알렉산드로스 대왕의 인도 원정
전쟁, 정복 활동, 군사사, 고대 그리스, 인도 역사
최근 수정 시각 : 2026-01-28- 13:54:35
알렉산드로스 대왕의 인도 원정은 기원전 327년부터 325년까지 이어진 인류 역사상 가장 대담한 군사적 모험 중 하나입니다. 페르시아 제국을 멸망시킨 알렉산드로스는 세상의 끝에 도달하겠다는 야망으로 힌두쿠시 산맥을 넘어 인도 서북부로 진격했습니다. 히다스페스 전투에서 코끼리 부대를 앞세운 포루스 왕을 꺾으며 절정에 달했으나, 히파시스강에서 지친 병사들의 항명으로 동진을 멈추고 인더스강을 따라 회군했습니다. 이 원정은 그리스와 인도 문명의 직접적인 조우를 이끌어 헬레니즘 문화와 간다라 미술의 기틀을 마련했으며, 고대 세계의 지리적 한계를 확장한 역사적 변곡점이 되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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격렬한 공성전 도중 알렉산드로스는 어깨에 화살을 맞아 부상을 당했으나 끝내 승리했습니다.
그리스군은 보복으로 수많은 원주민을 학살하거나 노예로 삼아 지역의 저항 의지를 꺾으려 했습니다.
이 전투를 통해 산악 지대의 험난함과 인도 부족들의 강인한 저항력을 처음으로 실감하게 되었습니다.
도망친 부족들은 도시를 파괴했으나 알렉산드로스는 크라테로스에게 도시의 재건을 명령했습니다.
이 지역의 풍부한 가축들을 노획하여 군의 식량을 보충하고 인근 부족들을 감시하는 기지로 삼았습니다.
산악 지대 통제를 위해 주둔군을 남기고 원정군은 다시 동쪽으로 진군을 계속했습니다.
헤파이스티온과 페르디카스는 주력 부대를 이끌고 인더스강으로 향하는 평탄한 길을 택했습니다.
알렉산드로스 본인은 산악 부족들을 제압하기 위해 험준한 북부 산악 지대로 군을 이끌었습니다.
이 전략적 분할은 보급로를 확보하고 인도 입구의 저항 세력을 동시에 소탕하기 위한 조치였습니다.
마사가는 견고한 성벽과 수많은 용병 부대를 보유한 요충지로 함락이 쉽지 않았습니다.
알렉산드로스는 공성 탑과 발리스타를 동원해 성벽을 압박하며 현대적인 공성술의 정수를 보여주었습니다.
이 요새의 함락 여부는 인더스강으로 가는 길목을 확보하는 데 있어 결정적인 변수였습니다.
마사가가 함락된 후 항복한 인도 용병들은 안전한 퇴각을 약속받았으나 알렉산드로스는 변심했습니다.
그는 용병들이 다시 자신에게 대항할 것을 우려해 밤중에 그들을 기습하여 모두 살해했습니다.
이 사건은 알렉산드로스의 원정 중 가장 도덕적 논란이 많은 잔혹한 행위 중 하나로 기록되었습니다.
탁실레스는 인근의 경쟁자인 포루스 왕을 견제하기 위해 알렉산드로스에게 협력을 약속했습니다.
그리스군은 탁실라에서 휴식을 취하며 인도의 독특한 종교와 철학, 풍습을 관찰할 기회를 가졌습니다.
알렉산드로스는 탁실레스에게 대가로 영토를 확장해주며 우호적인 관계를 공고히 했습니다.
포루스는 조공을 바치는 대신 강가에서 무기를 들고 만나자며 당당하게 도전장을 보냈습니다.
그는 대규모 코끼리 부대와 전차, 정예 보병을 결집하여 히다스페스강 건너편에 진을 쳤습니다.
이 소식은 알렉산드로스를 자극했으며 인도 원정 중 가장 큰 규모의 전면전을 예고했습니다.
승리의 도시라는 뜻의 니카이아와 죽은 애마의 이름을 딴 부케팔라를 각각 세웠습니다.
부케팔로스는 히다스페스 전투 이후 혹은 도중에 노령과 부상으로 사망한 것으로 전해집니다.
