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인슈타인 이혼사

개인사, 가족관계

num_of_likes 231

최근 수정 시각 : 2025-10-12- 01:35:00

등록된 키워드의 연표를 비교해서 볼 수 있습니다!
?
연혁 비교
아인슈타인 이혼사
개인사, 가족관계
report
Edit

아인슈타인의 삶을 통해 본 천재의 두 얼굴


아인슈타인은 우주의 비밀을 푼 혁명적 지성이었으나, 그의 사생활은 과학적 업적과 극명한 대조를 이룬다.

첫 아내와의 지적 동반자 관계는 그의 이기심과 외도로 파탄 났고, 노벨상 상금을 위자료로 내건 이혼은 그의 명성에 가려진 냉혹함을 보여준다.

천재의 위대함이 한 인간으로서의 책임과 윤리를 보장하지 않음을 그의 삶은 증명한다.

주요사건만
최신순

1896

[지적 동반자, 밀레바 마리치와의 운명적 만남]

취리히 연방 공과대학에서의 첫 만남

알베르트 아인슈타인은 스위스 취리히 연방 공과대학(ETH)에서 물리학과 수학 교사

과정을 밟던 중, 같은 반 학생이었던 세르비아 출신의 밀레바 마리치를 만났습니다.

두 사람은 과학에 대한 뜨거운 열정을 공유하며 깊은 사랑에 빠졌습니다. 

당시 여성의 고등 교육 기회가 극히 제한적이었던 시대에, 밀레바 마리치는 물리학자의
꿈을 안고 취리히 공대에 입학한 선구적인 여성이었습니다. 아인슈타인보다 4살
연상이었던 그녀는 뛰어난 지적 능력을 갖추고 있었으며, 두 사람은 '보헤미안'적인 생활
방식을 공유하며 학문적 동반자 관계를 형성했습니다. 아인슈타인이 마리치에게 보낸
초기 편지들에는 상대성 이론의 개념을 포함한 "우리의 이론"에 대한 언급이 등장하는데,
이는 두 사람이 단순한 연인을 넘어 깊은 지적 교감을 나누는 협력자였음을 시사합니다.
하지만 이 관계는 시작부터 난관에 부딪혔습니다. 아인슈타인의 어머니 파울리네는
마리치가 4살 연상이고, 유대인이 아니며, 선천적인 고관절 탈구로 다리를 저는 것을 문제
삼아 "책벌레"라 부르며 둘의 결혼을 격렬하게 반대했습니다. 이러한 가족의 반대는 두
젊은 연인에게 큰 정신적 압박으로 작용했습니다.

1902

[딸 리제를의 출생과 상실]

기록에서 사라진 첫 아이, 리제를

밀레바 마리치는 1901년 임신한 상태로 졸업 시험에 재응시했으나 낙방하며 학업을 중단해야 했습니다.

그녀는 고향인 세르비아로 돌아가 1902년 1월, 딸 리제를를 출산했습니다.

리제를의 행방은 이후 역사 속에서 완전히 사라졌습니다.

1901년, 임신 3개월 차였던 마리치는 졸업 시험에 다시 도전했지만 낙방했고, 이는 사실상
그녀의 과학자로서의 경력이 끝나는 순간이었습니다. 학위 취득에 실패한 그녀는
고향으로 돌아가 딸 리제를를 낳았습니다. 아인슈타인은 스위스에 머물며 단 한 번도
자신의 딸을 보지 않았습니다. 리제를가 성홍열로 일찍 사망했거나 입양되었다는 추측만
있을 뿐, 그녀의 삶에 대한 공식적인 기록은 전무합니다. 이 시기 아인슈타인 역시 직장을
구하지 못해 어려움을 겪었고, 마리치는 한 친구에게 보낸 편지에서 "우리 둘은 참 딱한
커플"이라고 토로하기도 했습니다. 첫 아이의 상실과 각자의 경력 실패는 두 사람의
관계에 지울 수 없는 상처와 슬픔을 남겼습니다. 

1903

[밀레바 마리치와의 결혼]

아인슈타인이 스위스 베른 특허청에 직장을 얻은 후, 두 사람은 가족의 반대를 무릅쓰고 마침내 결혼식을 올렸습니다.

이로써 마리치는 전도유망한 물리학도에서 평범한 가정주부의 삶을 시작하게 되었습니다.

