손준
삼국시대 인물, 오나라 관료, 섭정, 황족
최근 수정 시각 : 2025-09-02- 03:30:56
* 오나라 삼국시대의 관료이자 황족. * 손권 말년부터 어린 손량을 보좌하며 집권 세력으로 부상. * 제갈각을 제거하고 승상·대장군에 오르며 실질적인 오나라의 최고 권력자가 됨. * 뛰어난 재능에도 불구하고 권력을 남용하고 잔인한 통치로 민심을 잃음. * 섭정으로서 잦은 북벌 시도와 내부 숙청을 거듭하다 병으로 사망.
252
[손권의 유언과 보좌]
손권의 신임을 받아 말년에 무위도위와 시중에 올랐으며, 손권의 유언에 따라 어린 손량을 보좌할 핵심 인물 중 한 명으로 지명되었다.
제갈각을 돕는 역할을 맡았고, 제갈각을 제거하려던 손홍의 음모를 알려 그를 살려주기도 했다.
손권은 죽을 때 제갈각을 태자태부·대장군에 임명하며 어린 손량을 보좌하게 했고, 중서령 손홍, 회계태수 등윤, 장군 여거, 시중 손준에게 뒷일을 부탁했다. 손준은 이 유조를 받아 무위장군을 겸임하고 숙위가 되었으며 도향후에 봉해졌다. 《오서》에 따르면 손준이 제갈각을 추천하기도 했다. 태자소부 손홍이 황제의 죽음을 숨기고 제갈각을 제거하려 했을 때, 손준은 이 사실을 제갈각에게 알려 그의 목숨을 구했다.
253
[제갈각 제거 및 집권]
위 정벌 실패로 민심을 잃은 제갈각의 전횡을 기회 삼아, 손준은 어린 황제 손량과 공모하여 연회를 열고 제갈각을 유인했다.
의심하는 제갈각을 안심시킨 후 내전으로 불러들여 칼로 찔러 죽이고 삼족을 멸했다.
이 정변으로 손준은 승상·대장군에 올라 오나라의 최고 권력자가 되었다.
제갈각은 위 정벌 실패 후 민심을 잃고 독단적인 행보를 보였다. 손준은 이를 틈타 황제 손량과 상의하여 연회를 열어 제갈각을 초청했고, 불길함을 느낀 제갈각을 설득하여 내전으로 들어오게 한 뒤 칼로 찔러 죽였다. 이어서 제갈각의 둘째 아들과 셋째 아들을 참수하고 삼족을 멸했다. 이 사건 이후 손준은 승상·대장군이 되어 오나라의 집권자가 되었다. 당시 등윤이 제갈각에게 황제를 뵙도록 권유하여 결과적으로 손준의 쿠데타 성공에 기여하기도 했다.
254
[폐태자 손화 주살]
제갈각과 인척 관계였던 폐태자 손화가 복위될 수 있다는 민간의 소문을 경계하여, 손준은 제갈각 제거 직후 손화의 인수를 빼앗고 끝내 죽였다.
이 사건으로 백성들은 크게 슬퍼하며 손준에게 원망을 품게 되었다.
제갈각이 폐태자 손화를 각별히 여겼기에, 민간에서는 제갈각이 손화를 다시 옹립하려 한다는 소문이 돌았다. 손준은 이 소문을 빌미로 제갈각을 주살한 뒤 손화의 인수를 빼앗고 죽음에 이르게 했다. 이로 인해 많은 사람들이 손준을 원망하고 슬퍼했다. 또한 손준은 교만하고 음험한 성품으로 많은 이를 형벌로 죽였으며, 심지어 공주 노반과 사통하는 등 방탕한 생활을 했다.
[손영의 손준 암살 시도]
백성들의 원망이 깊어지던 오봉 원년 가을, 대제 손권의 손자인 오후 손영이 손준을 주살하려 했으나 발각되어 자살했다.
기록에 따라 손영은 이 계획을 몰랐다고도 전해지지만, 이 사건으로 손준은 자신을 향한 첫 번째 암살 위기를 가까스로 모면했다.
255
[광릉 축성 시도와 실패]
손준은 광릉에 성을 쌓으려 했으나, 조정 신료들은 불가능함을 알면서도 손준을 두려워해 아무도 말리지 못했다.
