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글, 훈민정음
세종대왕이 창제한 대한민국의 문자
최근 수정 시각 : 2025-10-12- 01:36:22
한글의 역사는 저항의 서사다. 창제 당시에는 기득권을 지키려는 사대부의 이념적 저항에 부딪혔고, 이후에는 폭군에 맞서는 민중의 목소리가, 가부장제 속 여성의 소통 창구가, 식민지하 민족의 혼을 지키는 최후의 보루가 되었다. 절대 권력이 만든 문자가 가장 민주적이고 강력한 저항의 도구가 된 역사는 한글의 위대함을 증명한다.
- 등록된 주요사건이 없습니다.
1443
[훈민정음 28자 비밀리에 창제]
세종대왕은 백성들이 문자 생활에서 겪는 어려움을 해소하고자 1443년 12월, 독창적이고 과학적인 문자 체계인 훈민정음 28자를 친히 창제했다.
이 문자는 발음기관을 본뜬 자음과 천지인(天地人) 삼재 사상을 담은 모음으로 구성되어 배우기 쉽게 설계되었다.
훈민정음 창제는 단순한 문자 개발을 넘어 지식 공유를 통한 평등 사회를 지향한 세종의 애민정신과 민족 주체성의 발현으로, 기득권 사대부의 강력한 반발이 예상되는 바 집현전 일부 소장 학자들과 비밀리에 은밀하게 추진하였다.
조선 제4대 임금 세종은 우리말이 중국의 말과 달라 한자(漢字)로는 온전히 소통할 수 없는 현실을 깊이 우려했다. 당시 지배층은 어려운 한자를 독점하며 지식과 권력을 유지했으나, 대다수 백성은 글을 몰라 법률이나 행정 절차에서 억울한 일을 당하거나 일상생활에 큰 불편을 겪었다. 이러한 상황을 안타깝게 여긴 세종은 '백성을 가르치는 바른 소리'라는 뜻의 훈민정음(訓民正音)을 직접 창제하기에 이른다. 이는 모든 백성이 쉽게 글을 익혀 자신의 뜻을 마음껏 펼치게 함으로써, 지식 격차를 해소하고 더 평등하며 풍요로운 사회를 만들고자 한 그의 깊은 애민정신과 개혁 의지의 산물이었다.
훈민정음 창제 과정은 매우 은밀하게 진행되었다. 세종은 한자를 신성시하고 중화를 숭상하는 사대부들의 강력한 반발을 예상했기에, 집현전의 일부 소장 학자들을 제외하고는 프로젝트를 극비에 부쳤다. 『세종실록』에 훈민정음 창제 사실이 기록된 1443년 12월 기사에 정확한 날짜 없이 '이달에(是月)'라고만 명기된 것은 이러한 비밀주의를 뒷받침하는 이례적인 사례다. 세종은 중국에 파견하는 사신을 통해 언어학 관련 서적을 구해오는 등 독자적인 연구를 통해 문자 체계를 완성했으며, 이는 특정 학자 집단의 협업이 아닌 군주 주도의 혁신적인 사업이었음을 시사한다.
훈민정음의 제자 원리는 당대 최고의 과학 기술과 동아시아 철학을 융합한 지적 성취의 결정체였다. 자음 체계는 발음기관의 모양을 정밀하게 관찰하여 형상화한 과학적 원리에 기반한다. 기본 자음 다섯 글자인 'ㄱ, ㄴ, ㅁ, ㅅ, ㅇ'은 각각 혀뿌리가 목구멍을 막는 모양, 혀가 윗잇몸에 닿는 모양, 입의 모양, 이의 모양, 목구멍의 모양을 본뜬 '상형(象形)'의 원리로 만들어졌다. 이는 세계 문자사에서 유례를 찾기 힘든 독창적인 발상으로, 글자의 모양만으로 그 소리를 유추할 수 있게 하는 직관성을 제공한다. 나아가 이 기본자에 소리의 세기가 더해지는 원리를 반영하여 획을 추가하는 '가획(加劃)'의 원리를 적용, 'ㅋ(ㄱ+획)', 'ㄷ, ㅌ(ㄴ+획)', 'ㅂ, ㅍ(ㅁ+획)', 'ㅈ, ㅊ(ㅅ+획)', 'ㅎ(ㅇ+획)' 등 체계적으로 나머지 자음을 파생시켰다. 이러한 설계는 최소한의 기본 요소로 전체 시스템을 확장하는 고도의 모듈식 원리를 보여주며, 한글의 논리적이고 체계적인 특성을 잘 드러낸다.
반면 모음 체계는 성리학적 세계관의 핵심인 우주론적 철학을 바탕으로 설계되었다. 모음의 기본이 되는 세 글자 'ㆍ(아래아)', 'ㅡ', 'ㅣ'는 각각 하늘(天), 땅(地), 사람(人)을 상징하는 '천지인 삼재(三才)' 사상을 형상화한 것이다. 둥근 모양의 'ㆍ'는 우주의 근원인 하늘을, 평평한 'ㅡ'는 만물을 싣는 땅을, 바로 선 'ㅣ'는 하늘과 땅 사이에 선 사람을 본떴다. 이 세 가지 기본 요소를 결합하여 나머지 모음들을 생성했는데, 이때 음양(陰陽)의 원리가 적용되었다. 'ㆍ'가 'ㅡ'나 'ㅣ'의 위쪽이나 오른쪽에 결합하면 양성모음('ㅗ', 'ㅏ')이 되고, 아래쪽이나 왼쪽에 결합하면 음성모음('ㅜ', 'ㅓ')이 되는 식이다. 이처럼 한글은 발음기관의 구체적인 형태를 본뜬 과학적 원리와 우주 만물의 생성 원리를 담은 추상적 철학을 하나의 문자 체계 안에 완벽하게 조화시킨 독창적인 창조물이다.
1444
[최만리의 반대 상소, 사대부의 저항]
훈민정음 창제 사실이 알려지자, 집현전 부제학 최만리 등은 사대주의와 성리학적 질서에 위배된다며 격렬히 반대하는 상소를 올렸다.
그들은 새 문자가 중화(中華)를 섬기는 도리에 어긋나고, 지식 독점의 기반인 한문 중심의 학문 체계를 훼손할 것이라 우려했다.
이에 세종은 백성을 위한 실용성을 내세워 조목조목 반박하며 창제 의지를 관철시켰으나, 이는 한글이 지배층의 문자에서 소외되는 역사의 시작을 알리는 사건이었다.
1444년 2월 20일, 훈민정음 창제라는 혁신적인 사업은 조선의 지배 이데올로기와 정면으로 충돌했다. 집현전 부제학 최만리(崔萬理)를 비롯한 정창손, 하위지 등 7인의 핵심 관료들은 세종에게 훈민정음의 부당함을 주장하는 장문의 상소를 올렸다. 이들은 세종의 학문적 동반자였기에, 이들의 집단적인 반발은 단순한 의견 개진을 넘어 세종의 개혁 정치에 대한 심각한 도전으로 받아들여졌다. 이 상소는 단순히 새로운 문자에 대한 언어학적 비판이 아니었다. 그것은 지식의 본질과 통제권을 둘러싼 당대 지배층의 세계관이 총체적으로 표출된 이념 투쟁의 서막이었다. 사대부들에게 한문으로 대표되는 지식은 소수 엘리트가 독점하여 국가를 통치하는 권력의 원천이었으며, 본질적으로 배타적인 성격을 띠었다. 반면 세종에게 훈민정음으로 대표되는 지식은 모든 백성이 누려야 할 보편적 권리이자 민생을 향상시키는 실용적 도구, 즉 포용적인 성격의 공공재였다.
『세종실록』에 상세히 기록된 이들의 반대 논리는 당시 사대부 계층의 보수적인 세계관을 명확히 보여준다.
첫째, '사대주의 위배'를 주장했다. 조상 대대로 지극한 정성으로 중국을 섬기며 그 문물제도를 따르는 것이 조선의 근본인데, 독자적인 문자를 만드는 것은 중화의 질서를 거스르는 행위이며 국제적 망신거리가 될 것이라고 우려했다.
둘째, '오랑캐(夷狄)화'를 경계했다. 역사적으로 고유 문자를 가진 민족은 몽골, 여진 등 문명 수준이 낮은 오랑캐뿐이었으므로, 새 문자의 창제는 스스로 중화 문명권에서 이탈하여 야만으로 퇴보하는 것이라 비판했다. 이는 문화적 가치를 내재적인 발전이 아닌, 중국과의 유사성에서 찾는 당시 지배층의 파생적 정체성과 문화적 사대주의를 극명하게 드러낸다.
셋째, '학문 쇠퇴'를 예견했다. 쉬운 언문이 보급되면 학자들이 성리학의 깊은 뜻을 담은 한문 공부를 게을리하게 되어 결국 학문의 근간이 무너질 것이라고 주장했다.
넷째, '행정의 비효율성'을 지적했다. 세종이 언문으로 법을 알리면 억울한 백성이 줄 것이라 한 데 대해, 형벌의 공정성은 문자의 문제가 아니라 법을 집행하는 관리의 자질에 달린 것이라며 언문의 실효성을 부정했다.
다섯째, '절차적 문제'를 제기하며 풍속을 바꾸는 중대한 일을 충분한 사회적 합의 없이 급하게 추진한다고 비판했다. 마지막으로, '세자 교육 저해'를 명분으로 삼아, 동궁이 마땅히 성리학 공부에 매진해야 할 시기에 정치에 무익한 언문 연구에 몰두하는 것은 국본을 흔드는 일이라며 우려를 표했다.
