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마준
삼국시대 위나라 관료, 서진 황족
최근 수정 시각 : 2025-09-02- 03:30:44
사마의의 7남 사마준은 어릴 적부터 학문에 뛰어나 당대 명사들과 어깨를 나란히 했다. 위나라 황제 조예의 주목을 받아 어린 나이에 황제를 가르쳤고 서진 건국 후 황족으로서 오나라 침공을 막아냈다. 특히 독발수기능의 난을 진압하며 선비족 20만 명의 항복을 받아내는 등 뛰어난 군사적 역량을 발휘 서진 종실 최고의 준걸로 평가받았다. 말년에는 흉노족 10만 명의 귀부를 이끌며 명성을 드높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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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마의 7남으로 출생]
삼국시대 말기 위나라의 관료이자 서진의 황족인 사마준이 하내군 온현 효경리에서 사마의의 7번째 아들로 태어났다.
그는 어려서부터 학문에 능하여 오륙세에 글을 쓰고 경서를 외워 주변을 놀라게 했으며, 당대 명사 순의와 인효를 논하며 일찍이 명성을 쌓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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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린 황제 조방을 가르치다]
위나라 경초 연간(237년~239년) 평양정후로 봉해지며 관직을 시작했다.
황제 조예가 그의 재능을 일찍이 눈여겨본 덕분에, 어린 나이에 산기상시로서 당시 8세였던 조방 황제에게 경서를 강론하는 중책을 맡았다.
260
[오나라 침공 성공적 방어]
서진 건국 이후, 오나라 장수 정봉과 제갈정이 회남 지방과 합비를 공격해오자 사마준이 이를 성공적으로 막아냈다.
특히 정봉이 이간책으로 서진 내부 분열을 꾀했을 때는 손삭을 보내 문제를 해결하는 등 뛰어난 위기관리 능력과 지략을 보였다.
264
[대장군으로 허창 수호]
동모후에 봉해지고 안동대장군이 되어 위나라의 핵심 요충지인 허창 방어를 총괄하는 중요한 역할을 맡았다.
이는 그가 위나라 군부의 핵심 인물로 성장했음을 보여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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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진 건국, 여음왕 책봉]
사마염이 위나라를 찬탈하고 서진을 건국하자, 사마준은 황족으로서 여음왕에 봉해지며 서진의 주요 인물로 자리매김했다.
이는 그의 높아진 위상과 황실 내 중요성을 명확히 보여주는 사건이다.
270
[독발수기능의 난 진압 착수]
북서부 지역에서 독발수기능이 난을 일으켜 진압에 나선 장수들이 연달아 실패하자, 사마염 황제는 사마준을 진서대장군으로 임명하여 옹주와 양주의 군사를 총괄하게 하고 반란 진압의 중책을 맡겼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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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반란 진압 경질 후 복귀]
진서대장군으로 임명된 후 견홍이 패사하는 등 독발수기능의 난 진압이 여의치 않자 사마준은 책임을 지고 경질되었다.
하지만 후임 사령관 가충이 곧 물러나면서, 사마준은 불과 1년 만에 다시 사령관으로 복귀하여 전열을 재정비했다.
274
[독발수기능 반란 반격 개시]
사령관으로 복귀한 사마준은 둔전을 설치하고 병사를 양성하며 착실히 전력을 다졌다.
마침내 274년부터 대대적인 반격을 개시, 독발수기능과의 전투에서 수차례 승리하며 그의 세력을 약화시키기 시작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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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독발수기능 진압, 선비족 20만 귀부]
274년부터 이어진 맹렬한 공격 끝에 독발수기능의 연맹을 해체시키고 그의 세력을 크게 약화시키는 데 성공했다.
이로 인해 선비족 20만 명이 사마준에게 투항하는 세계적인 성과를 거두었으며, 그 공으로 부풍왕에 봉해지고 표기장군으로 승진했다.
282
[사마유 유배에 반대하다]
사마유가 순욱과 풍담의 모략으로 산동으로 쫓겨날 때, 사마준은 그의 유배에 강력히 반대했지만 자신의 뜻을 이루지 못했다.
이는 서진 황실 내부의 권력 암투와 사마준의 소신을 보여주는 사건이다.
286
[흉노족 10만 명 귀부]
10만 명에 달하는 흉노족이 사마준에게 귀부하는 기록적인 사건이 발생했다.
이는 그의 뛰어난 통치력과 명성이 이민족에게까지 널리 미쳤음을 보여주는 증거이자 그의 생애 마지막 주요 업적 중 하나이다.
287
[별세]
서진 종실 최고의 준걸로 평가받았던 사마준이 287년 9월 29일 병사했다.
그의 죽음은 뛰어난 학문과 군사적 역량으로 서진에 큰 공헌을 했던 한 시대의 인재를 잃은 큰 손실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