율리우스 카이사르의 브리튼 침공

전쟁, 군사 작전, 로마사, 브리튼 역사

num_of_likes 55

최근 수정 시각 : 2025-09-02- 03:24:49

등록된 키워드의 연표를 비교해서 볼 수 있습니다!
?
연혁 비교
no image
전쟁, 군사 작전, 로마사, 브리튼 역사
report
Edit

- 기원전 55년과 54년 율리우스 카이사르가 갈리아 전쟁 중 브리튼섬을 두 차례 침공한 사건. - 로마군이 브리튼섬에 대규모 상륙 작전을 감행한 세계 최초의 역사적 기록. - 완전한 정복보다는 갈리아 배후 안정과 정보 획득이 주 목적이었음. - 단기적으로 로마의 영향력을 확대하고 장기적으로 브리튼-로마 관계 형성의 기반을 다짐. - 당시 로마인들에게 미지의 섬 브리튼의 지리 문화 군사에 대한 중요한 정보를 제공함.

연관 연혁
  1. 등록된 연관연혁이 없습니다.
주요사건만
최신순

BC 5C

[카르타고 항해자 히밀코, 브리튼섬 탐험]

카르타고의 항해자 히밀코가 북유럽 해안들을 탐험하며 브리튼섬이 고전 고대 세계에 알려졌습니다. 이 시기에 브리튼섬은 지중해 패권 시대에 주석 산지로 알려져 있었습니다.

고대 그리스가 지중해를 중심으로 패권을 행사하던 고전 고대 시기에 이미 브리튼섬은 주석의 산지로 알려져 있었습니다. 카르타고의 항해자 히밀코가 북유럽 해안들을 탐험하면서 브리튼섬도 고전 고대 세계에 알려졌습니다.

BC 4C

[그리스 지리학자 피테아스, 브리튼섬 탐험]

고대 그리스의 지리학자 피테아스가 브리튼섬 연안을 탐험했습니다. 로마인들은 피테아스의 항해를 꾸며낸 이야기로 여겼습니다.

고대 그리스의 지리학자 피테아스는 기원전 4세기에 브리튼섬 연안을 탐험했습니다. 그러나 로마 시기에 들어서도 브리튼섬은 로마인에게 바다 건너 세상 끝에 있는 미지의 섬이었고, 몇몇 로마 기록에서는 존재하지 않는다고 여겨지기도 하였으며, 피테아스의 항해를 그럴듯하게 꾸며낸 이야기쯤으로 여겼습니다.

BC 2C

[갈리아 화폐, 켄트 지방 통용 시작]

기원전 150년 무렵의 갈리아 화폐가 켄트 지방을 중심으로 브리튼섬에서 통용되기 시작했습니다. 이는 벨가이족의 인구와 영향력이 커졌음을 시사합니다.

브리튼섬에서 기원전 150년 무렵의 갈리아 화폐가 켄트 지방을 중심으로 통용되기 시작했으며, 후대로 가면 도싯에서 서쪽으로 멀리 떨어진 남부 연안까지 화폐가 사용되었고 이는 벨가이족의 인구와 영향력이 그만큼 커졌음을 의미합니다.

BC 1C

[갈리아-벨가이 화폐, 켄트 지방 통용]

기원전 100년 무렵의 갈리아-벨가이 화폐가 켄트 지방을 중심으로 브리튼섬에서 통용되었습니다. 브리튼섬은 이미 유럽 대륙과 교역로로 연결되어 있었습니다.

브리튼섬에서 기원전 100년 무렵의 갈리아-벨가이 화폐가 켄트 지방을 중심으로 통용되었으며, 브리튼섬은 이미 갈리아 나르보넨시스가 로마에 복속하기 이전부터 유럽 대륙과 교역로로 연결되어 있었습니다.

[베네티족과 브리튼족 동맹 및 반란]

카이사르가 브리튼 섬과의 선박 무역을 주도하던 아르모리카의 베네티족의 해상 무역을 봉쇄하자, 베네티족은 브리튼족과 동맹을 맺고 반란을 일으켰습니다. 이는 카이사르의 브리튼 침공에 대한 직접적인 배경이 됩니다.