이러한 조목조목의 반대 논리에 세종은 크게 분노하며 이들을 직접 불러 강하게 질책했다. 세종은 신라 설총이 만든 이두(吏讀) 역시 우리말 소리를 표기하기 위한 방편이었음을 상기시키며, "설총이 한 일은 옳고 임금이 하는 일은 그르다 하는 것이 무슨 까닭이냐?"고 꾸짖으며 사대부들의 이중적 잣대를 공격했다. 또한, 『삼강행실도』를 언문으로 번역하면 어리석은 백성도 쉽게 윤리를 깨우칠 수 있다는 실용적 가치를 역설하며, "사람의 교화는 타고난 자질에 달렸다"고 주장한 정창손을 향해 "아무짝에도 쓸 데 없는 용렬하고 속된 선비"라며 격노했다. 결국 세종은 상소를 주도한 이들을 모두 하옥시켰다가 다음날 석방했으나, 정창손만은 파직하며 개혁 의지를 굽히지 않았다. 이 사건은 한글 창제를 둘러싼 표면적인 논쟁을 종결시켰지만, 사대부 계층의 깊은 불신과 소극적 저항의 시작을 알리는 분기점이 되었다.
1445
[용비어천가 편찬: 왕조의 정당성을 노래하다]
세종은 훈민정음 반포에 앞서, 1445년 조선 건국의 정당성을 노래한 서사시 『용비어천가』를 한글로 먼저 편찬하게 했다.
이는 새 문자의 실용성과 예술성을 시험하는 동시에, 왕실 조상을 찬양하는 신성한 내용으로 반대 세력의 비판을 원천 봉쇄하려는 고도의 정치적 전략이었다.
한글로 기록된 최초의 문헌인 『용비어천가』는 한글에 국가적 권위를 부여하고, 그 정당성을 확보하는 결정적인 역할을 수행했다.
최만리의 상소에서 드러난 사대부들의 거센 이념적 저항에 직면한 세종은, 훈민정음의 가치를 증명하고 그 권위를 확립하기 위한 탁월한 정치적, 문화적 전략을 구사했다. 그것이 바로 훈민정음의 공식 반포에 앞서, 새 문자를 사용한 첫 작품으로 조선 건국의 정당성을 노래하는 왕실 서사시 『용비어천가(龍飛御天歌)』를 편찬한 것이다. 1445년(세종 27년) 4월, 세종은 권제, 정인지, 안지 등에게 명하여 목조에서 태종에 이르는 여섯 선대 왕의 위업을 찬양하는 장편 서사시를 짓게 했다. 이 작품을 한글로 먼저 기록하고 이후 한문으로 번역하게 한 것은, 새 문자의 운명을 건 세종의 치밀한 포석이었다.
『용비어천가』의 편찬은 다층적인 목적을 지닌 고도의 프로젝트였다. 첫째, 이는 새 문자의 성능을 시험하는 완벽한 '테스트 베드'였다. 장엄하고 유려한 시어를 한글로 표기함으로써, 훈민정음이 단순한 일상 언어 표기를 넘어 고도의 문학적 표현까지 담아낼 수 있는 뛰어난 문자임을 입증하고자 했다. 둘째, 이는 반대 세력의 공격을 무력화하는 효과적인 정치적 방패였다. 왕실 조상의 신성한 업적을 기리는 내용에 대해, 감히 신하들이 그 기록 형식인 '언문'이 저급하다는 이유로 비판하기는 사실상 불가능했다. 즉, 내용의 신성함을 통해 형식(한글)의 정당성을 확보한 것이다. 『용비어천가』에 대한 비판은 곧 왕실의 정통성에 대한 도전으로 비칠 수 있었기에, 사대부들은 침묵할 수밖에 없었다.
1447년에 총 10권 5책으로 간행된 『용비어천가』는 한글 가사를 먼저 쓰고 그에 해당하는 한시(漢詩)를 뒤에 붙이는 방식으로 구성되었다. 이는 한자에 익숙한 지식인들이 한글의 원리를 쉽게 이해하고 그 표현력을 체감하도록 돕는 교육적 효과도 노린 것이다. 이로써 훈민정음은 탄생과 동시에 국가의 공식 서사시를 기록하는 영예로운 지위를 부여받았다. 이는 한글이 단순한 실용 문자를 넘어 민족의 역사와 정신을 담는 그릇으로 첫발을 내디뎠음을 상징적으로 선포한 사건이었다.
1446
[훈민정음 해례본 반포와 공식 문자 선포]
1446년 9월 상순, 세종은 훈민정음의 제자 원리와 사용법을 상세히 설명한 해설서인 『훈민정음』 해례본을 간행하여 온 백성에게 반포했다.
이 책의 반포는 단순히 문자를 알리는 것을 넘어, 창제 철학과 과학적 원리를 명확히 기록하여 후세에 전하고자 한 역사적 선언이었다.
이로써 한글은 국가의 공식 문자로 선포되었으며, 세종은 곧바로 관리 채용 시험에 훈민정음을 포함시키는 등 제도적 보급책을 강력히 추진했다.
1443년 문자 창제 이후 약 3년간의 준비 기간을 거쳐, 1446년 음력 9월 상순, 세종은 훈민정음의 모든 것을 담은 해설서, 『훈민정음』 해례본(解例本)을 세상에 내놓았다. 이 책의 간행과 반포는 훈민정음이 국가의 공식 문자가 되었음을 천명하는 공식적인 절차였다. 『세종실록』과 해례본 말미에 실린 정인지의 서문에는 '정통 11년 9월 상한(正統十一年九月上澣)'이라는 기록이 명확히 남아 있어, 반포 시점이 1446년 9월 상순임을 증명한다. 오늘날 10월 9일 한글날은 바로 이 역사적인 반포를 기념하기 위해 제정된 것이다.
『훈민정음』 해례본의 간행은 후대의 오해와 왜곡을 막고 창제의 위대한 지적 유산을 온전히 보존하려는 세종의 전략적 행보였다. 이미 최만리 등의 상소에서 "근거가 없다"는 비판에 직면했던 세종은, 훈민정음의 창제 원리가 결코 임의적이거나 조잡한 것이 아님을 명확히 입증할 필요성을 절감했다. 해례본은 세종이 직접 지은 서문(御製序文)과 글자의 음가 및 운용법을 간략히 설명한 예의(例義), 그리고 정인지, 신숙주, 성삼문 등 집현전 학사들이 상세한 해설을 붙인 해례(解例)로 구성되어 있다. 해례 부분은 다시 글자를 만든 원리를 설명한 '제자해(制字解)'를 비롯해 초성, 중성, 종성, 합자해 등으로 나뉘어, 각 글자의 제자 원리부터 음운 체계, 실제 사용법까지 당시 언어학과 성리학적 철학을 총동원하여 체계적으로 기술하고 있다. 1940년 이 해례본이 발견되기 전까지 '한글이 창살 모양을 본떴다'는 등의 억측이 난무했으나, 해례본의 존재는 한글이 고도의 과학적 원리와 심오한 철학을 바탕으로 창제된 문자임을 명백히 증명했다.
세종의 보급 전략은 백성을 향한 아래로부터의 확산(Bottom-up)을 목표로 하면서도, 초기 실행 단계에서는 지배층을 향한 위로부터의 강력한 정책(Top-down)을 병행하는 이중적 접근을 취했다. 반포 직후인 1446년 10월, 그는 대간(臺諫)의 죄목을 직접 한글로 써서 공표하는 등 공식 행정 문서에 한글을 즉시 사용하기 시작했다. 더 나아가 같은 해 12월 26일에는 이조(吏曹)에 명하여, 행정 실무를 담당하는 하급 관리(吏胥)를 뽑는 이과(吏科) 시험에 훈민정음을 필수 과목으로 포함시키도록 했다. 이는 한글 능력이 관직 진출의 필수 조건임을 명시함으로써, 한글을 외면하던 사대부 계층이 마지못해라도 한글을 배우도록 강제하는 효과적인 수단이었다. 세종은 민중에게 한글을 보급하기 위해서는 국가 행정의 실무자들이 먼저 한글을 능숙하게 사용할 수 있어야 한다는 점을 정확히 인식하고 있었던 것이다. 이처럼 세종은 해례본 반포를 통해 한글의 지적 권위를 세우는 동시에, 제도적 강제력을 동원하여 한글이 국가 시스템 내에 뿌리내릴 수 있는 기반을 다졌다.
1447
[불교 경전 언해 사업: 불교를 통한 한글 보급]
세종과 세조는 유교 사대부들의 저항을 우회하고 한글을 효과적으로 보급하기 위해, 당시 민중의 보편적 신앙이었던 불교를 적극 활용했다.
소헌왕후의 명복을 빌기 위해 편찬된 『석보상절』(1447)과 세종이 직접 지은 찬불가 『월인천강지곡』(1447)은 한글로 된 최초의 대규모 산문과 시가 작품이었다.
훈민정음 반포 이후, 세종이 한글 보급을 위해 선택한 가장 중요한 전략은 당시 민중의 삶에 깊숙이 뿌리내린 불교를 활용하는 것이었다. 조선은 숭유억불(崇儒抑佛)을 국시로 삼았으나, 왕실 내부와 기층 민중 사이에서 불교의 영향력은 여전히 막대했다. 세종은 성리학적 명분에 얽매인 사대부들의 저항을 우회하면서 대중에게 효과적으로 다가갈 수 있는 매체로 불교 경전을 주목했다.
마침 1446년 세종의 비(妃)인 소헌왕후가 승하하자, 왕후의 명복을 빈다는 대의명분은 대규모 불경 언해 사업을 추진할 수 있는 절호의 기회를 제공했다. 이는 유교적 효(孝)의 실천이라는 명분을 내세워 사대부들의 비판을 무력화시키면서, 동시에 한글 보급이라는 국가적 과업을 달성하려는 세종의 뛰어난 정치적, 문화적 책략이었다.
