노식
후한 관료, 무장, 학자
최근 수정 시각 : 2025-09-02- 03:30:33
- 유비와 공손찬의 스승이자 당대 최고 학자 중 한 명. - 키가 크고 학식이 깊었으며 강직한 성품으로 유명. - 황건적의 난 진압에 큰 공을 세웠으나 환관의 모함으로 위기를 겪음. - 동탁의 전횡에 맞서 죽음도 불사한 충절을 보임. - 후한 말 혼란기 명망 높은 유학자이자 충신으로 활동.
122
[노식 탄생 추정 및 학문 시작]
노식은 123년 이전에 유주 탁군에서 태어났습니다. 젊은 시절 정현과 함께 마융에게서 학문을 배웠고, 그의 강직한 태도 덕분에 스승의 존경을 받았습니다.
노식은 서기 123년 이전에 유주 탁군 탁현에서 태어난 것으로 추정됩니다. 키가 8척 2촌으로 매우 컸으며, 젊었을 때 정현과 함께 마융의 문하에서 수년 동안 학문을 배웠습니다. 마융이 주변에 여자들로 하여금 춤추고 노래부르게 해도 노식은 전혀 눈길을 주지 않아 스승의 존중을 받았습니다.
167
[영제 즉위와 두무 간언]
환제가 죽고 영제가 즉위하자, 노식은 영제를 옹립한 공으로 문희후가 된 두무에게 자만하지 말고 상을 사양하라고 간했으나 받아들여지지 않았습니다.
167년 후한 환제가 죽고 후한 영제가 즉위했습니다. 환제의 황후 두씨의 아버지인 두무는 영제를 옹립하는 데 가장 큰 공을 세워 문희후가 되었는데, 이때 노식은 두무에게 자만하지 말고 상을 사양할 것을 권했으나 받아들여지지 않았습니다.
175
[소수민족 반란 진압]
소수민족의 반발이 일어나자, 노식은 구강태수와 여강태수로 임명되어 반란을 성공적으로 수습하며 뛰어난 행정 능력을 보여주었습니다.
175년 소수민족의 반발이 일어나자 조정으로부터 구강태수에 임명되어 사태를 잘 수습했습니다. 이후 여강에서도 같은 일이 벌어지자 여강태수를 지내며 역시 성공적으로 문제를 해결했습니다.
178
[일식과 영제에게 올린 간언]
일식이 발생하자, 노식은 영제에게 당고의 금으로 쫓겨난 사람들을 사면하고 관리 임용을 바로잡을 것을 청했으나, 영제는 이를 받아들이지 않았습니다.
178년 10월 일식이 일어나자, 노식은 영제에게 당고의 금으로 쫓겨난 사람들을 사면하고 관리의 임용을 바로잡을 것을 청했으나, 영제는 그의 간언을 받아들이지 않았습니다.
184
[황건적 진압과 광종 포위]
장각이 이끄는 황건적 봉기가 일어나자, 노식은 북중랑장으로 임명되어 황건적 본진을 상대로 연이어 승리하며 광종에서 이들을 포위하는 데 성공했습니다.
184년 장각의 지휘하에 황건적들이 봉기하자, 조정으로부터 북중랑장(北中郞將)에 임명되어 진압에 나섰습니다. 노식은 장각이 이끄는 황건적 본진을 상대로 거듭 승리하여 광종(廣宗)에서 이들을 포위했습니다.
[환관의 모함과 상서 임명]
황건적 진압 중 환관 좌풍이 뇌물을 요구했으나 노식이 거절하자, 좌풍의 모함으로 체포 위기에 처했습니다. 다행히 황보숭의 상소 덕분에 상서로 임명되어 복권되었습니다.
황건적을 광종에서 포위했을 때, 조정에서 보낸 환관인 소황문 좌풍이 노식의 군영을 감찰하러 나왔습니다. 노식이 주위의 권고에도 불구하고 끝까지 뇌물을 바치지 않자, 조정으로 돌아간 좌풍은 노식이 황건적을 격파할 수 있는데도 얼른 진압하지 않는다고 모함했습니다. 결국 영제의 진노를 산 노식은 순식간에 죄인이 될 위기에 처했으며, 위기에 몰렸던 장각은 숨통을 트게 되었습니다. 그해 10월 황건적의 본진을 격파한 황보숭이 노식에게 공을 돌리는 상소를 올린 덕분에 노식은 상서(尙書)가 될 수 있었습니다.
189
[하진과 동탁 권력 암투 반대 및 황실 구출]
대장군 하진이 동탁을 끌어들여 십상시를 제거하려 하자 노식은 이를 반대했습니다. 하진 암살 후 궁궐 혼란 속에서 태후와 황제가 도주하려 하자 단규를 막고 이들을 구출하는 데 기여했습니다.
광희 원년(189년), 대장군 하진이 동탁을 끌어들여 십상시를 제거하려 하자 노식은 정태와 더불어 이를 반대했으나 하진의 생각을 바꾸지 못했습니다. 결국 하진이 십상시에게 암살당하자 그 부하들은 일제히 궁궐을 공격했습니다. 상황이 심상치 않게 돌아가자 장양이 하태후에게 하진의 군대가 반란을 일으켰다고 고하고 태후와 황제, 진류왕을 데리고 달아나려 했습니다. 그러나 노식이 창을 쥔 채 태후를 이끌고 달아나던 단규를 거듭 노려보자, 단규는 마지못해 태후를 놔두고 도망쳤습니다.
[동탁의 황제 폐립 반대와 좌천]
정권을 잡은 동탁이 소제를 폐하고 헌제를 세우려 하자 노식은 면전에서 강하게 반대했습니다. 이로 인해 죽음의 위기에 처했으나 채옹의 간언으로 벼슬에서 쫓겨나는 것으로 그쳤고, 이후 원소의 군사로 임용되었습니다.
순조롭게 정권을 잡은 동탁은, 후한 소제를 폐하고 진류왕(후한 헌제)을 세울 뜻을 내비쳤습니다. 노식이 면전에서 반대하자 동탁은 노식을 죽이려 했습니다. 그러나 당시 갓 등용되어 동탁의 신임을 받고 있던 채옹이 노식을 위해 간한 덕분에 벼슬에서 쫓겨나는 것으로 그쳤습니다. 이후 상곡에서 은거하였다가 원소에게 군사로 임용되었습니다.
192
[노식 사망]
초평 3년인 192년, 노식은 세상을 떠났습니다. 그는 아들에게 장례를 산에서 검소하게 치르고 관 대신 베로 시신을 감싸라고 유언을 남겼습니다.
초평 3년(192년), 노식은 숨을 거두었습니다. 아들에게 유언으로 장례는 산에서 검소하게 치르고, 관을 짜지 말고 베로 시신을 감싸기만 하라고 일렀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