핀란드 내전
내전, 전쟁, 핀란드 역사
최근 수정 시각 : 2025-09-02- 03:11:58
핀란드 내전은 1918년 핀란드 독립 후 국가 주도권을 놓고 벌어진 처절한 동족상잔입니다. 러시아 제국의 붕괴와 제1차 세계 대전의 혼란 속에서 좌파 적군과 우파 백군이 충돌했으며 독일의 개입으로 백군이 승리했습니다. 이 전쟁은 핀란드 사회에 깊은 상처를 남겼지만 결국 민주 공화국으로 나아가는 계기가 되었습니다.
- 여성 참정권 세계 최초 도입
- 러시아 차르 니콜라이 2세 퇴위
- 핀란드 권력법 통과와 갈등
- 러시아 10월 혁명 발발
- 핀란드 정치적 총파업
- 핀란드 독립선언
- 러시아, 핀란드 주권 인정
- 핀란드 내전의 서막
- 적핀란드 정부 출범
- 내전 속 공포의 테러 발발
- 독일 엽병대대 바사 상륙
- 독-러 브레스트-리토프스크 조약
- 독일 동해사단 핀란드 상륙
- 독일군, 헬싱키 점령
- 라흐티 점령, 적군 병력 단절
- 적군 지도부 러시아 도주
- 카렐리야 거점 비푸리 함락
- 핀란드 내전 공식 종료
- 포로수용소의 비극
- 독일 패망, 핀란드 왕위 포기
- 핀란드 민주 헌법 발효
- 러-핀 타르투 조약 체결
1906
[여성 참정권 세계 최초 도입]
러시아의 지배를 받던 핀란드 대공국에서 총파업 이후 정치적 불안이 가중되자, 의회 개혁을 통해 신분제가 폐지되고 보통선거권이 도입되었습니다.
특히 세계 최초로 여성 시민에게도 모든 참정권을 허용하며 유권자 수가 10배 이상 폭증, 핀란드 사회민주당이 강력한 지지를 얻게 되었습니다.
이는 민주주의 역사에 큰 획을 긋는 사건으로 평가됩니다.
1917
[러시아 차르 니콜라이 2세 퇴위]
제1차 세계 대전의 패배와 러시아 내부의 염증이 겹치면서 러시아 차르 니콜라이 2세가 퇴위하는 '2월 혁명'이 발생했습니다.
이로써 핀란드의 자치적 지위가 복구되었고, 핀란드 의회는 비로소 제대로 된 정치권력체로 기능할 기회를 얻게 됩니다.
러시아의 혼란은 핀란드 독립의 결정적인 발판이 됩니다.
[핀란드 권력법 통과와 갈등]
핀란드 좌파가 다수를 차지한 토코이 내각이 핀란드 국내 문제에 대한 러시아 영향력을 차단하고 자치를 확대하는 '권력법'을 통과시켰습니다.
그러나 러시아 임시정부는 이를 거부하고 핀란드 의회를 해산, 재선거를 실시하며 핀란드 내 정치적 갈등이 폭발하는 기폭제가 됩니다.
[러시아 10월 혁명 발발]
블라디미르 레닌이 이끄는 볼셰비키가 '10월 혁명'을 일으켜 페트로그라드의 정치권력을 장악했습니다.
이는 핀란드의 독립을 둘러싼 권력 투쟁에 새로운 변곡점을 가져왔으며, 핀란드 좌파와 우파 모두 러시아의 불안정한 정세를 자국의 이익에 활용하려는 움직임을 가속화합니다.
[핀란드 정치적 총파업]
10월 의회선거에서 사회민주당이 다수당 지위를 상실하자, 좌파는 비타협적인 '우리는 요구한다' 계획을 발표하고 11월 14일부터 19일까지 총파업을 개시했습니다.
이는 '권력법'과 의회권력 선포를 부정하는 보수주의자들에 대한 강력한 정치적 압력 행사였으며, 핀란드 사회에 좌우 이념 갈등의 골을 더욱 깊게 만들었습니다.
[핀란드 독립선언]
스빈후부드 내각의 원로원이 제안한 핀란드 독립선언이 의회를 통과했습니다.
당시 사회민주당은 반대표를 던졌지만, 이는 핀란드가 러시아의 혼란 속에서 독립국가 건설이라는 역사적 기회를 잡은 순간이었습니다.
이제 핀란드 국민에게 남은 과제는 국제적인 독립 승인을 받아내는 것이었습니다.
[러시아, 핀란드 주권 인정]
핀란드 독립 선언 후, 스빈후부드 내각은 러시아 레닌과 협상하여 핀란드 주권을 인정받는 데 성공합니다.
독일의 강력한 압력을 받던 볼셰비키는 핀란드를 포기할 수밖에 없었고, 이는 핀란드의 완전한 독립을 향한 결정적인 발걸음이 되었습니다.
1918
[핀란드 내전의 서막]
핀란드 독립 후 좌파와 우파의 극한 대립은 결국 무력 충돌로 이어졌습니다.