이러한 배경 속에서 탄생한 첫 결실이 1447년(세종 29년)에 편찬된 『석보상절(釋譜詳節)』이다. 세종의 명을 받은 둘째 아들 수양대군(훗날 세조)이 김수온 등과 함께 석가모니의 생애와 가르침을 여러 불경에서 발췌하여 한글로 풀어쓴 책이다. 『석보상절』은 단순히 불경을 번역한 것을 넘어, 유려하고 세련된 문체로 구성된 최초의 한글 산문 작품으로서 국문학사에서 중요한 위치를 차지한다. 이어서 세종은 『석보상절』의 내용을 바탕으로 직접 500여 수에 달하는 찬불가를 지었는데, 이것이 바로 『월인천강지곡(月印千江之曲)』이다. '부처의 교화가 달이 천 개의 강에 그림자를 드리우는 것과 같다'는 의미의 이 작품은, 『용비어천가』와 함께 한글로 쓰인 서사시의 효시로 평가받으며, 한글이 심오한 종교적, 철학적 사상을 담아낼 수 있는 격조 높은 문학의 매체임을 입증했다.
1459
[세조의 한글보급 공헌]
세조 역시 한글 보급에 지대한 공헌을 했다.
그는 비록 피비린내 나는 정변을 통해 왕위에 올랐지만, 문화 군주로서의 정통성을 확보하고 아버지 세종의 업적을 계승하려는 의지가 강했다.
세조는 1459년(세조 5년), 자신이 편찬했던 『석보상절』과 세종이 지은 『월인천강지곡』을 합하여 『월인석보(月印釋譜)』를 간행했다.
특히 『월인석보』의 권두에 『훈민정음』 언해본을 수록하여 한글의 창제 원리와 가치를 다시 한번 천명함으로써, 자신의 사업이 세종의 뜻을 잇는 것임을 분명히 했다.
또한 세조는 불경의 번역과 간행을 전담하는 국가 기구인 간경도감(刊經都監)을 설치하여, 『능엄경언해』, 『법화경언해』 등 방대한 양의 불경을 체계적으로 언해하여 보급했다. 이러한 왕실 주도의 대규모 언해 사업은 한글 표기법을 정착시키고 어휘를 풍부하게 만들었을 뿐만 아니라, 한글로 쓰인 고급 출판물의 전범(典範)을 제시함으로써 한글이 결코 저급한 문자가 아님을 증명하는 강력한 선례를 남겼다.
1504
[연산군의 언문 탄압]
폭군 연산군은 자신을 비방하는 한글 투서가 발견되자 1504년 극도의 분노 속에서 언문(한글) 교습 및 사용 금지, 관련 서적 소각 등 전례 없는 탄압령을 내렸다.
이 사건은 한글이 지배층에 대한 비판과 저항의 수단으로 사용될 수 있는 잠재력을 보여준 첫 사례였다.
비록 이 탄압은 오래가지 못했지만, 한글의 확산에 찬물을 끼얹으며 공식적인 문자로서의 지위를 더욱 약화시키는 계기가 되었다.
훈민정음 창제 이후 약 반세기가 흐른 1504년, 한글은 역사상 최초의 국가적 탄압에 직면한다. 제10대 왕 연산군은 자신의 폭정을 비판하는 익명의 한글 투서가 발견되자 극도로 격분했다. 투서에는 "임금이 신하를 파리 목숨처럼 죽인다", "이토록 무도하다"와 같은 직설적인 비난이 담겨 있었다. 범인을 색출하지 못하자, 연산군의 분노는 비판의 내용뿐만 아니라 그 수단이 된 '언문', 즉 한글 자체로 향했다. 이 사건은 한글의 중요한 속성을 역설적으로 드러냈다. 배우기 쉽고 익명성을 보장하는 한글의 특성이, 이전에는 목소리를 낼 수 없었던 계층에게 권력에 대한 비판과 저항의 도구를 제공할 수 있다는 점이었다. 연산군의 극단적인 반응은 한글이 지닌 이러한 민주적이고 전복적인 잠재력을 간파했기 때문으로 해석할 수 있다.
연산군이 내린 탄압 조치는 전례 없이 가혹했다. 그는 한글의 교육과 학습, 그리고 사용을 전면 금지하는 명령을 내렸다. 이미 한글을 아는 자는 사용해서는 안 되며, 한글 해독자를 발견하면 즉시 고발하도록 했다. 심지어는 시중에 유통되거나 개인이 소장하고 있는 모든 한글 서적을 수거하여 소각하라는 극단적인 조치까지 취했다. 이는 세종이 백성을 위해 만든 문자를 그의 후손인 왕이 직접 말살하려 한 역사적 비극이자, 한글의 보급과 확산에 찬물을 끼얹는 결정적인 사건이었다. 이 탄압으로 인해 한글은 단순한 비주류 문자를 넘어, 위험하고 불온한 문자로 낙인찍히게 되었고, 이후 사대부 사회에서 한글을 배척하는 분위기를 더욱 공고히 하는 결과를 낳았다.
그러나 연산군의 한글 탄압은 몇 가지 한계와 이중성을 보였다.
첫째, 이 조치는 체계적인 이념에 기반한 것이 아니라, 자신에 대한 비판에 대한 충동적이고 감정적인 대응이었기에 명분이 약했고 오래 지속되지 못했다.
둘째, 연산군 자신도 한글의 실용적 가치를 완전히 부정하지는 못했다는 점이다. 그는 궁중 잔치를 위해 선발한 기녀들에게 춤과 노래를 가르칠 때, 한글로 된 가사를 익히게 하여 연회의 효율성을 높이는 등 필요에 따라 한글을 도구적으로 활용했다. 이는 그의 탄압이 한글의 내재적 가치를 부정한 것이라기보다는, 통제 불가능한 민중의 여론 형성 도구로서의 기능을 차단하려는 정치적 목적이 더 컸음을 보여준다. 비록 연산군의 탄압은 일시적이었지만, 이 사건은 한글이 공식적인 공론의 장에서 완전히 밀려나 여성과 서민 중심의 사적이고 비공식적인 영역에서 생명력을 이어가게 되는 경로를 더욱 고착화시키는 계기가 되었다.
1550
[사대부 여성들의 한글 사용 보편화]
16세기 중후반에 작성된 것으로 추정되는 '순천김씨묘 출토 언간'은 현존하는 가장 오래된 사대부가의 한글 편지 묶음이다.
이 편지들은 남성 중심의 한문 문화 속에서 한글이 여성들의 주된 소통 및 기록 수단으로 보편화되었음을 보여주는 결정적 증거다.
남편을 향한 애틋한 마음부터 집안 대소사까지, 당시 여성들의 삶과 언어생활을 생생하게 담고 있어 국어사 및 생활사 연구에 매우 중요한 가치를 지닌다.
연산군의 탄압 이후 공식적인 영역에서 위축된 한글은 역설적으로 사적인 공간, 특히 여성들의 삶 속에서 그 생명력을 이어갔다. 1977년 충북 청원의 순천 김씨 묘에서 발견된 192건의 한글 편지, 이른바 '순천김씨묘 출토 언간(諺簡)'은 그 생생한 증거다. 16세기 중후반에 작성된 것으로 추정되는 이 편지들은 현존하는 가장 오래된 사대부 여성의 한글 편지 자료군으로, 임진왜란 이전의 언어와 생활상을 보여주는 귀중한 사료다. 이 편지들은 성리학적 사회 구조가 공고해지면서 공적 영역과 한문 교육에서 배제되었던 여성들이 어떻게 한글을 자신들의 고유한 문자 세계로 구축했는지를 명확히 보여준다.
당시 조선 사회는 남성이 주관하는 공적 영역(外)과 여성이 관리하는 사적 영역(內)으로 엄격히 구분되었다. 한문이 전자의 공식 언어였다면, 한글은 후자의 비공식적이지만 필수적인 소통 언어로 자리 잡았다. 사대부 남성들은 한문으로 학문을 논하고 관직 생활을 영위했지만, 정작 한문을 배우지 못한 아내나 딸, 어머니와 소식을 주고받기 위해서는 한글을 사용할 수밖에 없었다. 순천 김씨의 편지들은 바로 이러한 언어적 이중 구조 속에서 한글이 여성들의 삶에 얼마나 깊숙이 스며들었는지를 증명한다. 편지에는 함경도 경성(鏡城)의 군관으로 부임해 간 남편 나신걸을 향한 애틋한 그리움과 걱정, 집안의 농사일과 노비 관리 문제, 자녀에 대한 염려 등 당시 여성의 일상이 고스란히 담겨 있다.
이 편지들의 가치는 단순히 여성들의 한글 사용을 증명하는 데 그치지 않는다. 공식적인 한문 기록에서는 찾아볼 수 없는 당대의 살아있는 구어(口語)를 그대로 보존하고 있다는 점에서 국어사적 중요성이 매우 크다. 형식에 얽매인 문어체 한문과 달리, 개인적인 편지글인 언간에는 당시 사람들이 실제로 사용했던 방언, 속어, 감탄사 등 생생한 언어 표현이 가감 없이 기록되어 있다. 이로 인해 언간은 16세기 한국어의 음운, 어휘, 문법 변화를 연구할 수 있는 독보적인 '언어적 타임캡슐' 역할을 한다. 결국 남성 사대부들의 한자 중심주의와 여성에 대한 교육 차별이라는 사회적 제약이, 역설적으로 여성들을 한글 문화의 주된 계승자이자 발전자로 만들었다. 여성들은 한글을 통해 자신들의 감정을 표현하고, 지식을 공유하며, 세대 간에 소통함으로써 공식 역사에서 소외되었던 한글의 명맥을 잇는 결정적인 역할을 수행했던 것이다. 16세기에는 왕실 여성이 한글로 공문서를 보내거나 여성이 한글로 상소문(상언)을 올리는 사례까지 등장하며, 한글이 여성의 목소리를 대변하는 수단으로 점차 확장되고 있었음을 보여준다.
