허준
조선 시대 의관, 의학자, 동의보감 저자
최근 수정 시각 : 2025-09-02- 03:13:43
- 조선 중기의 위대한 의관이자 의학자. - 조선 한방 의학의 결정판인 《동의보감》을 편찬하여 동아시아 의학사에 큰 획을 그음. - 선조의 어의로서 임진왜란 중에도 왕을 호종하며 건강을 돌본 공신. - 조정의 탄핵과 유배 속에서도 의술과 학문에 정진하여 후대에 길이 남을 업적을 남김. - 그의 의서는 일본과 청나라에서도 인정받았으며 지금도 여러 나라에서 번역 출판되고 있는 세계적인 의학 고전이다.
1539
[의학의 길을 걷다]
조선 중기의 위대한 의학자 허준이 태어났다.
그의 정확한 출생 연도에 대한 논란이 있으나, 일반적으로는 1539년으로 알려져 있으며, 이는 그가 의학의 길을 걷기 시작한 중요한 시점이다.
허준의 출생 연도는 1539년 외에도 1537년, 1543년, 1546년 등 여러 설이 존재하며, 이는 오늘날까지도 역사학계에서 논란이 되고 있는 부분이다. 하지만 최립의 문집 '간이집' 등 여러 기록을 통해 1539년생 설이 가장 유력하게 받아들여지고 있다.
1569
[내의원 의관으로 출사]
유희춘과 이조판서 홍담의 천거를 받아 조선 최고의 의료기관인 내의원에 들어가 궁중 의사, 곧 의관으로서의 첫발을 내디뎠다.
이는 그의 인생에서 중요한 전환점이 되었다.
비록 의과 시험을 거치지 않았으나, 그의 뛰어난 의술과 명성을 바탕으로 내의원에 특별 채용되었다. 1570년에는 유희춘의 병까지 치료하며 한성부 장안에서 더욱 명성을 높였다.
[고관대작 부인 병 완치]
31세 되던 해, 당시 고위 관료였던 부제학 유희춘의 부인이 앓던 병을 성공적으로 치료하며 의술을 인정받았다.
이 사건으로 한성부 고관대작들 사이에서 그의 이름이 널리 알려지기 시작하며 명성을 쌓았다.
허준은 유희춘 부인의 병을 고치며 그의 실력을 증명했고, 유희춘은 그해 이조판서 홍담에게 허준을 소개했다. 이 만남은 허준이 내의원에 출사하는 결정적인 계기가 되었다.
1573
[어의 자질 인정 승진]
내의원 첨정 재직 중 정3품 통훈대부와 내의원정에 오르며 빠른 승진을 거듭했다.
이는 동료 의관들보다 뛰어난 그의 의술과 능력을 조정에서 인정받았음을 의미한다.
1572년 종4품 내의원첨정에 재직 중이던 기록이 최초로 확인되며, 불과 1년 후 정3품에 오르는 등 파격적인 승진을 통해 왕실의 신임을 얻기 시작했다.
1590
[왕자 구명, 당상관 승진]
왕자 신성군을 성공적으로 치료한 공로로 당상관(정3품 통정대부 이상)으로 승진했다.
당시 의관에게 당상의 품계를 내리는 것은 파격적인 일이었고, 삼사에서 거세게 탄핵했으나 선조는 이를 거부하며 그의 능력을 굳건히 신뢰했다.
왕자를 치료한 것은 의관으로서 당연히 해야 할 일이며, 의관에게 당상의 가자를 내리는 것은 있을 수 없다는 삼사의 주장이 거셌으나, 선조는 허준의 공을 높이 사 그의 승진을 밀어붙였다. 이는 허준에 대한 선조의 깊은 신뢰를 보여주는 대목이다.
1592
[임진왜란 선조 호종]
임진왜란이 발발하자 선조를 의주까지 호종하며 왕의 건강을 지극히 돌보는 공로를 세웠다.
이 헌신적인 노력으로 그는 훗날 공신의 반열에 오르게 된다.
전란의 혼란 속에서도 왕의 곁을 지키며 의관으로서의 책임을 다했다. 그의 충성심과 뛰어난 의술은 위기에 처한 왕실에 큰 버팀목이 되었고, 이는 훗날 호성공신 책봉으로 이어졌다.
1596
[광해군 치료, 정2품 승진]
왕세자 광해군의 병을 성공적으로 치료하여 정2품하계 자헌대부로 승진했다.
대간들의 거듭된 탄핵에도 불구하고, 선조는 그의 공로를 인정하며 승급을 확고히 유지시켰다.
선조는 허준이 광해군의 병을 고친 공로를 치하하며 승급을 명했으나, 삼사는 의관의 지나친 승진이라며 거세게 반대했다. 그러나 선조는 '공로가 있는 자들이다'라며 대간의 요청을 듣지 않아, 허준에 대한 왕의 신임이 얼마나 두터웠는지 알 수 있다.
[의서 편찬 시작]
선조의 명을 받아 동료 의관들과 함께 의서 편찬에 착수했다.
