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우식
대통령 비서실장, 과기부 장관, 연세대 총장
최근 수정 시각 : 2025-09-22- 14:05:50
김우식 박사의 생애는 탁월한 행정가이자 제도 설계자로서 가장 뚜렷하게 드러난다.
그는 학계, 산업계, 정부라는 세 영역을 성공적으로 연결했으며, '인화'를 바탕으로 조직 내 갈등을 해결하고 이를 실용적 목표 달성으로 확장했다.
연세대 총장부터 대통령비서실장, 과학기술부총리, KAIST 이사장에 이르기까지, 그의 경력은 '조화'와 '실용'이라는 원칙으로 관통된다.
김우식의 삶은 현대 국가 경영에서 '행정가형 학자'의 가치를 증명하는 사례로 기록될 것이다.
1940
[충남 공주에서 출생]
김우식은 1940년 1월 26일, 충청남도 공주군(현 공주시)에서 태어났다.
본관은 청풍 김씨이다.
이후 그는 논산 강경에서 유년 시절을 보냈다.
김우식은 일제강점기인 1940년 충남 공주에서 태어났다. 그의 성장기는 한국 현대사의 격동기와 맞물려 있으며, 이러한 시대적 배경은 그의 가치관 형성에 영향을 미쳤을 것으로 추정된다.
[출처]
1950
[초·중·고 학창 시절]
논산 강경중앙초등학교, 강경중학교를 거쳐 강경상업고등학교(33회)를 졸업했다.
순수 학문계가 아닌 상업고등학교에서의 교육 경험은 실용적 사고와 경영 마인드의 기초를 형성했을 가능성이 있다.
이는 훗날 그의 행정 스타일에도 영향을 미쳤을 것으로 보인다.
그의 공식 학력은 강경중앙초등학교, 강경중학교, 강경상업고등학교 졸업으로 기록되어 있다. 특히 상업고등학교 출신이라는 점은 이공계 학자로서의 그의 경력에서 독특한 부분으로, 초기부터 실용 학문에 대한 관심이 있었음을 시사한다.
[출처]
1957
[연세대학교 화학공학과 입학]
1957년 연세대학교 이공대학 화학공학과에 입학하며 학문적 여정의 첫발을 내디뎠다.
시골 고등학교 출신으로 서울 생활과 학업에 적응하는 데 어려움을 겪으며 1학년 때 휴학을 심각하게 고민했다.
이 시기의 고뇌는 그의 인생에서 중요한 전환점을 맞이하는 계기가 되었다.
김우식은 1957학번(화공 57입)으로 연세대학교에 입학했다. 그는 한 인터뷰에서 시골 출신으로 친구도 없이 화학, 물리, 수학 등 어려운 학업을 따라가느라 1학년을 매우 힘들게 보냈으며, 휴학을 결심하기도 했다고 회고했다.
[출처]
1958
[연세춘추 기자 활동 시작]
휴학 대신 적극적인 학교생활을 결심하고 학내 언론사인 '연세춘추' 기자 모집에 지원하여 활동을 시작했다.
이 결정은 그의 인생에서 결정적인 전환점이 되었으며, 순수 공학도의 길을 넘어 소통, 조직 관리, 리더십 역량을 기르는 계기가 되었다.
이 경험은 훗날 그가 행정가로서 성장하는 데 중요한 자양분이 되었다.
그는 휴학계를 내려던 발걸음을 돌려 연세춘추의 문을 두드렸다고 술회했다. 이 활동을 통해 최현배, 김윤경 등 당대의 석학들을 만나며 시야를 넓혔고, 조직 내에서의 소통과 관계 형성의 중요성을 체득했다. 이 단 하나의 결정이 그의 인생 경로를 단순한 화학공학자에서 조직과 사람을 이해하는 리더로 바꾸는 분기점이 된 것으로 분석된다.
[출처]
1961
[연세대 졸업 및 사회 첫발]
연세대학교 화학공학과를 졸업하고 삼호방직공업 기술사원으로 입사하여 사회생활을 시작했다.
이 짧은 산업 현장 경험은 훗날 그가 산학협력의 중요성을 강조하는 정책 철학의 근간이 되었다.
이론과 현장의 간극을 직접 체험한 이 시기는 그의 실용주의적 사고를 강화하는 계기가 되었다.
1965
[연세대 대학원 석사 학위 취득]
모교인 연세대학교 대학원에서 화학공학 석사 학위를 취득했다.
학부 졸업 후 산업 현장을 경험하고 다시 학업으로 복귀한 것은 그의 학문에 대한 깊은 열정을 보여준다.