카이사르는 브리튼인들이 유럽에서 패퇴하여 브리튼섬에 정착한 벨가이족과 합세하여 갈리아 본토의 캘트족을 지원하고 자신에게 대항하였다고 침공의 이유를 밝혔습니다. 브리튼 섬과의 선박 무역을 주도하고 있던 아르모리카의 베네티족 역시 기원전 56년 브리튼족과 동맹을 맺었고, 스트라본은 카이사르가 베네티족과 브리튼족의 해상 무역을 봉쇄하자 기원전 56년 반란이 일어났다고 기록했습니다.

[폭풍으로 인한 로마군 피해 및 브리튼인의 반격]

로마군이 상륙지에 교두보를 마련하고 브리튼인 사절을 맞이하는 동안, 폭풍이 몰아쳐 기병 수송선들이 갈리아로 회항하고 로마 함선들이 크게 파손되었습니다. 이로 인해 식량 보급에 문제가 생기고 브리튼인들의 매복과 기습 공격이 이어졌습니다.

로마군은 앞서 서술한 고고학 발굴 지점으로 추정되는 상륙지에 교두보를 마련하고 브리튼섬으로 미리 파견되었다가 곧바로 포로가 된 코미우스와 브리튼인들의 사절을 맞이하였습니다. 카이사르는 브리튼인 지도자들과 교섭하며 아직 당도하지 못한 기병을 기다렸습니다. 기병을 태운 배는 교두보 근처까지 다가왔으나 마침 시작된 폭풍 때문에 갈리아로 회항할 수 밖에 없었습니다. 그 사이 교섭은 결렬되고 사절은 내륙으로 돌아갔습니다. 폭풍으로 항해가 불가능해지자 지원 병력뿐만 아니라 음식의 보급에도 문제가 생겼습니다. 지중해에서 나고 자란 카이사르는 브리튼섬의 거친 폭풍우를 처음 겪고서는 대경 실색할 지경이었습니다. 정박하여 두었던 전함에는 물이 들이차고 연안에 닻을 내려 두었던 수송선들은 서로 부딪혀 파손되었습니다. 일부 선박은 침몰하였고 그렇지 않은 것들도 도저히 사용할 상태가 아니었습니다. 카이사르가 배고픔에 시달리며 겨울을 견디고 있는 사이 브리튼인들은 식량을 구하기 위해 사냥나온 로마군을 매복과 기습으로 괴롭혔습니다. 마침내 폭풍이 지나가자 브리튼인들은 대열을 정비하고 로마군에 대한 공격에 나섰습니다.

[카이사르의 브리튼섬 정찰 및 복속 사절 파견]

카이사르는 늦은 계절임에도 브리튼섬 정찰을 결정하고 호민관 가이우스 볼루세누스에게 전함 한 척을 주어 정찰을 지시했습니다. 한편, 브리튼족 나라 가운데 한 곳이 침략 경고에 따라 복속을 약속하며 사절을 보내왔고, 카이사르는 동맹인 코미우스를 그들과 함께 브리튼으로 보냈습니다.

기원전 55년 늦여름, 카이사르는 전쟁을 치르기엔 늦은 계절이었음에도 브리튼섬 정찰을 결정하였습니다. 그는 브리튼섬과 교역하는 상인들을 불러모아 정보를 물었지만, 상인들은 독점 무역을 잃고 싶지 않아 도움이 될만한 정보를 내놓지 않았습니다. 카이사르는 호민관 가이우스 볼루세누스에게 전함 한 척을 내주어 정찰을 시켰습니다. 그는 하이드에서 샌드위치 사이로 짐작되는 켄트 연안을 정찰하였지만 삼엄한 경계 때문에 상륙할 수는 없었고 닷새 뒤 카이사르에게 돌아가 수집한 정보를 보고하였습니다. 이때 브리튼족 나라들 가운데 한 곳이 침략이 임박했다는 상인의 경고에 따라 복속을 약속하는 대사를 보내왔습니다. 카이사르는 정복에 도움을 줄 것이라고 판단하고 동맹이었던 아트레바트족의 왕 코미우스를 그들과 함께 브리튼으로 보냈습니다.

[카이사르의 1차 브리튼 침공 시작]

카이사르는 불로뉴쉬르메르 항구에서 로마 제7군단과 제10군단을 싣고 브리튼섬으로 출항했습니다. 공성 병기 없이 서둘러 진행된 이 작전은 훗날 전략적 실수로 기록됩니다. 카이사르는 브리튼섬을 완전히 정복할 의도는 없었습니다.