이 도시들은 그리스 문화의 전초 기지이자 회군 시 병사들의 안식처로 설계되었습니다.
저항 없이 항복한 부족의 영토를 포루스의 지배하에 두어 관리하도록 조치했습니다.
알렉산드로스는 정복지의 행정을 포루스에게 맡겨 자신의 군사적 부담을 덜어냈습니다.
원정군은 인도의 더 깊은 곳을 향해 끊임없이 동쪽으로 나아갔습니다.
여름철 장마로 강물이 범람하여 도하 작업은 그 어느 때보다 위험하고 고통스러웠습니다.
알렉산드로스는 직접 도하를 지휘하며 병사들의 사기를 북돋웠으나 자연의 위력 앞에 고전했습니다.
강을 건넌 후에는 히드라오테스강을 향해 진군하며 끊임없는 소규모 전투를 치렀습니다.
바지라의 주민들은 산속의 요새인 아오르노스로 도망쳤고 남겨진 도시들은 그리스군에 점령되었습니다.
알렉산드로스는 이 도시들을 요새화하여 배후의 안전을 도모하고 보급로를 안정시켰습니다.
이제 원정군의 시선은 전설적인 난공불락의 요새 아오르노스로 향하게 되었습니다.
아오르노스는 매우 가파른 절벽 위에 위치하여 정면 돌파가 사실상 불가능한 지형이었습니다.
알렉산드로스는 심리적인 압박과 함께 병사들을 독려해 이 전설적인 요새를 정복하기로 결심했습니다.
이는 단순한 군사적 목표를 넘어 신화적 영웅을 뛰어넘겠다는 그의 의지가 반영된 도전이었습니다.
병사들은 인근 산의 나무들을 벌채해 골짜기를 메우며 인위적인 진입로를 만들어냈습니다.
이 상상을 초월하는 공사는 요새 안의 수비군들에게 거대한 공포와 경이로움을 안겨주었습니다.
알렉산드로스는 직접 둑 쌓기 작업의 선두에 서서 병사들의 사기를 진작시켰습니다.
완성된 둑을 통해 그리스군이 요새 턱밑까지 접근하자 수비군은 항복을 제안하고 도주했습니다.
알렉산드로스는 도망치는 적들을 추격하여 섬멸하고 요새 정상에서 승리의 제사를 올렸습니다.
이 승리로 힌두쿠시 산맥 동쪽의 모든 산악 세력이 그의 권위 앞에 굴복하게 되었습니다.
헤파이스티온이 미리 제작해 둔 부교를 통해 대군이 무사히 강을 건너 동쪽으로 진군했습니다.
강 건너편에서는 탁실라의 통치자 옴피스가 대규모 예물과 함께 원정군을 맞이했습니다.
이제 알렉산드로스의 앞에는 인도의 펀자브 지방과 강력한 군주 포루스가 기다리고 있었습니다.
강 건너편에는 포루스의 코끼리 부대가 배치되어 있어 정면 도하가 매우 위험한 상황이었습니다.
알렉산드로스는 매일 밤 가짜 도하 작전을 펼쳐 적군을 지치게 만드는 교란 작전을 수행했습니다.
동시에 그는 비바람이 몰아치는 틈을 타 은밀하게 강을 건널 수 있는 지점을 물색했습니다.
포루스의 감시를 피해 본진에서 약 27km 떨어진 지점에서 비밀리에 도하를 완료했습니다.
강 중간의 섬들을 이용해 기습적인 도하에 성공한 후 곧바로 포루스의 측면을 압박했습니다.
이 기동은 히다스페스 전투의 승패를 결정지은 알렉산드로스의 천재적인 군사 행동이었습니다.
포루스는 아들이 이끄는 부대를 먼저 보냈으나 패배하자 코끼리 200마리를 앞세워 직접 나섰습니다.
그리스 보병대는 코끼리의 돌진에 당황했으나 긴 창과 도끼로 코끼리의 발과 코를 공격했습니다.
광분한 코끼리들이 아군과 적군을 가리지 않고 짓밟으면서 전장은 아수라장으로 변했습니다.
