저작권
법, 제도
최근 수정 시각 : 2025-10-12- 02:02:22
저작권의 역사는 인쇄술이 낳은 '복제'의 문제를 통제하려는 출판업자의 경제적 요구와 국가의 검열 필요성에서 출발했습니다.
이후 '앤 여왕법'을 통해 저자의 한시적 권리로 전환되었고, 베른 협약으로 국경 없는 보호를 받게 되었습니다.
디지털 시대에 이르러 DMCA는 기술과 플랫폼을 규제하는 방향으로 진화했으며, 이는 저작권이 단순한 권리를 넘어 정보 유통의 질서를 만드는 핵심 제도로 자리 잡았음을 보여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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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의 전투 (Battle of the Book)]
성직자 콜룸바가 스승 피니안의 시편을 몰래 필사하자, 아일랜드 국왕은 "모든 소에게 송아지가 있듯, 모든 책에는 그 사본이 있다"며 피니안의 소유권을 인정했습니다.
이에 불복한 콜룸바가 일으킨 전쟁으로 수천 명이 사망했으며, 이는 저작물 복제에 대한 소유권 개념이 물리적 충돌로 이어진 최초의 기록으로 여겨집니다.
[분쟁의 전개와 결과]
6세기 중반 아일랜드에서 활동하던 저명한 성직자 성 피니안(St. Finnian)은 귀한 시편(psalter)을 소장하고 있었습니다. 그의 제자였던 성 콜룸바(St. Columba, 또는 콜룸실레)는 스승의 허락 없이 밤을 새워 이 시편을 비밀리에 필사하여 자신만의 사본을 만들었습니다. 이 사실을 알게 된 피니안은 원본의 소유자로서 사본에 대한 권리 또한 자신에게 있다고 주장하며 사본의 반환을 요구했습니다. 콜룸바는 지식은 널리 퍼져야 한다는 이유로 이를 거부했고, 갈등은 당시 아일랜드의 상왕(High King) 디어르머드(Diarmait)의 판결로 이어졌습니다.
왕은 "모든 소에게 그 송아지가 있듯이, 모든 책에는 그 사본(새끼)이 있다(To every cow belongs her calf, to every book its copy)"라는 유명한 판결을 내리며 피니안의 손을 들어주었습니다. 이는 원본에 대한 소유권이 그 복제물에까지 미친다는 원칙을 천명한 것으로, 저작권의 핵심 개념과 맞닿아 있습니다. 그러나 강력한 닐(Neill) 가문 출신이었던 콜룸바는 이 판결에 불복하여 왕을 상대로 반란을 일으켰습니다. 561년, 이 분쟁은 '쿨 드레브네 전투(Battle of Cúl Dreimhne)', 일명 '책의 전투(Battle of the Book)'로 비화하여 3,000여 명의 사망자를 낳는 비극으로 끝났습니다. 이 참혹한 결과에 깊은 죄책감을 느낀 콜룸바는 스스로를 유배하여 스코틀랜드의 아이오나섬에 수도원을 세우고 여생을 선교 활동에 바쳤다고 전해집니다.
[역사적 의미와 재해석]
'책의 전투'는 흔히 역사상 최초의 저작권 소송으로 인용되지만, 현대 역사학계에서는 이 이야기가 실제 법적 분쟁 기록이라기보다는 후대에 정치적 목적으로 창작되거나 각색된 우화일 가능성이 높다고 분석합니다. 이 이야기는 12세기에서 16세기 사이에 콜룸바의 후손인 오도넬(O'Donnell) 가문이 자신들의 지배권을 정당화하기 위해 널리 퍼뜨린 것으로 보입니다. 즉, 가문의 조상인 성 콜룸바를 신성한 유물 '카하크(Cathach, 전투의 책)'와 연결시켜 그의 신성한 권위를 자신들의 정치적 권력으로 이전하려는 의도가 담겨 있었다는 것입니다.
따라서 이 사건은 엄밀한 의미의 법적 선례라기보다는, 복제물에 대한 소유권 개념이 고대 사회에서도 직관적으로 존재했음을 보여주는 상징적인 일화로서 더 큰 의미를 가집니다. 이는 저작권이라는 법 제도가 등장하기 훨씬 이전부터 창작물과 그 복제물을 둘러싼 소유 의식이 존재했음을 시사하며, 법의 역사가 어떻게 신화와 결합하여 후대의 정치적 서사를 구축하는지를 보여주는 흥미로운 사례입니다.
