들은 가톨릭 철학 교육의 뼈대가 되었습니다.
토미즘은 권위 있는 교회의 목소리로서 전 세계 가톨릭 지성계를 지배했습니다.
1917
[교회법전의 법제화]
반포된 가톨릭 교회법전(제1366조)에 신학교 교육 시 토마스 아퀴나스의 방법론과 원리를 따를 것을 명시했습니다. 토미즘이 법적인 구속력을 가진 교육 표준으로 확정된 사건입니다. 이로써 토미즘의 지위는 가톨릭 교회 내에서 불변의 위치를 점하게 되었습니다.
법전은 교수가 학생들을 가르칠 때 성인의 가르침을 거룩하게 지켜야 함을 강조했습니다.
이 조항은 1983년 개정 전까지 가톨릭 신학 교육의 근간이 되었습니다.
법적인 지위 보장은 토미즘이 전 세계 어디서나 동일한 수준으로 교육되는 결과를 낳았습니다.
1923
[스투디오룸 두쳄 반포]
교황 비오 11세가 토마스 아퀴나스 시성 600주년을 기념하여 회칙 '스투디오룸 두쳄(Studiorum Ducem)'을 반포했습니다. 교황은 토마스를 '교회의 스승'으로 재천명하며 그의 사상을 연구할 것을 촉구했습니다. 신토미즘이 절정기로 향하는 문화적 배경이 되었습니다.
회칙은 토마스의 사상이 이단에 대항하는 강력한 보루임을 다시 한번 확인했습니다.
평신도들에게도 성인의 지혜를 배우고 실천할 것을 권고했습니다.
이 시기 자크 마리탱과 같은 평신도 토미스트들이 등장하며 영향력이 사회 전반으로 확산되었습니다.
1925
[에티엔 길송의 성숙]
프랑스의 철학자 에티엔 길송이 '중세 철학의 정신' 등을 통해 역사적 토미즘을 정립했습니다. 그는 토미즘을 추상적인 체계가 아닌 역사적 맥락에서 살아 숨 쉬는 사상으로 부활시켰습니다. 그의 연구는 토미즘이 현대 인문학계에서도 정당한 평가를 받게 했습니다.
길송은 '그리스도교 철학'이라는 개념을 제시하며 신앙이 이성을 고양시키는 과정을 논증했습니다.
그의 존재론 연구는 훗날 실존적 토미즘의 기초가 되었습니다.
북미 지역에 교황청 중세연구소를 설립하는 등 글로벌 연구 네트워크 구축에도 힘썼습니다.
1930
[자크 마리탱의 통합적 인본주의]
자크 마리탱이 토미즘적 원리를 바탕으로 한 '통합적 인본주의'를 발표하며 사회 철학의 새로운 지평을 열었습니다. 그는 현대 민주주의와 인권의 기초를 토미즘에서 찾으려 노력했습니다. 이 사상은 훗날 세계 인권 선언과 현대 그리스도교 민주주의의 사상적 토대가 되었습니다.
마리탱은 인간의 존엄성이 신으로부터 온 것임을 토미즘적으로 증명했습니다.
정치와 종교의 건강한 분리와 협력을 주장하며 현대 사회에 맞는 토미즘의 적용을 보여주었습니다.
그의 활동으로 토미즘은 신학교 담장을 넘어 광장으로 나가는 지적 혁신을 이루었습니다.
1940
[누벨 테올로지의 도전]
앙리 드 뤼바크 등 '누벨 테올로지(새로운 신학)' 학자들이 경직된 매뉴얼 토미즘에 의문을 제기하기 시작했습니다. 이들은 토마스 이전의 교부 문헌으로 돌아가 신학의 원천을 회복할 것을 주장했습니다. 이는 토미즘 내부에 건전한 비판과 성찰의 기회를 제공했습니다.
이들은 토미즘이 지나치게 추상적이고 사변적으로 변질되었다고 비판했습니다.