왕답게 대접해달라는 포루스의 말에 감명받은 알렉산드로스는 그를 사면하고 왕위를 유지해 주었습니다.
오히려 포루스에게 더 넓은 영토를 맡기며 그를 인도 동부 통치를 위한 충실한 동맹자로 삼았습니다.
이 관대한 조치는 피정복지 인심을 얻고 인도 원정을 지속하기 위한 고도의 정치적 계산이었습니다.
카타이오이 부족은 도시 주변에 전차 벽을 쌓고 맹렬히 저항했으나 그리스의 파랑크스를 막지 못했습니다.
알렉산드로스는 본보기로 도시를 파괴하고 17,000명의 주민을 살해하며 잔혹함을 드러냈습니다.
이 소식은 주변 부족들에게 공포를 안겼으며 많은 이가 정글 속으로 도망치게 했습니다.
강 너머에는 갠지스강과 막강한 난다 제국이 있다는 소문이 돌기 시작했습니다.
병사들은 끝도 없이 이어지는 원정과 거대한 코끼리 부대와의 재대결 가능성에 두려움을 느꼈습니다.
이 지점은 그리스 원정군이 동쪽으로 가장 멀리 진출한 역사적인 한계선이 되었습니다.
코에누스 장군이 병사들을 대변하여 고향으로 돌아가고 싶다는 간절한 뜻을 전했습니다.
알렉산드로스는 분노하며 막사에 은신했으나 병사들의 완강한 태도에 결국 굴복했습니다.
이 사건은 무적의 정복자 알렉산드로스가 자신의 군대에게 패배한 유일한 순간이었습니다.
그리스 신들에게 감사를 표하는 이 제단들은 제국의 동쪽 끝을 표시하는 경계석 역할을 했습니다.
알렉산드로스는 자신의 키보다 훨씬 큰 갑옷과 침대를 남겨 후세에 거인족의 땅으로 기억되게 하려 했습니다.
이제 원정군의 목표는 정복이 아닌 무사히 고향으로 돌아가는 것으로 바뀌었습니다.
지방 부족들로부터 징발한 재료와 기술을 동원해 약 800~1,000척의 배를 건조했습니다.
알렉산드로스는 배를 타고 이동하고, 나머지 군대는 강 양안을 따라 행군하는 방식을 택했습니다.
이 해상 원정의 지휘는 네아르코스에게 맡겨졌으며 본격적인 남하가 시작되었습니다.
알렉산드로스는 배 위에서 제물을 바치며 인더스강의 신들에게 안전한 항해를 기원했습니다.
강변을 따라 행군하는 군대는 인근 부족들을 복속시키며 진격 속도를 조절했습니다.
이 장엄한 광경은 강 주변의 부족들에게 그리스의 위력을 다시금 각인시켰습니다.
말리 부족은 물이 없는 사막 지대에 의지해 저항했으나 알렉산드로스의 전격전을 예상치 못했습니다.
그리스군은 밤낮없이 진군하여 말리인들의 예상을 깨고 그들의 도시들을 기습했습니다.
회군 길임에도 불구하고 알렉산드로스는 여전히 가혹하고 철저한 군사 행동을 유지했습니다.
사다리가 부족하자 알렉산드로스는 직접 성벽 위로 올라가 적진 한복판으로 뛰어들었습니다.
그는 가슴에 화살을 맞고 폐가 관통되는 중상을 입었으나 부하들이 목숨을 걸고 그를 구출했습니다.
왕의 부상에 분노한 그리스군은 성 안의 모든 남녀노소를 대학살하는 잔혹한 보복을 가했습니다.
병사들의 동요를 막기 위해 알렉산드로스는 상처가 아물기도 전에 배에 올라 모습을 드러냈습니다.
그가 손을 들어 건재함을 알리자 병사들은 환호하며 울음을 터뜨렸습니다.
이 사건은 알렉산드로스가 원정군 내에서 얼마나 절대적인 존재였는지를 다시금 확인시켜주었습니다.
이곳은 교통의 요지로 판단되어 함대 수리소와 거대한 창고들이 세워졌습니다.