정유재란으로 작업이 중단되자, 선조는 허준에게 홀로 책임지고 새로운 의서를 만들 것을 명하며 500여 권의 의서를 참고하도록 내어주었다.
이는 훗날 위대한 의서 《동의보감》 편찬의 시작이 되었다.
임진왜란 이후 선조는 혼란 속에서 잃어버린 의학 지식을 복원하고 정리할 필요성을 느끼고 허준에게 의서 편찬을 명했다. 여러 차례 중단과 재개를 거치며 허준은 이 막중한 임무를 홀로 책임지게 되었고, 이는 그가 조선의 의학 지식을 집대성하는 기회를 마련해주었다.
1604
[호성공신, 의관 최초 정1품]
임진왜란 어가 호종의 공로로 호성공신 3등에 책록되었고, 의관으로서는 전례 없이 정1품 양평부원군에 올랐다.
비록 대간의 반대로 종1품 양평군으로 강등되었으나, 이는 의관으로서 최고의 영예였다.
선조를 의주까지 호종하며 세운 공을 인정받아 호성공신이 되었고, 동시에 의관 신분으로는 처음으로 정1품 품계를 받으며 양평부원군에 봉해졌다. 당시 신분 사회에서 의관이 정1품에 오르는 것은 파격적인 일이었기에, 대간들의 반대가 거셌고 결국 종1품 양평군으로 강격되었다. 하지만 이 자체로도 그의 공적이 얼마나 컸는지 보여주는 상징적인 사건이다.
1608
[선조 승하, 파직 유배]
선조가 병세가 위중하다가 갑자기 승하하자, 어의로서 책임 추궁을 당한 끝에 파직되고 공암(孔巖)으로 문외출송되었다.
광해군은 그를 빠른 시일 내에 복귀시키려 했으나 삼사의 반발로 무산되었다.
왕의 죽음은 당시 어의에게 큰 책임이 따르는 일이었고, 결국 허준은 문외출송이라는 유배형에 처해졌다. 하지만 유배 중에도 그는 왕명으로 시작했던 의서 편찬을 멈추지 않고 계속 이어나갔다.
1610
[세계최초 동의보감 완성]
유배 중에도 흔들림 없이 15년간의 연구와 집필 끝에 조선의 모든 의학 지식을 집대성한 임상의학 백과사전 《동의보감》을 마침내 완성하여 광해군에게 바쳤다.
이 책은 동아시아 의학 발전에 지대한 영향을 미쳤고, 세계적으로도 그 가치를 인정받았다.
선조의 명으로 1596년에 시작된 의서 편찬 작업은 임진왜란과 정유재란, 그리고 허준의 유배라는 험난한 과정을 거쳤다. 하지만 허준은 굴하지 않고 유배지에서도 연구를 거듭하여 마침내 1610년, 인체를 내장, 외형, 잡병, 탕액, 침구로 나누어 체계적으로 정리한 《동의보감》을 완성했다. 이 위대한 저작은 조선 한방 의학의 기준을 제시했을 뿐만 아니라, 18세기에는 일본과 청나라에서도 간행되었으며, 오늘날에도 여러 나라에서 번역 출판되는 세계적인 의학 고전이다.
1611
[유배 해제, 내의원 복직]
《동의보감》을 광해군에게 바친 후, 유배가 풀리고 신원(伸冤)되어 내의원에 복직했다.
그는 남은 생애 동안 후진 양성과 의서 편찬 및 수리 등에 힘쓰며 의학 발전에 기여했다.
오랫동안 기다려온 복직 이후 허준은 단순히 치료에만 전념하지 않고, 의학 지식의 보급과 계승, 그리고 새로운 의서 연구에 매진하며 조선 의학의 기틀을 다지는 데 헌신했다.
1615
[위대한 의학자 서거]
77세의 나이로 세상을 떠났다.
그의 죽음 이후 광해군은 생전에 보류되었던 정1품 보국숭록대부 양평부원군으로 추증하여, 조선 의학 발전에 기여한 그의 위대한 공로를 기렸다.
허준의 사망 이후 광해군은 그가 생전에 받지 못했던 최고의 품계인 정1품 보국숭록대부 양평부원군으로 추증하며 조선 의학 발전에 지대한 공헌을 한 그의 업적을 높이 평가했다. 그의 묘소는 현재 경기도 파주시 진동면 하포리 민간인통제구역 내에 위치해 있다.
1991
[허준 묘소 재발견]
한국 전쟁 이후 오랫동안 방치되어 있던 허준과 그의 부인 안동 김씨, 그리고 생모의 묘소가 군사 협조 아래 마침내 재발견되었다.
이로써 그의 유적은 다시 세상에 알려지며 대중의 관심을 받게 되었다.
묘소의 발견은 허준 연구에 새로운 활력을 불어넣었으며, 1992년 경기도 기념물로 지정되고 2006년에는 군사안보 관광 구역으로 일반에 공개되면서 많은 이들이 허준 선생의 발자취를 기릴 수 있게 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