무아마르 알 카다피
군인, 정치인, 독재자, 혁명가
최근 수정 시각 : 2025-10-18- 01:54:19
42년간 리비아를 통치하며 리비아의 최장기 국가 지도자라는 기록을 세운 군인이자 정치인. 무혈 쿠데타로 집권 자마히리야 체제를 선포하며 강력한 독재 정치를 펼쳤다. 반미주의와 이슬람 사회주의를 추진 서방과 대립하며 중동의 미친 개로 불리기도 했다. 리비아의 석유 국유화로 무상 교육·의료 등 높은 복지를 제공했으나 인권 탄압 비판도 받았다. 2011년 아랍의 봄 여파로 발생한 리비아 내전 중 시민군에 의해 사망했다.
1942
[카다피 출생]
리비아 시르테 근처에서 유목민 베두인족 가문에서 태어나 전통적인 이슬람 교육을 받으며 자랐다.
가난한 환경 속에서도 학업과 성공에 대한 강한 의욕을 보였다.
리비아 시르테 주 시르테 근처로 1942년 유목인인 베두인족의 일파인 카다파 부족 가문에서 태어나 전통적인 베두인식 이슬람 종교 교육을 받으면서 자랐다. 가난한 환경에서 여러 형제와 친척들과 함께 성장했으나 그는 공부와 출세에 대한 의욕, 욕망이 남달랐다고 한다.
1952
[이집트 왕정 폐지 영향]
10살 때 이집트 대통령 가말 압델 나세르가 왕정을 무너뜨리고 공화정을 선포한 소식에 깊은 영향을 받았다.
이때부터 아랍 세계를 통일하려는 의지를 키웠다.
10살 때 방송으로 이집트 대통령 가말 압델 나세르 등이 이집트 왕정을 무너뜨리고 공화정을 선포하자 여기에 영향을 깊게 받아 그의 아랍 사회주의 및 민족주의 의념을 따랐다. 이때부터 카다피는 나세르의 영향을 받아 아랍세계를 통일해 기독교 세계에 대항하려는 의지를 가지게 되었다고 한다.
1956
[수에즈 사태 시위 참여]
수에즈 사태 당시 반이스라엘 시위에 참가하며 자신의 정치적 성향과 아랍 민족주의에 대한 열망을 표출했다.
수에즈 사태에서는 반이스라엘 시위에 참가했다.
1963
[육군사관학교 입교]
벵가지의 리비아 대학교를 졸업한 뒤 육군사관학교에 입교했다.
재학 중 동료 생도들과 왕정 타도를 목표로 하는 자유장교단을 조직하며 혁명의 꿈을 키웠다.
벵가지의 리비아 대학교를 졸업한 후, 벵가지의 육군사관학교에 입교해 재학 당시부터 동료 생도들과 왕정타도를 목표로 하는 자유장교단을 조직했다.
1965
[영국 유학 및 장교 부임]
사관학교 졸업 후 1년간 영국으로 유학 겸 파견근무를 다녀왔으며, 귀국 후 통신부대 장교로 첫 보직을 받았다.
이후 그리스와 영국에서 추가 군사 훈련을 받았다.
사관학교 졸업과 동시에 1년 간 영국으로 유학 겸 파견근무를 하게 되었고, 귀국 후 첫 보직으로 통신부대 장교로 부임하였다. 나중에 그리스 아테네의 헬레나 군사 학교와 영국에서 군사 훈련을 받았다.
1969
[무혈 쿠데타로 집권]
육군 중위 신분으로 동료 장교들과 무혈 쿠데타를 감행했다.
당시 해외 체류 중이던 국왕 이드리스 1세를 퇴위시키고 왕정을 폐지, 공화정을 선포했다.
쿠데타 직후 군 총사령관에 오르고 대령으로 승격했으며, 혁명지도평의회 의장으로서 리비아의 국가원수, 총리, 국방장관 등 핵심 직책을 겸하며 전권을 장악했다.
