폴 고갱
화가, 탈인상주의, 상징주의, 종합주의, 프랑스
최근 수정 시각 : 2025-10-21- 17:54:00
세상을 등지고 원시의 아름다움을 찾아 타히티로 떠난 파격적인 화가. 인상주의를 넘어 상징주의와 종합주의를 개척 서양 미술에 새로운 지평을 열다. 파블로 피카소 앙리 마티스 등 후대 아방가르드 예술가들에게 지대한 영감을 준 거장. 자유로운 삶과 격정적인 사랑 그리고 병마 속에서도 불꽃 같은 예술 혼을 불태우다.
- 화가 폴 고갱 탄생
- 페루 이주와 아버지 사망
- 어머니 알린 사망
- 증권 중개인 시작
- 메테-소피 가드와 결혼
- 취미로 그림 시작
- 전업 화가로 전향 선언
- 가족과 코펜하겐 이주
- 파리로 돌아온 고갱
- 마지막 인상파전 출품
- 퐁타벤 첫 방문
- 파나마-마르티니크 여행
- 퐁타벤 화파 결성
- 반 고흐와 파국적 동거
- 클루아조니즘 대표작 완성
- 테하아마나와 논란의 결혼
- 타히티로의 첫 여정
- 타히티 대표작 완성
- 타히티에서 파리 귀환
- 메테와의 결별 선언
- 병마와 싸우는 고갱
- 파우라와의 동거와 자녀
- 타히티로의 영원한 여정
- 최후의 걸작 완성
- 딸 사망과 재정 위기
- 볼라르의 계약 제안
- 마르키즈 제도로 이주
- 베오호와의 동거와 출산
- 모르핀 중독에 시달림
- 사후 유작전과 명성
- 폴 고갱의 사망
1848
[화가 폴 고갱 탄생]
탈인상주의 화가 폴 고갱이 1848년 프랑스 파리에서 태어났다.
그의 아버지는 자유주의 언론인이었으며, 어머니는 사회주의 활동가 플로라 트리스탕의 딸이었다.
당시 유럽은 1848년 혁명으로 혼란스러웠다.
아버지 클로비스 고갱은 오를레앙 출신의 자유주의 언론인이었고, 어머니 알린 샤잘은 앙드레 샤잘과 유명한 사회주의 활동가 플로라 트리스탕의 딸이었다. 특히 외할머니 플로라 트리스탕은 '만국의 노동자여 단결하라'는 구호를 최초로 제안한 인물로, 고갱은 그녀를 평생 흠모했다.
1850
[페루 이주와 아버지 사망]
1850년, 아버지 클로비스는 페루에서 언론인 경력을 이어가려 했으나, 여행 중 심장마비로 사망했다.
어린 폴 고갱과 그의 가족은 페루에 도착했고, 그곳에서 외종조부의 환대 속에 유복하고 행복한 시기를 보냈다.
프랑스에서 추방령을 받은 아버지 클로비스 고갱은 장모 플로라 트리스탕의 연줄을 통해 페루에서 언론 활동을 계획했다. 하지만 가족을 동반한 여행 중 심장마비로 사망했고, 18개월 된 폴 고갱과 누나 마리는 어머니와 함께 페루에 도착했다. 페루에서 가족을 맞이한 외종조부는 차기 대통령직이 유력한 정치인이었으며, 고갱은 훗날 이 시기를 생애 가장 풍족하고 행복했던 때로 회상했다.
1854
[페루 떠나 프랑스 귀환]
페루에서 후견인이 실각하자, 고갱의 어머니는 아이들을 데리고 프랑스 오를레앙의 친척 집으로 갔다.
하지만 친척들의 괴롭힘으로 다시 파리로 돌아와 바느질로 생계를 이어갔다.
페루의 정치 상황이 불안정해지자, 알린 가족은 더 이상 페루에 머무를 수 없었다. 어머니는 아이들을 데리고 남편의 조부인 기욤 고갱이 살고 있는 오를레앙으로 갔으나, 외조모와 배다른 귀족 형제들의 영향력에 시달리다 결국 파리로 돌아와 바느질로 생계를 유지했다.
1867
[어머니 알린 사망]
해군에 복무 중이던 고갱은 1867년 7월 7일 어머니 알린이 사망했다는 소식을 몇 달 뒤에야 누나를 통해 접하게 되었다.