아인슈타인의 아버지가 임종 직전에야 결혼을 허락하면서, 두 사람은 베른에서 조촐한
결혼식을 올릴 수 있었습니다. 이후 마리치는 자신의 학문적 야망을 접고, 남편의 연구를
돕고 가정을 돌보는 데 전념했습니다. 이듬해인 1904년 첫아들 한스 알베르트가
태어났고, 1910년에는 둘째 아들 에두아르트가 태어났습니다. 마리치의 역할 변화는
그녀에게 큰 실망감을 안겨주었지만, 이 시기는 역설적으로 아인슈타인의 학문적 생산성이
폭발하는 중요한 시기였습니다. 

1905

[아인슈타인의 위대한 도약과 마리치의 보이지 않는 기여]

아인슈타인은 특수 상대성 이론, 광양자 가설, 브라운 운동 등 물리학의 역사를 바꾼 4편의 핵심 논문을 발표하며 '기적의 해(Annus Mirabilis)'를 맞이했습니다.

이 시기 마리치는 그의 가장 가까운 지적 조력자이자 안정적인 가정 환경을 제공한 인물이었습니다. 

아인슈타인의 창의성이 최고조에 달했던 1905년은 그가 마리치와 가장 긴밀한 지적,
가정적 파트너십을 유지하던 시기와 정확히 일치합니다. 마리치가 논문의 공동 저자라는
직접적인 증거는 부족하여 주류 역사학계에서는 인정되지 않지만, 그녀가 남편의 연구에
지적인 영감을 주고 토론 상대가 되어주었으며, 가사와 육아를 전담하여 그가 연구에
몰두할 환경을 만들어준 핵심적인 조력자였다는 점은 부정하기 어렵습니다.
아인슈타인의 초기 편지에서 나타나는 "우리"의 연구라는 표현과, 두 사람의 별거 이후
그의 연구 성과 발표 방식이 혁명적인 단기 논문에서 점진적인 이론 완성으로 변화한 점을
고려할 때, 마리치의 존재는 그의 초기 위대한 업적에 필수적인 촉매제였을 가능성이
높습니다. 그녀의 학문적 꿈이 좌절된 것은 결과적으로 아인슈타인의 성공을 위한
희생이었던 셈입니다. 

1912

[사촌 엘자와의 불륜 시작]

관계의 파국, 사촌과의 또 다른 사랑

아인슈타인의 명성이 높아지면서 부부 관계는 점차 소원해졌고, 1912년경 그는

베를린을 방문했다가 자신의 사촌인 엘자 뢰벤탈과 불륜 관계를 시작했습니다. 이는 결혼
생활에 돌이킬 수 없는 균열을 가져왔습니다.

1910년 둘째 아들 에두아르트가 태어날 무렵부터 아인슈타인은 일에만 몰두하며 가정에
소홀해졌고, 마리치와의 관계는 급격히 악화되었습니다. 그는 베를린에 사는 이혼녀이자
두 딸의 어머니였던 사촌 엘자와 사랑에 빠졌습니다. 엘자는 마리치와 달리 과학에 대한
지식은 없었지만, 명랑하고 사교적인 성격으로 아인슈타인을 살뜰히 챙기며 그의 보호자
역할을 자처했습니다. 이 불륜 관계는 7년간 지속되었으며, 아인슈타인이 마리치에게
이혼을 요구하는 직접적인 원인이 되었습니다. 

1914

[베를린 이주와 가혹한 결혼 조건, 그리고 별거]

파탄의 정점, 모욕적인 요구와 영원한 이별
아인슈타인이 베를린의 카이저 빌헬름 연구소 소장으로 부임하며 가족 모두 베를린으로 이주했지만, 그는 마리치에게 모욕적인 내용의 '결혼 생활 유지 조건'을 제시했습니다.

이를 견디지 못한 마리치는 두 아들을 데리고 취리히로 돌아가면서 영구적인 별거가 시작되었습니다. 

마리치는 베를린행을 원치 않았지만 결국 남편을 따라나섰습니다. 그러나 베를린 도착
직후 아인슈타인은 그녀에게 다음과 같은 굴욕적인 조건을 편지로 전달했습니다


"내 옷과 침실을 항상 정돈하고, 하루 세 끼 식사를 내 방으로 가져올 것. 당신은 나와의 모든
개인적인 관계를 포기하며, 내가 요구할 경우 즉시 대화를 중단하고 내 방에서 나갈 것.
아이들 앞에서 나를 폄하하는 말이나 행동을 하지 말 것".


이는 사실상 아내를 하녀처럼 취급하겠다는 선언이었습니다. 마리치는 처음에는 조건을 받아들이려 했으나, 결국 1914년 7월 29일, 제1차 세계대전 발발 바로 다음 날 두 아들을 데리고 취리히로 떠났습니다.


이별은 영구적이었습니다. 

