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말 압델 나세르

정치인, 혁명가, 대통령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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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근 수정 시각 : 2025-10-07- 00:50:3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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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말 압델 나세르
정치인, 혁명가, 대통령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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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집트의 정치인이자 혁명가로 1952년 군부 쿠데타를 이끌어 왕정을 폐지하고 집권했습니다. 1956년부터 사망한 1970년까지 이집트 대통령을 역임하며 수에즈 운하 국유화와 범아랍주의를 주창하며 아랍 세계의 상징적인 지도자로 떠올랐습니다. 아스완 댐 건설 등 근대화 정책을 추진했으나 권위주의적 통치와 인권 탄압 군부 독재로 인한 비판도 존재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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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18

[알렉산드리아 출생]

이집트 알렉산드리아에서 우체국 노동자의 아들로 태어났습니다.

그의 어머니는 나세르가 8살이던 1926년에 사망했으며, 당시 나세르는 카이로에 있어 어머니의 장례식에 참석하지 못했습니다.

그의 전기 작가는 나세르에게서 특별한 힘을 발견하고 그를 큰 도시의 좋은 학교에 보냈다고 평가했습니다.

1935

[학생 시위 참여 및 투옥]

학창 시절 정치에 대한 관심을 이어가며 시위 도중 부상을 입고 2일간 투옥되기도 했습니다.

이후 '이집트의 정치개혁에 관심 있는 카이로 중학생 협회' 의장으로 선출되어 1935년부터 1936년까지 활동하며 자신의 정치적 역량을 키웠습니다.

1937

[이집트 사관학교 입학]

육군 장교가 되겠다는 일념으로 이집트 사관학교에 입학했습니다.

이곳에서 훗날 정치적 동지가 될 압델 하킴 아메르와 안와르 사다트를 만나게 되며, 파루크 국왕의 군주제에 대한 불만을 공유하기 시작했습니다.

1939

[장교 임관과 비밀 쿠데타 계획]

사관학교 졸업 후 장교로 임관, 친구들과 함께 수단 근무를 자원했습니다.

제2차 세계 대전이 발발하자, 이탈리아 추축국 정보요원들과 접촉하여 이집트에서 영국을 몰아내기 위한 쿠데타를 계획했지만 실행에 옮기지 못했습니다.

이 시기, 혁명을 지지하는 민족주의 성향의 젊은 장교들을 규합하기 시작했습니다.

1948

[제1차 중동 전쟁 참전]

제2차 세계 대전에는 이집트군이 참전하지 않았으나, 1948년 제1차 중동 전쟁 중 팔레스타인 전선에서 첫 실전을 경험했습니다.

이후 카이로 왕립 군사학교 교관으로 부임하며 개혁 성향 장교들을 모아 '자유장교단'을 결성하고 조국의 존엄성 회복을 위한 활동을 시작했습니다.

1952

[이집트 혁명 발발]

자유장교단과 나세르는 오랫동안 준비해온 혁명 계획을 실행에 옮겨 카이로의 주요 정부 청사, 라디오 방송국, 경찰서, 군 사령부를 점령했습니다.

이 쿠데타는 군주제를 폐지하고 새로운 공화국 수립의 발판을 마련했으며, 혁명 세력은 영국의 개입 명분을 주지 않고 파루크 국왕의 안전을 보장하며 미국의 개입 가능성도 차단하는 등 능숙하게 상황을 관리했습니다.

쿠데타 직후, 자유장교단은 1차 중동전쟁의 영웅 무하마드 나기브 장군을 대통령으로 내세웠습니다. 나세르는 부의장으로 활동하며 실권을 장악했습니다. 이후 오랜 정치인이던 알리 마히르를 수상으로 임명했으나, 토지 개혁을 거부하자 1952년 9월 7일 사임을 강요했고, 나기브가 새로운 수상이 되었습니다.

1953

[공화국 수립과 권력 투쟁]

농지개혁법의 전면 시행과 함께 나기브는 이집트 군주정의 공식 폐지와 자신을 이집트 공화국의 새로운 대통령으로 선언했습니다.

나세르는 부수상 겸 내무상으로 취임했으나, 나기브와의 권력 투쟁이 심화되었습니다.

결국 1954년 2월 24일, 나기브는 대통령 및 수상 지위에서 사임하고 가택 연금되었습니다.

나세르가 새로운 수상으로 취임했으나, 나기브에 대한 대중의 지지와 복권 요구 시위가 거세지자, 나기브는 잠시 대통령으로 복권되었습니다. 하지만 나세르는 나기브에게 수상 지위를 포기하도록 강요하며 권력을 완전히 장악했습니다.

