허균
조선 문신, 소설가, 사상가, 시인, 개혁가
최근 수정 시각 : 2025-09-02- 03:13:27
조선 중기의 문신이자 시인 소설가 허균은 『홍길동전』을 지어 한국 최초의 한글 소설이라는 위대한 업적을 남겼다. 그는 신분 차별과 사회 모순을 비판하며 백성들의 복리 증진을 주장한 개혁 사상가였으며 유교뿐 아니라 불교 도교 심지어 천주교에도 깊은 관심을 보인 자유로운 영혼의 소유자였다. 하지만 광해군 대 인목대비 폐모론에 적극 가담하고 역모 혐의에 연루되어 비극적인 최후를 맞이했다.
1569
[허균 탄생]
조선 강원도 강릉에서 초당 허엽과 강릉 김씨 사이의 셋째 아들이자 막내로 태어났다.
5세 때부터 형 허봉의 친구 이달에게 글을 배웠고, 9세에 시를 지어 주변을 놀라게 했다.
1580
[부친 허엽 별세]
12세에 부친 초당 허엽이 상주 객관에서 별세했다.
학문은 둘째 형의 벗인 이달에게서 배우다가 나중에 류성룡에게 배웠고, 서자 출신인 이달의 불우한 처지에 깊이 공감했다.
1585
1588
[형 허봉 병사]
이이 탄핵으로 유배 갔던 친형 허봉이 20세에 병사했다.
누이 허난설헌도 시댁과의 불화와 자식들의 연이은 죽음으로 고통받던 시기였다.
1589
1592
[임진왜란 중 가족 상실]
임진왜란 중 부인 안동 김씨가 단천에서 첫아들을 낳고 사망했으며, 어린 아들도 전란 중에 병사했다.
이 비극적인 경험 이후 집필에 몰두하며 호를 '교산'으로 사용했다.
1593
[김종직 비판 『김종직론』 발표]
종전 후 학문 연구와 과거 준비 중, 사림의 중시조 김종직을 위선자라 비판하는 『김종직론』을 발표하여 사회에 큰 충격을 주었다.
허균은 김종직이 조의제문을 지어 세조 찬위를 비난했음에도 세조가 주는 관직을 받았다고 비판하며 그를 '위학자'이자 '이익과 관록을 앉아서 차지한 자'로 혹평했다. 이 비판은 사림파에게 심한 공격을 받는 원인이 되었으나, 그는 자신의 소신을 당당하게 펼쳤다.
1594
[문과 급제 및 관직 시작]
정시문과 을과에 급제하며 승문원 사관으로 벼슬길에 올랐다.
명나라 사신 접견 업무를 수행하며 예조좌랑, 병조좌랑으로 빠르게 승진했다.
1597
[중시 문과 장원급제]
문과 중시에 장원급제하여 종3품으로 승진했다.
관례상 정3품 당상관 승진이 일반적이었으나 그에게는 인사 불이익이 가해졌다.
1598
[황해도 도사 파직 (기생)]
황해도 도사로 부임했으나 애첩인 기녀를 데리고 간 일로 탄핵받아 여섯 달 만에 파직되었다.
뒤에 복직하여 춘추관기주관, 형조정랑 등을 지냈다.
1599
[황해도 도사 재파직]
다시 황해도 도사로 나갔으나, 한성부 기생을 데리고 간 일로 사헌부와 사간원의 지속적인 탄핵을 받아 파직당했다.
1601
[전운판관, 매창과 교류]
충청·전라 지방의 세금을 걷는 전운판관으로 부임하여 부안의 유명한 기생이자 시인 매창과 교류했다.
그는 매창에게 벼슬을 그만두고 은거하겠다는 약속을 하기도 했다.
1602
[심희수 탄핵 시도 및 명 사신 종사관]
세자시강원 시절 종1품 대신 심희수를 물러가라고 했다는 이유로 사헌부 지평에게 탄핵받아 추고당했으나, 같은 해 명나라 사신을 맞는 원접사의 종사관으로 외교관들을 상대했다.
1604
1606
[명 사신 영접 및 난설헌 시집 출간 계기 마련]
명나라 사신 주지번 영접 종사관으로 임명되어 주지번과 막힘없이 대화하며 글재주와 넓은 학식을 뽐냈다.
이때 누이 허난설헌의 시선집을 주지번에게 주어, 그녀의 사후 18년 뒤 중국에서 『난설헌집』이 출간되는 계기를 만들었다.
1607
[삼척부사 파직 (숭불 논란)]
명나라에 조선 문화를 알린 공로로 삼척부사가 되었으나, 재직 중 법당 출입과 숭불을 이유로 사간원과 사헌부의 거듭된 탄핵을 받아 석 달이 못 되어 파직되었다.
[공주 목사, 서얼들과 교류]
공주 목사로 부임하여 양반가의 서자 무리와 얼손들과 허물없이 교류하며, 『국조시산』을 편찬했다.
