두기 (백후)
삼국시대 인물, 위나라 관료, 효자, 행정가
최근 수정 시각 : 2025-09-02- 03:30:43
후한 말 혼란 속 하동군을 안정시키고 조조에게 복속시킨 위나라의 뛰어난 관료. 백성에게 관용과 은혜를 베풀어 선정을 펼쳤으며 효행으로 이름 높았음. 하동에서 16년간 재임하며 민심을 얻고 조조의 신임을 받아 중앙 요직을 거침. 특히 고간의 세력 확장을 저지하고 조비의 국정 운영을 도왔으나 누선 시운전 중 안타깝게 순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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효렴으로 천거되어 한중부승에 제수되었으나 취임하지 않고 형주로 떠났던 두기가 건안 연간(196년 ~ 220년)에 다시 돌아왔다.
197
허에서 경기와 대화를 나누던 중 상서령 순욱의 눈에 띄어 조조에게 천거되었다. 조조는 두기를 사공사직으로 임명했으며, 이후 호강교위와 사지절로 승진하고 서평태수까지 겸임하게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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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두기, 하동태수로 임명되어 반란 진압에 나서다.]
고간의 반란 시기, 하동군 위고와 범선이 내통하자 두기가 하동태수로 부임하여 상황을 수습하다.
건안 10년 10월, 병주자사 고간이 조조에게 다시 반기를 들었다. 이때 하동군 태수 왕읍이 중앙으로 불려간 사이, 하동군의 위고와 범선이 고간과 내통하며 혼란을 야기했다. 조조가 이를 염려하자 순욱은 두기를 천거했고, 두기는 하동태수로 부임하게 되었다.
[두기, 기지로 하동 반란 세력 내부 분열 유도.]
하동태수 두기, 위고와 범선이 섬 나루를 막자 예상치 못한 두 나루를 통해 진입. 위고 등을 명목상 등용하여 병사 징발을 방해하며 반란 세력을 약화시키는 지략을 펼치다.
위고 일당이 섬 나루를 끊어 두기의 부임을 방해했으나, 두기는 이를 무시하고 두 나루를 건너 하동으로 들어갔다. 그는 위고와 범선을 말로 추켜세워 도독, 군승 대행 등의 직책을 맡긴 후, 대규모 병사 징발을 재물로 대신하게 하고 장병들에게 휴가를 주어 병력을 분산시켰다. 이로써 위고의 세력은 약화되고 두기에게 우호적인 세력이 암암리에 형성되었다.
206
[고간 및 위고의 하동 반란 진압 성공.]
고간과 장성, 위고 등이 두기를 공격했으나 실패. 조조의 대군이 도착하자 반란 세력은 진압되고 위고 등은 주살되다.
장성 및 고간이 군사 활동을 시작하자 위고 등도 병사를 모아 두기를 공격했다. 그러나 두기는 수십 기병만으로 장벽에서 항거하며 수십 일 만에 4천 명을 모아 방어에 성공했다. 조조의 대군이 도착하자 고간과 장성은 패배했고, 위고 일당은 주살되었으며 나머지 가담자들은 사면되었다. 이로써 하동 평정이 완료되었다.
[하동태수 두기, 관용과 은혜의 선정 펼치다.]
두기, 하동태수로 부임 후 관용과 은혜를 바탕으로 선정을 베풀다. 백성들의 농사를 장려하고 학궁을 열어 유학을 가르쳐 하동 지역을 발전시켰다.
하동을 다스리면서 두기는 관용과 은혜를 숭상하여 백성들의 소송을 도리로써 해결하고, 효자와 정부 등에게 요역을 면제해주었다. 또한 가축 사육과 농사를 장려하여 백성들을 부유하게 만들었고, 학궁을 열어 경전을 가르쳐 유학을 장려했다. 이로 인해 하동은 유학자가 많은 지역으로 알려지게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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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두기, 하동의 충성으로 조조의 신임 얻다.]
건안 16년, 한수·마초의 반란 시 하동은 조조에게 변함없이 충성하며 군량을 제공. 조조는 이에 두기를 칭찬하고 봉록을 중 2천 석으로 올리다.
