러시아 혁명 (1905년)
혁명, 사회 운동, 역사
최근 수정 시각 : 2025-09-02- 03:24:36
- 러시아 제국 1905년 피의 일요일로 시작된 대규모 혁명. - 민생 개선 반독재를 목표로 전국 총파업과 무장 봉기까지 확산. - 10월 선언으로 헌법 제정과 두마 설치가 약속됐으나 스톨리핀의 강경 진압으로 1907년 종식. - 이 경험은 1917년 2월 혁명의 중요한 발판이 되었다.
1861
[농노 해방 불만 고조]
알렉산드르 2세의 농노 해방령이 발표되었으나, 귀족에게 유리하고 인민의 자유는 불완전하여 정치적 불만이 점차 커졌다.
이는 혁명적 사상이 싹트는 배경이 되었다.
농노 해방은 다년간 '배상금'과 법률상 소소한 자유를 더 위험하게 만들었으며, 인민의 권리는 계급에 따라 여전히 엄격하게 규정되어 있었다. 이는 러시아가 봉건 전제 정치에서 자본주의로 전환하는 과정에서 발생한 불완전한 개혁으로, 정치 체제는 변화하지 않아 불만을 쌓이게 했다.
1881
[차르 알렉산드르 2세 암살]
'인민의 의지' 분파가 던진 폭탄에 의해 알렉산드르 2세가 암살되는 충격적인 사건이 발생했다.
이후 보수적인 알렉산드르 3세가 즉위하며 혁명 운동에 대한 강경한 탄압이 시작되었다.
알렉산드르 2세 암살 이후, 대보수주의자 콘스탄틴 포베도노스체프의 영향을 깊이 받은 알렉산드르 3세가 차르로 즉위했다. 그의 통치 하에 러시아의 정치 경찰(오흐라나)은 혁명 및 민주화 운동을 억압하며 혁명 조직원들을 투옥하거나 추방했다.
1884
[최초 마르크스주의 단체]
러시아 이주민들을 중심으로 서구 마르크스주의 사상을 접한 러시아 최초의 마르크스주의 단체가 결성되었다.
이는 향후 러시아 사회민주노동당 창당의 기반을 다졌다.
서구에 이주한 러시아인 사상가들이 마르크스주의를 접하며 1884년에 최초의 러시아 마르크스주의 단체를 결성했으나, 1898년까지는 소규모 집단에 불과했다.
1892
[비테 체제 경제 개혁 시작]
세르게이 비테가 재무장관으로 취임하며 러시아 경제의 대대적인 근대화를 추진했다.
그는 재정 적자 해결을 위해 외국인 투자를 유치하고 경제를 끌어올려 국가 수익을 늘리려 했다.
비테는 1897년 루블화를 금본위제로 전환하는 등 경제 성장을 도모했으나, 이 성장은 모스크바, 상트페테르부르크 등 일부 지역에만 집중되었으며 외국인 투자가 약 3분의 1을 차지할 정도로 활발했다.
1894
[니콜라이 2세 즉위]
니콜라이 2세가 차르로 즉위했으나, 선대 알렉산드르 3세와 마찬가지로 정치 개혁을 일체 인정하지 않아 인민의 불만을 더욱 키웠다.
1898
[사회민주노동당 결성]
마르크스주의 사상을 기반으로 러시아 사회민주노동당이 결성되었다.
이 당은 1903년 멘셰비키와 볼셰비키로 분열되며 러시아 혁명의 주요 세력으로 성장한다.
1900
[사회혁명당 창설]
하르키우에서 사회혁명당이 창설되었다.
이 당의 '전투조직'은 1905년 이후 많은 유명 정치인을 암살하며 혁명 운동을 주도했다.
사회혁명당의 '전투조직'은 1902년 내무장관 드미트리 시퍄긴, 1904년 후임 뱌체슬라프 플레붸 등을 암살했다.
1902
[레닌의 혁명 이론 제시]
블라디미르 레닌이 혁명의 지도적 계급에 대한 자신의 사상을 담은 책 '무엇을 할 것인가?'를 출판하며 러시아 혁명 이론의 중요한 전환점을 마련했다.
1903
[볼셰비키-멘셰비키 분열]
러시아 사회민주노동당이 멘셰비키와 볼셰비키로 분열되었다.