이 시기는 본격적인 학자로서의 길을 걷기 위한 발판을 마련한 중요한 단계였다.
연세대학교에서 화학공학 학사 과정을 마친 후, 동 대학원에서 석사 과정을 이수하고 1965년에 학위를 받았다. 이는 그의 학문적 기반이 연세대학교에 깊이 뿌리내리고 있음을 보여주는 시작점이다.
[출처]
1968
[연세대 화학공학과 교수 임용]
1968년 모교인 연세대학교 화학공학과 전임교수로 부임하여 후학 양성의 길을 걷기 시작했다.
이는 그가 평생의 업이 될 교육자이자 행정가로서의 경력을 시작한 공식적인 출발점이다.
이 시점부터 그는 단순한 연구자를 넘어 대학 발전에 기여하는 역할을 모색하기 시작했다.
1968년부터 연세대학교 화학공학과 교수로 재직을 시작했다.
그는 이후 37년간 강단에 서며 연구와 교육뿐만 아니라, 다양한 행정 보직을 통해 대학 경영에 깊이 관여하게 된다.
[출처]
1971
[미국 노스캐롤라이나 주립대 과정 수료]
미국 노스캐롤라이나 주립대학교 대학원에서 산업공학 석사 과정을 이수하며 학문적 시야를 넓혔다.
화학공학이라는 그의 주 전공에 산업공학적 관점을 더한 이 경험은 훗날 그가 산학협력과 실용주의를 강조하는 데 중요한 학문적 배경이 되었다.
이는 그의 융합적 사고의 기초를 형성한 사건이다.
1970년부터 1971년까지 미국 노스캐롤라이나 주립대(NCSU)에서 산업공학 대학원 과정을 수료했다.
이는 박사 과정 중에 이루어진 것으로, 그의 학문적 탐구가 한 분야에만 머무르지 않았음을 보여준다.
[출처]
1975
[연세대 대학원 박사 학위 취득]
연세대학교 대학원에서 화학공학 박사 학위를 취득하며 학문적 여정의 정점을 찍었다.
이로써 그는 화학공학 분야의 전문가로서 학문적 정체성을 확고히 했다.
박사 학위 취득은 그가 향후 대학 내에서 주요 보직을 맡고 리더십을 발휘하는 데 필요한 학문적 권위를 부여했다.
1985
[연세춘추 주간교수 임명]
학생 시절 기자로 활동했던 연세춘추의 주간 및 신문방송 편집인으로 임명되었다.
이는 그의 인생 전환점이었던 연세춘추와의 인연이 이어진 상징적인 사건이다.
학생 조직을 지도하는 역할을 통해 그는 리더십과 갈등 조정 능력을 더욱 연마했다.
안세희 총장 시절, 공과대학 교수임에도 불구하고 연세춘추 주간으로 발탁되었다. 그는 1988년까지 이 역할을 수행하며 당시 정보기관의 간섭이 심했던 시기에 별다른 사고 없이 조직을 이끌었고, 이후 편집인으로까지 발령받았다. 이는 그의 탁월한 관리 능력을 대학 본부가 인정한 사례이다.
[출처]
1988
[연세대 학생처장 임명]
연세대학교 학생처장으로 임명되어 1989년까지 재임했다. 이는 그가 대학의 핵심 행정 보직을 맡기 시작한 중요한 시점이다. 학생들과 직접 소통하고 갈등을 조정하는 이 역할을 통해 그는 현장 중심의 행정 경험을 쌓았다.
1988년부터 1989년까지 학생처장직을 수행하며 본격적인 고위 행정가로서의 길을 걷기 시작했다. 이 경험은 이후 총무처장, 공과대학장 등 주요 보직을 역임하는 발판이 되었다.
[출처]
1990
[연세대 총무처장 임명]
연세대학교 총무처장으로 임명되어 1992년까지 대학의 살림을 책임졌다.
학생처장에 이어 대학의 인사, 재무 등 핵심 업무를 총괄하는 총무처장직을 맡음으로써 그는 대학 행정 전반에 대한 이해를 심화시켰다.
이 시기는 그가 행정 전문가로서의 역량을 입증한 기간이었다.
1993
[연세대 공과대학장 임명]
자신의 학문적 기반인 공과대학의 학장으로 임명되어 1995년까지 재임했다.
이 시기 그는 자신의 전공 분야에 대한 깊은 이해를 바탕으로 공과대학의 발전을 이끌었다.
