맬컴 엑스

인권 운동가, 이슬람 지도자, 사회 운동가, 사상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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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근 수정 시각 : 2025-10-18- 01:39:3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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맬컴 엑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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맬컴 엑스는 미국의 흑인 인권 운동가이자 이슬람 운동가로 급진적 사상으로 대중을 사로잡았다. 초기에는 흑인 분리주의를 주장하며 마틴 루터 킹 목사와 대립했으나 말년에는 인종 차별 반대와 인권 신장으로 사상을 확장했다. 카리스마 넘치는 연설과 행동으로 흑인 사회에 큰 영향력을 행사했으며 결국 암살로 생을 마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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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25

[맬컴 엑스 출생]

미국 네브래스카주 오마하에서 얼 리틀과 루이스 노턴의 아들로 태어났다.

출생 당시 이름은 맬컴 리틀이었으며, 그의 아버지는 침례교 설교자이자 범아프리카주의자 마커스 가비를 지지하는 활동가였다.

1926

[백인 우월주의 피해 이주]

가족들은 백인 우월주의 단체 쿠 클럭스 클랜의 가혹 행위를 피해 위스콘신주 밀워키로 이사했고, 얼마 후 미시간주 랜싱으로 다시 옮겼다.

이는 어린 맬컴에게 인종차별의 현실을 각인시키는 계기가 되었다.

1929

[랜싱 자택 화재]

살고 있던 랜싱의 집이 불탔다.

인종차별로 인한 협박과 폭력은 그의 가족에게 끊임없이 이어지며 불안정한 생활을 강요했다.

1931

[아버지 얼 리틀 사망]

아버지가 노면 전차에 치여 사망했다.

경찰은 자살로 기록했지만, 흑인 사회에서는 살해당했다는 소문이 돌았다.

이 사건은 맬컴의 삶에 깊은 상처를 남겼고, 그는 아버지의 죽음을 백인 우월주의자들의 소행으로 여겼다.

얼 리틀은 백인 우월주의자들에게 살해당했고, 맬컴의 삼촌 역시 린치를 당하는 등 가족들은 지속적인 백인 우월주의자들의 위협에 시달렸다. 생명보험사들은 자살 의혹을 이유로 보험금 지급을 거부하여 가족들은 심각한 생활고를 겪었다.

1938

[어머니 정신병원 입원]

어머니 루이스 노턴이 신경 쇠약 증상으로 정신병원에 수용되었다.

맬컴은 위탁 가정을 전전하며 불우하고 어려운 유년기를 보냈고, 이는 그의 가치관 형성에 큰 영향을 주었다.

1941

[이복 누이와 동거 시작]

위탁 가정을 전전하던 맬컴은 이복 누이 엘라 리틀 콜린스와 함께 보스턴 록스버리에 살게 되었다.

그는 이곳에서 흑인 중산층의 삶과 문화를 처음 경험하며 새로운 시야를 갖게 되었다.

1943

[병역 거부 및 사회 반항]

미국 병무청으로부터 입영 통지서를 받았으나, '총만 있다면야 당장 크래커 몇을 죽이겠죠'라고 말해 정신 상태 부적합으로 보충역 등급을 받았다.

이때부터 부당한 흑인 대우에 저항하며 흑인 권리 운동에 동참하기 시작했다.

1943년부터 1946년 사이 뉴욕 뉴 헤븐 하트포드 철도에서 근무하며 여러 임시직을 전전했고, 뉴욕 할렘에서는 마약 거래, 도박, 강도 등 범죄에 연루되기도 했다. 이 시절 그는 '디트로이트 레드'라는 별명으로 불렸다.

1946

[보석 절도 혐의로 검거]

동료 몇을 데리고 보스턴으로 돌아가 부유한 백인 여성의 집을 주로 노린 강도 행각을 벌였다.

결국 보석점에서 시계를 훔쳐 나오다가 검거되었다.

[절도 및 불법 침입으로 징역]

절도, 불법 침입 및 기물 파손 혐의로 징역 8년을 선고받고 찰스타운 스테이트 교도소에 수감되었다.

그의 젊은 시절 방황은 결국 수감으로 이어졌다.

[교도소 수감 생활 시작]

찰스타운 스테이트 교도소에 입소한 후, 종교에 매우 적대적인 태도를 보여 교도소 내에서 '사탄'이라 불렸다.

하지만 점차 독학으로 공부하며 지적인 변화를 겪기 시작했다.

교도소에서 독학으로 공부하는 존 엘턴 벰브리를 만나 감화받았고, 벰브리의 도움으로 닥치는 대로 책을 읽으며 지식을 쌓았다. 교도소 전등이 꺼진 후에도 계속 책을 읽을 만큼 학구열을 불태웠다.