이 분열은 향후 러시아 혁명의 전개와 결과에 지대한 영향을 미치게 된다.
1904
[핀란드 총독 암살]
핀란드 총독 니콜라이 보브리코프가 암살당하며 핀란드 내 민족주의와 제정 반발이 극에 달했음을 보여주었다.
이 사건은 1899년부터 시작된 러시아화 정책에 대한 반발의 정점이었다.
1905
[리가 시위대 무차별 학살]
라트비아 리가에서 시위자 80명이 군대에 의해 살해당했다.
이는 '피의 일요일' 사건 직전, 러시아 제국 전역에 확산되던 불안정한 분위기를 보여주는 잔혹한 사건이었다.
며칠 후 바르샤바에서도 100명이 넘는 파업 참가자들이 길거리에서 사살되었다.
[피의 일요일 학살]
상트페테르부르크에서 차르에게 탄원하려던 비무장 시위대가 궁정 근위병의 발포로 1,000명에 달하는 사상자가 발생했다.
이 잔혹한 사건은 1905년 러시아 혁명의 직접적인 도화선이 되었다.
당시 상트페테르부르크를 떠나 있던 차르가 모르는 곳에서 동궁에 군대가 배치되었다. 사망자 수에 대해서는 다양한 추정이 있지만, 일반적으로 1,000명 안팎이 사망하거나 부상했다고 추정되었다. 이 사건은 러시아의 많은 단체가 저항 운동을 시작하는 계기가 되었다.
[모스크바 총독 암살]
차르의 삼촌이자 모스크바 총독인 세르게이 대공이 암살되었다.
이 사건은 황제에게 큰 충격을 주어 부분적인 양보를 고려하게 만들었다.
[두마 창설 제안 수락]
황제가 자신의 자문에 응할 '두마'(의회) 창설에 동의했다.
이는 혁명 진압을 위한 양보였으나, 권한이 미약하고 선거권에 제한이 있어 오히려 소요를 격화시키는 결과를 낳았다.
[불리긴 선언 발표]
황제가 '불리긴 선언'을 발표하며 '황제를 보필하는' 의회 창설, 종교의 자유, 폴란드 농민의 변제금 감액 등을 인정했다.
하지만 질서 회복에는 실패했다.
[학생 시위 확산]
3월경 학생들이 파업에 동조하며 고등교육 기관들이 모두 강제로 연내 폐쇄되었다.
이는 저항 운동이 사회 전반으로 확산되고 있음을 보여주는 사례였다.
[파업 운동 전국 확산]
'피의 일요일' 이후 시작된 파업은 2월 캅카스에 이어 4월경에는 우랄 지방까지 퍼져 러시아 전역에서 들불처럼 일어났다.
[농민연합 결성 움직임]
농촌의 소요에 급진 정당이 침투하며 전국 러시아 농민연합을 결성하고 조직적인 농민 활동을 펼치려는 움직임이 있었다.
협의회는 지역 대표로 구성되었고 사회혁명당과 긴밀한 관계였지만 현실적이고 일관된 요구를 내놓지는 못했다.
[전국 총파업 돌입]
철도 노동자들의 파업이 시작되자마자 상트페테르부르크와 모스크바의 총파업으로 급속히 발전했다.
이는 혁명 운동의 최고조를 알리는 중요한 사건이었다.
단기간이었지만 상트페테르부르크 소비에트라는 200개가 넘는 공장 파업을 조직하는 노동자 협의회(대부분 멘셰비키)가 결성되었다.
[역사상 최대 규모 파업]
200만 명에 이르는 노동자들이 파업에 참여하는 세계 역사상 유례없는 대규모 시위를 벌였다.
이는 차르 정부에 엄청난 압박을 가했다.
[10월 선언 초안 상정]
세르게이 비테와 알렉시스 오보렌스키가 황제에게 '10월 선언' 초안을 제출했다.
이 선언은 기본적인 민권 승인, 정당 결성 허가, 보통선거 지향 선거권 확대를 다루고 있었다.
[10월 선언 공포]
총파업과 러일전쟁 패배로 군대 부족 상황에 몰린 황제 니콜라이 2세가 마침내 '10월 선언'에 서명했다.