꾸준히 진급하며 경력을 쌓던 육군 중위 카다피는 1969년 9월 1일 동료 장교들과 함께 수도 트리폴리를 공격하면서 기습적으로 쿠데타를 감행했다. 당시 신병 치료를 위해 터키에 체류 중이던 국왕 이드리스 1세는 객지에서 그대로 퇴위당해 터키로 망명했고, 국가의 중추기관도 유혈 사태 없이 간단히 제압하는 데 성공하였다. '무혈 쿠데타'로 사실상 정권을 잡은 카다피는 쿠데타 직후 군 총사령관에 올랐고, 이집트의 가말 압델 나세르를 흉내내 대령으로 승격했다. 그 해 11월에 잠정헌법을 공포한 이후 신생 리비아 공화국의 최고 정치 기구인 혁명지도평의회의 의장에 취임했다. 쿠데타 이후 리비아는 왕조가 교체되어 왕정에서 공화정으로 바뀌었다. 1969년 9월 1일 리비아 비상 혁명위원회를 설치하고 비상혁명위원장이 되면서 그는 총리와 국방장관과 국가평의회 의장(의회 의장)과 국가 원수를 모두 겸직한다. 비상 혁명위원회는 1977년 3월 2일까지 존속시킨 뒤 해산한다.
1970
[반미주의 국유화 추진]
총리 겸 국방장관 직책을 맡으며 리비아의 철저한 반미주의 노선을 주창했다.
미국 군사기지를 철수시키고 외국 자본과 석유 회사를 추방, 석유를 국유화하는 등 주요 산업을 국영화하며 이슬람 사회주의 국가 건설을 본격적으로 추진했다.
1970년부터 2년간 그는 리비아의 총리와 국방장관을 겸했으나 2년만에 총리직과 국방장관직은 내놓고 국가원수 겸 국가평의회 의장으로 머물렀다. 그 후, 철저히 반미주의를 주창하여 미국 군사기지를 철수시키고, 외국 자본을 추방했으며 이탈리아인, 프랑스인 등을 추방했다. 외국의 석유 회사들을 추방하고, 석유를 국유화했다. 또한 도로와 해운, 항만, 항공 등의 기반시설도 국유화와 국영화로 전환시켰다. 1970년부터 총리·국방장관을 겸하다가 1972년 이들 자리를 내놓고 완전한 이슬람 사회주의 국가를 건설하는 문화대혁명을 주도했다.
1972
[총리직 사퇴]
총리직과 국방장관직에서 물러났지만, 이후에도 '혁명의 지도자이자 수호자'를 자처하며 리비아의 민족주의, 반미주의 독재 정치를 지속적으로 이끌었다.
1972년부터 총리직에서 물러났지만 그 이후에도 정부 문건과 관영 통신에서 '리비아 아랍 자마히리야의 위대한 9월 사회주의 인민 혁명의 수호자' 내지는 '혁명의 지도자이자 수호자'를 자칭하며 민족주의, 반미주의 독재정치를 폈다.
1974
['녹색서' 집대성]
정치 이론 연구에 전념하기 위해 혁명평의회 의장 권한을 잠시 위임했다.
이듬해 그의 정치 사상을 집대성한 책인 《녹색서》를 출간했다.
1974년에는 정치이론을 연구하는 데 전념하여 혁명평의회의 의장 권한을 2인자에게 잠시 위임하였고, 다음 해 그의 정치이론을 집대성한 책이 나왔으니, 이것이 녹색서(The Green Book)이다. 이러한 그의 사상은 《녹색서》(1975)라는 책에 밝혀져 있다.
1977
['자마히리야' 체제 선포]
이슬람주의, 범아랍주의, 사회주의를 융합한 독자적인 '자마히리야'(인민권력) 체제를 선포했다.
'인민 직접민주주의'를 명분으로 의회와 헌법을 폐지하며 전제 독재 권력을 강화했다.
이후 모든 공직에서 사퇴하고 '혁명지도자'라는 명예직함으로 사실상의 국가원수 역할을 지속했다.
1977년 이슬람주의, 범아랍주의, 사회주의를 융합한 '''[[자마히리야]]'''(인민권력) 체제를 선포한 그는 '인민 직접민주주의'라는 독특한 체체 구축을 명분으로 [[의회]]제와 [[헌법]]을 폐지, 전제 독재권력을 강화했다. 1977년 소위 '인민주권확립선언'을 공포한 후 초대 전국인민위원회 서기장에 취임했으나 1979년에 모든 공직에서 사퇴하였다. 그 대신 오로지 혁명지도자라는 명예직함만을 가지고 있지만 사실상의 국가원수이자 리비아의 모든 국가 업무는 카다피의 지도 하에 돌아가게 되었다.
1978
[차드-리비아 전쟁 발발]
리비아 육군 소장으로 전역했다.