오직 등윤만이 간언했으나 받아들여지지 않았다.
그해 심한 가뭄까지 겹쳐 결국 광릉 축성 계획은 실패로 돌아갔다.
손준은 위위 풍조를 시켜 광릉에 성을 쌓게 하고, 오양을 광릉태수로, 유략을 동해태수로 임명했다. 조정의 신료들은 광릉에 성을 쌓는 것이 불가능한 일임을 알았으나, 손준의 위세를 두려워하여 감히 반대하지 못했다. 오직 등윤만이 손준에게 간언했지만, 손준은 이를 무시했다. 그해 큰 가뭄까지 겹쳐 결국 광릉 축성 계획은 실패로 끝났다.
[관구검·문흠의 난 지원]
위나라에서 관구검과 문흠이 사마씨에 대항하여 난을 일으키자, 손준은 윤달 정월에 여거, 유찬과 함께 군사를 일으켜 수춘을 공격하려 했다.
문흠의 잔당이 투항하는 성과도 있었으나, 위군 제갈탄의 방어로 수춘 공략에 실패하고, 고파 전투에서 대패하여 유찬 등 여러 장수를 잃었다.
결국 북벌은 실패로 끝났으나 문흠과 그 잔당을 얻는 것으로 위안을 삼았다.
오봉 2년(255년) 윤달 정월 9일, 위나라에서 관구검과 문흠이 사마씨에 대항하여 거병하자, 손준은 이를 기회 삼아 표기장군 여거, 좌장군 유찬 등과 함께 수춘 공격을 감행했다. 19일, 오군은 탁고에 이르러 문흠과 잔당 수만 명의 투항을 받았으나, 이미 제갈탄이 수춘성에 입성했다는 소식에 군사를 물렸다. 이후 2월, 위 장수 장반의 추격으로 고파에서 패배하여 유찬, 손릉 등 여러 장수를 잃었다. 3월에는 주이를 시켜 안풍을 공격했으나 이 또한 실패했다. 북벌 자체는 실패했지만, 문흠과 그의 잔당을 확보하는 부수적인 성과를 얻었다.
[손의의 손준 암살 시도]
관구검의 난 지원 실패 후 같은 해 7월, 손준의 당숙 손의가 촉한 사자와의 회견을 틈타 손준을 암살하려 했으나 발각되었다.
손의를 비롯한 수십 명이 죽임을 당했고, 전 공주 손노반의 고변으로 주 공주 노육까지 누명을 쓰고 죽임을 당하는 등 대규모 숙청이 이어졌다.
오봉 2년(255년) 가을 7월, 촉한 사자 방문 시, 손준의 당숙 손의가 장이, 임순 등과 공모하여 사자 회견 틈을 타 손준을 죽이려 했으나, 계획이 탄로 났다. 손의 등은 자살하고 수십 명이 죽임을 당했다. 이 사건에 전공주 손노반이 자신의 동생 주공주 노육이 손의와 공모했다고 상주하여, 손준은 노육에게 누명을 씌워 죽음에 이르게 했다.
256
[2차 북벌 계획과 사망]
256년 8월, 손준은 문흠의 제안을 받아들여 위나라 북벌을 계획했다.
출정에 앞서 여거의 군영을 방문했다가 불편함을 느끼고 떠난 뒤, 제갈각에게 공격받는 악몽에 시달리다 병이 깊어져 38세의 나이로 사망했다.
그는 유언으로 종제 손침에게 후사를 맡겼다.
태평 원년(256년) 8월, 손준은 투항해 온 문흠의 계책을 받아들여 문흠, 여거, 유찬, 주이, 당자 등에게 군사를 이끌고 강도에서 회수·사수로 진격하여 청주와 서주를 점령할 계획을 세웠다. 출정에 앞서 석두에서 군사를 전별한 뒤 여거의 군영에 들렀으나 불편함을 느끼고 돌아왔다. 이후 제갈각에게 공격당하는 악몽에 시달리다 병이 들어 38세의 나이로 사망했다. 그는 종제 손침에게 후사를 맡긴다는 유언을 남겼다. 훗날 손침이 주살당한 후, 경제는 손준의 관을 파내어 인수를 빼앗고 그의 이름을 종실에서 삭제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