프리드리히 니체

철학자, 작가, 문헌학자, 작곡가, 실존주의자, 포스트모더니즘 선구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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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근 수정 시각 : 2025-10-21- 17:30:4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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프리드리히 니체
철학자, 작가, 문헌학자, 작곡가, 실존주의자, 포스트모더니즘 선구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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독일의 철학자이자 작가로 서구 전통 가치를 비판하고 새로운 가치 정립을 시도함. 망치를 든 철학자라 불리며 기독교 도덕 합리주의 기원 등을 날카롭게 해부. 신의 죽음 위버멘쉬 힘에의 의지 등 독창적 사상으로 현대 철학의 거대한 흐름을 바꿈. 생전 고독했으나 사후 나치즘 왜곡을 극복하고 19세기 가장 중요한 철학자로 평가됨. 포스트모더니즘 등 후대 사상에 지대한 영향을 미친 전복적 사상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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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844

[망치를 든 철학자, 탄생]

1844년 10월 15일, 독일 프로이센의 작은 마을 뢰켄에서 루터교 목사의 아들로 태어났다.

당시 프로이센 국왕의 이름을 따서 '프리드리히 빌헬름'이라 지었지만, 훗날 가운데 이름인 '빌헬름'은 스스로 빼버렸다.

어려서부터 병치레가 잦았음에도, 그는 세상을 뒤흔들 철학자로 성장할 씨앗을 품고 있었다.

1849

[아버지의 이른 죽음]

다섯 살 되던 해, 루터교 목사이자 전직 교사였던 아버지가 뇌 질환으로 세상을 떠났다.

이듬해 남동생마저 잃으며, 어린 니체는 삶의 초반부터 상실과 마주했다.

이후 가족은 나움부르크로 이사하여 어린 시절을 보냈다.

1851

[학업 시작, 남다른 재능]

1851년 소년학교에 입학한 후, 나움부르크 돔 김나지움을 거쳐 명망 높은 슐포르타에 입학(1858년)했다.

그는 특히 음악과 언어에서 특출한 재능을 보였으며, 시를 짓고 음악을 작곡하는 등 예술적 감각을 키웠다.

고대 그리스와 로마 문화에 깊이 몰두하며 훗날 그의 철학적 기반을 다졌다.

1864

[신학 중단과 신앙 상실]

본 대학에서 신학과 고대 철학을 공부했으나, 한 학기 만에 어머니의 분노에도 불구하고 신학 공부를 중단하고 신앙을 상실했다.

이는 다비드 슈트라우스의 《예수의 생애》를 읽고 깊은 영향을 받았기 때문으로 보인다.

그는 기존의 가치에 의문을 제기하는 독자적인 사유의 길을 걷기 시작했다.

1865

[쇼펜하우어와의 만남]

1865년, 위대한 염세주의 철학자 쇼펜하우어의 글들을 접하며 큰 충격을 받고 깊은 영감을 받았다.

이듬해 프리드리히 알베르트 랑게의 저서 또한 그의 철학적 지평을 확장하는 데 결정적인 역할을 했다.

이 만남들은 니체가 독자적인 철학의 길로 나아가는 중요한 계기가 되었다.

1867

[군복무와 낙마 사고]

1867년 10월, 군에 자원하여 프로이센 포병으로 입대했다.

그러나 이듬해 3월, 말을 타다 심한 사고를 당해 가슴을 다쳤고, 결국 군복무를 계속할 수 없었다.

이 사고는 그의 건강을 더욱 악화시키는 원인이 되었으나, 동시에 학업에 전념할 계기가 되기도 했다.

1868

[바그너와의 운명적 만남]

1868년부터 위대한 작곡가 리하르트 바그너와 만나 깊은 교류를 시작했다.

니체는 바그너와 그의 부인에게 깊이 감탄하며 그의 사상 형성에도 영향을 받았다.