이후 1987년까지 리비아와 국경을 접한 차드와의 전쟁에 나섰으나, 차드-프랑스 연합군에게 패전하는 아픔을 겪었다.
1978년 리비아 육군 소장 전역. 1978년부터 1987년까지는 리비아와 국경을 접한 차드-리비아 전쟁에 나섰지만 차드-프랑스 연합군에게 패전하고 만다.
1980
[시리아와 합방 시도]
중동 지역에 단일 아랍 국가를 건설하려는 아랍 민족주의적 시도를 이어갔다.
시리아와의 합방을 선언했으나, 이란-이라크 전쟁 발발로 인해 계획은 무산되었다.
아랍 민족주의자였던 카다피는 한편, 중동 지역에 단일 아랍 국가를 건설하려는 시도를 했다. 이에 따라 이집트와 아랍 연합 구성에 합의했으나, 중동 전쟁 이후 이집트의 안와르 사다트 대통령이 추진한 평화 정책에 반발하여 양국 관계는 악화되었다. 1980년 시리아와의 합방을 선언했으나, 곧이어 이란-이라크 전쟁이 일어나 합방은 무산되었다.
1986
[미국 리비아 공습]
로널드 레이건 미국 대통령이 리비아를 '중동의 미친 개'로 비난하며 테러 지원국으로 규정했다.
이에 미국 공군과 해군이 리비아를 공습했으나, 국제사회는 미국을 규탄하는 성명을 발표하며 카다피에 대한 서방의 적대감과 국제사회의 복잡한 시각을 보여주었다.
카다피 정권은 반미주의에 입각하여 미국과 서방권을 상대로 팬암 항공 103편 폭파 사건 등 수차례의 테러를 감행했다. 미국의 로널드 레이건 대통령은 "리비아는 국제 테러 조직의 본거지이며 세계 각처에서 일어난 테러 사건의 배후 조종자이다. 또한 아랍·아프리카의 온건주의 국가(친서방 국가를 의미함) 지도자들을 타도하기 위한 테러리스트 훈련소를 설치하고 있다."고 비난하면서 리비아를 침공하겠다는 의사를 밝혔다. 1986년에는 미국 공군, 미국 해군이 1986년 미국의 리비아 공습했지만 국제 사회는 미국을 규탄, 비난하는 성명을 발표하게 된다.
1998
[빈 라덴 체포 요청]
리비아 시르테에서 발생한 독일 정보기관 요원 부부 살해 혐의로, 카다피 정부의 요청에 따라 오사마 빈 라덴에 대한 인터폴 첫 체포영장이 발부되었다.
이 사건을 계기로 카다피는 빈 라덴과 알 카에다에 대한 깊은 증오심을 가지게 되었다.
카다피와 빈 라덴과의 관계는 빈 라덴이 국제 사회의 수배를 받기 시작한 1998년 3월로 거슬러 올라오는데, 이 시기는 빈 라덴에 대한 인터폴의 첫 체포영장이 발부된 시점이었다. 이 영장은 카다피가 이끄는 리비아 정부의 청구로 발부되었는데, 그 이유는 빈 라덴의 알 카에다가 카다피의 고향인 리비아 시르테에서 독일 정보기관 요원 부부에 대한 살해를 저지른 혐의 때문이었다. 이 사건을 전후로 카다피는 빈 라덴이 이끄는 알 카에다에 대해 증오하게 되었다.
2001
[9.11 테러 후 협조]
9.11 테러 이후, 카다피는 미국의 오사마 빈 라덴 색출 작전에 적극 협조하며 알 카에다와 대립각을 세웠다.
이는 과거 반미주의 노선과는 상반되는 모습을 보여주었다.
2001년 9.11 테러 이후에 카다피는 미국의 빈 라덴 색출 작전에 협조하며 알 카에다와 줄곧 대립각을 세우기도 했다.
2003
[서방과 화해 시작]
조지 W.
부시 미국 대통령의 이라크 침공을 계기로 이라크와의 관계를 단절하고, 유럽 및 서방 세계에 개방을 선언하며 화해의 손길을 내밀었다.
이는 국제사회와의 관계 개선을 위한 중요한 전환점이었다.