1955

[외국 자본의 국유화 단행]

나세르의 이집트 정부는 1955년부터 1957년 사이 외국계 은행 및 보험회사, 제조업 회사를 국유화하고 외국인 소유 기업의 이집트인 이전을 강제했습니다.

이러한 조치로 이집트 내 외국인 공동체의 규모가 크게 감소했습니다.

1956

[수에즈 운하 영국군 철수]

나세르는 영국과의 협상을 통해 수에즈 운하에서의 영국군 철수를 이끌어냈고, 6월 13일 영국은 수에즈 운하를 공동 관리권으로 두는 데 동의하며 영국군을 철수했습니다.

이로써 이집트는 운하에 대한 주권을 확보할 발판을 마련했습니다.

[이집트 제2대 대통령 취임]

혁명사령평의회 의장으로서 국가원수 역할을 하던 나세르는 1956년 6월 이집트 총선에서 6년 임기의 대통령에 당선되었고, 6월 23일 공식 취임하여 제2대 대통령으로서 업무를 시작했습니다.

취임 후 튀르크식 봉건적 칭호 폐지 및 토지 개혁을 단행하며 새로운 시대를 열었습니다.

[수에즈 운하 국유화 선언]

영국군 철수 이후, 나세르는 7월 26일 수에즈 운하 국유화를 전격 선언했습니다.

이는 미국의 원조 중단으로 중단된 아스완 댐 건설 자금 마련을 위한 조치이자, 서방 국가들의 압력에 대한 강력한 반서방 정책의 일환이었습니다.

이 결정은 당시 국제사회에 엄청난 파장을 일으키며 나세르를 아랍 세계의 영웅으로 부상시키는 결정적인 계기가 되었습니다..

[수에즈 위기 승리로 영향력 확대]

수에즈 운하 국유화에 대한 서방 국가들의 보복 조치 이후, 10월 이스라엘이 이집트를 침공하며 제2차 중동 전쟁(수에즈 위기)이 발발했습니다.

이스라엘과 밀약을 맺은 영국, 프랑스도 전쟁에 가담했으나, 소련과 미국의 반대 및 유엔의 이집트 국유화 정당성 인정으로 국제사회의 비난 속에 결국 철병하며 나세르의 정치적 승리로 마무리되었습니다.

1958

[아랍 연합 공화국 창설]

수에즈 위기의 성공과 범아랍주의 정책으로 아랍 세계에서 나세르의 인기가 치솟자, 1958년 시리아 군과 시민 지도자들의 요청으로 이집트와 시리아가 통합하여 '통일 아랍 공화국'(UAR)을 건국했습니다.

이는 범아랍국가 건설의 첫 단계로 여겨졌으나, 시리아에 대한 강압 통치와 비밀 경찰 활동 등으로 인해 결국 1961년 해체되었습니다.

1962

[아랍 사회주의 개혁 시작]

통일 아랍 공화국의 해체에도 불구하고, 나세르는 1962년부터 아랍 사회주의를 통한 이집트 근대화 개혁을 시작했습니다.

이 시기, 아스완 댐 공사와 헬완 건설을 비롯한 여러 대규모 산업 계획이 추진되며 이집트의 문화적 발전이 이루어졌습니다.

1965

[두 번째 임기 시작 및 6일 전쟁]

1965년 3월 총선 이후 두 번째 대통령 임기를 시작했으나, 1967년 '6일 전쟁'에서 이집트가 이스라엘에 패배하는 충격적인 결과를 맞이했습니다.

이에 나세르는 사임을 발표했지만, 그의 복귀를 요구하는 대규모 민중 시위로 인해 대통령직에 복권되었습니다.

복권 후, 나세르는 1968년 스스로를 총리로 임명하고 이스라엘에 잃은 영토 수복을 위한 '소모전'을 개시했습니다. 또한 군의 비정치화 과정과 정치적 자유 개혁을 추진하는 등 국가 재건 노력을 기울였습니다.

1970

[심장마비로 서거]

아랍 연맹 회담을 마친 후 카이로 공항에서 쿠웨이트 사절단을 환송하고 기절, 심장마비로 사망했습니다.

카이로에서 열린 그의 장례식에는 500만 명 이상의 애도자가 참석했으며, 아랍 세계는 그의 죽음에 깊은 애도를 표했습니다.

나세르는 범아랍주의와 사회적 평등, 반제국주의 노력의 상징으로 기억되고 있습니다.

[국장으로 장례식 거행]

이집트 국민의 깊은 애도 속에 국장으로 치러졌습니다.

그의 시신은 메카를 향해 천으로만 덮인 채 안장되었습니다.

그의 죽음은 아랍 민족주의 운동의 큰 전환점이 되었음을 상징하며 많은 이들에게 기억되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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