성경과 교부들의 풍부한 서사성을 복원하려는 노력이 토미즘 연구와 병행되었습니다.
이 논쟁은 훗날 제2차 바티칸 공의회의 신학적 밑거름이 되는 중요한 사건이었습니다.
1946
[가리구 라그랑주의 방어]
전통 토미즘의 거두 레지날드 가리구 라그랑주가 새로운 신학적 시도들에 맞서 엄격한 토미즘을 옹호했습니다. 그는 진리의 불변성을 강조하며 토미즘의 정통 체계를 고수하려 노력했습니다. 신토미즘 내부의 보수적 가치를 지키는 강력한 목소리였습니다.
그는 현대적 경향이 가톨릭 교의를 상대주의로 흐르게 할 위험이 있다고 경고했습니다.
영성 신학과 토미즘 형이상학을 결합하여 깊이 있는 신학적 저술을 남겼습니다.
그의 강직한 태도는 토미즘이 자기 정체성을 잃지 않도록 하는 견인차 역할을 했습니다.
1950
[후마니 게네리스 반포]
교황 비오 12세가 회칙 '후마니 게네리스(Humani Generis)'를 통해 토미즘에서 벗어나려는 경향을 경고했습니다. 교황은 토마스의 철학이 계시된 진리를 이해하는 가장 안전한 길임을 재확인했습니다. 신토미즘 시대를 유지하려는 교황청의 마지막 강력한 의지였습니다.
회칙은 진화론, 실존주의 등 당시 유행하던 사상들에 대해 토미즘적 비판을 가했습니다.
신학자들이 교회 공인 학설인 토미즘을 가볍게 여기는 태도를 질타했습니다.
하지만 이는 내부적으로 더 큰 변화에 대한 갈망을 불러일으키는 계기가 되기도 했습니다.
1962
[제2차 바티칸 공의회 개막]
가톨릭 교회의 현대적 쇄신을 선언한 공의회가 열리면서 토미즘의 독점적 지위에 변화가 찾아왔습니다. 공의회는 토미즘을 존중하면서도 성경과 교부, 그리고 현대적 사유에 더 넓은 자리를 내주었습니다. 이는 토미즘이 '단일 체제'에서 '다양성 속의 중심'으로 변화하는 시점이었습니다.
공의회 문헌들은 토미즘의 전문 용어보다는 성경적이고 사목적인 언어를 선택했습니다.
신학 교육에서 토미즘은 여전히 중요하게 언급되었으나 다른 학파와의 대화가 장려되었습니다.
공의회 이후 토미즘은 더욱 유연하고 현대적인 형태로 진화해야 하는 과제를 안게 되었습니다.
1965
[옵타탐 토티우스 반포]
공의회 문헌 '사제 양성에 관한 교령(Optatam Totius)'에서 성 토마스를 스승으로 명시하며 그의 사상을 따를 것을 권고했습니다. 독점적 법제화에서는 물러났으나 여전히 가톨릭 교육의 모범임을 확인한 것입니다. 현대적 신학 교육 안에서 토미즘의 자리가 재정립되었습니다.
교령은 학생들이 토마스의 가르침을 통해 신학의 신비를 유기적으로 파악하도록 지시했습니다.
동시에 인류가 처한 문제들에 대해 현대적으로 응답할 수 있는 역량을 키울 것을 강조했습니다.
토미즘은 이제 신앙의 신비를 밝히는 가장 신뢰할 만한 '도구'로서의 역할을 수행하게 되었습니다.
1970
[초월론적 토미즘의 부상]
칼 라너, 베르나르드 로너건 등에 의해 칸트의 인식론적 질문에 답하는 '초월론적 토미즘'이 발전했습니다. 인간 주체의 인식 구조 안에서 신을 향한 개방성을 논증하려 노력했습니다. 이는 근대 철학의 주관성 전회에 대응하는 토미즘의 창조적 변용이었습니다.
