살바도르 아옌데
칠레 대통령, 사회주의자, 의사, 정치인
최근 수정 시각 : 2025-09-02- 03:19:28
- 라틴 아메리카 최초로 민주 선거를 통해 집권한 사회주의 대통령. - 구리 광산 국유화 복지 확대 등 급진적인 사회주의 정책을 추진하며 사회 변혁을 시도. - 미국의 경제 제재와 국내 보수 세력의 반발 경제난 등으로 집권 기간 내내 난관에 봉착. - 1973년 피노체트의 군사 쿠데타에 저항하다 대통령궁에서 비극적인 최후를 맞이함. - 그의 삶은 칠레의 복잡한 사회 변혁 역사와 민주주의의 명암을 극명하게 보여줌.
1908
[살바도르 아옌데 탄생]
칠레 발파라이소의 개혁적인 중상류 계급 가정에서 태어났다.
그의 가문은 비종교계 학교 설립, 급진당 활동 등 일찍이 개혁적인 분위기를 형성했다.
살바도르 아옌데 고센스는 발파라이소의 중상류계급 집안에서 태어났다. 그의 할아버지 라몬 아옌데는 1860년대 칠레 교육역사에서 처음으로 로마 가톨릭 교회와 관련이 없는 비종교계 학교를 설립하였다. 그의 아버지 살바도르 아옌데 카스트로 변호사와 삼촌들 역시 급진당의 핵심당원이었다.
1926
[사회주의에 눈뜨다]
칠레 대학교에서 의학을 전공하며 학생운동에 참여했고, 민중의 비참한 삶을 목격하며 사회주의 사상에 눈을 떴다.
마르크스, 레닌 등의 저작을 탐독하며 사회정의에 대한 신념을 굳혔다.
병역의무를 마친 뒤 1926년부터 칠레 대학교에서 의학을 전공하였다. 집안 분위기의 영향으로 정치에 관심이 있던 아옌데는 학생운동에 참여했으며, 의대생 시절 민중들의 비참한 생활을 목격하면서 사회주의에 입문하였다. 마르크스, 레닌, 트로츠키의 저작들을 읽으면서 사회정의, 빈곤과 질병의 관계등에 대한 신념을 정리할 수 있었던 것으로, 이러한 정치활동 경력은 카를로스 아바녜스 독재정권시절 옥고를 치르게 하였다.
1932
[사회 변혁 헌신 다짐]
급진 군인들의 사회주의 공화국 붕괴 후 재수감되었고, 부친의 죽음을 계기로 사회 변혁에 헌신할 것을 다짐했다.
병리학 조수로 일하며 빈민의 어려움을 직접 확인하며 사회주의 신념을 강화했다.
급진 군인들의 사회주의 공화국이 무너진 뒤 또 수감된 아옌데는 청렴결백한 변호사였던 부친의 죽음을 계기로 사회변혁에 헌신할 것을 다짐한다. 보수적인 병원들로부터 일자리를 거부당하자 병리학 조수로 근무한 그는 빈민들의 시신을 부검하는 일도 했는데, 이를 통해 빈민들의 어려움을 확인할 수 있었다. 병리학 조수로 일하면서 빈민들이 얼마나 비참하게 사는지 깨달은 경험은 그가 사회를 변혁하는 이념으로서 사회주의에 더욱 관심을 갖게 하였다.
1964
1964년 칠레 대통령 선거에서 칠레 사회당 후보로 출마했으나 977,902표를 얻어 38.93%의 득표율로 2위를 기록하며 낙선했다.
1970
[역사적인 대통령 당선]
칠레 대통령 선거에서 36.2% 득표율로 당선되며 라틴 아메리카 최초로 민주 선거를 통해 집권한 사회주의 대통령이라는 역사적인 기록을 세웠다.
과반 득표는 아니었으나 의회의 지지로 최종 확정되었다.
1970년 칠레 대통령 선거에서 칠레 사회주의 정당들의 연합 정당인 인민 연합 후보로 출마하여 36.2%를 득표, 근소한 차이로 승리했다. 당시 칠레 헌법에 따르면 선거에서 승리하기 위해서는 과반의 득표가 필요했으며, 대선 후보가 과반수의 표를 얻지 못할 경우 의회가 상위 득표자 후보 둘 가운데 한 명을 당선자로 정할 수 있었다. 아옌데는 의회의 최종 선택을 받아 대통령으로 당선될 수 있었다.
