피렌체 공화국

도시국가, 공화국, 르네상스, 중세, 이탈리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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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근 수정 시각 : 2025-09-02- 03:21:4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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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탈리아 토스카나의 르네상스 발원지이자 격동의 도시국가. 1115년 건국 후 메디치 가문의 흥망과 구엘프-기벨린 갈등 속에서도 번영했습니다. 세계 최초 플로린 금화 발행으로 금융을 선도하고 브루넬레스키 돔 같은 위대한 예술의 정점을 보여주며 유럽에 큰 영향을 미쳤습니다. 잦은 정치적 격변과 흑사병을 겪었으며 1533년 공국으로 전환되며 막을 내렸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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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피렌체 도시 건설]

위대한 로마의 영웅, 율리우스 카이사르가 피렌체라는 도시를 건설했습니다.

훗날 위대한 공화국이 탄생할 기반이 되었습니다.

1115

[피렌체 공화국 건국]

미망인 토스카나의 마틸데 죽음 이후, 피렌체 시민들이 변경백에 맞서 코뮌을 형성하며 공화국을 세웠습니다.

시뇨리아라는 의회가 두 달마다 길드 일원들에 의해 선출된 '정의의 곤팔로니에레'가 도시를 통치하는 독특한 체제였습니다.

1138

[공화국 공식 첫 언급]

피렌체 공화국이 바이에른 공작 하인리히 10세에 대항한 동맹에서 처음으로 공식적으로 언급되었습니다.

명목상 신성 로마 제국의 일부였으나, 독립적인 움직임을 보이기 시작했죠.

1189

[제국 황제의 침공]

도시가 번영하던 시기, 신성 로마 제국의 프리드리히 1세 황제가 이탈리아를 침공하며 피렌체의 독립적 움직임에 제동을 걸었습니다.

토스카나 후작이 피렌체 일대를 재획득하며 잠시 주권을 잃었습니다.

1197

[독립 재주장]

신성 로마 제국 황제 하인리히 6세가 사망하자, 피렌체 시민들은 이 기회를 놓치지 않고 다시 한번 독립을 강력하게 주장했습니다.

자주적인 도시국가로 나아가려는 열망이 뜨거웠습니다.

1216

[구엘프-기벨린 전쟁 발발]

피렌체를 뒤흔든 두 세력, 교황 지지파인 구엘프와 황제 지지파인 기벨린이 전쟁을 시작하며 평화는 깨졌습니다.

귀족은 기벨린, 민중은 구엘프를 지지하며 도시가 양분되었습니다.

1252

[구엘프 집권 및 플로린 발행]

구엘프 세력이 기벨린을 밀어내고 '프리미 포폴로' 정부를 세웠습니다.

이때 세계 최초로 금의 함량이 믿을 수 있는 새로운 금화 '플로린'을 발행하며 유럽 경제의 중심으로 우뚝 섰습니다.

플로린은 곧 국제 통화로 자리 잡았습니다.

1260

[몬타페르티 대패와 기벨린 복귀]

몬타페르티 전투에서 피렌체가 파멸적인 대패를 겪으며 구엘프 세력은 권력을 잃었습니다.

기벨린 파가 다시 집권하며 이전의 모든 발전을 무효화하고 수백 채의 탑과 주택, 궁전들을 철거하는 폭거를 저질렀습니다.

[교황 중재, 구엘프 복권]

허약한 기벨린 지배권은 오래가지 못했습니다.

교황 클레멘스 4세가 구엘프 세력을 지지하며 중재에 나섰고, 예상대로 구엘프 세력이 다시 권력을 회복했습니다.

피렌체의 정세는 여전히 불안정했습니다.

1290

[경제 절정, 베키오 궁전 건설]

13세기 후반, 피렌체 경제는 절정에 달했습니다.

이 시기에 아르놀포 디 캄비오가 설계한 아주 유명한 베키오 궁전이 세워지며 도시의 위용을 과시했습니다.

호화로운 상업 가문들의 타운하우스도 많아졌죠.

1298

[유럽 금융 중심지 부상]

유럽 은행업을 이끌던 시에나의 본시뇨리 가문이 파산하며, 시에나는 유럽 은행업의 중심 지위를 잃었습니다.

이 틈을 타 피렌체가 새로운 금융 강자로 떠오르며 경제적 영향력을 확대했습니다.

1340

[금융 대가문 파산 사태]

잉글랜드 에드워드 3세의 빚 지불 거절과 유럽 전역의 경제 쇠퇴가 겹치며, 피렌체의 유력 은행가문인 바르디, 페루치, 아차이올리 가문이 줄줄이 파산했습니다.

피렌체 금융업이 큰 타격을 입은 사건입니다.