이 일은 그의 삶에 큰 영향을 미쳤다.
1867년 7월 7일, 고갱의 어머니 알린이 사망했다. 당시 상선 해병으로 복무 중이던 고갱은 누나 마리가 인도까지 찾아와 알려주기 전까지 몇 개월 동안 이 소식을 알지 못했다.
1871
[증권 중개인 시작]
파리로 돌아온 23세의 고갱은 가족 친지의 도움으로 증권회사에 취직하여 11년간 근무했다.
그는 성공적인 증권 중개인이 되어 막대한 수입을 올렸으며, 미술품 거래로도 많은 돈을 벌었다.
1871년, 고갱은 파리로 돌아와 가족과 친한 지인 구스타프 아로사의 주선으로 증권회사에 취직했다. 그는 성공한 파리지앵 증권 중개인으로 11년간 일하며 연간 3만 프랑(현재 가치 1억 5천만 원 이상)의 수입을 올렸고, 미술품 거래로도 재산을 불렸다.
1873
[메테-소피 가드와 결혼]
고갱은 덴마크 출신의 메테-소피 가드와 결혼하여 10년간 다섯 자녀를 두었다.
하지만 전업 화가로 전향하면서 생활고에 시달리자 부부 관계는 파탄에 이르렀다.
1873년, 고갱은 덴마크 출신의 메테-소피 가드(1850년 – 1920년)와 결혼하여 이후 10년 동안 다섯 명의 자녀를 낳았다.
[취미로 그림 시작]
증권회사에 다니던 고갱은 취미로 그림을 그리기 시작하며 인상파 화가들과 교류했다.
특히 카미유 피사로와 친분을 맺고 함께 야외에서 그림을 그리며 인상파 화풍에 영향을 받았다.
증권회사 입사 직후인 1873년, 고갱은 취미로 그림을 그리기 시작했다. 당시 파리 9구에 살면서 인상파 화가들이 모이는 카페에 드나들었고, 카미유 피사로와 친해져 함께 그림을 그렸다.
1877
[화실 마련 및 이사]
고갱은 1877년 파리 보지라르 구역에 화실이 딸린 집으로 이사했다.
이곳에서 전직 증권 중개인이자 화가인 에밀 슈페네커와 친분을 맺으며 예술적 교류를 확대했다.
고갱은 1877년 '다리를 건너 빈곤층이 사는 신시가'인 보지라르 구역에 화실이 딸린 집을 마련하고 이사하였다. 그는 여기서 전직 증권 중계인이자 화가로 전업한 에밀 슈페네커와 친밀한 사이가 되었다.
1881
[인상파 전시회 첫 출품]
1881년과 1882년, 고갱은 인상파 전시회에 작품을 출품했지만 당시에는 멸시당했다.
아이러니하게도 그의 작품들은 오늘날 높은 평가를 받고 있다.
고갱은 1881년과 1882년에 인상파 전시회에 《보지라르의 채소밭》 등의 그림을 출품했으나 당시 평론가들에게 멸시를 받았다. 하지만 현재 이 작품들은 높은 가치를 인정받고 있다.
1882
[전업 화가로 전향 선언]
1882년 파리 증권시장이 붕괴하자 고갱은 더 이상 증권 거래로 수입을 얻을 수 없게 되었다.
그는 이를 계기로 전업 화가가 되기로 결심하며 인생의 큰 전환점을 맞이했다.
1882년 파리 증권시장이 붕괴하면서 고갱은 미술 시장 위축과 함께 더 이상 증권 거래로 수입을 얻기 어려워졌다. 그는 이 시기에 전업 화가의 길을 걷기로 결심하고 피사로에게 도움을 요청하는 편지를 쓰기도 했다.
1884
[가족과 코펜하겐 이주]
1884년 1월, 고갱은 파리보다 물가가 싼 루앙으로 이사하며 전업 화가로서의 삶을 모색했다.
그해 말, 메테가 자녀들과 코펜하겐으로 가면서 고갱도 그들을 따라갔으나, 언어 장벽과 사업 실패로 어려움을 겪었다.
