토마스 아퀴나스

신학자, 철학자, 스콜라 철학자, 교회학자, 성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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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근 수정 시각 : 2025-10-15- 00:02:0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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토마스 아퀴나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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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방교회 최고의 신학자이자 스콜라 철학의 거장. 아리스토텔레스 철학과 기독교 교리를 종합해 중세 신학을 대성했다. 은총은 자연을 파괴하지 않고 완성한다는 독창적 관점으로 신앙과 이성의 조화를 이룬 인물. 교황 요한 22세가 문제를 해결할 때마다 기적을 행했다고 극찬한 서양 사상사에 지대한 영향을 끼친 천재 철학자이자 성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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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224

[천재 신학자의 탄생]

이탈리아 로카세카 성에서 귀족 가문의 막내아들로 태어난 토마스 아퀴나스.

그의 정확한 생년월일은 기록되지 않아 사망일을 기준으로 48~50세 나이를 역산하여 1224년에서 1225년 사이로 추정된다.

어린 시절부터 남다른 학문적 재능을 보이며 서양 사상사의 거장이 될 운명을 예고했다.

1230

[몬테 카시노 수도원 입학]

부모님의 기대를 받으며 성 베네딕토 수도회 소속 몬테 카시노 수도원에 들어가 수도사 수업을 시작했다.

부모님은 그가 미래의 수도원장이 되기를 바랐으나, 토마스 아퀴나스는 예상치 못한 다른 길을 걷게 된다.

1239

[나폴리 대학에서 새 길을 만나다]

정치적 혼란으로 몬테 카시노 수도사 수업을 중단하고 나폴리 대학교에 입학했다.

이곳에서 아리스토텔레스 철학과 급부상하던 도미니코회 수도사들을 접하며 그의 삶을 결정적으로 바꿀 운명적인 계기를 맞이한다.

1244

[납치된 수도사의 굳건한 신념]

가족들의 기대(몬테 카시노 수도원장)를 저버리고 청빈한 삶을 택하는 도미니코회 수도사가 되었다.

이에 충격받은 가족들은 그가 파리로 유학 가던 도중 납치하여 로카세카 성에 감금하고 1년여간 회유와 협박을 일삼았다.

하지만 그의 소신은 꺾이지 않았다.

토마스의 이런 선택은 부유한 상인의 아들로 화려한 삶을 포기하고 청빈한 삶을 택한 아시시의 프란체스코를 연상시켰다. 훗날 그가 탁발 수도회를 옹호하고 대주교직을 사절하는 겸손한 수도사가 될 것을 예고하는 일화였다.

1245

[가족도 꺾지 못한 신념]

약 1년간 이어진 가족들의 회유와 협박에도 흔들리지 않자, 결국 가족들은 그의 확고한 신념을 인정하고 나폴리의 도미니코회 수도원으로 그를 돌려보냈다.

이는 부와 명예를 버리고 청빈한 삶을 택한 그의 강인한 의지를 보여주는 결정적인 사건이었다.

1248

[벙어리 황소, 스승을 만나다]

당대 최고 지성인 알베르투스 마그누스를 쾰른에서 만나 4년간 지도받으며 아리스토텔레스 철학과 디오니시우스 신학을 깊이 연구했다.

과묵하고 우람한 몸집 때문에 '시칠리아의 벙어리 황소'라는 별명을 얻었으나, 스승은 그의 무한한 재능을 꿰뚫어 보았다.

스승 알베르투스는 제자들이 모인 자리에서 "지금 벙어리 황소라 불리는 저 수도사의 우렁찬 목소리를 온 세상이 듣게 될 것"이라고 예언하며, 소심했던 젊은 제자의 침묵 뒤에 숨겨진 천재성을 알아보는 혜안을 보여주었다.

1251

[스승의 강력 추천, 파리행]

스승 알베르투스는 파리 대학교 강사를 추천해달라는 요청에 주저 없이 '벙어리 황소' 토마스 아퀴나스를 적극 추천했다.

총장은 그의 젊은 나이(27세)를 걱정했지만, 알베르투스는 추기경까지 설득하며 그의 파리 행을 성사시켰다.

이로써 그는 기독교 학문의 중심지에서 자신의 재능을 펼칠 기회를 얻었다.