알렉산드로스는 이곳에 주둔군을 남겨 남부 인도와 무역로를 통제하게 했습니다.
원정군은 계속해서 남하하며 인더스강 델타 지역을 향해 나아갔습니다.
알렉산드로스는 직접 강 하구까지 배를 타고 나가 인도의 남쪽 바다를 관찰했습니다.
조수 간만의 차이를 처음 경험한 그리스인들은 갑작스러운 수위 변화에 크게 당황했습니다.
그는 이곳에 거대한 항구와 요새를 건설하여 미래의 해상 무역 거점으로 삼았습니다.
함대는 네아르코스의 지휘하에 해안선을 따라 항해하며 바닷길을 개척하도록 했습니다.
알렉산드로스는 육로를 통해 함대의 보급품을 마련해주려 했으나 사막의 험난함은 예상 밖이었습니다.
약 2년여에 걸친 인도의 정복과 탐험이 공식적으로 종료되는 순간이었습니다.
뜨거운 열기와 식수 부족으로 인해 히다스페스 전투보다 더 많은 인명 피해가 발생했습니다.
알렉산드로스는 자신도 물을 마시지 않고 병사들과 고통을 함께하며 리더십을 발휘했습니다.
이 사막 횡단은 인도 원정의 마지막 고난이자 원정군에게 가장 뼈아픈 손실을 안긴 행군이었습니다.
죽음의 사막을 벗어난 병사들은 축제를 벌이며 자신들의 생환을 자축했습니다.
얼마 후 해안을 따라 항해하던 네아르코스의 함대와도 재회하여 서로의 안사를 확인했습니다.
이제 원정군은 페르시아의 심장부인 수사와 바빌론을 향해 평탄한 길을 나섰습니다.
알렉산드로스 자신을 포함하여 수천 명의 그리스 장병들이 페르시아 여인들과 혼인했습니다.
인도 원정 중 얻은 지식과 경험을 바탕으로 세계 제국의 기틀을 공고히 하려 했습니다.
그는 원정의 고통을 잊게 하려 병사들의 모든 빚을 탕감해주는 파격적인 포상을 내렸습니다.
인도 원정에서 입은 가슴 부상과 누적된 피로가 그의 건강을 심각하게 해쳤던 것으로 보입니다.
그의 죽음과 함께 그가 인도에 남긴 통치 체제는 급격히 흔들리기 시작했습니다.
알렉산드로스의 갑작스러운 서거는 거대 제국이 조각나고 헬레니즘 시대가 열리는 계기가 되었습니다.
그는 알렉산드로스가 남긴 그리스 주둔군들을 차례로 격파하며 인도를 하나로 통합했습니다.
그리스군의 전술과 조직력을 목격한 경험이 찬드라굽타의 강력한 군대 육성에 큰 영감을 주었습니다.
아시아 최초의 통일 제국인 모리야 제국은 알렉산드로스 원정의 부산물로 탄생한 결과였습니다.
셀레우코스는 500마리의 코끼리를 받는 대가로 인더스강 서쪽 영토를 찬드라굽타에게 양도했습니다.
이 협정을 통해 그리스와 인도 사이의 공식적인 외교 관계와 문화 교류가 정착되었습니다.
알렉산드로스가 무력으로 열어놓은 길은 이제 평화로운 교역의 통로가 되었습니다.
BC 2C
알렉산드로스가 뿌린 그리스 문화의 씨앗은 이 왕국을 통해 약 200년간 인도 땅에서 꽃피웠습니다.
그리스어와 아소카 문자가 새겨진 동전이 발행되었으며 두 문명의 융합이 절정에 달했습니다.
이는 서구와 동양 문명의 가장 성공적인 결합 사례 중 하나로 역사에 기록되었습니다.
BC 1C
그리스 신상을 닮은 불상들이 제작되기 시작했으며 이는 동양 불교 예술의 근간이 되었습니다.
알렉산드로스의 원정이 없었다면 탄생하지 않았을 예술적 융합의 결정체입니다.
이 양식은 훗날 비단길을 따라 중국과 한국, 일본까지 전해지는 긴 여정을 시작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