1670
[음식디미방 저술: 생활 속 실용 문자로 자리 잡은 한글]
1670년경, 안동의 사대부 여성 장계향은 자신의 요리법과 살림 지식을 집대성한 조리서 『음식디미방』을 한글로 저술했다.
이는 동아시아 최초로 여성이 쓴 조리서이자, 한글이 학문이나 이념이 아닌 실제 생활에 필수적인 지식을 기록하고 전수하는 실용 문자로 확고히 자리 잡았음을 보여준다.
이 책은 17세기 경북 지역의 식생활과 어휘를 생생하게 담고 있어, 한글이 여성들의 지식 체계를 구축하고 세대 간에 전승하는 핵심 매체였음을 증명한다.
17세기 후반, 한글은 개인적인 소통 수단을 넘어 여성들의 전문 지식을 체계화하고 전수하는 교육적 매체로 한 단계 도약한다. 그 상징적인 결과물이 바로 1670년경 경북 영양의 사대부 여성 장계향(張桂香, 1598-1680)이 저술한 한글 조리서 『음식디미방』이다. '음식의 맛을 아는 방법'이라는 의미를 지닌 이 책은, 저자가 평생에 걸쳐 터득한 조리법과 살림의 지혜를 후대의 딸과 며느리에게 물려주기 위해 집필한 것이다. 이는 한글이 단순한 의사소통 도구를 넘어, 여성 중심의 지식 체계를 기록하고 보존하며 교육하는 고등 기능을 수행하게 되었음을 의미한다.
『음식디미방』은 남성 중심의 유교 경전이나 역사서와는 다른, 실용적이고 경험적인 지식의 세계를 담고 있다. 책에는 면병류, 어육류, 주류 등 총 146가지에 달하는 음식의 재료와 조리법이 당시의 한글로 상세하게 기록되어 있다. 특히 이 책이 저술된 17세기 후기는 임진왜란을 통해 전래된 고추가 아직 경상도 북부 지방에 널리 보급되기 전이어서, 책에는 고춧가루를 사용한 조리법이 전혀 등장하지 않는다. 이는 당시의 식문화를 생생하게 복원할 수 있는 매우 중요한 단서를 제공한다. 이처럼 『음식디미방』은 한글을 통해 여성들의 생활 지혜가 어떻게 체계적인 지식으로 정립되고 세대를 이어 전승되었는지를 보여주는 독보적인 사례다.
이 책의 역사적 가치는 여러 측면에서 조명된다.
첫째, 저술 연대와 저자가 명확한 동아시아 최초의 여성 저술 요리서라는 점이다.
둘째, 17세기 경상도 지역의 방언과 일상 어휘가 풍부하게 담겨 있어, 당시의 언어생활을 연구
하는 데 귀중한 국어사 자료로 활용된다.
셋째, 한글이 여성들의 사적 공간에서 단순한 편지글을 넘어, 특정 분야의 전문 지식을 담는 '교과서'의 역할을 수행했음을 보여준다.
『음식디미방』의 등장은 한글이 여성들의 삶 속에서 단순한 문자 이상의 의미, 즉 그들의 경험과 지혜를 담는 그릇이자 다음 세대와 연결되는 다리 역할을 했음을 명확히 증명한다.
1700
[한글 시조의 유행과 역사 이야기의 재창조]
조선 후기, 사대부의 한문 문학이었던 시조(時調)가 한글로 창작되면서 여성과 서민층까지 향유하는 대중 문학으로 거듭났다.
특히 이방원의 '하여가'와 정몽주의 '단심가'처럼 널리 알려진 작품들은 조선건국 당대에 지어진 것이 아니라, 먼 훗날 18세기경 조선 건국사를 극적으로 재구성하며 창작된 후대의 문학 작품이다.
이처럼 한글 시조는 간결한 형식과 운율감으로 복잡한 역사적 사건과 인물의 감정을 대중에게 쉽고 흥미롭게 전달하는 강력한 문화적 도구가 되었다.
한글 소설과 더불어 조선 후기 민중 문화를 풍요롭게 한 또 다른 장르는 한글 시조였다. 본래 시조는 고려 말부터 사대부들이 한자를 기반으로 자신들의 정치적 신념이나 자연에 대한 감흥을 노래하던 격조 높은 문학 양식이었다. 그러나 조선 후기에 이르러 작자층이 여성, 중인, 서민 등으로 확대되면서, 한글로 창작되고 향유되는 시조가 크게 유행하기 시작했다. 한글 시조는 어려운 한자 대신 일상적인 우리말을 사용하고, 3장 6구라는 간결하고 정형화된 율격 속에 진솔한 감정을 담아내어 폭넓은 공감대를 형성했다.
이러한 한글 시조의 대중화 과정에서 나타난 흥미로운 현상은 '역사 이야기의 문학적 재창조'이다. 대표적인 사례가 조선 건국의 정당성을 둘러싼 이방원과 정몽주의 갈등을 상징하는 '하여가(何如歌)'와 '단심가(丹心歌)'이다. 많은 사람들이 이 시조들을 1392년 선죽교의 비극 직전, 두 인물이 실제로 주고받은 대화라고 알고 있지만, 이는 역사적 사실과 다르다. 이 시조들이 문헌상에 처음 등장하는 것은 18세기 이후에 편찬된 『청구영언』, 『해동가요』와 같은 가집(歌集)들이다. 이는 두 작품이 당대의 창작물이 아니라, 조선 건국이라는 역사적 대사건이 후대에 구전되고 문학적으로 각색되는 과정에서 창작된 '이야기로서의 시조'임을 시사한다.
이러한 현상은 한글 시조가 지닌 문화적 힘을 명확히 보여준다. 자칫 딱딱하고 어려울 수 있는 정치적, 역사적 사건을 '이런들 어떠하며 저런들 어떠하리'와 같은 쉽고 입에 붙는 한글 가락에 실어 표현함으로써, 글을 모르는 민중까지도 역사의 핵심적인 갈등 구조와 인물의 성격을 쉽게 이해하고 기억하게 만들었다. 즉, 한글 시조는 단순한 문학 작품을 넘어, 역사를 대중의 눈높이에서 재해석하고 구전시키는 강력한 '미디어' 역할을 수행했던 것이다. 이는 한글이 민중의 삶과 정서뿐만 아니라, 민족의 집단 기억을 형성하고 전승하는 데에도 얼마나 중요한 역할을 했는지를 보여주는 사례다.
1780
[최초의 한글 소설 : 홍길동전의 등장과 확산]
18세기 후반, 작자 미상의 한글 소설 『홍길동전』이 등장하여 대중적 인기를 끌었다.
비록 허균이 원작자라는 설이 널리 알려져 있으나, 현재 학계에서는 한글본의 창작 시기를 18세기 후반으로 보는 견해가 유력하다.
『홍길동전』의 성공은 한글이 서민과 여성을 포함한 폭넓은 독자층을 사로잡는 대중 문학의 매체로 기능할 수 있음을 입증하며, 이후 한글 소설 시대의 본격적인 개막을 알렸다.
18세기에 들어서면서 조선 사회는 농업 생산력의 증대와 상품 화폐 경제의 발달로 큰 변화를 맞이했다. 이러한 사회경제적 변화는 새로운 문화 소비층을 탄생시켰고, 이들의 욕구에 부응하여 한글 소설이라는 새로운 문학 장르가 폭발적으로 성장하는 배경이 되었다. 그 신호탄이 된 작품이 바로 『홍길동전』이다. 이 작품은 오랫동안 조선 중기의 문인 허균(許筠, 1569~1618)이 지은 최초의 한글 소설로 알려져 왔다. 이러한 주장은 허균과 동시대를 살았던 이식(李植)이 자신의 문집 『택당집』에서 "허균이 수호전(水滸傳)을 본떠 홍길동전을 지었다"고 기록한 데 근거한다.
그러나 현대 국문학계의 연구가 심화되면서 허균 작가설에 대한 비판적인 검토가 이루어지고 있다. 현존하는 한글 소설 『홍길동전』의 이본(異本)에는 17세기 후반의 인물인 장길산이 언급되거나 18세기에 들어서야 활성화된 관청인 선혜청이 등장하는 등, 허균의 생존 시기와 맞지 않는 내용이 발견된다. 또한, 본격적인 한글 소설이 18세기 후반부터 등장하기 시작했다는 점을 고려할 때, 17세기 초에 한글로 소설이 창작되었다고 보기는 시기적으로 너무 이르다는 주장이 제기되었다. 이에 따라 현재 학계에서는 허균이 한문으로 된 원전(「노혁전(盧革傳)」 등)을 썼을 가능성은 있으나, 우리가 아는 대중적인 한글 소설 『홍길동전』은 18세기 후반에 재창작된 작자 미상의 작품으로 보는 견해가 설득력을 얻고 있다.
창작 시기와 작가에 대한 논쟁과 별개로, 『홍길동전』이 한글 소설의 대중화 시대를 연 기폭제 역할을 했다는 점은 분명하다. 적서 차별이라는 사회적 모순에 저항하고 활빈당을 조직하여 탐관오리를 응징하는 홍길동의 영웅적인 이야기는 당시 서민과 여성 독자들에게 큰 통쾌함과 대리 만족을 선사했다. 이 작품의 성공은 한글이 지배층의 어려운 한문 문학을 대체하여 대중의 정서를 담아내는 강력한 매체가 될 수 있음을 입증했다. 이는 단순히 문학사적 사건을 넘어, 한글이라는 매체를 통해 새로운 상업적 문학 시장이 탄생했음을 알리는 경제사적 사건이기도 했다. 『홍길동전』의 인기는 이후 『심청전』, 『춘향전』 등 수많은 한글 소설의 창작과 유통을 촉진했으며, 한글이 계층을 초월하는 대중문화의 핵심 동력으로 자리 잡는 결정적인 계기를 마련했다.