1948

[이슬람으로 완전히 개종]

네이션 오브 이슬람의 수장 일라이저 무하마드에게 새로운 사람이 될 방법을 묻는 편지를 썼고, 그의 답장을 진지하게 받아들여 알라에게 간절히 기도했다.

이로써 과거와 단절하고 네이션 오브 이슬람의 일원이 되었다.

맬컴은 일주일 동안 알라에게 쉬지 않고 기도하여 무릎이 상할 정도였다고 회고했다. 수감 생활 동안 일라이저 무하마드와 꾸준히 편지를 주고받으며 종교적 신념을 굳건히 했다.

[네이션 오브 이슬람 접함]

형 필버트의 편지를 통해 흑인들의 자기 신뢰 형성과 백인의 지배로부터 해방을 주장하는 '네이션 오브 이슬람'을 처음 접했다.

처음에는 가입할 생각이 없었으나, 다른 형 레지날드의 조언으로 담배와 돼지고기를 끊는 등 이슬람식 생활을 시작했다.

레지날드는 맬컴을 면회하며 네이션 오브 이슬람이 백인을 악마라고 주장하는 교육 모임을 소개했고, 맬컴은 자신이 살아오면서 만난 백인들의 부도덕함을 떠올리며 이슬람의 교리를 받아들이기로 결정했다.

[노포크 교도소 이감]

누이의 청원 덕분에 실험적으로 운용되던 매사추세츠주 노포크 교도소로 이감되었다.

이곳에는 많은 책을 구비한 도서관이 있어 더욱 깊이 있는 공부를 이어갈 수 있었다.

1950

[FBI 사찰 시작]

해리 트루먼 대통령에게 자신이 공산주의자이며 한국 전쟁에 반대한다는 편지를 보낸 후, 미국 연방 수사국(FBI)의 조사가 시작되었다.

FBI는 그가 속한 네이션 오브 이슬람을 과격 단체로 보고 공산당과의 관련 여부를 의심하며 1953년까지 조사를 진행했다.

['맬컴 X'로 개명 시작]

자신의 진짜 아프리카 조상의 성을 알 수 없다는 의미에서 미지수를 뜻하는 '엑스(X)'를 사용하기 시작했다.

노예주인 백인의 성 '리틀'을 버리고 새로운 정체성을 확립하며 흑인으로서의 저항 의지를 상징적으로 드러냈다.

맬컴은 자서전에서 '내 진짜 선조인 아프리카 조상의 성을 알 수 없기에 미지를 뜻하는 엑스를 내 성으로 삼는다. 선조를 노예로 부리던 백인 주인의 성일 뿐인 리틀을 내 성으로 결코 사용하지 않겠다'고 밝혔다.

1952

[가석방으로 출옥]

7년간의 수감 생활 끝에 가석방으로 출옥했다.

그는 이슬람에 귀의한 이후의 감옥 생활에 대해 '내가 수감되어 있다는 것을 생각하지 않을 만큼 진정 자유로운 삶을 살았다'고 회고했다.

1953

[보스턴 제11 사원 개설]

네이션 오브 이슬람의 영향력을 확대하기 위해 보스턴에 제11 사원을 개설하며 조직 확장에 힘을 쏟았다.

[이슬람 성직자로 활동]

디트로이트에 있던 네이션 오브 이슬람의 제1 사원에 성직자로 등록하고 얼마 지나지 않아 전업 성직자로서 활동하기 시작했다.

그의 카리스마 넘치는 설교는 많은 흑인들을 끌어모았다.

1954

[필라델피아 제12 사원 개설]

필라델피아에 제12 사원을 개설하며 네이션 오브 이슬람의 확장을 주도했다.

그의 헌신적인 활동은 조직 성장의 핵심 동력이 되었다.

[할렘 제7 사원 지도자]

뉴욕 할렘에 있는 제7 사원의 지도자로 임명되었고, 그의 활동으로 제7 사원의 신도 수가 급속히 증가하며 네이션 오브 이슬람의 최고 논객이자 핵심 인물로 부상했다.

1955

[배우자 베티 센더스 첫 만남]

베티 센더스는 맬컴 엑스의 강연을 듣고 깊은 감동을 받아 그의 모든 강연에 참석했으며, 네이션 오브 이슬람에 가입하면서 자신의 성도 '엑스'로 바꾸었다.

두 사람은 이후 결혼하게 된다.

[네이션 오브 이슬람 확장 주도]

매사추세츠 스프링필드에 제13 사원, 하트포드에 제14 사원, 조지아 애틀란타에 제15 사원 등을 세우며 네이션 오브 이슬람을 전국적으로 확대시켰다.