건안 16년, 한수와 마초 등이 조조에게 반기를 들었을 때 홍농과 풍익에서는 많은 사람들이 반란에 호응하여 동요했으나, 하동군은 적과 인접했음에도 불구하고 동요하는 자가 없었다. 조조가 한수 등과 싸울 때 하동군에서 군량을 댔으며, 전쟁이 끝났을 때에도 20만여 곡이 남아 있었다. 조조는 이를 크게 칭찬하며 두기의 봉록을 중 2천 석으로 올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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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두기의 하동 병사들, 한중 원정군 수송에 공헌.]
조조의 한중 정벌 당시, 두기가 보낸 5천 명의 하동 병사들이 단 한 명의 이탈 없이 군량 수송 임무를 완수하며 두기에 대한 충성심을 보이다.
조조가 한중을 공격할 때, 두기는 하동군에서 5천 명의 병사를 보내 군량 수송을 맡겼다. 이 병사들은 두기를 위해서라며 한 명도 도중에 도망치지 않고 임무를 완수하여 두기의 덕망과 하동 백성들의 충성심을 입증했다.
220
[두기, 위나라 상서로 임명되어 중앙 관료로 활동 시작.]
하동에서 16년간 재직하며 공을 세운 두기, 위나라 건국 후 상서직에 오르다.
하동에서 16년간 뛰어난 행정 능력을 발휘했던 두기는 위나라가 건국된 후 상서(尙書)가 되어 중앙 관료로서 활동을 시작했다.
[두기의 청렴한 과부 징발 원칙.]
과부 징발 시, 다른 군과 달리 두기는 오직 과부만을 선별하여 보내 공정함을 지켰고, 이후 조비에게 그 청렴함을 인정받았다.
당시 기록에 따라 과부들을 징발하여 중앙으로 올려보내는 일이 있었는데, 다른 군에서는 이미 남편이 있는 여자까지 강제로 징발하는 일이 빈번했다. 그러나 두기는 오직 기록된 대로 죽은 자의 아내, 즉 과부만을 보냈으므로 그 수가 적었다. 후에 그의 후임 조엄이 유부녀까지 징발하여 보내자 조비가 두기에게 그 까닭을 물었고, 두기의 정직한 대답에 조비와 좌우의 사람들이 모두 놀랐다고 전해진다.
[조비 즉위 후 두기, 관내후 및 풍락정후에 봉해지다.]
건안 25년 조비가 왕위에 오르자, 두기는 관내후에 봉해지고 풍락정후로 봉읍이 올랐으며 사례교위를 대행했다.
건안 25년(220년), 조비가 왕위에 오르면서 두기는 관내후에 봉해졌다. 이후 풍락정후로 봉읍이 더욱 올랐으며, 사례교위(司隸校尉)를 대행하는 중요한 직책을 맡게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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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두기, 조비 원정 중 후방 책임자로서 국정 운영.]
조비의 오나라 정벌 시, 두기는 상서복야가 되어 후방 업무를 총괄하는 중책을 맡았으며, 조비의 부재 중에도 국정을 안정적으로 운영했다.
조비가 오나라를 정벌하러 나섰을 때, 두기는 상서복야(尙書僕射)가 되어 수도에서 뒷일을 맡아 처리하는 중책을 수행했다. 또한 조비가 허창으로 행행할 때에도 두기는 유수(留守)하여 중요한 국정을 안정적으로 운영하는 역할을 담당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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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두기, 황제 누선 시운전 중 불의의 사고로 사망.]
두기, 황제 누선을 제작하던 중 도하에서 시운전하다가 강풍에 배가 전복되어 물에 빠져 사망하다.
조서를 받아 황제의 누선을 건조하던 두기는 도하(渡河)에서 누선 시운전을 하던 중 갑작스러운 바람을 만나 배가 전복되면서 물에 빠져 사망했다. 당시 제갈탄도 함께 물에 빠졌으나, 제갈탄이 자신보다 두기를 먼저 구하라고 소리쳤음에도 불구하고 두기를 구하지 못했다고 전해진다.
[두기, 예언과 함께 62세의 나이로 사망.]
두기, 사망 전 20년 전 동자에게 수명을 다할 것을 예고받았던 일화를 이야기한 후 향년 62세로 생을 마감하다.
두기가 일찍이 동자를 만나 수명신이 자신을 부른다는 말을 들었다는 일화가 전해진다. 두기가 간곡히 청하자 동자는 그를 대신할 자를 찾겠으니 아무에게도 말하지 말라고 하고 사라졌다. 20년 후, 두기가 이 말을 사람들에게 이야기한 그날에 사망했으며, 향년 62세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