1790
['전기수'의 등장과 소설 낭독 문화]
18세기 조선 후기, 한글 소설이 인기를 끌면서 전문적으로 소설을 낭독해주는 직업인 '전기수(傳奇叟)'가 등장했다.
이들은 시장이나 길거리에서 실감 나는 목소리와 몸짓으로 청중을 사로잡았으며, 문맹인 서민들도 한글 소설을 즐길 수 있는 통로를 제공했다.
전기수의 등장은 한글 문화가 단순히 읽는 것을 넘어 듣고 즐기는 공연 예술의 형태로 확장되었음을 보여주는 상징적인 사건이다.
18세기 한글 소설의 폭발적인 인기는 새로운 직업과 독특한 문화 현상을 낳았는데, 그 대표적인 예가 바로 '전기수(傳奇叟)'의 등장이었다. 전기수는 전문적인 이야기꾼으로, 한양의 종각이나 광통교 주변과 같은 번화한 거리나 시장에서 사람들을 모아놓고 소설을 실감 나게 낭독해주는 직업이었다. 당시 소설책은 여전히 귀하고 값이 비쌌으며, 서민층의 문맹률 또한 높았기 때문에 글을 읽지 못하는 대다수 대중에게 전기수는 문화를 향유할 수 있는 중요한 통로였다. 이들의 존재는 한글 문학의 소비 방식이 개인적인 '읽기'에서 집단적인 '듣기'로 확장되었음을 보여준다.
전기수의 낭독은 단순한 음독(音讀)이 아니었다. 그들은 소설 속 등장인물의 성격과 감정에 따라 목소리 톤과 억양을 바꾸고, 극적인 장면에서는 과장된 몸짓과 표정 연기를 곁들이는 등, 오늘날의 1인극 배우나 성우와 같은 역할을 수행했다. 추재 조수삼의 『추재기이』나 유득공의 『경도잡지』와 같은 문헌에는 이들의 활동 모습이 생생하게 묘사되어 있다. 특히 이야기의 가장 흥미진진한 대목에서 갑자기 낭독을 멈추고 "다음 이야기가 궁금하면 돈을 내시오"라며 청중의 애를 태우는 '요전법(邀錢法)'이라는 기법은 이들의 활동이 철저히 상업적인 행위였음을 보여준다.
전기수의 인기는 대단하여, 때로는 사회적 물의를 일으키기도 했다. 정조 시대에는 한 전기수가 『임경업전』을 너무나 실감 나게 낭독하자, 이야기에 과도하게 몰입한 한 청중이 소설 속 악역인 김자점과 전기수를 동일시하여 그를 칼로 찔러 살해하는 사건이 발생하기도 했다. 이 사건은 『정조실록』에도 기록될 만큼 유명했으며, 전기수의 공연이 지닌 강력한 흡입력과 사회적 파급력을 증명한다. 또한, 영조 때의 기록에는 용모가 수려한 전기수가 양반가 부녀자들 사이에서 큰 인기를 끌었다는 내용도 전해진다. 이처럼 전기수의 등장은 한글 소설이라는 콘텐츠가 새로운 직업을 창출하고, 문학과 공연 예술이 결합된 새로운 형태의 대중문화를 만들어내는 문화적 생태계의 기폭제가 되었음을 보여준다.
1800
['방각본' 소설의 유행과 상업 출판의 시작]
18세기 영조와 정조 시대를 거치며 한글 소설에 대한 대중적 수요가 폭증하자, 민간 출판업자들이 영리를 목적으로 책을 찍어 파는 '방각본(坊刻本)'이 성행했다.
이는 국가 주도의 관판(官版) 출판에서 벗어나, 시장 논리에 따라 책이 생산되고 유통되는 본격적인 상업 출판 시대의 개막을 의미했다.
방각본은 다소 조잡했지만 저렴한 가격으로 한글 소설을 대량 보급하여, 한글의 대중화와 서민 문화 발달에 결정적인 기여를 했다.
한글 소설에 대한 대중적 수요가 급증하면서, 이를 충족시키기 위한 새로운 출판 형태인 '방각본(坊刻本)'이 18세기부터 본격적으로 유행하기 시작했다. 방각본은 관청에서 공적인 목적으로 간행하던 관판본(官版本)과 달리, 민간 서점이나 출판업자가 순수하게 영리를 목적으로 목판을 제작하여 찍어낸 상업용 출판물을 의미한다. 조선에서는 17세기부터 그 형태가 나타나기 시작했으나, 한글 소설 독자층이 충분히 성장한 영조와 정조 시대에 이르러 전성기를 맞이했다. 이는 문학과 지식이 소수 엘리트의 전유물이 아니라, 시장에서 거래되는 '문화 상품'으로 전환되었음을 알리는 중요한 이정표였다.
방각본 출판은 주로 상업이 발달하고 종이와 목재를 구하기 쉬운 도시를 중심으로 이루어졌다. 서울에서 간행된 '경판본(京板本)', 전주에서 간행된 '완판본(完板本)', 그리고 안성에서 간행된 '안성판(安城板)'이 대표적이다. 이들 방각본은 주로 『춘향전』, 『심청전』, 『홍길동전』, 『구운몽』 등 대중에게 인기 있는 애정 소설이나 군담 소설을 다루었다. 품질은 관판본에 비해 조잡하고 오탈자가 많았지만, 저렴한 가격으로 대량 생산되어 서민과 부녀자들에게 널리 보급될 수 있었다. 19세기 중후반 서울 인구가 약 35만 명이었던 시절, 방각본 소설의 유통량이 최소 10만 책에 달했을 것이라는 연구는 당시 한글 소설 시장의 규모를 짐작하게 한다.
방각본의 유행은 조선 후기 사회에 다층적인 영향을 미쳤다.
첫째, 한글의 대중화에 결정적으로 기여했다. 저렴한 한글 소설책이 널리 퍼지면서 더 많은 사람들이 한글을 배우고 읽으려는 동기를 갖게 되었다.
둘째, 전국적인 문화 공동체 형성의 기반이 되었다. 서울, 전주 등 각기 다른 지역에서 출판된 방각본들이 전국적으로 유통되면서, 지역과 계층을 넘어 동일한 이야기를 공유하는 문화적 동질감이 형성되기 시작했다. 이는 근대적인 민족 의식의 발아에 중요한 밑거름이 되었다.
셋째, 서민들의 목소리를 담아내는 매체가 되었다. 방각본 소설들은 양반 사회의 위선과 부패를 풍자하고, 신분적 제약에 얽매이지 않는 자유로운 인간의 감정을 솔직하게 표현함으로써 당시 서민들의 의식을 대변하고 새로운 사회에 대한 열망을 담아냈다.
1894
[독립신문 창간과 언문일치 운동]
1896년 4월 7일, 서재필은 최초의 순한글 신문인 『독립신문』을 창간하여 대중 계몽과 근대적 사상 전파에 앞장섰다.
이 신문은 띄어쓰기를 전면 도입하고 구어체에 가까운 '언문일치(言文一致)' 문장을 사용하여, 누구나 쉽게 정보를 읽고 이해할 수 있도록 했다.
『독립신문』은 한글을 단순한 표기 수단을 넘어, 근대적 여론을 형성하고 민중을 계몽하는 강력한 미디어로 탈바꿈시키는 결정적 계기가 되었다.
갑오개혁으로 한글이 법적인 국문 지위를 얻었지만, 그것을 실질적인 대중의 언어로 만든 것은 『독립신문』의 창간이었다. 1896년 4월 7일, 서재필과 유길준 등 개화파 지식인들은 "위아래 귀천이 모두 보게 하고, 모두 한글로만 쓰니 남녀노소가 다 알아보기 쉽고"라는 창간사를 내걸고 최초의 민간 신문이자 순한글 신문인 『독립신문』을 세상에 내놓았다. 이들은 어려운 한문으로는 대중을 계몽하고 자주독립 의식을 고취할 수 없다고 판단했으며, 한글이야말로 백성을 하나로 묶고 근대 국가의 주체로 세울 수 있는 가장 효과적인 수단이라고 믿었다.
『독립신문』은 내용뿐만 아니라 형식에서도 혁신적이었다. 가장 큰 특징은 한글 역사상 최초로 띄어쓰기를 전면적으로 도입했다는 점이다. 이는 가독성을 획기적으로 높여 정보의 이해를 도왔으며, 이후 현대 한글 표기법의 표준으로 자리 잡는 계기가 되었다. 또한, 문어체 한문의 딱딱한 문체에서 벗어나, 당시 사람들이 실제로 사용하는 입말에 가까운 문장, 즉 '언문일치(言文一致)'를 지향했다. 이는 글과 말이 일치하는 근대적인 문체의 확립을 이끌었으며, 한글이 단순히 소리를 기록하는 부호를 넘어 살아 숨 쉬는 대중의 언어로 기능하게 만들었다.
『독립신문』의 등장은 한글의 사회적 기능을 근본적으로 바꾸어 놓았다. 이전까지 한글이 주로 문학 작품이나 개인적인 서신에 사용되었다면, 『독립신문』은 한글을 통해 국내외 정세를 알리고, 근대적 사상을 전파하며, 공적인 여론을 형성하는 '미디어'로서의 가능성을 처음으로 실현했다. 갑오개혁이 한글에 '공식 문자'라는 법적 지위를 부여했다면, 『독립신문』은 한글에 '대중 매체'라는 사회적 기능을 부여한 것이다. 이로써 한글은 소수의 지식인을 넘어 광범위한 대중이 정치와 사회 문제에 참여할 수 있는 통로가 되었고, 근대적 국민 의식을 형성하는 데 결정적인 역할을 수행하게 되었다.