[총사령관 피격 사망]
칠레군 총사령관 레네 슈네이데르 장군이 아옌데 납치 계획에 저항하다 총에 맞아 부상당했고, 사흘 뒤 사망했다.
이 납치 계획은 CIA의 지원을 받았다는 의혹이 제기되며 아옌데 정부에 대한 미국의 개입 정황이 드러났다.
칠레군 총사령관 레네 슈네이데르 장군이 그를 납치하려던 로베르토 비오 장군 일당에게 저항하다 총에 맞는 일이 일어났다. 병원에서 치료를 받았으나 사흘 만에 부상으로 사망했다. 비오 장군의 납치 계획은 CIA의 지원을 받은 것이었다. 슈네이데르는 군대는 본분에 충실하게 국가 주권을 보위하는 것이지 정치를 방해하는 것이 아니라고 주장하는 헌법주의 독트린의 옹호자였다. 슈네이데르 장군의 죽음 소식은 불신을 받았고, 10월 24일 의회가 최종 선택한 아옌데에 대해 군사적 반대가 일어났다.
[대통령 취임]
기독교 민주당이 제안한 '헌법 보장 협약'에 서명한 후 칠레 대통령으로 정식 취임했다.
이는 군부의 반발을 의식한 아옌데의 전술적 행보로 해석되기도 했다.
아옌데는 기독교 민주당이 자신들에 대한 의회 지원을 받는 대신에 제안한 '헌법 보장 협약'에 서명하여 1970년 11월 3일에 대통령직에 취임했다. 레지 드브레와 인터뷰하면서 아옌데는 헌법 보장 협약에 동의한 이유를 밝힌 바 있다. 몇몇 도시에서는 아옌데가 이에 서명한 것을 단지 전술적인 행동으로 치부하기도 했다.
1971
[사회주의 정책 본격화]
'사회주의를 향한 칠레의 길' 정책을 실행하며 구리 광산, 은행 등 대규모 산업을 국유화하고, 정부 주도의 의료·교육 복지 관리, 무료 우유 배급, 토지 개혁 확대 등 급진적인 사회주의 개혁을 단행했다.
권력을 잡자 아옌데는 '사회주의를 향한 칠레의 길(La via chilena al socialismo)'이라는 사회주의 정책 실행에 착수했다. 이에 따르면 대규모 산업(특히 구리 광산과 은행)을 국유화하며, 정부의 의료 및 교육 복지 관리, 영양실조로 병든 어린이에게 대한 무료 우유 배급 등이 있었다. 토지개혁 역시 확대 시행되었는데, 관개된 토지 80 헥타르 이상의 모든 토지를 국유화하여 소수 대지주들의 토지 독점 문제를 해소하고자 했다.
[쿠바와의 관계 복원]
아메리카 대륙에서 쿠바와 외교 관계를 맺지 말자는 미주 기구 협약을 묵살하고 쿠바와 외교 관계를 복원했다.
직후 피델 카스트로 쿠바 대통령이 한 달간 칠레를 순방하며 아옌데 정부에 대한 공개적인 지지를 표명했다.
1971년 칠레는 쿠바와 외교 관계를 복원하여, 멕시코, 캐나다와 함께 아메리카 대륙에서 쿠바와 외교 관계를 맺지 말자는 미주 기구 협약을 묵살했다. 그 직후 쿠바 대통령 피델 카스트로는 한 달간 칠레에 순방했다. 방문 중 카스트로는 수많은 군중을 끌어모으며 아옌데에게 공개적인 충고를 주었는데, 이는 민중들에게 정치적 권리가 '사회주의를 향한 칠레의 길'을 뒷받침하는 증거라고 생각하게 되었다.
[미국의 경제적 압박]
아옌데의 사회주의 정책에 반감을 가진 미국 정부는 칠레에 대한 경제 제재를 가하고, 국제 구리 가격을 크게 떨어뜨려 칠레 경제를 흔들었다.
칠레의 주요 수출품인 구리 가격 폭락은 경제난을 더욱 심화시키는 결정적인 요인이 되었다.