카이사르는 오늘날의 불로뉴쉬르메르에 거주하였던 미로니족의 항구에서 로마 군단의 제7군단과 제10군단을 수송선 두 척에 나누어 싣고 재무관 휘하의 전함을 함께 브리튼섬으로 출발시켰습니다. 한편, 아마도 오늘날의 앙블레퇴즈 근처였을 다른 항구에서 출발한 18척의 수송선에는 기병과 말이 실렸습니다. 카이사르는 몹시 서둘렀고 항구에 수비대 하나만 남긴체 8월 23일 한밤중에 '3차 정찰'을 시작하였습니다. 서두른 나머지 공성 병기 없이 진행된 이 작전은 훗날 전략적 실수로 남게 됩니다. 카이사르는 이 작전으로 브리튼섬을 완전히 정복할 생각은 없었습니다.

[로마군의 월머 해안 상륙]

카이사르는 당초 도버 상륙을 시도했으나 브리튼인들의 방어로 월머 해안으로 상륙지를 변경했습니다. 로마군은 독수리 깃발 아래 상륙을 감행, 율리우스 카이사르는 사실상 최초로 군사를 이끌고 브리튼섬에 들어간 로마인이 되었습니다. 하지만 기병이 도착하지 못해 브리튼인 방어를 완전히 격퇴하지는 못했습니다.

카이사르는 당초 오늘날 도버에 해당하는 두브리스에 상륙하려고 하였는데, 볼루세누스가 이 곳이 상륙하기 알맞다고 보고했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브리튼인들 역시 이곳에 로마군이 상륙할 것을 대비하여 언덕과 도버 백악절벽 위에 방어 진지를 구축하고 있었기 때문에 재블린 공격을 피하기 위해선 다른 곳을 찾을 수 밖에 없었습니다. 카이사르는 '제9시'(오늘날 오후 3시)까지 해상에 닻을 내리고 기다렸다가 보급품을 실은 배들이 선단에 합류하자 7 마일 정도 떨어진 월머 해안에 상륙하였습니다. 이곳에서 율리우스 카이사르는 사실상 최초로 군사를 이끌고 브리튼섬에 들어간 로마인이 됩니다. 브리튼인들은 로마군의 상륙에 대응하여 기병과 전차를 동원하였고 로마의 함선들은 너무 많은 짐때문에 물 속 깊이 잠긴 상태여서 얕은 물가로 진입할 수 없었습니다. 병사들은 깊은 물에서 배에서 내려야 했고 연안에서 날아오는 공격을 막기 어려웠습니다. 그러나 카이사르는 독수리를 새긴 아퀼리페르를 앞세우고 상륙을 감행하였습니다. 로마군의 함선이 발리스타로 상륙을 저지하려는 브리튼인을 견제하는 사이 병사들은 해안에 교두보를 마련하였습니다. 바람이 좋지 않아 기병은 아직 도착하지 못하였고 카이사르는 브리튼인의 방어를 격퇴시킬 수 없었습니다. 그리하여 카이사르의 브리튼 침공은 자신만만한 그의 성격과 달리 '익숙한 성공'을 장식하지는 못했습니다.

[로마군의 초토화 작전 및 1차 침공 종료]

로마군과 친로마 브리튼인 코미우스 연합군은 브리튼인 거주지를 초토화하는 전투를 치렀습니다. 카이사르는 많은 포로를 잡았으나, 혹독한 겨울 날씨와 보급 문제로 인해 브리튼인들과 재협상하여 갈리아로 돌아갔습니다. 이 침공은 완전한 성공이라고 보기는 어렵지만, 갈리아 배후 안전 확보라는 소기의 목적은 달성했습니다.

폭풍이 지나가자 브리튼인들은 대열을 정비하고 로마군에 대한 공격에 나섰습니다. 한편 코미우스는 친로마 브리튼인을 규합하여 로마군과 함께 싸웠습니다. 로마군과 코미우스는 당시 로마군의 정책에 따라 인근 브리튼인 거주지를 초토화하였습니다. 전투를 치른 후 카이사르는 많은 포로를 인질로 잡았지만, 겨울철을 넘기며 전쟁을 계속할 여력은 없었습니다. 브리튼인들이 다시 한 번 협상을 위해 사절을 보내자 카이사르는 두 부족의 복속을 명분삼아 갈리아로 돌아갔습니다. 카이사르의 브리튼섬 침공은 갈리아 전쟁 기간 중에 배후의 안전을 확보하기 위한 전략의 일환이었고 영구적인 정복이나 브리튼의 복속을 기대한 것은 아니었습니다. 그런 점에서 볼 때 카이사르가 소기의 목적을 달성했다고 주장하는 점도 아주 일리가 없지는 않지만, 어느 면에서 보더라도 완전히 성공했다고 보기는 어렵습니다.