[갑오개혁과 한글의 공식 국문 지위 획득]
1894년 갑오개혁 시기, 고종은 칙령을 통해 모든 공문서를 국문(한글)을 바탕으로 작성하도록 공포했다.
이는 창제 후 약 450년간 '언문(諺文)'이라 불리며 천시 받던 한글이 마침내 국가의 공식 문자로 인정받은 역사적 전환점이었다.
이 조치는 청나라와의 사대관계를 청산하고 근대적 주권 국가를 지향하는 개혁의 상징이었으며, 이후 한글의 위상을 근본적으로 바꾸는 계기가 되었다.
19세기 말, 서구 열강의 압력과 내부의 개혁 요구에 직면한 조선은 근대 국가로의 전환을 모색하기 시작했다. 1894년(고종 31년) 7월부터 추진된 갑오개혁은 이러한 시대적 과제에 대한 응답이었으며, 이 과정에서 한글의 위상은 극적인 변화를 맞이했다. 1894년 11월, 고종은 "법률, 칙령은 모두 국문을 기본으로 삼고 한문 번역을 붙이거나 국한문을 혼용한다"는 내용의 칙령을 공포했다. 이 조치는 창제 이후 약 450년 동안 '언문(諺文)'이라 불리며 공식 문자로서의 지위를 인정받지 못했던 한글을 '국문(國文)', 즉 '나라의 글자'로서 국가의 제1 공식 문자로 선포한 역사적인 사건이었다.
한글의 국문화는 단순한 문자 정책의 변화를 넘어, 심대한 정치적, 외교적 의미를 담고 있었다. 갑오개혁의 핵심 목표 중 하나는 수백 년간 지속된 중국과의 사대(事大) 관계를 청산하고 조선이 완전한 주권 독립 국가임을 천명하는 것이었다. 이러한 맥락에서, 중국의 문자인 한자를 대신하여 조선 고유의 문자인 한글을 공식 문자로 채택한 것은 문화적 종속에서 벗어나 민족적 주체성과 국가적 독립을 선언하는 강력한 상징적 행위였다. 이는 문벌과 신분 차별을 철폐하고 모든 백성이 국가의 법과 정책에 쉽게 접근할 수 있도록 하려는 근대적 국민 국가의 이념과도 맞닿아 있었다.
물론, 이러한 법적 선포가 즉시 사회 전반의 언어생활을 바꾸지는 못했다. 오랜 기간 한문에 익숙했던 지배층의 관습은 쉽게 변하지 않았으며, 칙령 자체도 당시에는 한자로 공포될 수밖에 없는 현실적 한계가 있었다. 그러나 이 조치를 기점으로 국가의 공식 기록인 관보(官報)와 사법부의 판결문 등에 한글이 사용되기 시작하면서, 한글은 더 이상 사적이고 비공식적인 영역에만 머무는 문자가 아니게 되었다. 갑오개혁을 통한 한글의 국문화는 비록 불완전한 출발이었지만, 이후 한글이 대중 계몽과 민족의식 고취의 중심 매체로 부상할 수 있는 제도적 토대를 마련했다는 점에서 그 역사적 의의는 매우 크다.
1910
[주시경의 한글 연구와 '한글' 명칭의 보급]
국권 피탈 전후, 국어학자 주시경은 우리말과 글을 체계적으로 연구하고 교육하는 것이 민족의 정신을 지키는 길이라 믿었다.
그는 '한글'이라는 이름을 대중화하며 '으뜸가는 글'이라는 자긍심을 불어넣었고, 국어문법 체계를 세우는 등 현대 국어학의 기틀을 마련했다.
그의 헌신적인 활동과 제자들의 노력은 일제강점기 우리말 수호 운동의 구심점이 되었다.
일제에 의해 국권을 상실한 암흑기, 우리말과 글을 지키는 것은 민족의 혼을 지키는 것과 같은 의미였다. 이러한 시대적 사명감 속에서 한글 연구를 민족 운동의 차원으로 끌어올린 선구자가 바로 주시경(周時經, 1876-1914)이다. 그는 단순한 언어학자를 넘어, 국어의 과학적 체계화와 대중화를 통해 민족의 실력을 양성하고 궁극적으로 국권 회복을 이루려 했던 교육자이자 독립운동가였다.
주시경의 가장 큰 업적 중 하나는 '한글'이라는 명칭을 고안하고 대중화시킨 것이다. 이전까지 '훈민정음'은 '언문(諺文)', '암클', '국문(國文)' 등 다양한 이름으로 불렸는데, 이 중에는 비하의 의미를 담은 명칭도 있었다. 주시경은 1910년대 초, '크다', '하나', '바르다'는 의미를 지닌 '한'과 '글'을 합쳐 '한글'이라는 새로운 이름을 제시했다. 이는 우리 문자에 '세상에서 가장 크고 으뜸가는 글'이라는 자긍심을 불어넣는 행위였다. 이 명칭은 일제의 민족 문화 말살 정책에 맞서 우리 글의 정체성과 우수성을 상징하는 이름으로 빠르게 자리 잡았으며, 단순한 명칭의 변경을 넘어 민족적 자존감을 고취하는 강력한 상징으로 기능했다.
또한 주시경은 우리말을 과학적이고 체계적으로 연구하여 현대 국어학의 토대를 마련했다. 그는 1908년 '국어연구학회'(조선어학회의 전신)를 조직하여 학자들과 함께 공동 연구를 이끌었고 , 『국어문법』(1910), 『말의 소리』(1914) 등의 저술을 통해 우리말의 소리, 단어, 문장 구조를 체계적으로 분석했다. 그의 문법 체계는 이후 남북한 언어 규범의 기초가 될 정도로 선구적이었다. 그는 배재학당, 이화학당 등 여러 학교에서 국어를 가르치며 후학 양성에도 힘썼으며, 최현배, 이극로 등 그의 제자들은 훗날 조선어학회의 핵심 멤버가 되어 스승의 유지를 이어 우리말 수호 운동을 이끌었다. 주시경의 삶과 연구는 한글이 단순한 문자 체계를 넘어, 민족의 정신과 역사를 담는 그릇이며, 그 그릇을 지키고 닦는 것이 곧 민족의 미래를 지키는 일임을 웅변적으로 보여주었다.
1933
['한글 맞춤법 통일안' 제정]
1933년 10월 29일, 조선어학회는 혼란스럽던 한글 표기법을 체계적으로 정리한 '한글 맞춤법 통일안'을 제정, 공포했다.
이 통일안은 '표준어를 소리대로 적되, 어법에 맞도록 함'이라는 대원칙을 세워 현대 맞춤법의 근간을 마련했다.
이는 단순한 표기법 통일을 넘어 민족의 언어를 과학적으로 정리하려는 노력의 결실이자, 광복 이후 남북한 언어 규범의 기준점이 된 역사적 이정표였다.
일제강점기, 국가의 주권을 상실한 상황에서 우리말글의 규범을 세우는 일은 민간 학자들의 손에 맡겨졌다. 주시경의 제자들을 중심으로 활동하던 조선어학회(현 한글학회)는 당시 통일된 기준 없이 제각각이었던 한글 표기법을 체계적으로 정리하는 것을 시대적 과업으로 삼았다. 이는 단순히 언어학적 혼란을 바로잡는 것을 넘어, 식민 통치 하에서 민족의 언어적 자치권을 확립하려는 주체적인 노력의 일환이었다. 수년간의 연구와 토론 끝에, 1933년 10월 29일, 조선어학회는 한글 반포 487주년을 기념하여 '한글 맞춤법 통일안'을 공식적으로 발표했다.
'한글 맞춤법 통일안'의 가장 핵심적인 원칙은 총론 제1항에 명시된 "표준어를 소리대로 적되, 어법에 맞도록 함을 원칙으로 삼는다"는 것이다. 이는 단어의 원형을 밝혀 적는 '형태주의(形態主義)' 원칙을 대원칙으로 채택했음을 의미한다. 예를 들어, '꽃이', '꽃을', '꽃만'으로 활용될 때 발음은 [꼬치], [꼬츨], [꼰만]으로 달라지지만, 그 원형인 '꽃'을 일관되게 밝혀 적음으로써 의미의 파악을 용이하게 하는 방식이다. 이 원칙은 오늘날 한글 맞춤법의 근간을 이루고 있다.
통일안은 이 대원칙 아래 띄어쓰기, 문장 부호, 받침의 사용(종성부용초성), 두음 법칙 등 현대 맞춤법의 주요 골격을 대부분 포함하고 있었다. 이는 주시경 이래로 축적된 국어 연구의 성과를 집대성한 과학적이고 합리적인 표기법 체계였다. 이 통일안은 단순한 제안에 그치지 않고, 당시 동아일보, 조선일보 등 민족 언론과 출판계에서 적극적으로 채택하면서 실질적인 사회적 규범으로 자리 잡기 시작했다. 이후 1988년 정부가 현행 '한글 맞춤법'을 고시하기 전까지, '한글 맞춤법 통일안'은 수차례의 개정을 거치며 반세기 이상 우리 언어생활의 표준으로서 기능했다. 식민지라는 암울한 현실 속에서 민간 학자들의 힘으로 이룩한 이 성과는, 우리 민족의 높은 문화적 역량과 언어적 자존심을 보여주는 역사적 쾌거이자, 광복 이후 남북한이 각자의 어문 규범을 만드는 데 있어 공통의 출발점이 되었다는 점에서 그 의의가 매우 크다.
1942
[조선어학회 사건: 일제의 민족어 말살 정책]
1942년 10월, 일제는 민족말살통치의 일환으로 조선어학회 회원들을 치안유지법 위반 혐의로 대거 검거하는 '조선어학회 사건'을 일으켰다.