고갱은 1884년 1월 가족들과 함께 루앙으로 이사했다. 하지만 그해 말 아내 메테가 아이들을 데리고 코펜하겐으로 가면서, 고갱도 11월에 자신의 작품과 도구를 보내고 뒤따라갔다. 코펜하겐에서 그는 생계를 위해 방수포 판매를 시도했으나 덴마크어를 하지 못해 실패했고, 아내 가드가 프랑스어 수업으로 가족을 부양했다.
1885
[파리로 돌아온 고갱]
코펜하겐에서의 실패 후, 고갱은 6살 아들 클로비스와 함께 파리로 돌아왔다.
하지만 파리 미술계는 그를 환영하지 않았고, 혹독한 빈곤에 시달려 아들을 기숙 학교에 보내야 했다.
코펜하겐에서의 삶이 어려워지자 아내는 고갱에게 떠나달라 요구했고, 고갱은 1885년 아들 클로비스와 함께 파리로 돌아왔다. 파리 미술계의 냉대와 빈곤 속에서 그는 이 해에 몇 점의 그림밖에 그릴 수 없었다.
1886
[마지막 인상파전 출품]
1886년 마지막 인상파 전람회에 고갱은 작품 19점을 출품했다.
이 전시에서 조르주 쇠라의 신인상주의에 대한 고갱의 경멸이 피사로와의 절교로 이어지며 인상주의와의 결별을 알렸다.
1886년, 8회이자 마지막 인상파 전람회에 고갱은 19점의 그림과 목판화를 출품했다. 이 전시회에는 당시 아방가르드의 선두로 평가받던 조르주 쇠라의 작품도 전시되었는데, 고갱은 쇠라의 신인상주의와 점묘법을 경멸했다. 이는 전람회를 주선하고 쇠라를 초대한 피사로와의 의견 대립으로 이어져 결국 둘은 절교하게 되었다.
[퐁타벤 첫 방문]
1886년 여름, 고갱은 물가가 싼 브르타뉴 퐁타벤에서 새로운 친분을 쌓고 풍경화를 그렸다.
이곳에서 그는 랜돌프 칼데콧의 삽화를 모방하며 자신의 화풍에 원색을 더하는 변화를 시도했다.
1886년 여름, 고갱은 물가가 저렴한 브르타뉴반도의 퐁타벤에서 머물렀다. 다혈질적인 성격이었으나 느긋한 휴양지에서 새로운 화가들과 친분을 쌓았고, 찰스 라발의 권유로 파나마와 마르티니크의 이국적 풍광에 대한 이야기를 들으며 영감을 받았다. 이 시기 고갱은 주로 풍경화를 그렸으며, 브르타뉴 여행 안내서의 삽화를 의도적으로 따라 그리며 원색을 많이 사용하는 화풍으로 변화를 시도했다.
1887
[파나마-마르티니크 여행]
고갱은 친구 라발의 권유로 1887년 파나마와 마르티니크를 여행했다.
마르티니크에서는 20점 가량의 그림을 그렸고, 특히 인도인들의 힌두교 상징에 깊은 관심을 보였다.
1887년, 고갱은 친구 찰스 라발의 권유에 따라 파나마를 방문한 뒤 마르티니크의 생피에르에 체류했다. 돌아오는 여비를 아끼기 위해 파산 신청을 하기도 했으나, 뜨거운 기후와 비위생적인 움막 생활로 이질과 말라리아에 걸렸다. 생피에르에서 약 20점의 그림을 그렸으며, 마르티니크에 정착한 인도인들의 힌두교 상징에 큰 흥미를 보였다.
1888
[퐁타벤 화파 결성]
마르티니크 여행 후 고갱은 찰스 라발, 에밀 베르나르 등과 함께 퐁타벤을 재방문하여 '퐁타벤 화파'를 결성하고 상징주의를 내세웠다.
그는 유럽 전통 화풍의 한계를 느끼고 아프리카와 동양 미술의 강렬함, 특히 일본의 채색판화에 매료되었다.
파나마와 마르티니크 여행 후, 고갱은 다시 찰스 라발, 에밀 베르나르, 에밀 슈페네커 등 여러 화가들과 함께 퐁타벤을 방문했다. 이들은 상징주의를 표방하며 '퐁타벤 화파'를 결성했다. 고갱은 유럽의 전통적 화풍, 특히 인상주의가 상징주의 관점에서 부족하다고 여겼고, 아프리카와 동양 미술, 특히 일본의 채색판화의 강렬함에 매력을 느꼈다.