매달 수백 명의 흑인들이 새로 가입하며 그의 영향력은 폭발적으로 커졌다.

191cm의 큰 키에 81kg의 풍채 좋은 맬컴 엑스는 매우 인상적인 설교자였으며, 사람들은 그를 '활력 있는 몸매'를 가진 '매료될 수밖에 없는 미남'이라 평했다. 그의 카리스마는 네이션 오브 이슬람을 500명 규모의 소집단에서 2만 5천 명의 회원이 가입한 대중 단체로 만드는 데 결정적인 역할을 했다.

1957

[존슨 힌튼 사건 발생]

네이션 오브 이슬람 회원 존슨 힌튼이 뉴욕에서 경찰에게 구타당하는 사건이 발생했다.

맬컴 엑스는 5백 명이 넘는 군중을 이끌고 경찰서로 찾아가 힌튼의 면회와 석방을 요구했다.

경찰서 주변에 4천여 명이 모인 상황에서 맬컴 엑스가 손짓 한 번으로 군중을 조용히 해산시킨 후, 경찰은 그를 '처럼 영향력을 갖는 사람은 또 없을 것'이라며 놀라워했다. 이 사건으로 맬컴 엑스는 대중적으로 큰 주목을 받기 시작했고, 뉴욕 경찰국은 그를 사찰하기 시작했다.

1958

[베티 엑스와 청혼]

베티 엑스에게 청혼했다.

두 사람은 별도의 사적인 만남 없이 박물관이나 도서관에 갈 때 베티를 꼭 초대하여 함께하는 독특한 '데이트' 방식을 유지했다.

[베티 엑스와 결혼]

미시간주 랜싱에서 베티 엑스와 결혼했다.

이들 부부는 훗날 여섯 명의 딸을 두게 된다.

1959

[방송 출연, 전국적 인물 부상]

뉴욕 텔레비전 다큐멘터리 《더 헤이트 댓 헤이트 프로듀스트》(The Hate That Hate Produced)에 출연하며 '화이트 아메리카'라 부른 백인 사회에도 자신의 이름을 널리 알렸다.

이후 방송과 언론에서 그의 의견을 요청하는 일이 잦아졌다.

1960

[피델 카스트로와 역사적 만남]

국제 연합 총회 참석차 뉴욕에 온 피델 카스트로를 할렘에서 만나 두어 시간 대화를 나누었다.

카스트로는 맬컴을 쿠바로 초청했고, 이는 그의 국제적 영향력을 보여주는 역사적인 만남이었다.

국제 연합 총회가 열리는 동안 이집트의 가말 압델 나세르, 기니의 아메드 세쿠 투레, 잠비아의 케네스 카운다와 같은 아프리카 지역 여러 나라의 국가 원수들 역시 맬컴 엑스를 자국으로 초청할 정도로 그의 국제적 위상이 높아졌다.

1963

[워싱턴 행진 비난]

마틴 루터 킹 주니어 등이 주도한 '직업과 자유를 위한 워싱턴 행진'을 '워싱턴 광대짓'이라 맹비난하며 흑인 민권 운동과 대립각을 세웠다.

그는 흑인들이 백인에게 쫓겨다니는 짓이라며 비판했다.

맬컴 엑스는 이 시기 흑인 우월주의와 흑인 분리주의를 주장하며, 백인을 '악마'라고 비난했다. 이는 비폭력을 강조한 마틴 루터 킹 목사의 노선과는 극명하게 대비되었다. 흑인 인권 운동이 인종 차별 철폐를 위해 싸우는 동안, 맬컴 엑스는 오히려 인종의 분리와 흑인만으로 구성된 국가의 건설을 주장했다.

[케네디 암살 논평으로 비난]

존 F.

케네디 암살에 대해 '닭이 자신의 횃대에 돌아온 것과 같은 일', 즉 사필귀정이라고 논평하여 큰 논란을 일으켰다.

맬컴의 발언으로 네이션 오브 이슬람 전체가 비난받게 되자, 결국 대변인직을 그만두게 되었다.

네이션 오브 이슬람은 공식적으로 케네디 일가에 조의를 표하며 맬컴의 발언이 자신들의 공식 입장과 무관하다고 선을 그었다. 이 사건은 맬컴과 네이션 오브 이슬람의 관계가 악화되는 결정적인 계기가 되었다.

1964

[무슬림 모스크 인코퍼레이션 설립]

네이션 오브 이슬람 탈퇴 후 새로운 이슬람 종교 단체인 '무슬림 모스크 인코퍼레이션'을 창립하며 독자적인 종교 활동을 시작했다.

[아프로 아메리칸 연대 기구 창립]

네이션 오브 이슬람 탈퇴 후 범아프리카주의 운동 단체인 '아프로 아메리칸 연대 기구'를 창립했다.