[출처]
1440
[1440년 경 구텐베르크 활판 인쇄술 발명]
요하네스 구텐베르크가 발명한 금속활자 인쇄술은 지식의 대량 복제 시대를 열었습니다.
이 기술 혁신은 책의 생산 비용을 극적으로 낮춰 정보의 대중화를 이끌었으나, 동시에 손쉬운 불법 복제를 가능하게 했습니다.
이는 저자의 창작 행위가 아닌, 출판업자의 자본 투자를 보호해야 할 경제적 필요성을 낳으며 저작권 제도 탄생의 직접적인 배경이 되었습니다.
[기술 혁신과 사회 변화]
1440년경 독일 마인츠에서 요하네스 구텐베르크(Johannes Gutenberg)가 발명한 금속활자 인쇄술은 인류 역사의 흐름을 바꾼 기술 혁신이었습니다. 이전까지 책은 수개월에서 수년이 걸리는 고된 필사 작업을 통해 소량만 제작될 수 있는 고가의 사치품이었습니다. 그러나 인쇄술의 등장은 동일한 책을 수천 권 규모로 빠르고 저렴하게 복제하는 것을 가능하게 만들었고, 이는 지식과 정보의 폭발적인 확산을 촉발했습니다. 인쇄술 발명 후 불과 50년 만인 1500년경, 유럽에서는 이미 900만 권이 넘는 책이 출판될 정도로 그 파급력은 막대했습니다. 이로 인해 책은 소수 성직자와 귀족의 전유물에서 벗어나 일반 대중에게까지 확산되었고, 이는 르네상스와 종교 개혁 같은 거대한 사회 변혁의 기폭제가 되었습니다.
[저작권 탄생의 경제적 배경]
역설적으로, 지식의 확산을 가져온 이 위대한 발명은 저작권이라는 새로운 법적 개념을 낳는 직접적인 원인이 되었습니다. 인쇄술은 저작권 사상이 싹튼 계기였지만 , 그 최초의 요구는 저자가 아닌 인쇄업자 및 출판업자로부터 나왔습니다. 필사 시대에는 복제 자체가 어렵고 비용이 많이 들어 불법 복제가 큰 문제가 되지 않았습니다. 그러나 인쇄술의 시대에는 막대한 자본을 투자하여 활자를 조판하고 인쇄 시설을 갖춰 책을 출판한 업자의 결과물을 경쟁자가 단 한 권만 구입하여 손쉽게 재인쇄함으로써 막대한 이익을 가로챌 수 있게 되었습니다.
이러한 무단 복제는 출판업자들의 사업적 기반을 심각하게 위협하는 새로운 경제적 위험 요소였습니다. 따라서 저작권의 초기 개념은 창작자의 지적 노력을 보호하려는 고상한 목적이 아니라, 인쇄업자들이 자신들의 자본 투자를 보호하고 시장에서의 독점적 이익을 확보하기 위한 상업적 필요성에서 출발했습니다. 즉, 인쇄술이라는 기술이 '불법 복제'라는 경제적 문제를 낳았고, 이 문제를 해결하기 위한 법적 장치로서 '저작권'의 필요성이 대두된 것입니다. 이는 저작권의 역사가 창작자의 권리 보호라는 이상과 출판 자본의 이익 보호라는 현실 사이의 긴장 관계 속에서 발전해 왔음을 보여주는 중요한 출발점입니다.
[출처]
1557
[영국 서적상 조합 왕실 칙허]
영국 메리 1세는 서적상 조합(Stationers' Company)에 왕실 칙허를 부여하여 출판 독점권을 인정했습니다.
조합에 등록된 '카피(copy)'를 복제할 권리, 즉 '카피라이트(copyright)'는 조합원인 출판업자에게만 주어졌습니다.
이는 왕실이 출판업자의 이익을 보장해주는 대가로 불온서적을 통제하고 검열하는, 저작권의 원시적 형태였습니다.