알베르투스는 "학문과 삶에서 빛나는 성취를 이룬" 토마스의 능력을 누구보다 확신했다. 스승의 강력한 지지와 혜안이 없었다면, 젊은 토마스는 파리 강단에 설 수 없었을 것이다.

1252

[파리 신학 강단에 서다]

페트루스 롬바르두스의 명제집 강독자로서 파리 대학교에서 신학 강의를 시작했다.

이는 그가 정식 신학교수가 되기 위한 필수 과정이었으며, 이와 함께 명제집 주석 집필에 착수하며 그의 학문적 깊이를 더욱 다져나갔다.

1256

[논쟁의 한복판, 교수 취임]

명제집 주석 작업을 마치고 파리 대학 신학교수로 취임했다.

당시 재속 성직자와 수도회 교수들 간의 분쟁이 유혈 사태로 번질 만큼 격렬했던 시기였다.

그의 취임 강연은 프랑스 왕의 군대가 경호하는 삼엄한 분위기 속에서 진행될 정도로 학문의 전장이었다.

수줍음 많던 '벙어리 황소'는 이때부터 수도회를 비판하는 재속 성직자들의 주장을 조목조목 반박하며 자신의 존재감을 드러냈고, 스승 알베르투스, 친구 보나벤투라와 함께 당대 최고의 학자로 각광받기 시작했다. 그의 첫 승리를 기념하는 이정표였다.

1259

[묘연한 행적 속 대작 구상]

파리 교수직을 내려놓고 이탈리아로 돌아왔으나 1261년 오르비에토에서 재등장하기 전까지 그의 정확한 행적은 묘연하다.

이 미지의 시기에 그의 대표작 중 하나인 '대이교도대전'을 집필하기 시작하며, 학문적 성숙을 향한 발걸음을 멈추지 않았다.

한때 아냐니에서 교황청 강독자로 있었다는 설이 있었으나, 현재는 사실이 아닌 것으로 여겨진다. 많은 학자들은 그가 본래 교구인 나폴리로 돌아갔을 것으로 추정한다.

1261

[오르비에토의 겸손한 학자]

약 2년간의 묘연한 행적 끝에 오르비에토 체류 사실이 기록으로 확인되었다.

1265년 로마로 떠나기 전까지 수도회를 대표하는 학자이자 성직자로서 활발히 활동하며 '대이교도대전' 등 주요 저작들을 완성했다.

높아지는 명망 속에서도 겸손함을 잃지 않았다.

자신을 모욕하는 젊은 수도사에게 "수도사의 본분은 순종과 겸양"이라며 너그러이 대하는 일화는 그의 고매한 인품을 보여준다. 바쁜 일정 속에서도 주변 사람들에게 따뜻하고 겸손한 스승이자 사목자였다.

1265

[로마에서 시작된 위대한 대전]

학문적 불모지였던 로마로 불려가 교수 및 저술 활동에 매진했다.

이 시기에 그의 대표작이자 서방교회 신학의 최고봉이라 불리는 '신학대전'의 집필을 시작했으며, '신의 권능에 관한 정규토론집' 등 수많은 중요한 저작들을 완성하며 그의 사상적 깊이를 더했다.

이탈리아 체재 기간은 '대이교도대전'이 완성되고 '신학대전'과 같은 대작이 집필되기 시작한 시기이자, 그의 성숙한 사유를 반영하는 주요 저작들이 쏟아져 나온 황금기였다. 겸손한 순종과 강한 사명감을 지닌 인간 토마스 아퀴나스의 초인적인 노력의 결실이었다.

1268

[파리 재입성, 열정의 학자]

파리 대학 역사상 최초로 두 차례 교수직을 역임하는 영광을 얻었지만, 이 시기는 재속 성직자들과의 격렬한 논쟁으로 쉴 틈 없는 시간이었다.

왕과의 식사 자리에서 마니교도 논박 방법을 찾아 식탁을 내려치고 비서에게 받아 적게 할 정도로 학구적 열의가 뜨거웠다.

왕은 그의 학구적 열의에 감동하여 조용히 기다려주었다. 이 쉼 없는 활동은 '신학대전' 1, 2부 완성, 방대한 성서 주석 및 아리스토텔레스 주석서들을 집필하는 등 '기적적'이라는 수식어가 붙을 만큼 엄청난 질과 양의 결과물로 이어졌다.

1272

[고향 나폴리, 마지막 저술]

파리에서의 격렬했던 교수 생활을 마치고 고향 나폴리로 돌아왔다.