특히 대규모 산학협력 연구센터 건립을 주도하며 실용주의적 비전을 구체화하기 시작했다.
1993년부터 2년간 공과대학장직을 수행했다.9 재임 중이던 1996년 인터뷰에서 그는 기업과 대학이 함께 연구하는 연건평 2만 평 규모의 공학연구센터 건립을 추진하고 있다고 밝혔다. 이는 그의 산학협력에 대한 확고한 철학을 보여준다.
[출처]
1998
[연세대 대외부총장 임명]
연세대학교 대외부총장으로 임명되어 2000년까지 대학의 대외 협력 및 발전기금 모금 업무를 총괄했다.
이 보직은 그가 총장직에 오르기 위한 마지막 단계였으며, 이 시기에 쌓은 외부 네트워크와 모금 경험은 총장 재임 시절의 성공적인 경영 성과로 이어졌다.
그는 이로써 총장으로서 필요한 모든 행정 경험을 완비하게 되었다.
2000년 총장으로 선출되기 직전 2년간 대외부총장직을 수행했다.4 이 역할은 대학의 재정 확충과 외부 기관과의 관계 설정에 핵심적인 자리로, 그가 총장으로서의 경영 능력을 최종적으로 검증받는 시기였다.
[출처]
2000
[제14대 연세대학교 총장 취임]
1992년과 1996년에 이은 세 번째 도전 끝에 연세대학교 제14대 총장으로 선출되어 취임했다.
취임사에서 그는 '열린 대학, 열린 행정'을 기치로 내걸고 단과대 중심 운영체제, 옴부즈맨 제도 도입, 산학협동체제 구축 등을 약속했다.
이는 수십 년간의 행정 경험을 바탕으로 대학의 체질 개선을 이루겠다는 그의 구체적인 청사진이었다.
2000년 8월 8일, 그는 연세대 총장으로 공식 취임했다. 1992년과 1996년에도 총장 선거에 도전했던 이력은 그의 오랜 숙원이 이루어졌음을 보여준다. 취임사에서 그는 세계 100위권 대학 진입을 목표로 연구와 교육의 질적 수준을 높이고, 획기적인 산학협동체제를 구축하겠다는 포부를 밝혔다.
[출처]
2001
[윤동주 시문학상, 언더우드 선교상 제정]
제1회 윤동주 시문학상(5월)과 언더우드 선교상(10월)을 제정하고 시상식을 개최했다.
이는 연세대학교의 인문학적 정체성과 기독교 창립 정신을 기리는 상징적인 사업이었다.
이를 통해 그는 대학의 연구 및 교육 역량 강화뿐만 아니라, 대학의 역사와 가치를 재정립하는 데에도 깊은 관심을 보였다.
총장 재임 2년 차에 연세대학교의 정신적 유산을 기리는 두 개의 중요한 상을 제정했다.
이는 대학의 브랜드 가치를 높이고 구성원의 자긍심을 고취하기 위한 전략적 행보로 평가된다.
[출처]
2002
[경영대학 분리 신설]
30여 년간 지속된 상경대학과 경영대학의 분리 문제를 성공적으로 해결하고 경영대학을 신설했다.
이는 첨예하게 대립하던 두 집단의 이해관계를 원만하게 조정한 그의 '인화' 리더십이 빛을 발한 대표적인 사례이다.
이 성과는 오랜 내부 갈등을 해결하여 조직의 에너지를 미래 발전에 집중시킨 중요한 업적으로 평가받는다.
경영학과를 상경대학에서 분리하여 독립된 경영대학으로 신설하는 것은 연세대의 오랜 숙원 과제였다. 김우식 총장은 특유의 인화력과 조정 능력을 발휘하여 수십 년간의 갈등을 종식시켰다. 연세대학교 측은 이를 그의 가장 중요한 경영 업적 중 하나로 꼽고 있다.
[출처]
2003
[주요 연구·교육 인프라 대거 확충]
여성인력개발연구원(1월), 김대중도서관(2월), 산학협동연구관(5월) 등 주요 시설을 연이어 설립 및 봉헌했다.
이는 그의 임기 중 가장 많은 성과가 집중된 해로, 대학의 연구 역량과 사회적 위상을 동시에 끌어올리려는 그의 비전이 가시화된 시기였다.
특히 김대중도서관 설립은 연세대를 한국 민주주의 역사의 중요한 거점으로 자리매김하게 했다.