이로써 기본적인 민권과 입헌 군주제로의 전환이 약속되었다.
황제는 서명하면서 “이번 배신행위는 부끄럽고 아픈 것 같다”고 심경을 토로했다. 선언이 발표되자 모든 주요 도시에서 자발적인 시위가 일어났고, 파업도 공식적으로 종료되거나 빠르게 소멸했다. 사면도 이루어졌다. 하지만 동시에 반유대주의 공격 등 새로운 잔인한 반동도 나타났다.
[새로운 선거법 공포]
25세 이상 시민을 네 계층으로 나누어 선거권을 인정하는 선거법이 공포되었다.
이는 두마 창설을 위한 실질적인 조치였다.
[모스크바 총파업 강행]
모스크바에서 볼셰비키가 노동자들을 협박과 폭력으로 총파업을 강행했다.
이는 10월 선언 이후에도 혁명 세력의 활동이 지속되고 있음을 보여주었다.
파업은 12월 7일부터 정부 병력 투입으로 시가전으로 발전했다.
[모스크바 시위 무력 진압]
세메노프스키 연대가 대포를 사용하여 노동자들이 점거한 지역을 포격, 모스크바 시위를 잔혹하게 진압했다.
약 1,000명이 사망하고 도시는 폐허가 되었으며 볼셰비키는 투항했다.
그 보복으로 수없이 많은 사람들이 구타당하고 살해되었다.
1906
['스톨리핀의 넥타이' 공포]
표트르 스톨리핀 암살 미수 사건 이후, 테러리스트에 대한 공개 재판이 시작되어 8개월 이상에 걸쳐 1,000명이 넘는 사람들이 교수형에 처해졌다.
교수대는 '스톨리핀의 넥타이'라는 별칭으로 불리며 공포의 상징이 되었다.
[최초의 두마 선거]
러시아 역사상 최초로 두마 선거가 실시되었다.
카데트가 170석, 톨루도비키가 90석을 차지하는 등 다양한 정치 세력이 참여했다.
사회주의자, 에스 엘, 볼셰비키는 기권했다.
[기본법으로 차르 권력 강화]
정부가 '기본법'을 공포하여 새로운 질서에 제한을 가했다.
차르는 전제 군주로서 행정, 외교, 교회, 군사를 완전히 지배하는 권한을 재확인했고, 두마의 권한은 차르가 임명하는 평의회보다 하위로 제한되었다.
두마는 법안을 승인해야 했고, 평의회와 차르가 법이었으며, '예외적으로' 정부는 두마에서 심의할 수 있었다.
[비테 총리 사임]
러시아 재정 구조 조정을 위해 약 9억 루블의 차입 협상을 완료한 세르게이 비테가 황제의 '불신'을 이유로 사임했다.
그의 후임으로는 황제의 하수인 이반 고레미킨이 임명되었다.
비테는 이후 '러시아 제국 말기의 가장 뛰어난 정치인'으로 알려졌다.
[최초의 두마 해산]
자유화 요구가 높아진 운동가들로 인해 황제의 명령으로 최초의 두마가 해산되었다.
민중의 대대적인 반응은 없었으나, 이후 테러리스트에 대한 탄압이 강화되었다.
1907
[1905년 혁명 종식]
표트르 스톨리핀 총리의 쿠데타로 1905년 러시아 혁명이 공식적으로 종식되었다.
이로써 혁명 단체는 붕괴되고 지도자들은 수감되거나 망명하게 되었다.
본질적으로 러시아는 여전히 황제가 권력을 쥐고 귀족이 부와 토지를 소유했지만, 두마의 창설과 탄압은 혁명 단체를 일시적으로 약화시켰다. 이 경험은 제1차 세계 대전이 일어날 때까지 과격파 활동으로 이어졌다.
1908
[농촌 소요 사태 진정]
1905년 사건 이후 재발했던 농촌의 소요 사태가 1908년에 최종적으로 종식되었다.
정부의 토지 재분배 지원이 소요를 잠재우는 데 영향을 미쳤다.
정부가 양보한 토지 재분배 지원이 농민들이 토지 관리인과 '농민이 아닌' 지주를 내쫓고 습격하는 행동으로 이어졌으나, 결국 강력히 억압되어 진정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