1609
[천주교 기도문 입수]
명나라 사절단 수행원으로 베이징에 가서 천주교의 기도문을 얻어왔다.
이는 그가 새로운 문물과 서학에 남다른 관심을 보였음을 입증한다.
1610
[과거 부정 연루, 의금부 갇힘]
전시 대독관으로서 자신의 조카와 조카사위를 합격시켰다는 혐의로 사헌부에서 탄핵받아 의금부에 갇혀 지냈다.
[전라북도 함열로 유배]
과거 부정 혐의로 42일간 의금부에 갇힌 뒤, 전라북도 익산군 함열로 유배되었다.
당시 허균이 죄를 뒤집어썼다는 여론도 있었다.
1611
[『성소부부고』 저술]
유배지에서 학동들을 가르치고 글을 써서 문집 『성소부부고』 64권을 엮었다.
이 책에는 당대의 용사, 충신, 명사들에 대한 인물평이 담겨 있다.
1612
[『홍길동전』 저술]
유배지에서 한국 최초의 한글 소설인 『홍길동전』을 저술했다.
이 작품은 조선 초 실존 인물 홍길동을 모티프로 이상향을 표현했으며, 이후 석방되어 몇 년간 태인에 은거했다.
1613
[계축옥사 연루 위기, 대북당 가담]
계축옥사 당시 평소 친교가 있던 서얼들이 처형당하자, 연루 위기를 피하고자 이이첨에게 아부하여 대북당에 참여하며 신변의 안전을 도모했다.
1614
1615
[명나라에서 조선 역사 기록 입수]
명나라 천추사로 파견되어 조선왕 이성계가 이인임의 아들로 기록된 문서를 입수, 조선으로 보내는 등 진귀한 책과 유교, 불교 경전을 입수하여 광해군의 칭송을 받았다.
[가선대부 승진 및 천주교 서적 추가 입수]
문신 정시 문과 수석, 동부승지를 거쳐 명나라에서 많은 서책과 함께 천주교 기도문, 지도 등을 들여온 공로로 가선대부로 특별 승진했다.
1616
1617
[의정부 좌참찬, 흉격 사건 연루]
정2품 의정부 좌참찬 겸 예조판서에 올랐으나, 흉격 사건에 연루되어 길주에 유배되었다가 해명 후 풀려났다.
[인목대비 폐모론 적극 가담]
인목대비 폐출 논의에 적극적으로 앞장서며 깡패들을 동원해 궁궐 뒷산에서 불온한 움직임을 보이기도 했다.
이는 훗날 역모 누명으로 돌아오는 원인이 되었다.
허균은 이이첨, 정인홍보다도 더 인목대비 폐모론에 앞장섰고, 이 때문에 폐모를 반대하던 영의정 기자헌과 수시로 마찰을 빚었다. 또한 신분제도와 서얼 차별에 항거하기 위해 서자와 불만 계층을 규합하여 혁명을 계획하기도 했다.
[기준격의 역모 고변 시작]
폐모에 반대하던 영의정 기자헌이 유배되자, 그의 아들 기준격은 허균이 배후조종했다고 의심하며 "허균이 역모를 꾸몄다"고 상소하여 그를 공격하기 시작했다.
1618
[남대문 벽서 사건 발생]
남대문에 "포악한 임금을 치러 하남 대장군인 정아무개가 곧 온다"는 내용의 벽서가 붙는 사건이 발생했다.
허균의 심복 현응민이 붙였다고 전해지며, 이는 그에 대한 국문과 체포로 이어지는 결정적 계기가 되었다.
[『성소부부고』 보존 노력]
자신의 최후를 예감한 허균은 체포되기 전 문집 『성소부부고』와 누이 허난설헌의 시문들을 딸의 집으로 옮겨, 외손자 이필진에게 훗날 간행해줄 것을 유언으로 남겼다.
[역모 혐의로 능지처참]
기준격의 상소와 남대문 벽서 사건으로 의금부에서 국문을 받고 역적모의를 하였다는 심복들의 진술로 능지처참형을 당했다.
향년 49세.
그의 아들들은 처형되거나 숨어 살았으나, 출가한 딸들은 연좌되지 않았다.
1623
[인조반정 후 복권 불발]
인조 반정 이후에도 북인 당원이었던 이유로 복권되지 못했다.
정조와 고종 때 복권 여론이 나타났으나 노론의 강한 반대로 무산되어 대한제국 멸망까지 복권되지 못했다.
1668
[외손자 이필진의 문집 간행]
허균이 남긴 유언에 따라 외손자 이필진이 그의 문집과 『성소부부고』를 간행하여 후대에 그의 작품들이 알려지게 되었다.
1910
[『홍길동전』 저자 밝혀짐]
대한제국 멸망 이후 허균의 저서 『홍길동전』과 그의 사상에 대한 연구가 시작되었으며, 유몽인 등의 기록을 통해 『홍길동전』의 저자가 허균임이 공식적으로 알려지게 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