[왕권과 출판 자본의 결합]
1557년 5월 4일, 영국의 메리 1세는 '서적상 조합(Worshipful Company of Stationers)'에 왕실 칙허(Royal Charter)를 부여했습니다. 1403년에 결성된 이 길드는 인쇄업자, 서적 판매상, 제본업자 등으로 구성되어 있었으며, 이번 칙허를 통해 영국 내 모든 출판에 대한 강력한 독점권을 획득했습니다. 이 시스템의 핵심은 조합이 관리하는 등록부(Register)였습니다. 조합원은 출판하고자 하는 저작물, 즉 '카피(copy)'를 이 등록부에 등재함으로써 해당 저작물을 복제할 배타적 권리(right to copy)를 영구적으로 보장받았습니다. 이것이 바로 '카피라이트(copyright)'라는 용어의 어원입니다.
이 제도는 왕실과 서적상 조합 간의 상호 이익을 위한 전략적 결합이었습니다. 왕실은 조합에 독점적 상업 이익을 보장해주는 대신, 조합을 대리인으로 삼아 국가의 사상 통제를 용이하게 했습니다. 조합은 왕실을 대신하여 출판물을 사전 검열하고, 종교적·정치적으로 불온하다고 판단되는 서적을 수색하고 압수할 권한을 가졌습니다. 즉, 저작권의 초기 형태는 지식의 확산이 아닌 통제와 검열의 수단으로 기능했던 것입니다.
[저자의 부재와 출판업자의 권리]
이 시스템에서 가장 주목할 점은 '저자'의 법적 지위가 전무했다는 사실입니다. 서적상 조합의 '카피라이트'는 창작 행위를 한 저자에게 귀속되는 권리가 아니라, 원고를 구매하여 조합에 등록한 출판업자에게 주어지는 독점적 영업 허가권이었습니다. 저자는 자신의 원고를 출판업자에게 일회성으로 판매하는 것 외에는 어떠한 법적 권리도 주장할 수 없었습니다.
이처럼 저작권은 '저자의 권리'가 아닌 '출판사의 특권'으로 탄생했습니다. 이는 국가가 특정 산업 집단에 독점권을 부여하여 시장을 통제하고, 그 대가로 정치적 목적을 달성하는 중상주의 시대의 전형적인 통치 방식이었습니다. 이 역사적 출발점은 이후 저작권의 역사에서 저자의 권리와 출판사의 이익이 어떻게 충돌하고 조율되어 왔는지를 이해하는 데 매우 중요한 맥락을 제공합니다.
[출처]
1710
[앤 여왕법 (Statute of Anne) 제정]
세계 최초의 근대적 저작권법인 '앤 여왕법'은 권리의 주체를 출판업자에서 저자로 전환시킨 역사적 전환점이었습니다.
이 법은 저자에게 14년의 배타적 권리를 부여하고, 기간 만료 후에는 저작물이 공공의 자산(public domain)이 되도록 규정했습니다.
이는 저작권을 개인의 영구적 재산이 아닌, 학문 장려라는 공익을 위한 한시적 독점권으로 정의한 것입니다.
[역사적 전환: 저자의 권리 등장]
1710년 4월 10일 영국에서 발효된 '앤 여왕법(Statute of Anne)'은 세계 최초의 근대적 저작권법으로 평가받으며, 저작권 역사상 가장 중요한 분수령으로 꼽힙니다. 이 법의 공식 명칭은 "학문의 장려를 위하여, 인쇄된 서적의 복제권을 저자 또는 그 구매자에게 일정 기간 부여하는 법률(An Act for the Encouragement of Learning...)"로, 그 입법 목적이 명확히 드러납니다.
이 법이 제정된 배경에는 1695년, 서적상 조합의 독점권 근거였던 '인쇄허가법(Licensing Act)'이 폐지되면서 빚어진 극심한 혼란이 있었습니다. 독점권을 잃은 서적상 조합은 의회에 새로운 법 제정을 끈질기게 로비했는데, 이때 자신들의 이익을 직접적으로 주장하기보다 '가난한 저자들을 보호해야 한다'는 명분을 내세우는 전략을 사용했습니다. 그 결과, 역설적으로 출판업자의 권리가 아닌 저자의 권리를 중심에 두는 법이 탄생하게 되었습니다.