2003년은 그의 재임 기간 중 가장 역동적인 해였다. 여성인력개발연구원, 김대중도서관, 산학협동연구관, 언더우드가기념관 등 다양한 성격의 기관들이 문을 열었다. 이는 학문 분야의 균형 발전과 대학의 사회적 책무를 동시에 고려한 그의 폭넓은 경영 철학을 보여준다.
[출처]
[고려대학교 명예경영학 박사 학위 수여]
고려대학교로부터 명예경영학 박사 학위를 받았다.
이는 라이벌 대학으로부터 그의 탁월한 대학 경영 능력을 공식적으로 인정받은 상징적인 사건이다.
화학공학자로서 경영학 분야의 명예박사 학위를 받은 것은 그의 행정가로서의 정체성을 명확히 보여준다.
그의 공식 학력 정보에는 2003년 고려대학교에서 명예경영학 박사 학위를 받은 기록이 포함되어 있다.4 이는 그의 대학 총장으로서의 경영 성과가 학계 전반에서 높이 평가받았음을 의미한다.
[출처]
2004
[제27대 대통령비서실장 취임]
노무현 정부의 제27대 대통령비서실장으로 발탁되어 공식 임기를 시작했다.
이는 정치적 경력이 전무한 이공계 출신 대학 총장의 파격적인 기용으로, 그의 행정 안정성과 조정 능력을 높이 산 인사였다.
그는 정무적 역할보다는 실무형·관리형 비서실장으로서 국정 시스템을 안정적으로 운영하는 데 주력했다.
그의 임명은 연세대 총장 임기 만료(2004년 2월)와 거의 동시에 이루어졌다. 언론에서는 그를 이념보다 실용을 앞세우는 '실무형·관리형 비서실장'으로 평가하며, 진보 성향의 정부와 보수 진영 간의 가교 역할을 할 것으로 기대했다.
[출처]
2005
[연세대 화학공학과 교수 정년퇴임]
1968년 임용된 이래 37년간 몸담았던 연세대학교 화학공학과 교수직에서 정년퇴임했다.
이는 그의 오랜 교육자로서의 삶이 공식적으로 마무리되었음을 의미한다.
그의 퇴임은 한 시대의 학자이자 교육 행정가로서의 여정을 마감하는 상징적인 사건이었다.
1968년부터 시작된 연세대학교 화학공학과 교수로서의 재직이 2005년 2월을 끝으로 마무리되었다.4 대통령비서실장으로 재직 중에 맞이한 퇴임이었으며, 이는 그의 경력이 학계에서 관계 중심으로 완전히 이동했음을 보여준다.
[출처]
[청조근정훈장 수훈]
정년퇴임 교원 정부포상에서 공무원에게 수여되는 최고 등급 훈장인 청조근정훈장을 받았다.
이는 연세대학교 총장으로서의 업적과 교육계에 기여한 공로를 국가로부터 공식적으로 인정받은 것이다.
이 수훈은 그의 학자 및 교육 행정가로서의 경력을 정점에서 마무리하는 상징적인 영예였다.
정부는 2005년 2월 말 정년퇴임하는 교원들에 대한 정부포상을 발표하며, 김우식 당시 연세대 교수(전 총장)에게 1등급 훈장인 청조근정훈장을 수여한다고 밝혔다. 청조근정훈장은 대학 총장급 인사에게 주어지는 최고 영예의 훈장이다.
[출처]
[대통령비서실장직 사임]
약 1년 6개월간의 임기를 마치고 대통령비서실장직에서 물러났다.
이 기간 동안 그는 국정 시스템을 안정적으로 관리하는 데 기여했다는 평가를 받았다.
그의 사임 이후 후임으로는 이병완 비서실장이 임명되었다.
2004년 2월 13일에 시작된 대통령비서실장 임기는 2005년 8월 19일에 종료되었다.
이기준 교육부총리 인사 파동 당시 인사추천위원장으로서 책임론에 휩싸였으나, 노무현 대통령의 두터운 신임 아래 임기를 이어갔다.
[출처]
2006
[부총리 겸 과학기술부장관 취임]
대통령비서실장에서 물러난 후, 부총리급인 제25대 과학기술부장관으로 임명되어 공식 업무를 시작했다.
이는 그의 전문 분야인 과학기술 분야에서 국가 정책을 총괄하는 역할로, 그의 경력과 전문성을 극대화한 인사였다.
그는 '과학기술중심사회 구축'을 목표로 정책을 추진하기 시작했다.
2008
[부총리 겸 과학기술부장관 퇴임]
참여정부의 임기 종료와 함께 약 2년간 수행했던 부총리 겸 과학기술부장관직에서 퇴임했다.