1347

[흑사병 유럽 강타]

오리엔트에서 시작된 흑사병이 메시나를 통해 유럽에 상륙했습니다.

이 치명적인 질병은 유럽 인구의 3분의 1을 제거하며 피렌체 공화국을 포함한 모든 도시 국가에 엄청난 충격과 경기 침체를 가져왔습니다.

사회 구조가 영원히 바뀐 중세 탈피의 시작점이었습니다.

1378

[치옴피의 난 발생]

흑사병과 경기 침체로 불만이 쌓여있던 양모 노동자들이 '치옴피의 난'을 일으켰습니다.

혁명적인 코무네를 세우려 했지만, 1382년에 부유한 세력들에 의해 진압되었습니다.

피렌체의 사회적 갈등이 폭발한 사건입니다.

1397

[메디치 은행 설립]

훗날 피렌체의 지배자가 될 메디치 가문의 기반, '메디치 은행'이 조반니 디 비치 데 메디치에 의해 설립되었습니다.

이 은행은 17세기까지 존재하며 가문의 부와 권력을 지탱했습니다.

1420

[브루넬레스키의 돔 건축]

세계 역사상 가장 놀라운 건축물 중 하나로 꼽히는 피렌체 대성당의 거대한 돔이 필리포 브루넬레스키에 의해 만들어졌습니다.

당대 사람들은 물론 오늘날에도 경탄을 자아내는 르네상스 건축의 걸작입니다.

1427

[전쟁 부채와 세금 개혁]

밀라노와의 전쟁에서 승리했지만, 420만 플로린이라는 막대한 부채를 떠안게 된 피렌체는 새로운 세금 제도 '카스타토'를 도입했습니다.

이는 시민들의 전체 부를 기반으로 한 세금으로, 재정 위기 극복을 위한 시도였습니다.

1433

[코시모 메디치 추방과 복귀]

루카 공화국과의 전쟁 실패 후, 코시모 데 메디치가 피렌체 정부의 핵심 인물에서 추방되는 위기를 겪었습니다.

하지만 불과 1년 만에 시민들의 압도적인 지지로 귀환했고, 자신을 추방했던 알비치 가문을 오히려 몰아냈습니다.

메디치 가문의 시대가 본격적으로 열렸습니다.

1439

[동서 교회 화해 공의회]

피렌체는 동방 정교회와 로마 가톨릭교회의 화해를 위한 역사적인 대규모 공의회를 유치하며 국제적 위상을 크게 높였습니다.

비록 합의가 오래가지 못했지만, 당시 피렌체의 영향력을 보여주는 사건입니다.

1453

[콘스탄티노플 함락]

피렌체 공의회의 동서 교회 화해 시도에도 불구하고, 4년 뒤 동로마 제국의 수도 콘스탄티노플이 오스만 투르크에게 함락되었습니다.

유럽 역사에 큰 영향을 미친 비극적인 사건입니다.

1464

[코시모 메디치 사망]

르네상스 도시 피렌체를 만든 주역, 코시모 데 메디치가 사망했습니다.

그는 도나텔로, 브루넬레스키 등 위대한 예술가들을 후원하며 피렌체를 르네상스의 중심지로 변모시켰습니다.

그의 죽음은 한 시대의 마감이었습니다.

1466

[피에로 집권과 쿠데타 진압]

코시모의 장남 '통풍 걸린자 피에로'가 집권했습니다.

그의 통치 기간 동안 피렌체 정치는 항상 말썽이 많았는데, 루카 피티 등 반대 세력이 무장 반란을 시도했지만 시민들의 지지를 얻지 못하고 실패로 돌아갔습니다.

1469

[위대한 로렌초 집권]

피에로의 아들이자 르네상스 최고의 예술 후원자 중 한 명인 로렌초 데 메디치가 피렌체를 통치하기 시작했습니다.

레오나르도 다 빈치, 미켈란젤로, 보티첼리 등 수많은 천재 예술가들이 그의 후원 아래 빛을 발했습니다.

피렌체 르네상스는 그의 시대에 절정을 맞이했습니다.

[통풍 걸린자 피에로 사망]

건강이 좋지 않았던 피에로 디 코시모 데 메디치가 겨울에 사망했습니다.

그의 죽음으로 피렌체는 새로운 메디치 가문의 리더를 맞이하게 됩니다.

1478

[파치 음모사건 발생]

파치 가문이 주도한 음모사건으로 로렌초의 동생 줄리아노 데 메디치가 살해당했습니다.

쿠데타는 실패했고, 공모자들은 성난 시민들에게 즉결 처형당했습니다.

교황 식스토 4세까지 개입하며 피렌체는 2년간 전쟁을 치러야 했습니다.

1492

[위대한 로렌초 사망]

피렌체 르네상스의 황금기를 이끌었던 로렌초 데 메디치가 사망했습니다.