[반 고흐와 파국적 동거]
테오 반 고흐의 주선으로 1888년 아를에서 빈센트 반 고흐와 9주 동안 함께 작업했다.
하지만 격렬한 논쟁 끝에 고갱은 떠나겠다고 선언했고, 그날 밤 반 고흐는 자신의 귀를 자르는 충격적인 사건이 발생했다.
고갱은 다음 날 아를을 떠났다.
미술상 아르센 프와티에 갤러리 전시를 통해 테오 반 고흐가 고갱의 작품 3점을 구매하면서 고갱과 반 고흐 형제는 친분을 맺게 되었다. 테오의 주선으로 1888년 아를에 있는 반 고흐의 노란 집을 방문한 고갱은 9주 동안 함께 작업했으나, 12월 23일 저녁 고흐와의 격렬한 비난 끝에 고갱은 떠나겠다고 선언했다. 그날 밤 고흐는 자신의 귀를 잘랐고, 다음 날 정신병원으로 가게 된 고흐를 뒤로하고 고갱은 아를을 떠났다. 둘은 생전에 다시 만나지 않았지만 연락은 이어졌다. 고갱은 1889년 제작한 《자화상, 머리 모양의 물병》에서 당시의 트라우마를 표현한 것으로 알려져 있다.
1889
[레 베 개인전 개최]
1889년, 벨기에 화가 20명으로 구성된 '레 베(Les XX)'가 고갱의 개인전을 개최했다.
이 전시는 고갱의 작품 세계를 알리는 중요한 기회가 되었다.
1889년, 벨기에의 화가 20명이 결성한 '레 베(Les XX)'가 고갱의 개인전을 열었다.
[클루아조니즘 대표작 완성]
고갱은 1889년 《황색의 그리스도》를 그리며 클루아조니즘의 정수를 구현했다.
원색적인 색상과 두터운 외곽선을 사용하면서도 전통적인 명암 표현을 유지하여 후기 르네상스 시대의 작품 같은 독특한 화풍을 선보였다.
고갱은 민속 예술과 우키요에의 강한 영향을 받아 클루아조니즘에 동참했다. 미술 평론가 에두아르 뒤자르댕이 에밀 베르나르의 화풍을 중세 칠보 공예에 빗대어 명명한 클루아조니즘은 단색의 평평한 여백과 외곽선의 강조를 특징으로 한다. 고갱은 1889년 《황색의 그리스도》를 그리면서 이 화풍의 정수를 구현했다. 색상은 원색적으로, 경계는 두터운 외곽선으로 뚜렷하게 표현했으나, 명암은 전통적인 그라디에이션 방식을 사용해 후기 르네상스 시대 작품처럼 보이게 했다.
1891
[테하아마나와 논란의 결혼]
타히티에서 고갱은 당시 13세였던 테하아마나와 결혼했다.
그는 이미 매독에 걸려 있었음에도 10대 소녀들과 성관계를 가졌으며, 이는 본국에서는 중혼죄와 미성년자 약취에 해당하는 심각한 범죄였다.
이러한 행위는 식민지 남성의 성적 방종으로 간주되어 당시에는 불문에 부쳐졌다.
고갱은 첫 타히티 방문 시 당시 13세였던 테하아마나와 결혼했다. 고갱은 44세였다. 그는 아내 메테와 정식 이혼한 상태가 아니었으므로 중혼죄에 해당하며, 미성년자와의 관계는 본국이었다면 중형을 선고받을 수 있는 행위였다. 당시 유럽 남성이 식민지에서 벌이는 성적 방종은 관습적으로 불문에 부쳐지는 경우가 많았다. 고갱은 타히티로 갈 당시 이미 매독에 걸려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10대 소녀들과 성관계를 이어갔다.
[타히티로의 첫 여정]
고갱은 1890년부터 타히티에서의 작품 활동을 구상했고, 1891년 2월 그림 경매로 자금을 모아 4월 타히티로 떠났다.
6월 파페에테에 도착한 그는 이상적인 원시를 꿈꿨으나, 현실은 유럽화된 모습이었다.