바젤 대학교 재직 시에도 긴밀한 관계를 유지하며 바이로이트 축제에 초대받는 등, 예술적 교감은 절정에 달했다.

1869

[최연소 교수, 그리고 무국적자]

24세의 젊은 나이에 리츨 교수의 도움으로 스위스 바젤 대학교 고전문헌학 교수에 취임했다.

동시에 프로이센 국적을 포기하여 죽을 때까지 공식적인 시민권이 없는 무국적자가 되었다.

또한 라이프치히 대학교에서 시험과 논문 없이 출판된 저술만으로 박사학위를 받는 파격적인 행보를 보였다.

바젤 대학교 취임 강연으로 “호메로스와 고전문헌학”을 연설했으며, 신학과 교수 프란츠 오버베크와 평생 친구로 지냈다. 러시아 철학자 아프리칸 스피르, 역사학자 야코프 부르크하르트 등에게도 영향을 받으며 활발한 학술 활동을 이어갔다.

1870

[전쟁과 건강 악화]

1870년 프로이센-프랑스 전쟁에 위생병으로 참전했다가 심각한 병에 걸려 건강이 더욱 악화되었다.

이는 어릴 적부터 잦았던 병치레와 1868년 낙마 사고로 약해진 그의 몸에 치명타를 입혔다.

바젤 대학교 재직 중에도 잦은 휴가를 내야 할 정도로 건강 문제는 심각했다.

1872

[첫 철학서 《비극의 탄생》]

그리스 비극 연구를 통해 '디오니소스적'과 '아폴로적'이라는 대립 개념을 제시하며 철학계에 충격을 안긴 첫 철학서 《비극의 탄생》을 출판했다.

이 책은 기존 동료들에게는 별다른 열정을 얻지 못했지만, 니체의 독자적인 미학 이론의 중요한 발판이 되었다.

1873

[문화 비평서 《반시대적 고찰》]

1873년부터 1876년 사이에 《반시대적 고찰》 총 4편을 집필했다.

이 에세이들은 쇼펜하우어와 바그너의 사상을 통해 독일 문화의 발전에 도전하는 비평적 시각을 공유하며, 니체의 문화 비평가로서의 면모를 보여주었다.

1876

[바그너와의 결별 시작]

바이로이트 축제에서 바그너의 작품에 대한 대중의 천박한 반응과 진부한 공연에 큰 실망감을 느꼈다.

점차 기독교적 도덕주의, 국수주의, 반유대주의에 빠져드는 바그너의 모습에 환멸을 느끼며 그와의 결별을 결심했다.

이로써 그의 사상적 독립이 가속화되었다.

1878

[새로운 시작, 《인간적인…》]

경구적인 문체가 돋보이는 《인간적인, 너무나 인간적인》을 출판했다.

이 책은 쇼펜하우어와 바그너의 영향에서 벗어나 니체 자신만의 독자적인 철학을 정립하기 시작했음을 알리는 중요한 전환점이다.

이 시기에는 혼인을 시도하기도 했으나 뜻을 이루지 못했다.

1879

[교수직 사임, 독립의 길로]

잦은 병치레와 계속되는 건강 악화로 인해 35세의 나이에 바젤 대학교 교수직을 사임했다.

이후 강연 활동을 중단하고 자유로운 철학 정립을 위해 조용히 산 속으로 들어가 요양과 집필에 전념했다.

유럽 각지를 돌아다니며 집필에 몰두하는 독립 철학자의 삶을 시작했다.

1881

[영원 회귀의 영감, 《아침놀》]

1881년, 실스마리아에서 '영원 회귀' 사상에 대한 압도적인 영감을 받았다.

이 사상은 그의 대표작 《차라투스트라는 이렇게 말했다》의 근본 사상이 된다.

같은 해, '관습의 도덕'을 비판하는 《아침놀》을 출판하며 기존 도덕관에 대한 비판적 시각을 더욱 확고히 했다.