[핵심 내용과 공공의 이익]
앤 여왕법의 핵심 내용은 다음과 같은 혁신적인 조항들을 포함합니다.
1. 권리 주체의 전환
법은 역사상 처음으로 저작권의 원천적 소유자를 출판업자가 아닌 '저자(author)'로 명시했습니다. 이는 저작권이 출판사의 영업 특권에서 저자의 창작에 대한 권리로 전환되는 패러다임의 변화를 의미했습니다.
2. 보호 기간의 한정
서적상 조합이 누렸던 영구적인 독점권과 달리, 앤 여왕법은 저작권 보호 기간을 최초 출판일로부터 14년으로 한정했습니다. 만약 14년이 지났을 때 저자가 생존해 있다면, 추가로 14년을 더 갱신할 수 있었습니다.
3. 공공 영역(Public Domain)의 확립
가장 중요한 혁신은 보호 기간이 만료된 저작물은 누구나 자유롭게 복제하고 이용할 수 있는 '공공 영역'으로 귀속된다고 규정한 점입니다. 이는 지식과 문화가 궁극적으로는 사회 전체의 자산이라는 사상을 법적으로 제도화한 것입니다.
앤 여왕법은 저작권이 저자의 천부적 권리가 아니라, 창작을 장려하여 사회 전체의 '학문을 장려'하려는 공공의 목적을 달성하기 위해 국가가 저자에게 부여하는 '한시적인 독점권'이라는 공리주의적 철학을 확립했습니다. 이 '저자의 인센티브'와 '공공의 접근권' 사이의 균형이라는 기본 구조는 이후 미국을 포함한 전 세계 저작권법의 근간을 이루게 되었습니다.
[출처]
1886
[베른 협약 (Berne Convention) 채택]
빅토르 위고 등의 주도로 체결된 베른 협약은 국경을 넘어 저작물을 보호하는 최초의 국제 조약입니다.
이 협약은 '내국민 대우', '무방식주의', '독립성'의 3대 원칙을 통해 저작권 보호를 자동적이고 보편적인 권리로 만들었습니다.
또한 '저자 사후 50년'이라는 최소 보호 기간을 설정하여 국제적인 기준을 제시했습니다.
[국제적 보호의 필요성과 협약의 탄생]
19세기에는 한 국가에서 법으로 보호받는 저작물이 다른 국가에서는 아무런 제약 없이 복제되는 일이 비일비재했습니다. 이러한 '저작권 해적 행위'로부터 자국의 저자들을 보호하기 위한 국제적 규범의 필요성이 대두되었고, 이는 프랑스의 대문호 빅토르 위고(Victor Hugo)와 같은 인물들의 주도로 '국제문예협회'가 조직되는 계기가 되었습니다. 이러한 노력의 결실로 1886년 9월 9일, 스위스 베른에서 '문학 및 예술 저작물의 보호를 위한 베른 협약'이 채택되었습니다.
[베른 협약의 3대 원칙과 최소 기준]
베른 협약은 국경을 초월하여 저작권을 보호하는 통일된 체계를 구축했으며, 그 핵심은 다음의 세 가지 기본 원칙에 있습니다.
1. 내국민 대우의 원칙 (Principle of National Treatment)
협약 가입국은 다른 가입국 국민의 저작물에 대해 자국민의 저작물과 동등한 수준의 보호를 부여해야 합니다. 이는 외국인 저작자에 대한 차별을 철폐하는 중요한 원칙입니다.
2. 무방식주의 원칙 (Principle of Automatic Protection)
저작권 보호는 등록이나 납본, 저작권 표시(©) 등 어떠한 형식적 절차를 거치지 않아도 저작물이 창작되어 유형물에 '고정(fixed)'되는 순간부터 자동으로 발생합니다. 이는 저작권이 국가가 부여하는 시혜적 권리가 아니라 창작과 동시에 발생하는 권리라는 인식을 담고 있습니다.
3. 보호 독립성의 원칙 (Principle of Independence of Protection)
한 가입국에서의 저작권 보호는 저작물의 본국(country of origin)에서 보호받는지 여부와는 무관하게 독립적으로 적용됩니다.