1890년, 고갱은 다음 작품 활동을 타히티에서 하는 것을 구상했다. 1891년 2월 파리의 드루오 호텔 경매에서 성공적으로 자금을 모아 4월 타히티로 배를 타고 출발, 6월 파페에테에 도착했다. 그는 유럽 문명이 닿지 않은 이상적인 원시를 기대했으나, 식민 수도 파페에테는 이미 유럽화되어 있었고, 그는 자신의 기대를 반영한 이상화된 원시 속 여인을 그리기 위해 연출된 사진과 기존 그림들을 참조하는 등 신중한 태도를 보였다. 1901년 출간된 편지집 《노아 노아》에서 그는 자신이 타히티를 환상의 장소로 만들고 표절했다고 고백하기도 했다.
1892
[타히티 대표작 완성]
고갱은 13세 아내 테하아마나를 모델로 누드화 《유령이 그녀를 지켜본다》를 그렸다.
이 작품은 타히티에서의 그의 예술적 탐구를 상징하는 대표작 중 하나로 남아있다.
고갱은 13살의 아내 테하아마나를 모델로 한 누드화 《유령이 그녀를 지켜본다》를 제작했다. 타히티 생활을 마친 고갱은 원주민 아내를 아무 죄책감 없이 버리고 파리로 돌아왔다.
1893
[타히티에서 파리 귀환]
고갱은 1893년 8월 파리로 돌아와 타히티를 소재로 한 그림들을 다음 전시회에 출품했다.
듀랑-루엘 전시회에서 그의 작품 40여 점 중 11점이 팔리며 드디어 명성을 얻기 시작했다.
고갱은 1893년 8월 파리로 돌아왔다. 애초 기대했던 경매 참가 기회는 놓쳤지만, 타히티를 소재로 한 그림들을 그려 다음 전시회에 출품했다. 1894년 11월 듀랑-루엘 전시회에서 출품한 고갱의 작품 40여 점 중 11점이 팔리며 드디어 명성을 얻을 수 있었다.
1894
[메테와의 결별 선언]
1885년 파리로 돌아간 고갱은 1891년 메테와 마지막으로 만났고, 1894년 메테가 결별을 선언했다.
다음 해 1895년에는 공식적인 이혼 절차를 밟으며 오랜 결혼 생활의 종지부를 찍었다.
고갱 부부는 마지막으로 만난 것이 1891년이었고, 아내 메테는 1894년에 결별을 선언했다. 이혼 절차는 1895년에 진행되었다.
1895
[병마와 싸우는 고갱]
타히티로 돌아온 후 고갱은 파리에서 다친 발목 통증과 매독으로 인한 건강 악화에 시달렸다.
그럼에도 원주민 여성들과의 관계를 이어갔고, 때로는 이로 인해 구속되기도 하는 등 방탕한 생활을 했다.
고갱은 프랑스로 돌아간 동안 해변에서 술을 먹고 돌아다니다 병을 잘못 밟는 바람에 발목을 다쳤다. 타히티에 온 다음 상처 부위는 계속해서 통증을 주었고 다른 건강 상태도 악화되기 시작했다. 그뿐만 아니라 매독도 여전했지만 원주민 여성을 상대로 성적 방탕을 그치지 않았다. 가끔은 이 때문에 구속되기도 하였다.
[파우라와의 동거와 자녀]
두 번째 타히티 생활 중 고갱은 이웃 소녀 파우라(당시 14세)와 동거하여 두 아이를 얻었다.
첫째 딸은 아기 때 죽었고, 둘째 아들은 파우라가 길렀다.
고갱은 그녀에게 아무런 금전적 유산도 남기지 않았다.
두 번째 타히티 생활을 시작하며 고갱은 이웃집의 파우라와 동거하고 있었는데, 그녀는 고갱을 만났을 때 열네살이었다. 파우라는 두 아이를 낳았는데 첫째는 딸이었고 아기였을 때 죽었다. 둘째 아들은 파우라가 길렀다. 훗날 전기 작가 메튜가 타히티를 방문했을 때에도 파우라가 낳은 아들의 후손이 그곳에 살고 있었다. 1919년 영국의 작가 윌리엄 서머싯 몸이 방문했을 때 파우라는 고갱이 아무런 금전도 남기지 않고 떠났다고 말했다.