일제는 학회의 사전 편찬 사업을 '독립운동'으로 규정하고, 이윤재, 한징 등 회원들을 잔혹하게 고문하여 옥사시키는 만행을 저질렀다.
이 사건은 우리말과 글을 지키려는 학자들의 숭고한 희생을 보여주는 동시에, 언어가 민족 정체성의 핵심임을 역설적으로 증명한 비극적 역사이다.
1930년대 후반부터 일제는 태평양 전쟁을 확대하며 한반도를 병참 기지화하고, 조선 민족의 정체성을 완전히 말살하려는 극단적인 동화 정책을 펼쳤다. 신사참배와 창씨개명을 강요하고, 1938년부터는 학교에서 조선어 교육을 단계적으로 폐지하며 공공장소에서의 우리말 사용마저 금지했다. 이러한 야만적인 탄압 속에서, 조선어학회가 추진하던 우리말 큰사전 편찬 사업은 단순한 학술 활동을 넘어 민족의 언어와 정신을 지키려는 최후의 보루와도 같은 독립운동이었다.
일제 총독부는 조선어학회의 활동을 예의주시하고 있었으며, 이들의 사전 편찬 사업이 민족의식을 고취하는 핵심적인 활동임을 정확히 간파하고 있었다. 1942년 7월, 함흥의 한 여학생이 기차 안에서 친구와 한국어로 대화했다는 이유로 일본 경찰에 검거된 '함흥 학생 사건'이 발생했다. 일제는 이 학생의 일기장에서 조선어학회 회원인 정태진이 관련되어 있다는 꼬투리를 잡아, 이를 빌미로 1942년 10월 1일부터 이극로, 최현배, 이희승 등 학회 핵심 인사 33인을 치안유지법 위반 혐의로 대거 검거했다. 이것이 바로 '조선어학회 사건'의 시작이었다.
일제는 조선어학회를 '독립운동을 목적으로 하는 비밀결사'로 날조하고, 사전 편찬을 '조선 민족정신을 유지하려는 불온한 행위'로 규정했다. 체포된 학자들은 함흥 형무소 등지에서 상상하기 어려운 혹독한 고문을 당했으며, 이 과정에서 이윤재와 한징 두 학자가 옥중에서 순국하는 비극이 발생했다. 다른 학자들 역시 재판에 회부되어 징역형을 선고받고 옥고를 치르다, 1945년 8월 15일 조국이 광복을 맞이한 후에야 풀려날 수 있었다. 조선어학회 사건은 일제의 언어 탄압이 얼마나 잔혹했는지를 보여주는 대표적인 사례다. 동시에, 식민 지배자들이 한 나라의 민족을 말살하기 위해서는 그 나라의 언어를 먼저 파괴해야 한다고 생각했음을 역설적으로 증명한다. 목숨을 걸고 우리말과 글을 지키려 했던 학자들의 숭고한 희생은, 한글이 한국인의 정체성과 동의어임을 피로써 증명한 역사적 사건으로 기억되고 있다.
1948
[대한민국 '한글전용법' 제정 및 국한문 혼용 논쟁]
1948년 10월 9일, 대한민국 정부는 '한글 전용에 관한 법률'을 제정하여 모든 공문서를 한글로 작성하도록 규정했다.
이는 한글의 위상을 확고히 하고 문맹률을 낮추려는 취지였으나, 한자어의 의미 전달 문제를 들어 한자 혼용을 주장하는 측과의 격렬한 논쟁을 촉발시켰다.
이 '한글 전용 대 국한문 혼용' 논쟁은 해방 이후 70여 년간 교육, 문화, 정치 등 사회 전반에 걸쳐 지속된 한국 사회의 중요한 언어적, 이념적 갈등이 되었다.
1945년 광복 이후, 새로운 국가 건설의 열망 속에서 문자 정책은 중요한 사회적 의제로 떠올랐다. 미군정 시기부터 한글 전용에 대한 논의가 시작되었으며, 마침내 대한민국 정부가 수립된 1948년 10월 9일 한글날에 '한글 전용에 관한 법률'(법률 제6호)이 제정, 공포되었다. 이 법은 "대한민국의 공용 문서는 한글로 쓴다. 다만, 얼마 동안 필요한 때에는 한자를 병용할 수 있다"고 규정하여, 한글을 국가의 유일한 공식 문자로 천명했다. 이는 외솔 최현배를 비롯한 한글학자들의 오랜 노력이 결실을 본 것으로, 모든 국민이 쉽게 문자를 해독하고 정보에 접근할 수 있는 민주주의적 이상을 반영한 조치였다.
그러나 이 법의 제정은 새로운 사회적 갈등의 시작이기도 했다. 한글 전용 정책은 '민주적 접근성'과 '민족 정체성'을 중시하는 입장과, '학술적 정밀성'과 '전통 계승'을 강조하는 입장 간의 첨예한 대립을 낳았다. 한글 전용론자들은 한글만으로도 모든 의사소통이 가능하며, 쉬운 한글 전용이 문맹을 퇴치하고 국민의 지적 수준을 향상시키는 가장 빠른 길이라고 주장했다. 반면 국한문 혼용론자들은 우리말 어휘의 상당수가 한자어로 이루어져 있어 한자를 모르면 단어의 정확한 의미를 파악하기 어렵고, 이는 결국 학문과 문화의 질적 저하로 이어질 것이라고 반박했다. 이들의 주장은 한글 전용이 고급 어휘에 대한 이해도를 낮춰 '실질적 문맹률'을 높일 수 있다는 우려를 담고 있었다.
이 논쟁은 정권의 성격에 따라 정책의 방향이 바뀌며 70여 년간 지속되었다. 특히 박정희 정부 시기에는 강력한 한글 전용 정책이 추진되어 1970년부터 모든 공문서와 교과서에서 한자가 추방되었다. 그러나 이에 대한 학계와 사회 원로들의 반발이 거세지자, 1972년부터 중·고등학교에서 한문 교육이 독립 교과로 부활하는 등 일부 후퇴가 이루어졌다. 이 논쟁은 1990년대 컴퓨터와 인터넷의 보급으로 한글 타자의 효율성이 입증되면서 한글 전용이 대세로 굳어지는 듯했으나, 여전히 학술 용어의 정확성, 동음이의어 문제 등을 둘러싼 논쟁은 계속되고 있다. 현재는 공문서와 일상 언어에서는 한글 전용을 원칙으로 하되, 전문 분야나 인명, 지명 등 필요한 경우 한자를 병기하고, 학교 교육을 통해 기초 한자를 가르치는 절충적인 형태로 귀결되고 있다. 이 오랜 논쟁은 세종 시대부터 이어져 온 '보편적 소통'과 '학문적 깊이'라는 두 가치 사이의 긴장을 현대적으로 보여주는 사례라 할 수 있다.
1949
[북한의 한자 폐지 및 '문화어' 정책 수립]
1949년 3월, 북한은 '봉건 잔재 청산'과 문맹 퇴치를 명분으로 모든 출판물과 공문서에서 한자 사용을 전면 폐지했다.
이후 1966년 김일성 교시에 따라, 서울말 기반의 표준어 대신 평양말을 중심으로 한 '문화어'를 새로운 표준으로 제정했다.
이 정책들은 주체사상에 기반하여 남한과의 언어적 차별성을 의도적으로 강화하고, 언어를 체제 선전과 인민 통제의 도구로 활용하려는 정치적 목적을 뚜렷이 보여준다.
광복 이후 한반도의 분단은 남과 북이 서로 다른 언어 정책의 길을 걷게 하는 결정적인 계기가 되었다. 남한이 국한문 혼용 논쟁 속에서 점진적인 한글 전용을 추진한 것과 달리, 북한은 혁명적이고 급진적인 방식으로 언어 개혁을 단행했다. 그 첫 단계는 한자의 완전한 폐지였다. 북한은 해방 직후부터 대대적인 문맹 퇴치 운동을 전개했으며, 이 과정에서 배우기 어려운 한자를 '봉건 시대의 잔재'이자 '인민 대중을 억압하는 소수 유한계급의 문자'로 규정했다. 이러한 이념적 배경 아래, 1949년 3월을 기점으로 신문, 잡지, 교과서 등 모든 출판물에서 한자 사용을 전면적으로 금지했다. 이는 언어를 사회주의 국가 건설과 계급 투쟁의 도구로 인식하고, 과거와의 사상적 단절을 꾀하려는 뚜렷한 정치적 의도가 담긴 조치였다.
두 번째 단계는 새로운 표준어의 수립이었다. 1966년 5월, 김일성은 "조선어의 민족적 특성을 옳게 살려나갈 데 대하여"라는 교시를 통해, 서울말을 기반으로 한 기존의 표준어가 '부르주아적이고 양반적인 언어'라고 비판했다. 그리고 '혁명의 수도'인 평양의 말을 중심으로 하고 노동계급의 언어 지향을 반영한 새로운 표준어, 즉 '문화어(文化語)'를 제정할 것을 지시했다. 이는 언어의 표준을 서울에서 평양으로 옮김으로써, 남한과의 체제 경쟁에서 우위를 점하고 북한 정권의 정통성을 강화하려는 정치적 목적을 명확히 드러낸다.
문화어 정책의 핵심은 '말다듬기 운동'을 통해 한자어와 외래어를 고유어로 적극적으로 순화하는 것이었다. 예를 들어 '세모'를 '모가 세 개 난 것'으로, '직각'을 '곧은각'으로 바꾸는 식이었다. 이러한 언어 순화 운동은 주체사상에 입각하여 언어의 민족적 순수성을 지키려는 의도도 있었지만, 결과적으로 남북한 간의 어휘 차이를 심화시켜 언어 이질화를 가속하는 결정적인 원인이 되었다. 이처럼 북한의 언어 정책은 언어의 자연스러운 변화보다는, 최고지도자의 교시와 정치적 이념에 따라 언어를 인위적으로 개조하고 통제하려는 강력한 언어 공학적 성격을 띤다.