그의 아들 피에로가 뒤를 이었으나, 메디치 가문은 다시 격동의 시기를 맞이하게 됩니다.

1494

[피에로의 항복과 메디치 추방]

프랑스 샤를 8세의 이탈리아 침공에 '불행한 피에로'가 굴욕적으로 항복하자, 분노한 피렌체 시민들이 봉기하여 메디치 가문을 추방했습니다.

18년간 메디치 가문은 이탈리아와 유럽을 전전해야 했습니다.

[사보나롤라의 신정 정치]

메디치 가문이 추방되자 페라라 출신의 성직자 지롤라모 사보나롤라가 피렌체의 새로운 지배자가 되었습니다.

그는 활발한 설교와 예언으로 민중의 지지를 얻고, 피렌체를 엄격한 신정 체제로 바꾸려 했습니다.

1497

[허영의 소각]

사보나롤라는 '허영의 소각'을 명령하여 가발, 향수, 그림, 고대 필사본 등 '세속적인 허영심'을 모아 불태웠습니다.

이는 피렌체를 엄격한 종교적 이상향으로 만들려는 그의 의지를 보여주는 상징적인 사건입니다.

1498

[사보나롤라 화형]

교황 알렉산데르 6세를 비난하다 파문당한 사보나롤라는 피사 정복 전쟁 실패와 역병으로 시민들의 신뢰를 잃었습니다.

결국 피렌체 당국자들에 의해 시뇨리아 광장에서 화형에 처해지며 그의 신정 정치는 비극적인 막을 내렸습니다.

1503

[불행한 피에로 익사]

프랑스 군대와 동행했다 패배 후 도망치던 중 배가 뒤집히는 사고로 '불행한 피에로'가 익사했습니다.

메디치 가문 추방 후 9년 만에 비극적인 최후를 맞았습니다.

1509

[피사 정복 및 소데리니 통치]

사보나롤라의 몰락 후, 피에로 소데리니가 종신제 수상으로 선출되어 비교적 민주적인 정부를 이끌었습니다.

마키아벨리의 제안으로 국민군 제도를 도입하고 1509년에 숙원이었던 피사를 정복하는 성과를 거두었습니다.

1512

[메디치 가문 통치권 회복]

피렌체가 프랑스 편을 들었다는 이유로 스페인군(신성동맹군)의 침공을 받아 프라토가 함락되자, 피에로 소데리니 수상은 물러났습니다.

조반니 데 메디치 추기경(훗날 교황 레오 10세)이 군사를 이끌고 입성, 메디치 가문이 18년 만에 피렌체 통치권을 되찾았습니다.

1513

[메디치 교황 레오 10세 등극]

피렌체의 통치권을 회복했던 조반니 데 메디치 추기경이 로마로 가 교황 율리오 2세의 뒤를 이어 레오 10세로 선출되었습니다.

이로써 피렌체 공화국과 교황령이 사실상 동군연합을 이루는 독특한 정치적 상황이 펼쳐졌습니다.

1523

[메디치 교황 클레멘스 7세 등극]

메디치 가문은 교황직에 계속해서 힘을 쏟았습니다.

레오 10세 사망 후, 줄리오 데 메디치 추기경이 다시 교황으로 선출되어 클레멘스 7세가 되었습니다.

메디치 가문의 영향력이 교황청까지 미치던 시기입니다.

1527

[로마 약탈과 메디치 재추방]

코냐크 동맹 전쟁 중 로마가 신성 로마 제국 군대에게 약탈당하고 파괴되는 충격적인 사건이 발생했습니다.

메디치 가문 출신 교황 클레멘스 7세가 이끄는 교황령 군대가 패배하자, 피렌체 내 반-메디치 세력이 봉기하여 메디치 가문은 또다시 통치권을 잃었습니다.

1530

[피렌체 공성전과 메디치 복귀]

교황 클레멘스 7세와 카를 5세의 바르셀로나 조약에 따라, 제국군이 피렌체를 침공했습니다.

11개월에 걸친 치열한 공성전 끝에 제국군이 승리하며, 메디치 가문은 다시 한번 피렌체 통치권을 회복했습니다.

이로써 공화국의 운명이 결정되기 시작했습니다.

1533

[피렌체 공화국 폐지, 공국 건국]

마침내 피렌체 공화국의 막이 내렸습니다.

1532년 교황 클레멘스 7세는 알레산드로 데 메디치를 '피렌체 공화국의 공작'으로 임명했고, 이로써 세습 군주제가 도입되며 공화국은 공식적으로 폐지되었습니다.

1533년 알레산드로 데 메디치는 피렌체 공국을 건국했습니다.

길고 격동적인 공화국의 역사는 종말을 고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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