21세기 초에서는 서방 세계에 대해 화해의 손짓을 내보였다. 2003년 미국의 조지 W. 부시 대통령 등이 이라크를 침공하자 이라크와의 관계를 단절하는 한편 유럽과 서방 세계에 개방을 선언하고, 외부의 학술 연구단의 출입을 완화시키기도 했다.
2004
[미국과 외교 복원]
미국과 외교관계를 복원했다.
이는 2006년 미국이 리비아를 테러지원국 명단에서 삭제하는 결과로 이어지며, 리비아와 서방 관계의 큰 진전을 보여주었다.
2004년 미국과 외교관계를 복원시켰으며, 미국은 2006년 리비아를 테러지원국 명단에서 삭제하였다.
2008
[이탈리아 사과 수용]
과거 이탈리아인의 재산 몰수 및 추방에 대해 사과하고, 이탈리아의 식민 지배 사과를 받아들였다.
이는 서방과의 관계 개선 노력의 일환이었다.
과거 이탈리아인의 재산을 몰수하고 추방한 것에 대해 사과하고, 이탈리아의 식민 지배 사과를 받아들였다.
[미국 국무장관과 회담]
콘돌리자 라이스 미국 국무장관이 트리폴리를 방문하여 카다피와 회담했다.
이는 미국과 리비아 간 외교 관계 복원과 개선을 상징하는 역사적인 순간이었다.
2008년 9월 콘돌리자 라이스 미국 국무장관은 트리폴리 (리비아)를 방문하여 카다피와 회담하였다.
2009
[아프리카 연합 의장]
아프리카 연합 의장을 맡아 2010년 1월까지 직위를 수행했다.
이는 국제 무대에서의 영향력을 확장하려는 그의 노력을 보여주었다.
2009년 2월부터 2010년 1월까지 아프리카 연합 의장을 지냈으며, 리비아 지역이 1551년 오스만 제국의 영토가 된 이래로(당시 트리폴리) 리비아의 최장기 국가 지도자였다.
[UN총회 96분 연설]
UN총회에서 90여 분간 미국을 비롯한 서방 세계에 대한 비판과 아프리카 식민지 보상 요구 등 강력한 메시지를 전달했다.
그의 달변은 동시통역사가 교체될 정도였다.
UN총회 연설에서 90여분간 미국을 비롯한 서방세계에 대한 비판, 그리고 유럽국가들이 아프리카의 식민지 역사를 가진 나라들에 대한 보상을 해야한다는 요구를 하기도 했던 달변가였다. UN총회서 96분 연설…동시통역사 기진맥진해 교체
2011
[리비아 반정부 시위]
아랍의 봄의 영향을 받아 42년간 지속된 카다피의 장기집권에 반대하는 대규모 반정부 시위가 리비아 전역에서 시작되었다.
카다피는 이를 알 카에다의 소행으로 지목하며 시위대를 강경 진압했다.
2011년 초에 시작된 아랍의 봄 아랍의 민주화 시위의 영향을 받아 리비아에서도 2011년 2월 카다피 정권에 대항해 2011년 리비아 반정부 시위가 일어났으며, 카다피는 이 사건의 배후로 알 카에다를 지목할 정도로 알 카에다에 대한 심한 반감을 드러냈다.
[반군, 수도 트리폴리 점령]
나토의 지원을 받은 자유 리비아군(반군)이 수도 트리폴리에 진입하여 카다피의 아들 둘을 생포하고 도시를 장악했다.
이로써 카다피 정권은 사실상 붕괴하고, 카다피는 고향 시르테에 고립되었다.
2011년 8월 22일 자유 리비아군이 트리폴리 (리비아)에 진입하여 그의 아들 둘을 생포했다. 반정부 시위 직후 리비아 시민군은 벵가지 등의 도시를 장악 후 나토의 지원을 얻어 트리폴리 (리비아) 시를 점령했다. 이후 카다피의 리비아 정부군이 트리폴리 (리비아)를 빼앗기자 카다피는 시르테에 완전히 고립되었다.
[카다피 총격 사살]
고향 시르테에서 리비아 시민군에게 체포되던 중 총격으로 사망했다.
42년간 리비아를 통치했던 독재자의 파란만장한 생애는 비극적으로 막을 내렸다.
같은 해 10월 20일 그는 고향 시르테에서 사살되었다. 카다피가 사망할 당시 상황은 구체적으로 알려지지 않았으나, 결국 리비아 시민군에게 체포되던 중 시민군의 총격으로 사망한 것으로 확인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