라너는 인간을 '무한을 향한 개방된 존재'로 정의하며 토미즘의 존재론을 심리적, 인식론적으로 확장했습니다.
전통적 토미스트들로부터 지나친 현대화라는 비판을 받기도 했으나 신학의 현대화에 크게 기여했습니다.
이 흐름은 현대 가톨릭 신학의 주류 중 하나로 자리 잡으며 토미즘의 생명력을 증명했습니다.
1980
[분석적 토미즘의 탄생]
존 할데인 등에 의해 영미권의 분석 철학과 토미즘을 결합하려는 시도가 시작되었습니다. 논리적 분석과 언어 철학의 방법론으로 토마스 아퀴나스의 주장을 검증하고 옹호했습니다. 영미 학계에서 토미즘이 새롭게 조명받는 계기가 되었습니다.
마음의 철학, 형이상학, 윤리학 등에서 토미즘의 합리적 설득력을 입증하는 데 주력했습니다.
엘리자베스 앤스콤, 필리파 풋 등 뛰어난 여성 철학자들의 윤리학 연구와도 궤를 같이했습니다.
분석적 토미즘은 대륙 철학에 치중되었던 토미즘 연구의 지평을 영미권으로 확장했습니다.
1990
[리소스망 토미즘의 전개]
신토미즘의 인위적인 체계를 넘어 토마스의 원문과 그 성경적 뿌리를 회복하려는 '리소스망(Ressourcement) 토미즘'이 전개되었습니다. 텍스트 자체의 신학적 풍부함에 집중하며 토미즘의 본래 모습을 복원하려 했습니다. 학문적 엄밀함과 신앙적 경건함을 동시에 추구하는 흐름입니다.
토마스가 사용한 성경 인용과 교부들의 권위를 추적하며 그의 신학적 의도를 정밀하게 분석했습니다.
매뉴얼 토미즘이 놓쳤던 토마스의 영성적, 사목적 측면을 재발견하는 성과를 거두었습니다.
현대 신학계에서 가장 활발하고 생산적인 토미즘 연구 학파 중 하나로 손꼽힙니다.
1998
[피데스 에 라치오 반포]
교황 요한 바오로 2세가 회칙 '신앙과 이성(Fides et Ratio)'을 통해 토마스 아퀴나스를 '사상의 거장'으로 기렸습니다. 교황은 신앙과 이성이 인간 영혼을 진리로 이끄는 두 날개임을 강조하며 토미즘의 가치를 현대적으로 재천명했습니다. 포스트모더니즘 시대에 토미즘의 역할을 강조한 사건입니다.
회칙은 토마스가 신앙과 이성을 분리하지 않으면서도 각각의 고유한 영역을 지켜냈음을 높이 평가했습니다.
현대 철학자들이 객관적 진리에 대한 확신을 가질 수 있도록 토마스의 모델을 제시했습니다.
이 문건은 21세기 토미즘 부흥의 가장 강력한 교회적 지침서가 되었습니다.
2020
[현대적 토미스트 연구소의 활약]
미국의 '토미스틱 인스티튜트(The Thomistic Institute)' 등이 디지털 플랫폼을 통해 현대 지성계에 토미즘을 전파하고 있습니다. 대학 캠퍼스와 온라인 강의를 통해 수많은 젊은 지식인들이 다시 토미즘에 주목하기 시작했습니다. 토미즘은 이제 최첨단 기술과 접목되어 새로운 시대를 맞이하고 있습니다.
팟캐스트, 유튜브 등을 통해 토미즘의 복잡한 주제들을 대중적으로 풀어서 전달하고 있습니다.
과학 기술 윤리, 인공지능 등 현대적 난제에 대한 토미즘적 답변을 제시하는 연구가 활발합니다.
이러한 노력으로 토미즘은 박제된 과거의 유산이 아닌 살아 숨 쉬는 현대 사상으로 재평가받고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