[카이사르의 2차 브리튼 침공 준비]

카이사르는 1차 침공의 실수를 되풀이하지 않기 위해 갈리아로 복귀하자마자 2차 침공을 준비했습니다. 다섯 군단과 2천 기병을 더 큰 규모로 편성하고 베네토족의 배를 활용하여 상륙에 용이하도록 준비했습니다.

카이사르는 갈리아로 복귀하자 마자 2차 침공을 준비하였습니다. 침공 준비는 해를 넘겨 기원전 54년 여름까지 이어졌습니다. 키케로는 당시 카이사르의 군영에서 복무하고 있던 친구 트레바티우스 테스타와 자신의 형제였던 퀸투스 툴리우스 키케로에게 보낸 편지에서 전차를 노획한 트레바티우스의 무공을 칭찬하고 퀸투스에게 브리튼섬에 대한 자세한 설명을 부탁하였습니다. 카이사르는 작년의 실수를 되풀이하지 않기 위해 다섯 군단 규모의 더 큰 군대를 모아 둘로 나누어 편성하고 2천의 기병을 보다 상륙에 용이한 베네토족의 배에 실어 수송하기로 하였습니다. 2차 침공의 출발 지로는 이티투스 포르투스가 선정되었습니다.

[2차 침공 중 폭풍으로 인한 로마군 함선 피해]

내륙 진격 중 또다시 폭풍이 몰아쳐 수송선 40여 척이 파손되었다는 보고가 도착했습니다. 카이사르는 급히 해안 교두보로 퇴각하여 10여 일간 함선 수리와 요새화에 매달렸습니다. 이는 작년과 같은 상황이 반복되어 카이사르 계획의 문제점을 보여주었습니다.

다음 날 아침 카이사르가 진군을 준비하는 사이 교두보의 퀸투스가 보내온 소식이 도착하였습니다. 또 다시 폭풍이 몰아쳐 수송선의 상당수가 닻을 잃고 서로 부딪혀 파손되었다는 보고였습니다. 퀸투스는 약 40척의 함선을 잃었다고 밝혔습니다. 로마군은 대서양과 영국해협에 대해 아는 바가 적었기 때문에 항해에 어려움을 겪긴 하였지만, 이 경우 작년과 같은 상황이 벌어진 것이어서 카이사르의 계획에 명백한 하자가 있었다고 할 수 있습니다. 카이사르는 급히 해안 교두보로 퇴각하여 함선의 수리를 지시하였습니다. 로마군은 대략 열흘 동안 밤낮을 쉬지 않고 함선 수리와 교두보 요새화에 매달려야 하였습니다.

[카이사르의 2차 브리튼 침공 상륙]

티투스 라비에누스를 갈리아에 남기고 카이사르는 800척 규모의 함선과 대규모 병력을 이끌고 두비우스 인근 해변에 상륙했습니다. 브리튼인들은 대규모 상륙군 위세에 눌려 즉각적인 반격을 하지 못했습니다.

티투스 라비에누스를 이티우스 포르투스의 수비 담당으로 남기고 카이사르는 1차 침공 당시 최적의 상륙지로 선정한 두비우스 인근 해변에 상륙하였습니다. 상륙에 동원한 배는 카이사르의 기록에 따르면 800여 척이나 되었는데, 대부분 인근 갈리아 지역의 상선을 징발한 것이었습니다. 카이사르는 브리튼인들이 상륙군 규모의 위세에 눌려 반격을 하지 못하였다고 기록하였지만, 브리튼인 입장에서는 방어군을 소집하기 위한 시간이 필요했기 때문일 수 있습니다.

[카이사르, 켄트 내륙 진격 및 브리튼인 격퇴]

카이사르는 상륙 후 야간 행군으로 켄트 내륙을 진격하여 스타우어강에서 브리튼인 군대와 대치했습니다. 브리튼인들은 공격에 나섰으나 패배하고 숲 속 요새로 후퇴했고, 로마군은 요새마저 공격하여 격퇴시킨 뒤 요새에 군영을 차렸습니다.