[타히티로의 영원한 여정]
1895년 6월, 고갱은 친구의 도움으로 배삯을 마련해 다시 타히티로 떠났다.
그는 이로써 유럽을 다시는 돌아보지 않게 되었으며, 그의 남은 생애는 태평양에서 이어졌다.
1895년 6월 28일, 고갱은 다시 타히티로 떠나기로 마음먹고 친구로부터 배삯을 받았다. 이로서 그는 다시 유럽을 보지 못하게 되었다.
1897
[최후의 걸작 완성]
건강 악화, 딸의 죽음, 빚 독촉 등 절망적인 상황 속에서 고갱은 1897년 기념비적인 작품 《우리는 어디서 왔고, 우리는 무엇이며, 우리는 어디로 가는가》를 제작했다.
그는 이 작품이 자신의 마지막 대작임을 직감했다.
건강 악화와 딸의 죽음, 빚 독촉이 겹치자 고갱은 매우 침울하게 가라앉았다. 그는 이해에 《우리는 어디서 왔고, 우리는 무엇이며, 우리는 어디로 가는가》를 제작하였다. 고갱은 이것이 그의 마지막 대작임을 직감하였다.
[딸 사망과 재정 위기]
1897년 4월, 고갱은 딸 알린의 폐렴 사망 소식을 접했다.
같은 달, 마굿간 부지 매각과 집 개조 대출 등으로 재정적 압박이 가중되어 은행 거래까지 중지되는 등 심각한 위기를 겪었다.
1897년 4월, 그가 아끼던 딸 알린이 폐렴으로 죽었다는 소식이 날아들었다. 이 달에는 그동안 공짜로 쓰던 마굿간 부지가 팔려 새로 마굿간을 지어야 했고, 살던 집을 보다 사치스러운 목조 건물로 개조하려고 은행 대출까지 받은 상태였다. 하지만 그는 이런 일에 아랑곳하지 않았고 결국 그해 말 은행은 거래 중지를 통지해 왔다.
1899
[볼라르의 계약 제안]
1899년 가을, 파리 딜러의 사망 후 아트딜러 앙브르와즈 볼라르가 고갱에게 월 300프랑의 고정 수입과 작품당 200프랑을 제안했다.
고갱은 이 계약을 통해 마르키즈 제도 방문을 계획했지만, 결국 볼라르와의 약속을 어기고 그곳으로 떠났다.
1899년 가을 고갱의 파리 쪽 딜러인 조지 쇼데가 사망하자, 볼라르는 고갱과 직접 거래를 원했다. 볼라르는 고갱에게 월 고정 수입 300프랑을 제공하는 대신 연간 최소 25점의 작품을 완성하고 각 작품당 200프랑에 사겠노라고 제안했다. 화구와 물감도 제공하기로 했다. 이 제안은 나쁘지 않았지만, 고갱은 이를 따르면 오랫동안 계획했던 마르키즈 제도 방문을 포기해야 했다. 고갱은 일단 계약을 맺고 생활비가 들어오자 약속을 어기고 마르키즈로 가기로 마음먹었다.
1901
[마르키즈 제도로 이주]
고갱은 1901년 9월 마르키즈 제도로 이주하며 미지의 원시를 꿈꿨다.
하지만 그곳 역시 유럽 문명의 영향을 받고 서양 질병으로 고통받는 현실에 직면했다.
고갱은 태평양의 한가운데 있는 마르키즈 제도야말로 문명의 영향을 받지 않고 전래의 식기와 무기를 쓰며 살 것이라고 기대했다. 그러나 마르키즈에 도착하자마자 그곳도 타히티와 별반 다를 것 없이 유럽화되었다는 것을 실감했다. 게다가 마르키즈는 서양인들이 달고 들어온 질병으로 고통받고 있었다. 18세기 8만여 명이었던 주민은 고갱이 도착한 20세기 초에는 간신히 4천여 명이 남아있었다. 아이들은 로마 가톨릭교회가 세운 미션 스쿨에 다녔고, 프랑스 식민 당국의 국가 헌병이 치안을 유지했다. 1901년 9월 16일 고갱은 아투오나에 거처를 마련했다. 그는 가톨릭 선교회로부터 땅을 샀는데, 선교회의 주교는 고갱이 타히티에서 신문을 만들 때부터 가톨릭 편이었다는 말을 마음에 들어 했다.