더불어 베른 협약은 모든 가입국이 준수해야 할 최소한의 보호 기준을 설정했습니다. 가장 대표적인 것이 저작권 보호 기간을 최소 '저자 사후 50년'으로 정한 것입니다. 이는 각국의 법제가 다르더라도 국제적으로 통용될 수 있는 최소한의 보호 수준을 보장하기 위한 장치였습니다.
베른 협약의 채택은 저작권에 대한 인식을 근본적으로 바꾸는 계기가 되었습니다. 특히 '무방식주의' 원칙은 영미법계의 실용적인 '카피라이트(copyright)' 전통보다 저자의 인격과 창작 행위 자체를 중시하는 유럽 대륙법계의 '저자권(droit d'auteur)' 철학을 국제 규범으로 확립한 것으로 평가됩니다. 이 때문에 등록 등의 형식적 요건을 중시했던 미국은 100년 이상이 지난 1989년에야 베른 협약에 가입하게 됩니다.
[출처]
1957
[대한민국 저작권법 최초 제정]
대한민국 최초의 독자적인 저작권법이 제정되었으나, 사회적 인식 부족으로 거의 시행되지 않는 '사문화된 법'에 가까웠습니다.
이 법은 저자 사후 30년의 보호 기간을 규정했으며, 당시 한국 사회가 저작물을 지적 재산으로 인식하기보다 공유의 대상으로 여기는 경향이 강했음을 보여줍니다.
본격적인 저작권 보호는 1986년 전면 개정 이후 시작되었습니다.
[근대적 법제의 도입과 현실]
1957년 1월 28일 공포된 저작권법(법률 제432호)은 대한민국 정부 수립 이후 최초로 제정된 독자적인 저작권법입니다. 이전까지는 일제강점기에 도입된 일본 저작권법이 의용(依用)되어 왔습니다. 이 법은 저작자의 권리를 보호하고 문화 발전에 이바지함을 목적으로 했으며, 저작권 보호 기간을 '저자 사후 30년'으로 규정하고 공정 이용에 관한 조항을 포함하는 등 근대적 저작권법의 체계를 갖추고 있었습니다.
하지만 법 제정에도 불구하고, 당시 한국 사회의 현실과 법 사이에는 큰 괴리가 존재했습니다. 유교적 전통 속에서 지식인의 학문적, 예술적 성과를 금전적 대가와 연결하는 것을 꺼리는 문화가 있었고, 책을 복사하는 행위를 절도와 동일시하는 인식이 매우 희박했습니다. 이로 인해 1957년 저작권법은 제정 이후에도 저작권 침해 소송이 거의 제기되지 않는 등 사실상 효력을 발휘하지 못하는 '죽은 법(dead law)'으로 남게 되었습니다.
[본격적인 저작권 시대의 서막]
이러한 상황은 1980년대 한국이 급격한 경제 성장을 이루고 국제 사회와의 교류가 활발해지면서 변화를 맞이하게 됩니다. 특히 미국의 통상 압력 등 외부적 요인과 맞물려 지적재산권 보호에 대한 필요성이 대두되었고, 이는 1986년 저작권법 전면 개정으로 이어졌습니다. 따라서 1957년 법은 비록 현실에 뿌리내리지는 못했지만, 대한민국 저작권 제도의 법적 기틀을 처음으로 마련했다는 점에서 역사적 의의를 가집니다. 이는 본격적인 저작권 시대가 열리기 전, 법과 사회적 인식 간의 간극을 보여주는 중요한 기록입니다.
[출처]
1986
[대한민국 저작권법 전면 개정]
국제적 기준에 부합하기 위한 저작권법 전면 개정이 이루어졌으며, 1987년 7월 1일부터 시행되었습니다.
보호 기간을 '저자 사후 50년'으로 연장하여 세계 저작권 협약(UCC) 기준을 충족시켰습니다. 이 개정은 외부 통상 압력의 영향이 컸으며, 한국 사회에 저작권 인식을 본격적으로 확산시키는 계기가 되었습니다.