이곳에서 그는 절필하기 전인 1273년까지 사도 바울 서간문 주해, 시편 주해, 그리고 미완성으로 남게 될 '신학대전' 3부를 집필하는 등 마지막 학문적 열정을 불태웠다.

1273

['모두 지푸라기' 절필 선언]

성 니콜라우스 축일 미사 중 어떤 강렬한 충격을 받은 후, 평생 이어오던 위대한 저술 활동을 완전히 멈췄다.

비서가 이유를 묻자 "내가 본 것에 비하면 내가 쓴 것들은 모두 지푸라기에 지나지 않아..."라고 답하며 신비로운 깨달음을 암시했다.

이 무렵부터 그의 건강은 급격히 악화되어 명상 중 의식을 잃거나 주변의 도움이 필요할 정도였다. 육체적 한계 속에서도 그의 정신은 새로운 차원의 진리를 경험한 듯했다.

1274

[병상에서의 마지막 소원]

건강이 급격히 악화되어 거의 말을 할 수 없을 지경에 이르렀다.

여동생 테오도라를 방문했을 때 "신이 내 저술 활동에 종지부를 찍었듯이 내 인생도 빨리 끝내줬으면 한다"고 힘겹게 말하며 죽음을 예감하는 듯한 마지막 소원을 밝혔다.

[위대한 신학자, 영면하다]

리용 공의회에 참석하라는 교황의 명을 받고 가던 중 건강이 급격히 악화되어 포사누오바 수도원에 머물게 되었다.

결국 100여 명의 수도사와 평신도들이 지켜보는 가운데 49세의 나이로 영원한 안식에 들었다.

한 시대의 거장이 고요히 막을 내렸다.

1277

1277.03.07 사후 3년

[사후 3년, 파리에서 단죄]

위대한 신학자가 사망한 지 정확히 3년째 되는 날, 파리에서 그의 실체적 형상 단일성 이론을 포함한 몇몇 주요 이론들이 단죄를 받았다.

그의 혁신적인 사상이 당시 학계에 일으킨 파장을 보여주는 사건이었다.

1277.03.18 사후 3년

[옥스퍼드에서도 단죄]

파리에 이어 옥스퍼드에서도 로버트 킬워드비에 의해 그의 이론 일부가 단죄 당했다.

사후에도 그의 사상은 뜨거운 논쟁의 중심에 있었으나, 이는 훗날 그의 위대함을 더욱 부각시키는 과정이 되었다.

1286

1286.04.30 사후 12년

[재차 단죄와 불굴의 사상]

옥스퍼드에서 킬워드비의 후임 요하네스 페캄에 의해 다시 한번 그의 이론들이 단죄를 겪었다.

하지만 이러한 논쟁과 단죄의 시련은 오히려 그의 사상이 지닌 깊이와 영향력을 증명하는 계기가 되었다.

1323

1323.07.18 사후 49년

[성인 시성, '기적의' 신학자]

그가 사망한 지 49년 만에 마침내 가톨릭 교회의 성인으로 시성되었고, 이전에 그의 이론들에 대한 모든 단죄는 철회되었다.

교황 요한 22세는 "그가 문제를 해결할 때마다 그만큼의 기적들을 행한 것이다"라고 극찬하며 그의 위대한 학문적 업적을 기렸다.

성인 시성 심사 과정에서 "기적을 일으키지 못했다"는 지적이 있었으나, 교황은 그의 학문적 성취 자체가 기적임을 선언하며 이를 일축했다. 이는 토마스 아퀴나스의 사상이 얼마나 독보적이었는지를 보여준다.

1325

1325.02.14 사후 51년

[교황청, 정통성 공식 인정]

옥스퍼드에서 그의 이론이 단죄 당한 지 39년 만에, 교황청이 토마스 아퀴나스의 정통성을 공식적으로 재확인했다.

이는 그의 사상이 논쟁을 넘어 교회의 핵심적인 위치로 확고히 자리매김했음을 의미한다.

1567

1567.04.15 사후 293년

[최고 영예, 교회학자 등극]

로마 가톨릭 교회가 토마스 아퀴나스를 교회학자로 공식 공표했다.

이는 교회가 인정하는 최고의 신학적 권위를 가진 학자에게 부여되는 영예로, 그의 사상이 서방교회에 미친 지대한 영향을 상징하는 최종적인 인정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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