재임 기간 동안 그는 R&D 투자 확대, '국가 R&D사업 중장기 Total Roadmap' 수립, 과학 대중화 등 다방면에 걸친 정책을 추진했다.
그의 퇴임은 국가 과학기술 정책의 한 시대를 마무리하는 의미를 가졌다.
2006년 2월 10일에 시작된 임기는 2008년 2월 28일에 종료되었다. 재임 기간 동안 그는 국가 R&D 투자를 10조 원대로 확대하고, 출연연 경쟁력 강화를 위한 'Top Brand Project'를 시작했으며, '금요일에 과학터치'와 같은 과학문화 확산 프로그램을 추진했다.
[출처]
[KAIST 특훈교수 임용]
참여정부 임기 종료와 함께 공직에서 물러난 후, 한국과학기술원(KAIST) 특훈교수로 초빙되었다. 이는 그가 국가 과학기술 정책을 이끌었던 경험과 학계에서의 위상을 인정받은 것이다. 이 시기를 기점으로 그는 정부 관료에서 다시 교육 및 연구 현장으로 복귀하여 후학 양성과 과학계 발전에 기여하기 시작했다.
2008년 부총리직 퇴임 후 KAIST 특훈교수로 자리를 옮겼다. 그는 한 강연에서 정부 관료 활동을 마친 후 '시간을 귀하게 보내자'는 깨달음을 얻었다고 말하며, 남은 삶을 어떻게 보낼지에 대해 깊이 고민했다고 밝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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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9
[창의공학연구원 이사장 취임]
사단법인 창의공학연구원 이사장으로 취임하여 현재까지 활동하고 있다.
이는 그의 오랜 신념인 '창의적 인재 양성'을 제도적으로 실현하기 위한 구체적인 행보였다.
그는 이 기관을 통해 창의성 개발 방법론을 연구하고 교육 프로그램을 운영하며 과학기술과 인문, 예술의 융합을 도모하고 있다.
2009년부터 창의공학연구원 이사장을 맡아 창의적 리더십 확산에 주력하고 있다. 연구원은 2002년 연구 모임으로 출발하여 창의공학 방법론, 창의성 아카데미 과정 등을 개설하며 활발한 연구 및 교육 활동을 펼치고 있다. 그는 이 활동을 통해 과학문화융합포럼을 창립하는 등 융합의 가치를 확산시키는 데 힘쓰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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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6
[더불어민주당 고문 위촉]
더불어민주당의 고문으로 위촉되어 짧은 기간 활동했다.
이는 참여정부에서의 인연을 바탕으로 한 것으로, 그가 특정 정파에 얽매이기보다는 국가 원로로서 정책적 조언을 하는 역할을 수행했음을 보여준다.
그의 정치 활동은 주로 과학기술 및 교육 분야에 대한 자문 역할에 국한되었다.
2016년 6월 더불어민주당의 고문으로 이름을 올렸으며, 같은 해 8월까지 약 2개월간 활동했다. 그는 이전에도 열린우리당, 민주당 등에서 당무위원 및 고문으로 간헐적으로 활동한 바 있다.
[출처]
2020
[KAIST 이사장 취임]
대한민국 최고의 이공계 연구중심대학인 KAIST의 이사장으로 선임되었다.
이는 그의 학문적, 행정적 경력의 정점을 장식하는 영예로운 직책이었다.
80세의 나이에 국가 과학기술 교육의 최정점에 있는 기관의 운영을 책임지게 된 것은 그의 영향력과 리더십이 여전히 건재함을 보여주는 사건이다.
2020년 4월, 그는 KAIST 이사장으로 취임했다. 그는 이 소식을 "고목나무에 매화 한 송이가 피었다"고 표현하며, 나이에 얽매이지 않고 일할 수 있음에 감사함을 표했다.
[출처]
2023
[KAIST 이사장 임기 만료]
약 3년간의 임기를 마치고 KAIST 이사장직에서 물러났다.
이 기간 동안 그는 KAIST가 국가 기술 자립에 기여하는 연구중심대학으로서의 역할을 다하도록 지원했다.
그의 임기 만료는 과학기술계 원로로서의 또 다른 중요한 경력을 마무리하는 의미를 가졌다.
2020년 4월 2일에 시작된 KAIST 이사장 임기는 2023년 5월에 만료되었다.4 80대의 나이에도 불구하고 그는 국가 과학기술 교육의 최상위 기관을 이끌며 마지막까지 봉사하는 모습을 보여주었다.
[출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