유리명왕

고구려 국왕, 삼국시대 인물, 왕족

num_of_likes 49

최근 수정 시각 : 2025-09-02- 03:31:00

등록된 키워드의 연표를 비교해서 볼 수 있습니다!
?
연혁 비교
no image
고구려 국왕, 삼국시대 인물, 왕족
report
Edit

고구려 제2대 국왕으로 동명성왕의 뒤를 이어 왕국의 기틀을 다졌습니다. 졸본에서 국내성으로 천도하여 중앙 집권 체제를 강화하고 국력을 신장시켰습니다. 선비족 토벌 부여·신나라와의 전쟁으로 영토를 확장 대외적 위상을 높였습니다. 계비 치희를 그리워하며 지은 황조가 설화로도 유명합니다. 대무신왕 민중왕 등 여러 아들이 왕위에 오르며 고구려 왕실의 중요한 인물로 평가됩니다.

연관 연혁
  1. 등록된 연관연혁이 없습니다.
주요사건만
최신순

BC 1C

[유리명왕 탄생]

동명성왕과 예씨 부인의 맏아들로, 동부여에서 태어났습니다.

뜻이 크고 기이한 절개를 지닌 인물로, 어릴 때부터 비범한 면모를 보였습니다.

[고구려 왕태자 책봉]

아버지를 찾아 고구려로 와 동명성왕이 남긴 부러진 칼 조각이라는 징표를 찾아내며 친자로 인정받고 왕태자로 책봉되었습니다.

이로 인해 비류와 온조는 남하하여 백제를 건국했습니다.

삼국지 위서 고구려전에는 본래 여달이었으나 고구려에 온 후 여해로 개명했다고 전합니다. 광개토대왕릉비에는 그를 유류 세자라 하여 주몽왕의 명으로 태자에 책봉되었다고 기록했습니다.

[제2대 고구려 국왕 즉위]

석 달간의 대리청정을 지낸 후, 동명성왕의 서거와 함께 고구려의 제2대 국왕으로 즉위하며 새로운 시대를 열었습니다.

[왕비 송씨와 혼인]

다물후 송양의 딸을 왕비로 맞이하여 왕실의 기반을 다졌습니다.

[왕비 송씨 사망 및 재혼]

왕후 송씨가 사망한 이듬해, 골천 사람 화희와 한나라 출신 치희를 후처로 맞아들였습니다.

[황조가 창작 설화]

계비 치희가 화희와의 다툼 끝에 고향으로 돌아가자, 치희를 그리워하는 마음에 꾀꼬리가 노니는 모습을 보며 '황조가'를 지었다는 설화가 전해집니다.

[선비족 토벌]

부분노의 뛰어난 계책을 활용하여 고구려를 위협하던 선비족을 성공적으로 토벌했습니다.

[부여 대소왕 침공 실패]

부여 대소왕이 고구려에 볼모를 요청했으나 태자 도절이 거부하자, 5만 대군으로 고구려를 침공했습니다.

그러나 갑작스러운 폭설로 인해 대패하며 퇴각했습니다.

[탁리, 사비 처형 사건]

제사에 쓰일 돼지를 잡다가 다리 힘줄을 끊은 탁리와 사비를 처형하여 왕의 엄격한 통치력을 보여주었습니다.

1

[태자 도절 사망]

유리명왕의 첫째 태자인 도절이 사망했습니다.

2

[새 수도 물색 시작]

도망친 제사용 돼지를 쫓다가 장생 설지가 위나암이 새로운 수도로 적합하다는 보고를 올렸습니다.

유리명왕은 그해 9월 직접 위나암의 지세를 살펴보며 천도를 준비했습니다.

3

[국내성 천도]

졸본에서 국내성으로 수도를 옮기고 위나암성을 축조했습니다.

이는 이반한 민심을 수습하고 북부여의 위협에서 벗어나 정권을 강화하려는 중요한 결정이었습니다.

4

[태자 해명 책봉]

두 번째 아들인 해명을 태자로 책봉하며 왕위 계승 구도를 새로이 했습니다.

9

[태자 해명 자결]

이웃 황룡국왕이 준 활을 부러뜨려 고구려의 위상을 높였으나, 이를 오해한 유리명왕의 명으로 자결했습니다.

비극적인 사건으로 기록됩니다.

[무휼, 부여 사신 물리침]

부여 대소왕이 고구려를 속국으로 삼으려 하자, 왕자 무휼이 재치 있는 말로 부여 사신을 돌려보내 고구려의 자주성을 지켜냈습니다.

12

[신나라와 충돌]

신나라 왕망이 흉노 정벌을 위해 고구려군을 징발하려 했으나 거절당하자 고구려를 공격했습니다.

이에 고구려는 신나라를 공격하며 국력을 과시했습니다.

13

[무휼, 부여군 대파]

부여가 또다시 고구려를 침공했으나, 왕자 무휼의 탁월한 매복 작전으로 부여군을 크게 물리치고 승리했습니다.

14

[영토 확장 및 현도군 탈환]

서쪽의 양맥을 정복하고, 현도군의 고구려현을 빼앗는 등 적극적인 대외 투쟁으로 영토를 확장하며 세력 기반을 강화했습니다.

[무휼 태자 책봉]

국내외에서 뛰어난 능력을 보인 셋째 아들 무휼을 태자로 책봉하여 후계자로 삼았습니다.

(이후 대무신왕이 됨).

18

[유리명왕 서거]

두곡의 별궁에서 서거했으며, 두곡 동원에 안장되었습니다.

파란만장했던 생을 마감하며 고구려의 기틀을 다진 영주로 기억됩니다.

비교 연혁 검색
search
키워드 중복 확인
close
댓글 게시판
이전 다음 위로 이동 아래로 이동