이는 흑인들의 민족 자결권과 자기 방어권을 강조하며 국제적인 연대를 모색하는 움직임이었다.

[네이션 오브 이슬람 탈퇴]

일라이저 무하마드와의 불화 및 교조주의 비판을 이유로 네이션 오브 이슬람을 공식 탈퇴했다.

그는 자신이 예전부터 다른 흑인 인권 운동가들과 함께 활동하고 싶었지만 무하마드가 그것을 막았다고 선언하며 새로운 전환점을 맞았다.

맬컴 엑스가 네이션 오브 이슬람을 탈퇴한 원인 중 하나는 일라이저 무하마드가 조직의 교리를 어기고 젊은 비서와 혼외 관계를 가졌다는 소문 때문이었다. 또한, 조직 내 맬컴 엑스를 반대하는 세력이 커진 것도 탈퇴에 영향을 미쳤다.

[마틴 루터 킹과 유일한 만남]

워싱턴 D.C.에서 열린 시민권리법 제정 촉구 행사에서 마틴 루터 킹 주니어와 단 한 번 만났다.

이들의 만남은 많은 사진 기자들에 의해 보도되며 역사적인 장면으로 기록되었다.

이 짧은 만남은 과거 극명하게 대립했던 두 흑인 운동가의 관계 변화를 상징하는 중요한 사건으로 평가된다. 맬컴 엑스는 네이션 오브 이슬람과 결별한 뒤 다른 민권 운동가들과의 연대를 모색했다.

[이슬람 성지 순례(하즈) 시작]

네이션 오브 이슬람과 결별 후 수니파 이슬람에 귀의하며, 무슬림의 의무 중 하나인 메카 순례(하즈)를 결심하고 사우디아라비아 지다로 향했다.

이는 그의 사상적 대전환의 서막이었다.

[메카 순례, 사상 변화의 계기]

메카의 카바 성소를 순례하는 하즈를 마쳤다.

인종을 가리지 않고 평등하게 순례하는 수많은 무슬림들을 보고 크나큰 감명을 받아 인종 차별주의에 반대하는 입장으로 사상이 크게 바뀌는 계기가 되었다.

메카 순례 이후 그는 '나는 이제 인종 차별주의에 반대한다'고 선언했다. 하지만 그의 영향으로 흑인 우월주의자가 된 젊은이들은 그가 백인 우월주의에 굴복했다며 비판하기도 했다. 그는 1964년 대부분의 기간 동안 아프리카, 아라비아, 영국, 프랑스 등지를 여행하며 국제적인 시야를 넓혔다.

[가족 보호 위한 무장 사진 게재]

네이션 오브 이슬람과의 긴장이 고조되면서 시카고의 월간 잡지 '에버니' 9월호에 M1 카빈을 들고 창문에 기댄 채 가족을 보호하는 모습의 사진이 게재되었다.

이는 그의 신변 위협이 현실화되고 있음을 보여주었다.

네이션 오브 이슬람은 공개적으로 맬컴 엑스를 '위선자'라 비난하며 사적인 보복을 가하려 했고, 실제로 1964년 2월에는 그의 차량이 폭파되는 사건도 발생했다. 이 시기 그는 여러 대학에서 강연 요청이 쇄도하는 유명인사였다.

1965

[뉴욕에서 암살당함]

뉴욕 맨해튼 오더번 볼룸에서 아프로 아메리칸 연대 기구 연설을 준비하던 중 네이션 오브 이슬람 회원 세 명에게 총격을 받아 40세의 나이로 암살당했다.

가슴, 어깨, 팔, 다리에 21발의 총상을 입었으며, 특히 가슴을 관통한 열 발이 치명적이었다.

총격범 토머스 헤이건은 현장에서 체포되었고, 노먼 3X 버틀러와 토머스 15X 존슨 역시 목격자 증언을 토대로 체포되었다. 이들 모두 네이션 오브 이슬람 소속이었다. 그의 죽음은 흑인 인권 운동사에 큰 충격을 주었으며, 사상 변화 이후의 새로운 활동은 미완으로 남았다.

[대규모 조문객 방문]

사망 후 2월 26일까지 대략 1만 4천 명에서 3만 명에 이르는 조문객들이 그의 죽음을 애도하기 위해 방문했다.

그의 갑작스러운 죽음에 많은 이들이 충격을 받았다.

[할렘에서 장례식 거행]

할렘의 흑인 기독교 교회에서 장례식이 치러졌다.

존 루이스, 바이어드 러스틴과 같은 흑인 인권 운동 활동가들이 참석하여 그의 마지막을 함께 했다.

그는 뉴욕 하츠데일의 페른클리프 공동묘지에 안장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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