1919

[노벨상 상금을 건 이혼 합의]

미래의 영광을 담보로 한 이혼 계약

수년간 이혼을 거부하던 마리치를 설득하기 위해, 아인슈타인은 자신이 미래에 노벨상을 받게 되면 상금 전액을 위자료로 지급하겠다는 파격적인 제안을 했습니다.

마리치는 그의 수상을 확신하고 이 조건을 받아들여 이혼에 합의했습니다. 

아인슈타인은 엘자와의 재혼을 위해 이혼을 서둘렀지만, 마리치는 완강히 버텼고 그
과정에서 심신이 쇠약해지기까지 했습니다. 당시 큰 재산이 없었던 아인슈타인은 자신의
가장 확실한 자산, 즉 미래의 지적 자본을 담보로 내걸었습니다. 그는 1918년 마리치에게
"이혼에 동의해준다면, 내가 노벨상을 받을 경우 상금 전액을 당신에게 양도하겠다"고
제안했습니다.


이 제안은 단순한 금전적 합의 이상의 의미를 가집니다. 아인슈타인에게는
자유를 얻기 위한 계산된 도박이었고, 마리치에게는 자신의 젊음과 경력을 바쳐 함께 이룬
"우리의 연구"에 대한 정당한 몫을 주장하는 행위였습니다. 그녀는 누구보다 그의 업적의
가치를 잘 알고 있었기에 그의 수상을 믿어 의심치 않았습니다. 결국 이 조항은 이혼
합의서에 명시되었고, 1919년 2월 14일 두 사람은 법적으로 남남이 되었습니다.

[사촌 엘자 아인슈타인과의 재혼]

혁명적 과학자의 보수적 선택, 사촌과의 재혼

아인슈타인은 밀레바 마리치와 이혼한 지 불과 넉 달 만에 자신의 사촌인 엘자 뢰벤탈과 재혼했습니다.

이는 당시 유럽 사회의 관습 안에서 이루어진, 안정과 보살핌을 추구한 선택이었습니다.


엘자는 아인슈타인의 이종사촌(어머니들끼리 자매)이자, 육촌(아버지들끼리
사촌)이었습니다. 20세기 초 유럽에서 사촌 간의 결혼은 법적으로 금지되지 않았으며,
특히 상류층과 중산층 사이에서는 가문의 재산과 사회적 지위를 유지하기 위한 방편으로
드물지 않게 이루어졌습니다. 유대교와 개신교 문화권에서도 사촌 결혼을 금기시하지
않았습니다. 뉴턴 물리학의 세계를 뒤엎은 혁명적인 과학자 아인슈타인이 사생활에서는
지극히 관습적인 선택을 했다는 점은 흥미로운 역설입니다. 이는 그가 지적 파트너와의
갈등으로 점철된 첫 결혼과 달리, 자신을 보살펴주고 안정적인 환경을 제공해 줄 수 있는
전통적인 관계를 원했음을 보여줍니다. 즉, 그의 선택은 과학 연구에 온전히 집중하기 위한
실용적 판단이었던 셈입니다. 아인슈타인과 엘자는 자녀를 낳지 않았지만, 그는 엘자의 두
딸 일제와 마고를 자신의 딸처럼 키웠습니다. 특히 마고와는 매우 가까운 관계를
유지하며 편지를 통해 자신의 연애사를 솔직하게 털어놓기도 했습니다. 그러나 이 결혼
생활 역시 평탄하지만은 않았습니다.


아인슈타인의 여성 편력은 계속되었고, 심지어 엘자와 결혼하기 전 그녀의 딸인 일제에게 청혼했다는 기록도 남아있습니다.


1922

[노벨상 수상과 상금 전달]

약속의 이행, 그러나 엇갈린 운명

아인슈타인은 '광전효과'에 대한 연구 공로로 1921년도 노벨 물리학상 수상자로 선정되었고, 1922년에 상을 받았습니다.

그는 약속대로 상금 전액을 밀레바 마리치에게 송금했습니다. 

1922년 아인슈타인은 1921년도 노벨 물리학상 수상자로 결정되었습니다. 당시 상금은
121,572 스웨덴 크로나로, 오늘날 가치로 환산하면 수억 원에 달하는 거액이었습니다.
아인슈타인은 약속을 지켜 상금 전액을 마리치에게 전달했습니다. 마리치는 이 돈으로
취리히에 3채의 건물을 구입하여 임대 수입으로 생활을 꾸려나갔습니다. 하지만 다른
기록에 따르면, 상금이 대공황 시기에 가치가 폭락한 장기 채권에 투자되어 마리치가
약속된 경제적 안정을 누리지 못했다는 주장도 있습니다. 어떤 경우든, 이 거액의
위자료는 이후 정신질환을 앓게 된 아들의 막대한 치료비를 감당하는 데 대부분
사용되면서 그녀의 고된 삶을 완전히 구원해주지는 못했습니다. 