상륙 후 카이사르는 퀸투스 아트리우스에게 교두보 방어를 맡기고 즉시 야간 행군을 이끌어 12 마일가량 내륙으로 진군하였고 아마도 스타우어강으로 여겨지는 켄트의 강줄기를 사이에 두고 브리튼인 군대와 대치하였습니다. 브리튼인들은 로마군을 공격하였으나 패배하였고 숲 속으로 들어가 언덕 요새에 진지를 구축하였습니다. 그러나 로마군이 다시 진지를 공격하자 패배하여 흩어졌습니다. 당시 전투 지점은 기록된 바가 없어 정확히 알기 어렵습니다. 카이사르는 브리튼인의 언덕 요새에 군영을 차렸습니다.

[카시벨라우누스의 항복과 카이사르의 갈리아 귀환]

카시벨라우누스가 켄트의 왕들에게 협공을 제안했으나 실패로 돌아가자, 그는 항복 조건을 논의할 사절을 보냈습니다. 카시벨라우누스는 인질 제공, 연례 상납, 만두브라시우스 복위를 약속했고, 카이사르는 이를 수락하고 갈리아로 귀환했습니다. 이는 브리튼섬이 로마에 종속되는 계기가 되었지만, 완전한 정복은 아니었습니다.

카시벨라우누스는 상황을 바꾸기 위해 켄트에 있던 4 명의 왕에게 전갈을 보내 로마군을 협공하자고 제안하였습니다. 그러나 이 협공은 실패로 돌아갔고 카시벨라우누스는 항복 조건을 논의할 사절을 카이사르에게 보냈습니다. 코미우스의 중재로 카시벨라우누스는 인질 제공, 연례 상납, 그리고 트르노반트족의 만두브라시우스 복위를 약속하였고, 카이사르는 되도록 겨울이 지나기 전에 갈리아로 돌아가길 바라고 있었기 때문에 이와 같은 조건으로 항복을 수락하였습니다. 카이사르는 9월 26일 키케로에게 보낸 편지에서 브리튼 침공의 결과를 알려주면서 인질만을 사로잡고 전리품을 위한 약탈은 하지 않은 채 갈리아로 귀환한다고 밝혔습니다. 카이사르는 귀환하면서 병사를 남겨두지 않았고 이후 브리튼인 부족들이 로마에게 제대로 상납금을 주었는 지에 대해서는 알려진 바가 없습니다.

[카시벨라우누스 지휘 아래 브리튼족 연합군과 교전]

함선 수리 후 카이사르가 스타우어강을 다시 건너려 할 때, 템스강 북부 출신 카시벨라우누스가 브리튼 부족 연합군을 이끌고 방어에 나섰습니다. 브리튼 연합군은 로마군을 궁지로 몰아넣기도 했으나, 로마 기병대의 활약으로 공격이 막혔습니다.

다시 전열을 정비한 카이사르가 스타우어강을 건너려고 할 때에는 브리튼인 역시 많은 병력을 소집하여 방어 준비를 마친 뒤였습니다. 브리튼인의 전쟁사령관은 템스강 북부 출신의 카시벨라우누스였고 당시 브리튼 부족 대부분을 모아 지휘하였습니다. 그는 당시 친로마 입장을 취했던 트리노반트족의 왕 만두브라시우스를 몰아내고 로마와 대항하도록 하였습니다. 브리튼인 연합 부대는 몇 차례의 전투에서 로마군을 궁지로 몰아넣었습니다. 호민관이었던 퀸투스 라베리우스 듀루스가 전사하였고, 가이우스 트레보니우스 휘하의 군단이 곤경에 처했습니다. 그러나 로마의 기병대가 브리튼인의 공격을 막았습니다.

[카시벨라우누스 유격전 전환 및 브리튼 부족 항복]

카시벨라우누스는 정규 회전 대신 4천 대의 전차를 활용한 유격전으로 전략을 바꾸었습니다. 로마군은 템스강을 넘어 카시벨라우누스의 영토에 진입했고, 트리노반트족을 비롯한 다섯 부족이 카이사르에게 항복하여 만두브라시우스의 복위를 요청했습니다. 결국 카시벨라우누스는 언덕 요새로 몰렸습니다.