[국제화와 법제의 현대화]
1986년 12월 31일 공포되어 이듬해 7월 1일부터 시행된 저작권법 전면 개정은 대한민국 저작권 역사의 실질적인 출발점으로 평가됩니다. 이 개정은 급속한 경제 성장과 함께 국제 사회의 일원으로 발돋움하던 한국이 지적재산권 보호라는 글로벌 스탠더드를 수용해야 하는 시대적 요구에 부응한 결과였습니다. 특히 미국의 강력한 통상 압력은 법 개정을 촉진한 중요한 외부 요인으로 작용했습니다.
개정법의 가장 핵심적인 내용은 저작권 보호 기간을 기존의 '저자 사후 30년'에서 '저자 사후 50년'으로 연장한 것입니다. 이는 당시 국제 저작권 규범의 양대 축이었던 베른 협약과 세계 저작권 협약(UCC)의 기준에 맞추기 위한 조치였습니다. 한국은 이 법 개정을 기반으로 1987년 UCC에, 1996년에는 베른 협약에 가입할 수 있는 토대를 마련했습니다.
[인식의 전환과 법의 실효성 확보]
1986년 개정은 단순히 법 조항을 바꾸는 데 그치지 않고, 한국 사회 전반에 저작권이라는 개념을 본격적으로 알리는 계기가 되었습니다. 이전까지 '사문화'되었던 법이 현실적인 집행력을 갖추기 시작하면서, 출판, 음악, 영상 등 다양한 분야에서 저작권 분쟁이 수면 위로 떠오르기 시작했습니다. 법학자 유규호는 1980년대 이후 저작권법이 "대체로 무시되던 법적 개념에서 법정 안팎에서 뜨겁게 논의되는 개념으로" 변모했다고 평가했습니다.
이처럼 1986년 전면 개정은 대한민국 저작권법이 국제적 규범에 편입되고 사회적으로 실효성을 갖추게 된 결정적 사건입니다. 이는 한국이 지적재산권 보호를 통해 선진 경제 시스템으로 나아가는 과정에서 필수적인 법적 인프라를 구축했음을 의미합니다.
[출처]
1998
[미국 디지털 밀레니엄 저작권법(DMCA) 제정]
인터넷 시대의 저작권 문제를 규율하기 위해 제정된 DMCA는 두 가지 핵심 제도를 도입했습니다.
하나는 암호화 등 기술적 보호조치를 무력화하는 행위를 금지한 것이고, 다른 하나는 ISP 등 온라인 서비스 제공자에게 '면책 조항(Safe Harbor)'을 부여한 것입니다.
이는 플랫폼 사업자의 책임을 제한하는 대신, 권리자의 요청 시 불법 콘텐츠를 삭제하도록 하는 '통지 및 삭제' 제도의 근간이 되었습니다.
[디지털 시대의 새로운 법적 과제]
인터넷의 등장은 저작물을 비용 없이, 완벽하게, 그리고 전 세계적으로 즉시 복제하고 전송할 수 있는 환경을 만들었습니다. 이는 기존의 저작권 체계에 전례 없는 위협을 가했고, 이에 대응하기 위해 미국은 1996년 세계지식재산기구(WIPO)에서 체결된 두 조약을 이행하고자 1998년 '디지털 밀레니엄 저작권법(DMCA)'을 제정했습니다.
[DMCA의 두 기둥: 기술 통제와 플랫폼 면책]
DMCA는 디지털 환경의 저작권 질서를 구축하기 위해 다음과 같은 두 가지 핵심적인 장치를 마련했습니다.
1. 기술적 보호조치 무력화 금지 (Anti-Circumvention, 제1201조)
저작권자가 자신의 저작물에 대한 접근을 통제하기 위해 사용하는 암호화, 비밀번호 시스템 등의 기술적 보호조치(TPM 또는 DRM)를 우회하거나 무력화하는 행위 자체를 불법으로 규정했습니다. 또한, 이러한 무력화를 목적으로 하는 장치나 서비스를 제작, 배포하는 행위도 금지했습니다. 이는 저작권 침해 행위뿐만 아니라, 침해를 가능하게 하는 기술적 준비 행위까지 규제 범위를 넓힌 것입니다.
