헨리크 입센
극작가, 시인, 현대극의 아버지
최근 수정 시각 : 2025-09-02- 03:13:37
- 노르웨이를 대표하는 위대한 극작가이자 시인. - 현대극의 아버지로 불리며 근대 시민극과 현대 현실주의극의 초석을 다짐. - 낭만주의 사실주의 상징주의를 아우르며 독자적이고 심오한 작품 세계 구축. - 사회 문제에 대한 날카로운 통찰과 인간 내면의 갈등을 깊이 있게 탐구. - 《브랜드》 《페르 귄트》 《인형의 집》 등으로 전 세계 연극사에 지대한 영향.
- 헨리크 입센 탄생
- 첫 작품 <카틸리나> 집필
- <카틸리나> 출판과 <전사의 무덤>
- 베르겐 국민극장 합류
- 《헬게란의 용사들》과 이직
- 《사랑의 희극》 발표와 극장 폐쇄
- 최고 걸작 《왕위를 노리는 자들》
- 27년 외국 생활 시작 (이탈리아)
- 극시 《브랜드》 집필
- 《브랜드》 출판, 최고 시인 등극
- 또 다른 걸작 《페르 귄트》
- 사실주의 시민극 <청년동맹>
- 현대사회극 《사회의 기둥》
- 《인형의 집》 발표
- 《민중의 적》 발표와 논란
- 《물오리》, 사상 변화의 시작
- 27년 만의 조국 귀향
- <건축가 솔네스>, 상징주의 시작
- 마지막 작품 <우리들 사자가 눈뜰 때>
- 헨리크 입센 별세 (국장)
1828
[헨리크 입센 탄생]
노르웨이의 위대한 극작가이자 시인 헨리크 요한 입센이 텔레마르크주 시엔에서 태어났습니다.
그는 훗날 "현대극의 아버지"로 불리며 연극사에 한 획을 그었습니다.
1836
[부친의 사업 도산]
8살이 되던 해, 입센은 부유했던 상인 부친의 도산으로 암울한 소년 시절을 보내야 했습니다.
이 경험은 그의 작품 세계에 깊은 영향을 주었습니다.
1843
[약제사 조수 시절과 사생아]
15세에 그림스터 읍에서 약제사 조수로 일하며 연상의 하녀와 사이에서 아기를 낳게 되는 사건을 겪었습니다.
이 시기는 입센의 성장기에 중요한 부분을 차지합니다.
이 그림스터 시대가 입센의 성장기이며, 그의 생애에 큰 영향을 미쳤을 것으로 짐작됩니다.
1848
[첫 작품 <카틸리나> 집필]
20세 겨울, 입센은 고대 로마의 카틸리나를 소재로 한 시극 <카틸리나>를 썼습니다.
이는 그의 일생을 관통하는 '빛과 어둠 사이의 내적 갈등' 테마를 처음 선보인 작품입니다.
이 작품은 1848년 프랑스 혁명에 자극을 받아 쓰여졌으며, 이후 입센 작품의 중요한 테마가 됩니다.
1849
[<카틸리나> 출판과 <전사의 무덤>]
친구의 도움으로 <카틸리나>를 자비 출판한 입센은 수도 크리스티아니아(오슬로)로 이주합니다.
같은 해, 그의 1막 작품 <전사의 무덤>이 크리스티아니아에서 성공적으로 상연되었습니다.
1851
[베르겐 국민극장 합류]
1851년 가을, 입센은 베르겐 국민극장의 무대감독 겸 극작가로 초빙됩니다.
이곳에서의 6년간은 그의 극작가 수업 시대로, 매년 신작을 써야 하는 의무가 주어졌습니다.
이 시기 그는 연극 연수를 위해 덴마크, 독일 등지를 여행하며 무대 경험을 쌓았고, 이는 훗날 극작에 큰 도움이 되었습니다.
1854
[《잉게르 부인》 발표]
베르겐 시절의 대표작 중 하나인 《외스트로트의 잉게르 부인》을 발표했습니다.
흥행에는 실패했으나, 교묘한 줄거리 구성과 음산한 분위기 묘사가 돋보였습니다.
1855
1857
[《헬게란의 용사들》과 이직]
아이슬란드 사가를 통해 영감을 받아 《헬게란의 용사들》을 썼습니다.
같은 해, 크리스티아니아의 노르웨이 극장으로 자리를 옮겨 국민 문학 운동에 전념하게 됩니다.
1858
[수잔 토레센과의 결혼]
베르겐에서 인연을 맺었던 수잔 토레센과 결혼합니다.
수잔은 입센에게 큰 영향을 미쳤으며, 《헬겔란트의 해적》과 《사랑의 희극》의 여주인공 모델이 되기도 했습니다.
같은 해 아일랜드 전설을 소재로 한 신문극 《헬겔란트의 해적》을 발표했습니다.
1859
1862
[《사랑의 희극》 발표와 극장 폐쇄]
당시 연애 풍속을 해학적으로 비판한 운문극 《사랑의 희극》을 발표했습니다.
같은 해, 경영난으로 인해 노르웨이 극장이 폐쇄되면서 입센은 경제적으로 더욱 어려워졌습니다.