1882

[《즐거운 학문》과 신의 죽음]

《즐거운 학문》을 출판하며 "신은 죽었다"는 충격적인 선언을 발표했다.

이는 인간이 만들어낸 최고 가치의 상실, 즉 허무주의의 도래를 의미하며, 삶의 목적을 잃은 현대인에게 "어떻게 살 것인가?"라는 근원적인 질문을 던졌다.

1883

[《차라투스트라》, 위버멘쉬]

그의 사상적 정수가 담긴 《차라투스트라는 이렇게 말했다》를 집필하고 출판했다.

이 작품에서 니체는 기존의 모든 가치를 극복하고 스스로 의미를 창조하는 '위버멘쉬(초인)' 개념을 제시하며, 인류에게 새로운 이상향을 제시했다.

1886

[도덕비판의 서곡 《선악…》]

기존의 도덕적 세계관이 삶을 옥죄고 있음을 비판하는 《선악의 저편》을 출판했다.

그는 이 책에서 자신을 '철학자 디오니소스의 제자'로 소개하며, 그리스도를 '생의 부정'으로, 디오니소스를 '생의 긍정'으로 대비시킨다.

1887

[《도덕의 계보학》 출판]

도덕적 개념들의 기원과 형성 과정을 파헤치는 역작 《도덕의 계보학》을 출판했다.

이 책에서 '주인도덕'과 '노예도덕'을 구분하며 기존 도덕의 허위를 폭로하고, '능동적 허무주의'를 통해 스스로 가치를 창조하는 길을 제시했다.

1889

[토리노의 붕괴, 정신 이상]

1889년 1월 이탈리아 토리노에서 갑작스럽게 졸도한 후 정신병원에 입원했다.

이후 생애 마지막 10년 동안 정신 능력을 완전히 상실한 채 지내야 했다.

그의 정신 착란 원인은 매독이라는 소문이 있었으나, 최근 연구에서는 악성 뇌종양 때문이라는 주장이 제기되었다.

이 시기 니체의 저작들은 정본 형식을 갖추지 못했으며, 누이 엘리자베스가 그의 저작들을 수습하고 편집하는 과정에서 왜곡의 논란이 발생하기도 했다.

1890

[누이의 개입과 왜곡 시작]

정신이 붕괴된 니체 대신, 파라과이에서 귀향한 누이 엘리자베트 푀르스터-니체가 그의 저작 출판 논의에 개입하기 시작했다.

그녀는 광적인 국가주의자이자 반유대주의자였던 남편의 영향을 받아, 니체의 사상을 자신의 정치적 목적에 맞게 왜곡하고 악용하려 시도했다.

1900

[위대한 철학자의 죽음]

생애 마지막 10년을 정신 착란 상태로 보낸 니체는 1900년 8월 25일, 바이마르에서 55세를 일기로 세상을 떠났다.

그의 유해는 고향 뢰켄의 아버지 묘 옆에 안장되었다.

생전에는 학계에서 철저히 무시당했으나, 사후 유럽 철학과 문학에 지대한 영향을 미쳤다.

1901

[《힘에의 의지》 왜곡 출간]

니체의 누이 엘리자베트가 그의 버려진 글들을 짜집기하여 《힘에의 의지》를 출간했다.

그녀는 히틀러의 열렬한 지지자였으며, 니체의 사상을 나치즘에 유리하게 왜곡하여 대중에게 퍼뜨렸다.

이로 인해 니체는 오랫동안 나치즘과 반유대주의의 시초로 오해받았다.

1961

[하이데거의 재평가]

1961년 실존주의 철학자 마르틴 하이데거가 기념비적인 저서 《니체》를 출간하며 니체에 대한 왜곡된 평가를 바로잡고 재평가의 물꼬를 텄다.

이로써 니체에게 붙어다니던 해괴한 이미지는 대부분 해소되었고, 그는 현대 철학의 거장으로 확고히 자리매김하게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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