1936

[두 번째 아내 엘자의 죽음]

보호자의 상실

나치를 피해 미국 프린스턴으로 이주한 지 3년 만에, 아내 엘자가 병으로 사망했습니다.

아인슈타인은 어머니가 돌아가셨을 때 이후 처음으로 눈물을 흘리며 깊이 슬퍼했다고 전해집니다. 

엘자는 아인슈타인의 명성을 관리하고 그가 연구에만 집중할 수 있도록 헌신적인 보호자
역할을 했습니다. 1933년 나치의 위협을 피해 함께 미국으로 망명한 후, 그녀는 1936년
짧은 투병 끝에 세상을 떠났습니다. 아인슈타인은 그녀의 죽음에 큰 충격을 받고 비통해했습니다.

1948

[밀레바 마리치의 고된 삶과 죽음]
이혼 후 마리치의 삶은 고난의 연속이었습니다.

둘째 아들 에두아르트가 정신분열증 진단을 받으면서, 그녀는 평생을 아들의 병간호와 엄청난 치료비 부담에 시달리다 1948년 쓸쓸히 생을 마감했습니다. 

1930년, 총명했던 둘째 아들 에두아르트가 정신분열증 진단을 받으면서 마리치의 삶은
송두리째 흔들렸습니다. 그녀는 노벨상 상금으로 마련했던 부동산 두 채를 아들의 치료비를 위해 매각해야 했습니다. 아인슈타인은 아들의 병이 마리치 집안의 유전 탓이라며 비난했고, 경제적 지원에도 인색했던 것으로 전해집니다. 말년에 마리치는 마지막 남은 집마저 아인슈타인에게 팔고 그 집에 세 들어 사는 처지가 되었는데, 아인슈타인이 퇴거 통보를 했다는 충격적인 기록도 있습니다. 수십 년간 이어진 고통과 싸우다 지친 그녀는 1948년 72세의 나이로 취리히의 한 병원에서 뇌졸중으로 홀로 눈을 감았습니다.


1955

[아인슈타인의 죽음과 남겨진 가족들]

한 시대의 종언, 그리고 가족의 반응

아인슈타인은 76세의 나이로 심부전으로 사망했습니다.

그의 죽음은 전 세계적인 애도를 불러일으켰지만, 가족들의 반응은 그의 복잡했던 사생활을 반영하듯 엇갈렸습니다.

아인슈타인은 1955년 4월 18일 프린스턴에서 사망했습니다. 그의 장례식은 가족의
요청에 따라 비공개로 엄격하게 치러졌으며, 시신은 화장되어 유골은 알려지지 않은
장소에 뿌려졌습니다. 장남 한스 알베르트는 평생 자신과 어머니, 동생을 버린 아버지를
용서하지 않았고, 장례식에도 참석하지 않은 채 신문에 짤막한 애도 성명을 내는 것으로
도리를 다했습니다. 의붓딸 마고는 아버지가 사망했을 당시 좌골 신경 질환으로 입원
중이었으며, 아이젠하워 대통령으로부터 개인적인 위로 메시지를 받았습니다. 그녀는
아인슈타인의 사후에도 프린스턴 자택에 남아 그의 유산을 지켰습니다.

1965

[아버지의 그늘 아래 남겨진 아들들]

아인슈타인의 두 아들은 평생 아버지의 부재와 무관심으로 인한 상처를 안고 살았습니다.

장남 한스는 아버지를 용서하지 못했고, 차남 에두아르트는 정신병원에서 생을 마감했습니다. 

천재의 아들들이 겪은 삶은 아인슈타인의 개인적 유산이 남긴 깊은 상흔을 보여줍니다.
차남 에두아르트는 정신병원에서 30년 이상을 보내다 1965년 55세의 나이로 사망했습니다. 장남 한스 알베르트는 미국 버클리 대학의 수력공학 교수로 성공적인 경력을 쌓았지만, 어머니와 동생을 버린 아버지를 평생 증오했습니다. 그는 아버지의 장례식에도 참석하지 않았으며, 신문에 짤막한 애도 성명을 내는 것으로 도리를 다했을 뿐입니다. 이는 아인슈타인의 위대한 과학적 업적 이면에 그의 가족이 감당해야 했던 인간적인 비극과 고통이 있었음을 명백히 보여줍니다. 

비교 연혁 검색
search
키워드 중복 확인
close
댓글 게시판
이전 다음 위로 이동 아래로 이동