[베오호와의 동거와 출산]
마르키즈 제도 이주 후 1901년 11월, 고갱은 원주민 소녀 베오호와 동거하며 딸을 얻었다.
그의 병세는 여전했지만, 베오호는 건강한 딸을 낳았고, 이 딸의 후손은 여전히 마르키즈에 살고 있다.
11월이 되자 고갱은 베오호와 동거하였고 요리사와 하인을 두고 생활했다. 고갱은 풍경과 인물을 그리고 여러 습작을 하며 보냈지만 볼라르가 보낸 대리인은 타히티의 잃어버린 낙원을 주제로 한 그림을 계속 그릴 것을 재촉했다. 그러나 고갱은 마르키즈의 이웃 소녀들과 사람들을 그려 나갔다. 태평양에선 사이클론이 잦았고 변변한 건물이 없는 원주민들은 자주 이재민이 되어 교회를 찾아왔다. 고갱은 베히네, 배오호(마리-로즈)와 같은 이들 원주민의 딸들을 건드렸다. 고갱의 병은 그대로였지만 열네 살 소녀였던 배이호는 건강한 딸을 낳았다. 배이호가 낳은 딸은 여전히 마르키즈에 살고 있다.
1902
[모르핀 중독에 시달림]
병세 악화와 고통을 덜기 위해 고갱은 모르핀에 손을 대기 시작했고, 결국 1902년 무렵 모르핀에 중독되었다.
이는 그의 마지막 시기를 더욱 고통스럽게 만들었다.
이런 일이 벌어지는 동안에도 고갱의 병세는 계속 악화되었다. 고갱은 고통을 덜기 위해 모르핀에 손을 댔고 결국 중독되었다.
[식민 당국의 소송]
1902년 3월, 고갱은 타히티에서 척을 진 아마추어 화가의 고소로 프랑스령 폴리네시아 식민 당국에 소환되었다.
그는 결국 벌금을 납부해야 했으며, 이는 그의 생활에 또 다른 어려움을 더했다.
1902년 3월, 프랑스령 폴리네시아 식민 당국은 고갱을 법정에 소환했다. 타히티 생활을 하는 동안 주거 침입 문제 등으로 척을 진 아마추어 화가 에드워드 찰리가 고갱을 고소했기 때문이다. 찰리는 고갱이 동거하였던 파우라의 가족이 자신의 집을 부수고 들어와 도둑질을 하였다고 주장하였고 고갱은 자신이 운영하던 신문에서 찰리를 맹비난했다. 결국 고갱은 벌금을 납부할 수밖에 없었다.
[베오호, 고갱을 떠나다]
1902년 7월, 고갱과 동거하던 베오호는 임신 7개월의 몸으로 그를 떠나 집으로 돌아갔다.
그녀는 11월에 아이를 낳았지만 다시 고갱에게 돌아오지 않았다.
1902년 7월 베오호는 임신 7개월인 상태에서 고갱을 떠나 집으로 돌아갔다. 그녀는 11월에 아이를 낳았지만 고갱에게 돌아가지 않았다.
1903
[사후 유작전과 명성]
고갱 사후 파리의 아트딜러 앙브루아즈 볼라르는 1903년과 1906년 두 차례 유작전을 개최했다.
생전에는 제대로 평가받지 못했던 고갱은 이 전시회를 통해 비로소 명성을 얻게 되었고, 그의 작품은 아방가르드 작가들에게 영감을 주었다.
고갱 사후 파리의 아트딜러 앙브루아즈 볼라르는 1903년과 1906년 두 번의 유작전을 파리에서 개최하였고 그제서야 명성을 얻게 되었다. 고갱의 작품은 파블로 피카소나 앙리 마티스와 같은 프랑스 아방가르드 작가들에게 영감을 주었다.
[폴 고갱의 사망]
오랜 병마와 약물 중독에 시달리던 탈인상주의 화가 폴 고갱은 1903년 5월 8일, 마르키즈 제도에서 54세의 나이로 생을 마감했다.
오랜 병마와 약물 중독에 시달리던 폴 고갱은 1903년 5월 8일 사망하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