2. 온라인 서비스 제공자 면책 조항 (OSP Safe Harbor, 제512조)
유튜브나 페이스북과 같은 플랫폼 사업자(OSP)가 이용자들의 저작권 침해 행위에 대해 직접적인 법적 책임을 지지 않도록 하는 '면책 조항'을 신설했습니다. 만약 플랫폼 사업자들이 이용자가 올리는 모든 콘텐츠에 대해 법적 책임을 져야 한다면, 오늘날과 같은 이용자 제작 콘텐츠(UGC) 기반의 인터넷 생태계는 성장할 수 없었을 것입니다. 이 면책의 조건으로, 플랫폼은 저작권자로부터 침해 사실을 통지받으면 해당 콘텐츠를 신속하게 삭제하거나 접근을 차단해야 하는 '통지 및 삭제(Notice and Takedown)' 의무를 부담합니다.
DMCA는 기술 기업과 콘텐츠 권리자 사이의 '거대한 타협'의 산물입니다. 플랫폼 사업자는 법적 책임의 부담을 덜고 사업을 확장할 수 있게 된 반면, 저작권자는 기술적 통제권이라는 강력한 무기와 온라인상의 침해물을 신속하게 제거할 수 있는 절차를 확보하게 되었습니다. 이 법은 이후 전 세계 인터넷 관련 입법에 막대한 영향을 미쳤으며, 오늘날 온라인 콘텐츠 규제의 기본 틀을 형성하고 있습니다.
[출처]
2011
[대한민국 저작권법 개정 (FTA 반영)]
한미 FTA 발효를 위한 전제 조건으로 저작권법이 다시 한번 개정되었습니다.
이 개정으로 저작권 보호 기간이 '저자 사후 70년'으로 연장(2013년 7월 1일 시행)되었고, 미국식 '공정 이용(Fair Use)' 조항이 도입되었습니다.
이는 한국의 저작권 제도가 국내적 필요보다 국제 통상 협상의 결과로 변화해 왔음을 보여주는 대표적인 사례입니다.
[통상 협상과 법제 변화]
2011년 이루어진 저작권법 개정은 한미 자유무역협정(FTA)이라는 외부적 요인이 국내법을 직접적으로 변화시킨 대표적인 사례입니다. FTA 협정문에는 양국의 지적재산권 보호 수준을 높은 수준으로 통일하기 위한 여러 조항이 포함되어 있었고, 한국은 협정 발효를 위해 저작권법을 이에 맞춰 개정해야 했습니다.
[주요 개정 내용: 보호 기간 연장과 공정 이용 도입]
이번 개정의 핵심적인 내용은 두 가지입니다.
1. 보호 기간 연장
저작재산권의 보호 기간이 기존의 '저자 사후 50년'에서 '저자 사후 70년'으로 20년 연장되었습니다. 이는 미국, 유럽연합 등 주요 선진국의 기준에 맞춘 것으로, 이 조항은 2년의 유예 기간을 거쳐 2013년 7월 1일부터 시행되었습니다.
2. 공정 이용(Fair Use) 조항 도입
기존 저작권법은 저작권자의 허락 없이 저작물을 이용할 수 있는 경우를 법에 구체적으로 명시하는 '제한적 열거주의' 방식을 취하고 있었습니다. 그러나 개정법은 "보도·비평·교육·연구 등을 위하여는 정당한 범위 안에서 공정한 관행에 합치되게" 저작물을 이용할 수 있다는 포괄적인 '공정 이용' 조항을 도입했습니다. 이는 미국의 저작권법 체계를 받아들인 것으로, 기술 발전에 따라 예측하기 어려운 새로운 저작물 이용 형태에 대해 법원이 보다 유연하게 판단할 수 있는 길을 열어주었습니다.
이 개정은 한국의 저작권법이 국내적인 사회적 합의나 문화 정책적 필요보다는, 국제 통상 관계와 외교적 협상에 의해 주도적으로 형성되어 왔음을 명확히 보여줍니다. 특히 보호 기간 연장은 이미 존재하는 저작물의 권리를 연장시켜주는 것으로, 창작 인센티브 제공이라는 저작권의 본래 목적과 상충될 수 있다는 비판과 함께, 문화유산에 대한 공공의 접근을 제한한다는 논란을 낳기도 했습니다. 이는 저작권법이 한 국가의 문화적 자산을 어떻게 규정하고 관리할 것인가에 대한 깊은 사회적 논의가 필요한 영역임을 시사합니다.
[출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