1월 25일 백위대가 '핀란드 백군'으로 재명명되며 교전 명령이 내려진 직후, 1월 26일 적군 역시 헬싱키 노동자회관에 붉은 제등을 내걸며 혁명 명령을 하달했습니다.
이로써 핀란드는 돌이킬 수 없는 동족상잔의 비극으로 치닫게 됩니다.
적위대는 1월 27일 밤 대규모 동원을 개시했고, 헬싱키 적위대를 포함한 일부 병력은 1월 23일부터 26일 사이 비푸리-탐페레 사이 철도 확보에 나섰습니다. 철도 확보는 주요 거점 보호와 페트로그라드의 볼셰비키 지원군 호위, 그리고 백군의 보급 차단을 위한 핵심 전략이었습니다.
[적핀란드 정부 출범]
적위대가 헬싱키를 장악한 직후, '핀란드 인민대표단'이라는 기구가 지도부를 맡는 적핀란드가 수립되었습니다.
이들은 핀란드 사회민주주의에 기반한 민주사회주의를 추구하며 레닌의 프롤레타리아 독재와는 다른 독자적인 노선을 걷고자 했습니다.
이는 핀란드 내전의 주요 교전 당사자가 공식적으로 모습을 드러낸 사건입니다.
[내전 속 공포의 테러 발발]
핀란드 내전 발발과 함께 적군과 백군 양측에서 상대방의 권력 구조를 파괴하고 공포를 심어주기 위한 테러가 자행되기 시작했습니다.
적군에 의한 '적색 테러'로 약 1,650명, 백군에 의한 '백색 테러'로 약 10,000명이 희생되었으며, 이는 핀란드 사회에 깊은 정신적 상처를 남겼습니다.
특히 백색 테러는 백군이 점령지를 확대하면서 전쟁 후반으로 갈수록 그 규모가 커졌습니다.
[독일 엽병대대 바사 상륙]
핀란드 백군에게는 숙련된 지휘관이 절실했습니다.
1915년부터 1917년까지 독일에서 훈련받고 동부전선에서 단련된 핀란드 엽병대대 주력 1,450명이 바사에 상륙하여 백군에 합류했습니다.
이들은 백군 병사들을 빠르게 훈련시키고 강력한 지도력을 발휘하며 내전의 전세를 뒤바꾸는 핵심적인 역할을 하게 됩니다.
[독-러 브레스트-리토프스크 조약]
독일이 러시아를 공격하는 '주먹질 작전'으로 러시아군이 무너지자, 볼셰비키는 독일에 굴복하여 '브레스트-리토프스크 조약'을 체결할 수밖에 없었습니다.
이 조약에 따라 핀란드, 발트 3국, 폴란드, 우크라이나가 러시아에서 독립하여 독일의 세력권에 편입되었고, 핀란드 적군에 대한 러시아의 무기 및 보급 지원은 중단됩니다.
[독일 동해사단 핀란드 상륙]
독일 제국은 백핀란드의 요청에 따라 뤼디거 폰 데어 골츠가 이끄는 10,000명 규모의 '동해사단'을 한코에 상륙시켰습니다.
이는 서부 전선에서 압박을 받던 독일이 핀란드를 지원하는 것을 꺼렸으나, 러시아 혁명 상황이 복잡해지고 페노스칸디나비아의 지정학적 중요성이 커지면서 결정된 일이었습니다.
독일군의 개입은 핀란드 내전의 결정적인 전환점이 됩니다.
이후 4월 7일에는 3,000여 명의 브란덴슈타인 분견대가 로비사를 점령하는 등, 독일군은 핀란드 남부 지역에서 쾌진격을 거듭하며 적군을 압박했습니다.
[탐페레 전투, 백군 승리]
만네르헤임 대장이 이끄는 백군이 핀란드 남서부 주요 공업도시 탐페레를 공격하여 3월 28일부터 치열한 시가전을 벌였습니다.
16,000명의 백군과 14,000명의 적군이 대치한 이 전투는 핀란드 내전에서 가장 격렬했으며, 백군이 엽병연대까지 투입한 끝에 승리합니다.
이는 핀란드 내전의 중요한 전환점이 됩니다.
이 전투는 순전히 핀란드인 간의 동족상잔이었으며, 백군 700~900명, 적군 1,000~1,500명이 사망했고 11,000~12,000명의 적군이 포로로 잡혔습니다. 탐페레 시의 동부 목조건물들은 전투 과정에서 완전히 파괴되었습니다.
[독일군, 헬싱키 점령]
독일 동해사단 병력 약 2,000~3,000명이 헬싱키를 북서쪽에서 공격하고 해군 함포 포격 지원을 받으며 시가전을 벌였습니다.
적위대 정예 병력이 전선에 나가 있던 상황에서 헬싱키는 4월 13일 오후 2시를 전후하여 항복했고, 독일군은 승리를 축하하는 열병식을 가졌습니다.