이 작품에 등장하는 목사의 희화화는 보수파로부터 공격을 받기도 했습니다.
1863
[최고 걸작 《왕위를 노리는 자들》]
조국을 떠나기 전 셰익스피어적 수법이 엿보이는 역사극 《왕위를 노리는 자들》을 집필했습니다.
이 작품은 당시까지의 입센 작품 중 최고 걸작으로 평가됩니다.
1864
[27년 외국 생활 시작 (이탈리아)]
노르웨이가 덴마크-프로이센 전쟁에 참전하지 않은 것에 대한 반감과 고향에 대한 소외감으로 1864년 4월, 조국을 떠나 이탈리아로 향했습니다.
이후 27년간 독일과 이탈리아에 머무르며 극작에 전념했습니다.
1865
[극시 《브랜드》 집필]
이탈리아에서 어려운 생활 중 극시 《브랜드》를 집필했습니다.
이 작품은 덴마크-프로이센 전쟁 당시 노르웨이 국민의 배신 행위를 비난하는 내용으로 젊은층을 매료시켰습니다.
1866
[《브랜드》 출판, 최고 시인 등극]
《브랜드》가 덴마크에서 출판되며 순식간에 여러 판을 거듭하는 대성공을 거두었습니다.
이 작품으로 입센은 경제적 윤택과 함께 노르웨이 최고의 시인 반열에 오르게 됩니다.
1867
[또 다른 걸작 《페르 귄트》]
《브랜드》와 한 쌍을 이루는 극시 《페르 귄트》를 발표했습니다.
처음에는 비평가들을 당황하게 했으나, 오늘날 노르웨이 문학의 최고 작품으로 평가받고 있습니다.
이 작품은 노르웨이 민화를 소재로 했으며, 노르웨이 국민의 초국가 의식에 대한 신랄한 풍자를 담고 있습니다. 1876년 그리그의 음악과 함께 초연되어 대성공을 거두었습니다.
1869
[사실주의 시민극 <청년동맹>]
《청년동맹》을 시작으로 입센은 운문을 완전히 포기하고 사실주의 시민극의 제2기 창작 활동에 돌입합니다.
1875
[현대극 전향의 계기]
비에른손이 현대극을 쓰기 시작한 것에 자극받아 입센은 현대사회극으로 전향을 결심합니다.
이는 그의 후기 작품 세계의 중요한 전환점이 됩니다.
1877
[현대사회극 《사회의 기둥》]
《사회의 기둥》을 발표하며 본격적으로 현대사회극으로 전향했습니다.
개인의 해방을 목표로 사회를 가차 없이 비판하는 '반사회극'의 시대를 열었습니다.
소년 시절의 반사회적 경험과 외국에서의 고향 관찰을 바탕으로, 사회의 해독 근원을 날카롭게 분석하여 독자에게 제시했습니다. 이 작품들은 전 세계에 소개되어 큰 반향을 불러일으켰습니다.
1879
[《인형의 집》 발표]
여성 해방과 사회적 위선을 날카롭게 다룬 《인형의 집》을 발표하며 유럽 연극계의 선두 주자로 우뚝 섰습니다.
1881
1882
[《민중의 적》 발표와 논란]
《민중의 적》을 발표하며 다윈과 졸라의 사상에 따르는 급진적 작가로 평가받았습니다.
파리 공연에서는 드레퓌스 사건을 연상시킨다는 이유로 관객 난투극이 발생, 공연이 취소되는 해프닝도 있었습니다.
1884
[《물오리》, 사상 변화의 시작]
《물오리》를 기점으로 입센의 사회사상은 내면적, 회의적, 자조적으로 변화하기 시작하며, 이후 상징적인 경향이 짙어집니다.
1886
[《로스메르스흘름》 발표]
정치 투쟁을 줄거리로 하면서도 남녀 간의 심리적 상극을 깊이 있게 다룬 《로스메르스흘름》을 발표했습니다.
1888
1890
1891
[27년 만의 조국 귀향]
27년간의 긴 외국 생활을 청산하고 마침내 조국 노르웨이로 돌아왔습니다.
이는 그의 후기 작품 활동의 새로운 시작점이 됩니다.
1892
[<건축가 솔네스>, 상징주의 시작]
귀향 후 첫 작품인 <건축가 솔네스>를 발표하며, 세계적으로 유명해진 노예술가의 자기고백적 면모와 상징주의적 경향이 짙어지는 제3기 작품 세계를 열었습니다.
1894
1896
1899
[마지막 작품 <우리들 사자가 눈뜰 때>]
입센의 일생을 결론짓는 심각한 분위기의 마지막 희곡, <우리들 사자가 눈뜰 때>를 발표했습니다.
이 작품을 에필로그로 여기며 새로운 극에 대한 의욕을 보이기도 했습니다.
젊은 시절 제임스 조이스가 이 작품에 대해 열렬한 소개문을 썼을 정도로 중요한 의미를 가집니다.
1906
[헨리크 입센 별세 (국장)]
병마에 시달리던 헨리크 입센은 1906년 5월 23일, 78세의 나이로 세상을 떠났습니다.
그의 장례는 국가 차원의 국장으로 치러지며 위대한 작가의 마지막을 기렸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