남미에서 처음으로 사회주의 정부가 민주 선거로 등장했다는 사실에 두려움을 느낀 미국이 구리 가격을 크게 떨어지게 하면서 칠레 경제는 더 어려워졌다. 실제로 구리는 칠레의 가장 중요한 수출품이었는데(칠레 수출의 절반 이상이 이 자원 하나에서 나왔다), 국제 시장에서 구리 가격이 떨어지면서 수출 소득이 떨어졌다. 국제 구리 가격이 칠레에 불리하게 요동치면서 1971-72년 칠레 경제에 악영향을 끼쳤다. 1970년 톤당 66$에 이르던 구리 가격은 1971-72년에는 겨우 48-9$로 곤두박칠 쳤다.
1972
[경제 위기 심화]
미국의 경제 제재와 급진적인 국내 정책의 부작용으로 칠레 경제는 극심한 위기에 빠졌다.
1972년 인플레이션율은 140%에 달했고, 실질 GDP는 급격히 감소했다.
생필품 부족과 지하 시장이 확산되는 등 사회적 혼란이 가중되었다.
사회주의 정책에 반감을 품은 다국적 기업들과 자본주의 강대국은 칠레에 대한 경제 투자를 끊기 시작했다. 이러한 결과 1972년에 칠레 에스쿠도화의 인플레이션율은 140%에 이르렀다. 1971년과 1973년 사이에 평균 실질 GDP는 1년마다 -5.6%씩 수축되었고 정부 예산 적자는 치솟고 외환보유고는 떨어졌다. 물가는 상승하는데 정부는 가격 통제를 강제하면서 상점에서 생필품은 사라지고 쌀, 콩, 설탕, 밀가루의 지하 시장이 늘어났다. 아옌데 정부는 국제 채권자와 외국 정부에 채무 디폴트를 선언했다. 또 임금을 인상하는 동시에 모든 물가를 동결했다.
[대규모 파업 발생]
트럭 기사들을 시작으로 소사업가, 전문직 노조, 학생 집단까지 가세한 대규모 파업이 칠레 전역에서 발생하여 경제에 막대한 타격을 주었다.
아옌데는 총사령관을 내무부 장관에 임명하고 트럭 징발을 지시했으나 법원에서 불법으로 선언되는 등 정국 혼란이 가중되었다.
1972년 10월 칠레에서는 파업이 밀어닥쳤다. 처음에는 트럭 기사들이 주동했으나 나중에는 소사업가, 몇몇 (대개 전문직) 노조, 일부 학생 집단이 가세했다. 경제에 타격을 준 것은 물론이거니와 24시간 파업으로 인해 아옌데는 총사령관 카를로스 프라츠 장군을 내무부 장관에 임명하게 된다. 또 그는 국가가 정지하는 사태를 막고자 트럭 징발을 정부에 지시했다. 아옌데의 조치는 칠레 항소 법원에 의해 불법적으로 선포되기에 이르렀으며, 정부는 트럭 소유자들이 트럭을 되돌리도록 명령했다. 그의 임기 내내 (아옌데의 사회주의 노선의 개혁정치를 지지한) 토착민, 노예 출신의 빈민들과 백인 정착민 출신 상류층 사이에 긴장이 높아갔다.
1973
[피노체트 쿠데타와 사망]
미국의 지원을 받은 아우구스토 피노체트 국방 장관이 군사 쿠데타를 일으켜 정권을 장악했다.
아옌데 대통령은 산티아고의 모네다 궁에서 피델 카스트로에게 선물 받은 AK-47 소총으로 최후까지 저항하다 자살했다.
이는 오랜 논란 끝에 그의 가족과 당원들에 의해 인정되었다.
아옌데 대통령이 1973년 3월 총선에서 전보다 더 많은 표를 받아 개혁정치가 계속될 것이 분명해지자 군부에서는 1973년 9월 11일 미국의 지원을 받은 칠레 쿠데타를 일으켰다. 칠레 국경과 공항은 모두 폐쇄되었으며, 모든 정치활동이 금지되었고, 국회와 방송국등의 주요기관은 군이 점령했다. 좌파정당 가입자를 비롯한 반군부인사들은 많은 인사들이 체포되어 총살되었다. 한편 아옌데는 아우구스토 피노체트의 군사 쿠데타에 대항하여 직접 권총을 들고 끝까지 투쟁하다 1973년 산티아고의 모네다 궁(칠레의 대통령궁)에서 피델 카스트로로부터 선물받았던 AK-47 소총으로 자살하였다. 수십 년간의 군부의 처형 의혹이 있었으나, 아옌데 대통령이 피노체트 쿠데타 세력과의 투쟁 끝에 자살했다는 설명은 그의 가족과 그의 정당의 소속한 사람들에게도 널리 인정되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