이로써 핀란드 혁명을 상징하던 노동자회관의 붉은 제등도 함께 사라졌습니다.
이 전투로 독일군 60명, 적위대원 300~400명, 백위대원 23명이 사망했고, 7,000여 명의 적위대원이 포로로 잡혔습니다.
[라흐티 점령, 적군 병력 단절]
브란덴슈타인 분견대가 남동해안의 요충지 라흐티를 점령하며 핀란드 적위대의 서쪽 병력과 동쪽 병력을 단절시켰습니다.
이로 인해 적군의 지휘체계와 보급선이 심각하게 훼손되었고, 적군 병력의 조직적인 저항이 불가능해지며 전세는 백군과 독일군에 더욱 유리해졌습니다.
[적군 지도부 러시아 도주]
헬싱키가 독일에 함락되고 전세가 불리해지자, 적핀란드 지도부인 인민대표단 구성원 대다수가 러시아 페트로그라드로 도주했습니다.
지도부의 갑작스러운 도주는 적위대 병사들에게 큰 분노와 절망감을 안겨주었으며, 이후 수천 명의 적위대원들이 러시아로 필사적인 탈출을 감행하게 됩니다.
[카렐리야 거점 비푸리 함락]
만네르헤임 대장이 탐페레 전투 이후 비푸리에 공세를 집중하여 4월 29일 도시를 함락시켰습니다.
18,500명의 백군과 15,000명의 적군이 대치한 이 전투에서 적군 500~800명이 사망하고 12,000~15,000명이 포로로 잡혔습니다.
비푸리의 함락은 적군에게 심각한 타격을 입혔고 내전의 종결을 알리는 신호탄이 되었습니다.
[핀란드 내전 공식 종료]
백위대가 카렐리야 지협의 러시아 해안포대 이노 요새를 점령하며 핀란드 내전이 공식적으로 종결되었습니다.
백핀란드 수뇌부와 만네르헤임 대장은 다음 날 헬싱키에서 대규모 승리 열병식을 가졌습니다.
적위대는 완전히 분쇄되었고, 핀란드는 독일의 보호령이 되는 복잡한 상황에 처하게 됩니다.
적군과 백군 사이에 휴전협정이나 평화조약은 체결되지 않았으며, 공식적인 정전협정 없이 전쟁이 끝났습니다.
[포로수용소의 비극]
내전 이후 백군과 독일군에 잡힌 8만여 명의 적군 포로들은 수오메늘리나, 라흐티, 탐미사리 등 대규모 포로수용소에 수용되었습니다.
식량 부족, 영양실조, 스페인 독감 등으로 6월에만 2,900여명이 사망하는 등, 1918년 말까지 총 1만 3천여 명의 핀란드인이 수용소에서 목숨을 잃었습니다.
이는 핀란드 내전이 남긴 가장 큰 비극 중 하나입니다.
재판 과정에서 7만 6천여 건의 재판이 이루어져 6만 8천여 명이 유죄를 선고받았고, 555명이 사형을 선고받았습니다(113명 집행). 탐미사리 수용소의 치사율은 34%에 달했습니다.
[독일 패망, 핀란드 왕위 포기]
제1차 세계 대전에서 독일이 패망하면서, 핀란드 왕국을 세우려던 독일 제국의 계획은 무위로 돌아갔습니다.
뤼디거 폰 데어 골츠 백작의 독일군은 헬싱키를 빠져나갔고, 아직 대관식도 치르지 않았던 프리드리히 카를 폰 헤센 공자는 12월 20일 왕위를 포기했습니다.
이로써 핀란드는 독립된 민주공화국으로 급변하는 전환점을 맞이하게 됩니다.
핀란드의 지위는 독일 제국의 보호령인 군주국에서 독립된 민주공화국으로 급변했습니다.
1919
[핀란드 민주 헌법 발효]
독일 제국의 영향력에서 벗어난 핀란드는 1919년 7월 17일 근대화된 '핀란드 헌법'을 발효하며 민주공화국으로서의 기반을 다졌습니다.
이는 1918년의 혼란과 공위기를 극복하고 시민사회와 정부체제를 안정화시키는 중요한 단계였습니다.
1920
[러-핀 타르투 조약 체결]
핀란드와 러시아 사이에 '타르투 조약'이 조인되어 양국 간의 정치적 관계를 안정시키고 국경선을 확정했습니다.
이 조약으로 국경선은 구 핀란드 대공국의 국경선을 유지하기로 합의되었고, 핀란드는 국제사회에서 주체적인 위치를 확보하며 평화를 정착시키는 중요한 발걸음을 내딛습니다.
1973
[내전 피해자 배상금 지급]
핀란드 정부는 내전 이후 수용소에 갇혔던 11,600명의 사람들에게 배상금을 지불하며 과거의 비극을 치유하려는 노력을 시작했습니다.
이는 핀란드 내전이 남긴 깊은 상처를 공식적으로 인정하고, 국민 통합을 위한 중요한 사회적 화해의 제스처로 평가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