1980
1980년대 한글의 컴퓨터 구현을 두고, 모든 글자를 조합할 수 있는 '조합형'과 자주 쓰는 글자만 미리 정의한 '완성형' 코드 방식이 치열하게 대립했다.
정부는 행정 전산망의 효율성과 국제 표준(ISO) 호환성을 이유로 1987년 완성형(KS C 5601)을 국가 표준으로 채택했으나, 이는 '똠방각하' 등 수많은 한글을 표현하지 못하는 문제를 낳았다.
이 논쟁은 1995년 마이크로소프트가 모든 한글을 표현할 수 있는 확장 완성형(CP949/UHC)을 도입하고, 이후 유니코드가 보편화되면서 일단락되었다.
컴퓨터의 등장은 한글에 새로운 차원의 도전을 제기했다. 바로 디지털 세상에서 한글을 어떻게 표현할 것인가의 문제, 즉 한글 코드 표준화 문제였다. 1980년대 개인용 컴퓨터(PC)가 보급되기 시작하면서 여러 기업들이 각기 다른 방식으로 한글 코드를 구현하여 문서 호환이 불가능한 심각한 문제가 발생했다. 이에 정부는 표준화의 필요성을 절감하고 코드 제정 작업에 착수했으며, 이 과정에서 두 가지 방식이 첨예하게 대립했다. 이는 한글 창제 원리의 이상적 구현과 당시 기술 환경의 현실적 제약 사이의 충돌이었다.
한쪽에는 '조합형(Johab)' 코드가 있었다. 이는 한글의 창제 원리인 자모 결합 방식을 그대로 디지털에 구현한 것이다. 초성, 중성, 종성에 해당하는 자모 각각에 코드값을 부여하고, 이를 컴퓨터가 실시간으로 조합하여 글자를 화면에 표시하는 방식이다. 이 방식의 최대 장점은 현대 한글로 표현 가능한 11,172개의 모든 글자를 이론적으로 구현할 수 있다는 점과 창제 원리에 부합한다는 점이었다. 다른 한쪽에는 '완성형(Wanseong)' 코드가 있었다. 이는 자주 사용되는 한글 2,350자에 미리 완성된 글자 모양을 만들어 각각에 고유한 코드값을 부여하는 방식이다. 조합 과정이 없어 처리 속도가 빠르고, 당시 국제 표준이었던 ISO 2022 체계와 호환이 용이하다는 실용적인 장점이 있었다.
정부는 행정 전산망 구축의 효율성과 국제 표준과의 호환성을 우선시하여 1987년, 완성형 코드를 국가 표준(KS C 5601-1987)으로 채택했다. 그러나 이 결정은 심각한 후폭풍을 낳았다. 표준에 포함되지 않은 수많은 글자들, 예컨대 당시 방영되던 드라마 제목 '똠방각하'나 '펲시' 같은 단어를 컴퓨터로 입력하거나 표현할 수 없는 문제가 발생한 것이다. "찦차를 타고 온 펲시맨과 쑛다리 똠방각하"라는 문장은 완성형 코드의 한계를 비판하는 상징적인 구호가 되었다. 이 논쟁은 1995년 마이크로소프트가 Windows 95를 출시하면서 새로운 국면을 맞았다. 마이크로소프트는 기존 완성형 코드를 유지하면서, 비어있는 코드 영역에 나머지 8,822자를 추가로 할당한 '확장 완성형 코드(Unified Hangul Code, UHC 또는 CP949)'를 도입했다. 이는 모든 한글을 표현하면서 기존 코드와의 호환성도 지키는 실용적인 해결책이었다. 궁극적으로 전 세계 모든 문자에 고유한 코드값을 부여하는 '유니코드(Unicode)'가 2.0 버전에서 현대 한글 11,172자를 모두 포함시키면서 , 길었던 조합형-완성형 논쟁은 비로소 막을 내리게 되었다.
1989
[유네스코 '세종대왕 문해상' 제정]
1989년, 유네스코는 대한민국 정부의 지원을 받아 '세종대왕 문해상(King Sejong Literacy Prize)'을 제정했다.
이 상은 전 세계 문맹 퇴치에 크게 기여한 개인이나 단체에 수여되며, 한글 창제를 통해 백성의 문자 생활을 개선한 세종대왕의 정신을 기리기 위해 만들어졌다.
이는 한글의 창제 정신과 우수성이 인류 보편의 가치로 국제 사회에서 공식적으로 인정받은 최초의 사례라는 점에서 큰 의미를 지닌다.
한글의 가치는 국경을 넘어 세계적으로 인정받기 시작했다. 그 상징적인 첫걸음은 1989년 유네스코(UNESCO)가 '세종대왕 문해상(King Sejong Literacy Prize)'을 제정한 것이다. 이 상은 대한민국 정부의 제안과 지원으로 만들어졌으며, 전 세계적으로 문맹 퇴치에 현저한 공을 세운 개인, 단체, 또는 기구에 수여된다. 상의 명칭에 '세종대왕'의 이름이 붙여진 것은, 모든 백성이 쉽게 글을 깨우쳐 인간다운 삶을 영위하기를 바랐던 세종의 애민정신과 훈민정음 창제의 이념이 국경을 초월한 인류 보편의 가치임을 국제 사회가 공식적으로 인정한 것을 의미한다.
유네스코는 1946년 설립 이래 전 세계의 문맹 퇴치를 주요 과업 중 하나로 삼아왔다. 세종대왕 문해상은 이러한 유네스코의 활동에 한국이 적극적으로 기여하는 형태를 띤다. 1990년부터 매년 '세계 문해의 날'인 9월 8일에 시상식이 열리며, 특히 개발도상국에서 자국의 모어(母語)를 발전시키고 보급하는 데 기여한 공로를 특별히 고려한다. 이는 훈민정음이 우리말을 온전히 담아내기 위해 창제되었듯, 각 민족이 자신의 언어와 문화를 보존하고 발전시키는 것의 중요성을 강조하는 것이다. 수상자에게는 미화 2만 달러의 상금과 은메달, 그리고 상장이 수여된다.
세종대왕 문해상의 제정은 한글의 위상을 국내적 차원에서 국제적 차원으로 끌어올린 결정적인 사건이다. 이는 한글이 단순히 한국인만을 위한 문자가 아니라, 그 창제 정신과 원리가 전 인류의 문해력 증진에 영감을 줄 수 있는 세계적인 문화유산임을 공인받은 것이다. 세종대왕이 15세기에 품었던 '모든 백성을 위한 문자'라는 국가적 프로젝트의 이념이, 20세기 후반에 '모든 인류를 위한 문해'라는 세계적인 이상으로 확장되고 계승되었음을 보여주는 상징적인 성과라 할 수 있다.
2007
[세종학당 설립과 한국어의 세계화]
2007년, 대한민국 정부는 전 세계에 한국어와 한국 문화를 보급하기 위한 공식 기관인 '세종학당(King Sejong Institute)'을 설립했다.
한류의 확산으로 급증하는 한국어 학습 수요에 체계적으로 대응하기 위해 설립된 세종학당은 전 세계 한국어 교육의 허브 역할을 수행하고 있다.
2007년 3개국 13개소로 시작한 세종학당은 2024년 기준 88개국 256개소로 확대되어, 한국어의 세계적 위상을 보여주는 대표적인 지표가 되었다.
21세기에 들어서면서 K팝, K드라마 등으로 대표되는 한류(Hallyu, Korean Wave)가 전 세계적으로 확산되자, 한국 문화에 대한 관심은 자연스럽게 한국어 학습에 대한 폭발적인 수요로 이어졌다. 이러한 시대적 흐름에 부응하여 한국어와 한국 문화를 체계적으로 보급하기 위한 정부 주도의 기관이 필요하게 되었고, 그 결과 2007년 '세종학당(King Sejong Institute)'이 설립되었다. 세종학당은 전 세계 외국인에게 한국어를 가르치는 대표적인 공공 브랜드이자, 한국 문화 교류의 핵심 거점 역할을 수행하고 있다.
세종학당의 성장은 경이로울 정도다. 2007년 몽골 울란바토르를 포함한 3개국 13개소에서 740명의 수강생으로 시작했던 세종학당은, 2012년 이를 총괄하는 '세종학당재단'이 출범하면서 더욱 체계적이고 폭발적인 성장을 거듭했다. 2023년에는 전 세계 85개국 248개소에서 약 21만 6천여 명의 수강생이 한국어를 배웠으며 , 2024년 6월에는 쿠바, 네팔 등이 추가되어 88개국 256개소로 확대되었다. 이는 한글이 더 이상 한민족만의 언어가 아니라, 세계인들이 배우고 싶어 하는 매력적인 글로벌 언어로 자리매김했음을 보여주는 가장 확실한 지표다.
세종학당의 성공은 한류라는 문화적 동력과 한글 자체의 과학적 우수성이 결합된 결과다. 많은 학습자들이 K팝 가사를 이해하고, 자막 없이 K드라마를 보기 위해 한국어 학습을 시작한다. 언어 학습 앱 듀오링고(Duolingo)의 보고서에 따르면, 한국어는 전 세계적으로 가장 빠르게 성장하는 언어 중 하나이며, 그 주된 동기는 '문화'와 '재미'로 나타났다. 일단 학습을 시작한 이들은 한글이 배우기 쉽고 체계적이라는 점에 매력을 느끼게 된다. 이처럼 세종학당은 한류가 촉발한 관심을 전문적인 언어 교육으로 연결하는 제도적 장치로서, 한글의 세계화와 한국의 문화적 소프트파워를 강화하는 데 핵심적인 역할을 수행하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