카시벨라우누스는 정규 회전으로 로마군의 침공을 막을 수 없다고 판단하자 4천여 대의 전차를 분산시켜 유격전으로 전략을 바꾸었습니다. 한편 카이사르는 템스강에 도착하여 브리튼의 방어 상태를 살폈습니다. 템스강 양안은 모두 요새화되어 있었고 강 바닥에도 방어물이 세워져 있었습니다. 템스강변에서 전투가 어떻게 진행되었는 지는 기록이 없으나 2세기 무렵 작성된 기록에는 카이사르가 코끼리 궁병대를 이용하였다는 서술이 있습니다. 로마군은 템스강을 넘어 카시벨라우누스의 영토에 진입하였습니다. 카이사르가 브리튼섬에서 가장 강력한 부족이라 평가한 트리노반트족은 사절을 보내 자신들이 로마에 대항할 의사가 없지만 카시벨라우누스의 강압에 못이겨 참전하였노라고 해명하였습니다. 이들은 쫓겨난 왕인 만두브라시우스를 복위 시켜준다면 로마편에 설 것이며 인질도 제공하겠노라고 약속하였습니다. 트리노반트족 외에 다섯 부족이 같은 약속을 해오며 카이사르에게 항복하였고 이러한 분위기에 힘입어 카이사르는 오늘날 위템스테드에 있던 언덕 요새로 카시벨라우누스를 몰아넣을 수 있었습니다.

[카이사르, 키케로에게 편지 발송]

카이사르는 교두보에서 키케로에게 편지를 보냈습니다. 이 편지는 딸 줄리아의 사망 소식에 대한 답장이었습니다.

9월 1일 카이사르는 교두보에서 키케로에게 편지를 썼습니다. 딸 줄리아의 사망 소식에 답장을 보내야 했기 때문입니다.

[카이사르, 키케로에게 2차 침공 결과 보고]

카이사르는 키케로에게 브리튼 침공 결과를 담은 편지를 보냈습니다. 편지에서 인질만을 사로잡고 전리품 약탈 없이 갈리아로 귀환했다고 밝혔습니다.

카이사르는 9월 26일 키케로에게 보낸 편지에서 브리튼 침공의 결과를 알려주면서 인질만을 사로잡고 전리품을 위한 약탈은 하지 않은 채 갈리아로 귀환한다고 밝혔습니다.

[코미우스의 브리튼섬 이주 및 반로마 활동]

코미우스는 훗날 반로마 세력에 합류하여 갈리아에서 로마군과 유격전을 벌였습니다. 패배 후 브리튼섬으로 건너가 정착했으며, 이는 로마가 브리튼섬 남부를 장악할 때까지 그의 왕국이 유지되는 배경이 되었습니다.

코미우스는 훗날 진영을 바꾸어 반로마 세력에 합류하였습니다. 코미우스는 고향이었던 갈리아에서 세력을 규합하여 로마군을 상대로 여러 차례 유격전을 펼쳤으나 패배하였고 결국 브리튼섬으로 건너가 정착하였습니다. 기원후 1 세기에 쓰여진 섹스투스 율리우스 프론티누스의 《전략》(Strategemata)은 코미우스가 추종자들을 이끌고 브리튼섬으로 도망쳤으며 카이사르가 추격하였으나 마침 영국해협이 썰물 때여서 코미우스를 따라잡을 수 없었다고 서술하고 있습니다. 고고학자 존 크라이튼은 아마도 안토니우스와의 화친 조건 가운데 하나에 따라 코미우스가 브리튼섬으로 이주하였을 것이라고 추측합니다. 프론티누스의 서술은 그가 브리트니아의 총독으로 부임하였을 때 현지에서 전해들은 이야기여서 부정확할 것이라는 것입니다. 크라이튼은 브리튼 이주 후 코미우스가 카이사르에 의해 다시 왕으로 임명되었고 폼페이우스와 카이사르가 벌인 내전에서 카이사르를 지지하여 관계를 회복하였다고 말했습니다. 코미우스의 왕국은 로마가 브리튼섬 남부를 장악하여 속주로 삼을 때까지 유지되었습니다.

비교 연혁 검색
search
키워드 중복 확인
close
댓글 게시판
이전 다음 위로 이동 아래로 이동